“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3-14절)
어떤 이들은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빛과 소금이라는 말만 알 뿐 빛이 어떻게 와서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는지 소금 맛이 어떻게 해서 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말만 들고 남에게 가르치려 드는 사람일 뿐입니다. 소금과 빛입니다. 근데 우리가 원래 소금 같이 맛을 내는 사람이었습니까? 빛으로 어둠을 비추는 인물들이었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데는 영적인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리와 생명은 과정이 없이 바로 완제품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육신을 자신의 마음의 의지로 움직이는 단계에서 소금이니 빛이니 이야기하면 웃을 일입니다. 8복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소금과 빛이 됩니다. 그 과정을 거치며 육신은 깻묵을 짜듯 정과 욕심은 빠져 나가고 오직 그리스도의 성분만 오롯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정이기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계시로 옵니다. 단 번에 다 이루어진 것으로 약속하시지만 우리에겐 시간차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구원의 과정 또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심령의 가난 곧 성령의 배고픔(마5:3)부터 시작된 복을 가진 자의 대장정이 8복의 단계를 거치면서 어느덧 소금이 되고 빛이 됩니다. 말이 아닙니다. 얼굴 표정이며 몸짓이며 이미지이며 삶의 행태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귀엽지 않은 데가 없고,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이 아깝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 곧 예수그리스도의 성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이며 세상의 소금이며 빛입니다. 당연히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비교할 수 없는 의인입니다(마5:20) 게임이 안 됩니다.
그들의 의는 자신의 의지로 육신을 다스리는 선행의 의입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들, 곧 세상의 소금과 빛들은 그 안에서 샘솟는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에 의한 컨트롤입니다. 격이 다릅니다. 자동차 기계식 운전대와 유압식 운전대의 차입니다. 유압식은 운전자가 손으로 운전대를 조작하는 것 같지만 이미 엔진의 힘에 의해서 조향장치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8복이 이루어지면 소금 노릇 할 필요 없고 빛의 역할 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바로 소금이고 빛입니다. 맛이 납니다. 그리고 보입니다. 감출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 구원을 대충 하시려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8복을 앉으나 서나 한 번 기도화 시켜 보세요 머지않아 무릎을 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