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자는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와 같다
잠언 25 : 13
어렸을 때 6월은 보리 타작과 모내기를 하는 일로 매우 바쁜 달이였습니다. 보리 타작 할 때 말린 보리를 마당 가운데 모아놓고 도리깨로 내리치면 보리 이삭이 잘 떨어집니다. 구름이 끼거나 해가 가리면 보리 이삭이 잘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낮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 도리개질을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온 몸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땀으로 범벅이 됩니다. 그때 우물에서 근방 길어온 시원한 냉수 한 바가지 마시면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충성된 자는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우리는 심리적으로 매우 피곤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 때 시원한 얼음 냉수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전을 보니까 ‘충성’이란 ‘마음에서 울어나는 정성’, 유교 도덕적 관념으로 ‘임금에게 바치는 정성’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이 ‘충성’에 대한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행동적인 것으로 많이 수고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상관을 보고 ‘저 인간, 돈 좀 있다고’ 하는 내적 감정을 가지면서도 잘못보이면 짤릴까 봐 겉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은 충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위선은 충성이 될 수 없습니다. ‘충성’이란 어원에는 ‘신실’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실’이란 믿음이 있고 꾸밈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가 고기 잡는 바닷가로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밤새껏 그물을 내려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리고 말씀대로 그물을 내려 두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눅5:5).
그때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므로 제자를 삼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제자로 불렀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순종에 앞서 베드로의 신실성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몇 번 그물을 내려 보고 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날이 새기까지 그물을 내리는 것을 예수님이 다 보신 것입니다. 밤새워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거두다 보니 녹초가 된 상황입니다. 몇 마리의 고기를 잡았다면 다소 용기를 낼 수 있겠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 바다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충성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물을 내리고 내려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그물을 내리는 그 신실함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을 위해 그물을 씻는 베드로의 신실함을 보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리는 베드로를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패한 그 바다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에게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하면서 마지못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사장 말 안들어면 월급이 감봉되든지 짤릴 위험이 있어서 속으로는 사장을 욕하면서 겉으로 열심히 하는 것처럼 하는 이중성은 충성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 할 수 없어 마음은 내끼지 않으면서 억지로 깊은 데로 그물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충성’이란 마음으로부터 승복하는 성실한 태도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설득 당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고기 잡는 전문가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그물을 내린 그 바다에 다시 그물을 내리라는 말은 내 생각으로는 이해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내가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설득 당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복음송에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헤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이 복음송을 모두 즐겨 부릅니다. 작사 작곡하신 분이 최용덕씨인데 사실 그분은 사랑하는 어린 딸이 모진 병에 걸려 일찍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 것이 아니지요, 부모 앞서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내야 하는 실망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한 번도 실망 시킨 적이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에 설득 당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을 것이라는 뜻 앞에 승복 당하였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은 지속적인 삶입니다. ‘충성’이란 ‘지속’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와서 종들을 불러 결산을 하였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얼마나 많이 남겼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수고했느냐를 보신 것입니다. 종들은 오랫동안 그 달란트로 장사를 하고 노력을 하므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 가니라”(왕하2:2).
4과 6절에도 지역 이름만 다르지 똑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똑 같은 말씀을 나열하였을까요?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니 너는 여기 머물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맹세까지 하면서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시 엘리야는 벧엘에서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니 너는 여기 머물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엘리야는 여리고에서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니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했지만 역시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고 끝까지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이렇게 엘리야는 엘리사를 머물라고 했지만 끈질기게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며 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엘리야를 떠나지 않고 따르므로 엘리사는 무엇을 볼 수 있었습니까? 엘리야가 하늘로 올리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얻었습니까? 엘리야가 입었던 겉옷이 떨어지는 것을 주워 입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더 많은 능력있는 선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충성은 엘리야를 떠나지 않고 끈질기게 따랐던 것입니다.
그때 그때의 처한 형편에 따라 그에 알맞게 그 자리에서 처리하는 임기웅변은 충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임기웅변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는 자를 충성된 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동성교회를 떠나지 않고 오늘까지 나옵니다. 그동안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주일이면 다른 교회로 가지 않고 동성교회에 나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시설이 빈약해도 지속적으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충성입니다. 땀을 많이 흘리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만이 충성이 아닙니다. 주어진 여건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마음으로 승복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교회를 찾아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오늘 동성교회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충성이 동성교회를 일으켜 세우게 된 것입니다.
35년을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숭복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가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딱딱하고 기우뚱거리는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오늘까지 교회를 지켜 온 것은 신실한 마음으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별로 은혜스럽지 않아 졸다가 가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주일이면 교회를 찾아오는 것이 충성입니다. 베드로가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한 그 바다에 다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설득당하는 것이 충성된 제자감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실함과 지속적인 충성이 헛되지 않을 줄 믿습니다. 머잖아 베드로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던 것처럼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주어 입고 갑절의 영감을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지난날 보다 더 큰 은혜의 동산이 될 줄 믿습니다.
초대교회 감독이였던 폴리갑은 서머나 교회를 50년간 섬기다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폴리갑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화형 선고 받았습니다. 당시 총독은 폴리갑에게 개종하기를 강요하면서 ‘네가 나가서 예수를 믿을지라도 내 앞에서 한번만 네 입으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86년간 나는 그를 섬겨 왔고 그는 내게 아무런 잘못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그분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투기장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화형으로 순교를 했습니다.
지난 14일 ‘고신 교단 설립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예배드리면서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란 찬송을 불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이 메여 찬송을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장로교의 역사를 통해서 고신 교단이 겪어온 어려웠던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한국 장로교가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평양신학교를 통해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왜정의 박해와 핍박으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므로 많은 성도들이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 주기철 목사님은 순교를 하셨습니다. 출옥한 목사님들이 평양신학교를 계승할 신학교를 설립한 것이 고려신학교입니다.
해방 후 출옥한 목사님들과 신사참배한 목사님들이 한국 교회를 다시 정리하면서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님들은 ‘우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어 신사참배하였다’고 하면서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출옥한 목사님들 가운데 주남선 목사(거창), 한상동 목사(부산 다대), 손양원 목사(함안 칠원), 조수옥 전도사(마산), 순교한 주기철 목사(진해 웅천)입니다. 모두가 경남 노회 소속한 분들입니다. 결국 대한 예수교 장로교 총회가 이 분들이 소속한 경남노회를 축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경남노회가 소위 법통노회라 하여 오늘까지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그때 이분들이 아니였다면 한국 교회는 진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충성된 종들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개혁주의 신학위에 그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환란과 핍박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찬송은 고려신학교의 교가입니다. 교단 설립 60주년에 고신교단 소속한 교회와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함께 찬송을 부를 때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죽도록 충성하자는 고백의 찬송인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일제의 총칼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신앙을 지켜온 것이 충성입니다. 신사참배 한 것을 회개하자고 해도 거절하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없어 총회로부터 축출을 당해도 순수한 신앙을 지켜 온 것이 충성입니다.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해도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는 베드로가 충성된 종입니다. 설교가 별로 은혜스럽지 못해도 주일이면 변함없이 교회를 찾아 나오는 여러분이 충성된 자입니다.
이렇게 충성된 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훌륭한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엘리사가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와 같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충성된 자들이였습니다.
오늘 나와 여러분은 신실한 성도로서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교회를 지키는 충성된 종들이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종에게 주어지는 넘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장차 주 앞에서 금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충성된 자가 되어 이러한 영광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