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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소를 잡아먹은 죄 : 조선의 명판결
다음은 19세기의 우화 소설 가운데 한 편이다. 소가 주인공인 흥미로운 소설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사또에게 하소연한 내용으로, 등장(等狀:일종의 청원문)을 올린 소는 죽도록 일만 한 자신들을 잡아먹는 인간들을 탄핵했다. “삼가 사정을 아뢰옵나니, 저희들이 지극히 원통한 사정을 참을 수 없어 부득불 만사를 무릅쓰고 섬돌 아래에서 우러러 말씀드립니다. 하늘이 저희를 내실 때 사람에게 속하게 하였으니 그 뜻은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아! 저희가 우마 무리에 속하여, 비록 기묘한 공은 없으나 밭가는 농부에게 몸을 굽히고 농부의 손에 목숨을 맡겨 넓은 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내 몸의 고달픔을 잊고 밭을 이루었습니다.
밭을 이룬 후에는 백가지 곡식을 심고 곡식이 익은 후에는 사람들이 함께 먹었습니다. 밭을 갈아야 할 곳을 가리킨 것은 비록 사람이지만 허다한 밭을 개간하여 이룬 것은 어찌 저희들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밭에 백 가지 곡식을 심은 것은 비록 사람이지만 무궁한 식량을 돕는 것이 어찌 저희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생각건데, 저희는 곡식을 훼손할 마음이 없고 또 사람을 해칠 뜻이 없으며, 어염집 외양간에 모로 누워 단지 산과 들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먹으면서 혼자서 울고 누워 있을 뿐입니다. 고달픈 수고로움을 말하지 않고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며 오직 한 몸을 주인의 생활에 맡겼으니, 어찌 매우 가련하고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슬퍼하고 지켜주어도 오히려 저희의 공에 필적하지 못합니다.
아! 만여 개의 나라와 온 세상 억조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천만 가지의 맛 중 저희 고기만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에 저희는 낮은 언덕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아! 저희의 수가 많지만 새우의 만분의 일에 미치지 못하고, 고기가 드물게 맛있지만 신선한 꿩고기의 뛰어난 맛에 미치지 못합니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가게에서 저희를 도살하는 것을 다 기록할 수 없고, 뭇 사람들이 함께 먹을 뿐만이 아니라 금수 또한 저희 고기를 맛보니, 어찌 지극히 원통함이 심하지 않겠습니까? 슬픕니다! 무릇 저희들이 비바람을 무릅쓰고 고생하며 춥거나 더운 때의 수고로움을 참고 눈서리를 무릅쓰고 배고프거나 배부를 때의 고통을 꺼리지 않는 것은, 저희가 비록 드러내어 진술하지 않았더라도 훤히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다시 번거롭게 하지 않겠으나 무릇 저희의 공은 진실로 얕지 않습니다.
예부터 성현께서 혹 저희들의 몸을 타고 사방을 횡행한 것 또한 가상하고 특이한 일입니다. 저희의 상황을 살펴보면 너그러이 받아줄 수 있는 게 있고, 저희의 공로를 살펴보면 더욱이 해로운 것이 없습니다. 사정이 정말로 이와 같은데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어지럽게 도륙함이 이와 같이 심한 것은 반역의 무리를 모조리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모두 원통함을 만드는 것인데 하소연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나라를 걱정하는 성심은 어려서부터 더욱 간절해지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굳세어지며, 죽기 전에 한없는 은혜에 보답하기를 기약합니다.
이는 진실로 칭찬할 만한일인데, 무슨 죄가 있어 매번 살육 당하는 것이 다른 것보다 가장 심합니까? 아! 성인군자는 살생을 참지 못하여 부엌을 멀리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천하에 금수가 없어 저희를 도살한다면 조금도 원통함이 없을 것입니다. 강과 바다에 쌓여 있는 물고기와 산과 계곡에 많은 금수들이 눈에 가득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도 이를 먹지 않고 다만 저희를 죽이니 이에 저희의 원통함은 지극합니다.
아! 저희의 공적이 이와 같이 많으니 상을 주는 덕은 입지 못하더라고 혹 주멸 당하는 화를 면한다면 실로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는 때일 것이며 죽음에서 살아나는 은혜일 것입니다. 엎드려 빌건대, 지극한 원통함을 펴지 못하는 사정을 특별히 살피시고 또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불쌍히 여겨 저희를 도살하지 않도록 엄명으로 분부하시어 이 한 몸을 보전케 해주시면 성덕을 감사드리며, 이전에 함부로 죽이던 것을 없애 남아 있는 저희 무리의 근심을 없애주시기를 천만 바라옵니다.”
소는 자신들이 밭을 갈기에 인간들이 먹을 곡식이 있으며, 자신들이 몸을 제공하기에 인간들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지나치게 도살하여 종족을 보전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사또의 판결문
“하소연을 들어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며 할 말이 없다. 천하 만물이 사람에게 주어져 혹 죽이기도 하고 기르기도 하는 것은 모두 하늘이 지시한 것이나, 너희들의 이 말은 진실로 이해할 만하다. 너희 조상의 공로는 뛰어나 청사에 분명히 드러나며 너희들이 분주했던 상황은 길이 눈 안에 있으니 너희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밝게 알 수 있다. 대개 천지가 드넓고 만물이 눈에 넘쳐 허다한 것을 잡아먹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생각건대 너희의 고기는 만고에 드문 종류로 천 번 끓이고 만 번 구우면 맛이 더욱 입에 맞고 털과 피, 가죽과 뼈 또한 헛되이 버릴 것이 없다. 아침저녁으로 폐하기 어려운 좋은 반찬이며 또한 사람의 몸을 편안히 하는 것 중 큰 것이기에, 뭇사람들이 한 번 먹으면 세간사를 잊고 밤낮으로 먹으며 승려가 한 번 먹으면 사찰의 도리를 폐하고 밤낮으로 잊지 못한다. 저잣거리에서 어지러이 도살하는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도리를 참작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지금부터 지나치게 도살하지 말고 가려서 살육하도록 분부할 것이니, 너희는 그렇게 알고 다시 번거로이 진술하지 말라.”
소고기를 좋아하는 조선의 풍속 때문에 죽도록 일만 하고도 잡혀먹게 되니 원통할 뿐이라는 소의 청원에 사또는 지나치게 도살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조선시대에 소를 잡는 행위는 큰 범죄였다.
우금(牛禁) 정책
‘우금(牛禁)’이란 사사로이 소를 도살하지 못하도록 한 조선의 정책을 말한다. 조선후기에는 쌀로 술을 빚지 못하도록 한 주금(酒禁), 국가의 재목으로 사용할 소나무를 마음대로 베지 못하도록 한 송금(松禁)과 더불어 몰래 소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했다.
‘대명률’의 규정에 의하면 “사사로이 자기의 말과 소를 잡은 자는 장(杖) 1백에 처한다. 잘못하여 죽인 경우는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 만약 소와 말이 병들어 죽었을 경우 관(官)에 신고하지 않고 먹어버린 자는 태형(笞刑) 40대에 처하며 힘줄・뿔・가죽을 관에서 몰수한다”고 했다. 조선후기에는 우금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속대전’에는 “소와 말을 사사로이 도살하는 자는 장(杖) 1백, 도(徒) 3년에 처한다”고 했다. 소를 몰래 잡아먹을 경우 매를 맞고도 도형 3년에 처해졌으니 웬만한 폭력 범죄보다도 그 처벌이 무거웠다.
이렇게 몰래 소를 도살하는 것을 엄금한 이유는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소는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주자의 권농문(勸農文)에도 ‘김매고 밭가는 일은 전적으로 소의 힘에 의지하고 있으니 반드시 정성껏 보살피고 때맞추어 먹이를 주어야 하며, 멋대로 도살하여 농사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만일 이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장 20대를 치고 소 한 마리당 50관(貫)의 돈을 추징하되 옥에 가두고 돈의 납부를 감독하여 가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구절이 보인다. 중국과 조선을 막론하고 농사일에 유용한 소를 잡아먹는 일은 용서받기 어려웠다.
소를 밀도살한 죄를 지나치게 엄형하거나 혹은 많은 속전(처벌 대신에 내는 벌금)을 거두다보니 이를 악용하는 부정사례가 빈번했다. 심지어 평소에 원한이 있는 자를 소를 밀도살했다고 고발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다산은 우금을 둘러싼 풍속의 쇠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무릇 감사로서 탐욕스러운 자는 반드시 우금을 엄하게 한다. 감사는 듣고 보는 것을 오직 서리에만 의존하고 향촌의 증언을 듣지 않으니 이에 간교한 아전이 기회를 틈타 묵은 감정을 보복한다. 돈을 빌리고도 잘 갚지 않거나 혹은 빚독촉을 심하게 하는 등 평소에 서로 원한이 깊은 자들은 사사로운 도살로 무고한다. 원래 익명으로 고발하면 법에서 인정하지 않지만, 감사는 속전을 받아 쓸 요량으로 자세히 살피지 않은 채 속전만 토색하니 아전의 위세는 날로 높아가고 백성의 재물은 날로 줄어든다.
정사를 잘못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우금을 어긴 밀도살의 경우 장 1백에 도 3년형에 해당하고 이는 속전 28냥을 납부하면 되는데도 무려 40냥에 가깝게 토색질을 할 정도로 우금을 악용하여 속전을 뜯어내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 토색질에 나선 서리와 사또들을 비꼬는 말로 ‘우금사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때문에 다산은 소를 몰래 도살한 죄를 속전으로 납부토록 한 규정 자체를 문제삼았다. “속전에는 세 가지 폐해가 있으니, 첫째, 백성의 재산을 축내는 것이요, 둘째 수령 자신의 이름을 손상시키는 것이요, 마지막으로 부패한 서리들의 도둑질을 조장하는 것이다. 결코 속전을 징수해서는 안된다. 다만 권세 있는 가문이나 부유한 집에서 법을 어기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여 밀도살을 일삼으면 이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속전을 징수하여 감옥 안의 죄수들을 구휼할 정도는 좋다.”
속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금을 범한 자를 엄형으로 처벌하다보니 도둑을 다스리거나 살인의 형률로 엄벌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7세기에 형조참판을 지냈던 이세재는 동래 부사 시절 엄하게 형벌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지친(至親) 사이에 서로 송사하는 자가 있으면 양쪽을 다 처벌하고, 산송이 벌어지면 일단 풍수지리 술사를 잡아다가 엄형하였으며, 소를 몰래 잡은 자는 속전으로 죄값을 치르도록 허락지 않고 도둑을 다스리는 법률을 적용하였다. 심지어 재임 3년동안 몰래 잡은 소고기는 끝내 먹지 않았다고 한다. 민성휘 또한 평안도 감사 재직시에 우금을 범하면 거의 살인에 해당하는 형률을 적용하였다. 이 때문에 소의 두수가 늘고 농사가 활기를 띠었다지만, 다산은 지나치게 가혹하다며 탄식했다. “귀양 보내고 속전을 받는 것도 백성이 괴로움으로 여기는데 하물며 사람의 목숨을 죽여 소의 목숨을 대신한다면 백성이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다산은 지나치게 엄형하는 것은 풍속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의 풍속에 암말과 수말의 교배를 금지하니 새끼를 낳아 기르는 일이 끊어져 버렸다. 또한 양이 없어 명절에 소가 아니면 고기가 없으니 인정(人情)의 원하는 바를 가혹하게 금하기 어렵다. 세력 있는 아전이나 부민(富民)이 혼례나 장례식 등 잔치에 반드시 소를 잡는 습속을 금하는 정도가 마땅하다. 그리고 장 1백에 도 3년형은 가혹하니 장(杖) 1백을 감하여 태형 50대로 하고 도(徒) 3년은 가죽・힘줄・뿔을 바치는 것으로 속죄하도록 해야 한다
소를 사랑하는 중국인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에서 딱히 소고기를 대체할 만한 다른 가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양을 기르는 것도 아니고 말도 충분하지 않았다. 돼지는 사람들이 꺼렸으며 오직 소고기를 가장 좋아한 것이다. 다산은 목축을 장려하는 정책이야말로 우금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산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인용하여 중국인들이 얼마나 소를 사랑하는지, 소고기 대신 돼지와 양고기를 즐기는지 소개하였다.
“중국의 풍속에는 소에게 코뚜레를 하지 않는다. 다만 남방의 물소[水牛]만 성질이 사나워서 코뚜레를 할 뿐이다. 중국에서는 소를 항상 목욕시키고 손질해 주는데 비해 조선의 소는 죽을 때까지 씻지 않아 똥 찌꺼기가 말라붙어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소의 도살을 금한다. 북경(北京)에 돼지 푸줏간이 72개소, 염소 푸줏간이 70개소가 있어서 푸줏간마다 하루에 돼지 300마리가 팔리고 염소도 마찬가지로 팔린다. 고기를 이같이 먹지만 소 푸줏간은 2개뿐이다.
조선의 경우 하루에 잡는 소를 계산하면 무려 5백 마리나 된다. 대략 나라의 제사 때 잡는 것, 반촌(泮村)과 서울 5부 안의 24개소의 푸줏간에서 잡는 것, 그리고 전국 3백여 고을마다 관에서 반드시 푸줏간에서 소를 잡으니, 작은 고을에서는 날마다 잡지 않지만 큰 고을에서 거의 매일 잡으니 이를 헤아려 보면 그 수가 이미 5백 마리가 넘는다. 무릇 소는 열달 만에 나서 세 살이 되어야 새끼를 가질 수 있으니 몇 년에 한 마리 낳는 것으로 하루에 5백 마리씩 잡는 것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소가 날마다 귀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소를 키우고 있는 농부가 극히 적어서 항상 이웃에서 빌려 쓰는데 하루하루씩 빌려다 쓰기 때문에 논갈이가 항상 늦다. 마땅히 소의 도살을 일절 금하면 수년 안에 농사가 때를 놓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조선에는 다른 가축이 없으므로 소의 도살을 금하면 고기를 먹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소의 도살을 금한 후에라야 백성이 비로소 다른 가축을 기르는데 힘을 기울여 돼지와 염소를 번식시킬 것이다. 지금 돼지고기를 팔려고 내놓아도 밤이 지나도록 손님이 없으니 이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고기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돼지고기나 양고기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탈이 날까 염려스럽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음식은 습성에 따라 맞추어질 뿐이다.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많이 먹는 중국인들이 모두 탈이 났는가? 율곡 이 이 선생은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미 그 힘으로 지은 곡식을 먹고 나서 다시 그 고기를 먹다니 과연 옳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지당한 이치이다.” 다산은 소고기 대신 양과 돼지고기를 먹는 풍속을 장려함으로써 소의 밀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양 기르는 법
다산은 중국의 서적을 통해 양을 잘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옛날에 조선에 양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풍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풍속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렸을 때 각 고을에서 기르던 양이 50~60마리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각 고을에서 기르던 것은 모두 고(羖)였는데 속칭 염소라고도 했으니 양과는 다르다. 내가 연구해보니 양을 기르는 방법에는 몇 가지 주의할 일이 있다. 먼저 물을 자주 먹이면 물에 상해서 코가 헐고, 빨리 몰면 먼지를 마셔서 병이 난다. 한 곳에 너무 세워두는 것도 안된다.
한낮에 더위를 먹으면 반드시 옴이 생기고 가을에 서리 맞은 풀을 먹으면 복창(腹脹)이 생긴다. 성질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니 일찍 우리를 만들어주어야 하며 막히고 답답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에 계속 가두어서는 안된다. 질퍽한 곳에서는 발굽이 구부러지고 습한 곳에서 재우면 배앓이를 한다. 우리 안에 약간 높은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그 위에서 자도록 해야 한다. 마른풀을 우리 주위에 쌓아 두어 양들이 우리를 돌면서 먹도록 해야 한다. 콩을 심어 콩대를주면 좋아한다. 겨울에 새끼를 낳으면 밤에 반드시 불을 피워주어야 하고 여름에 털갈이할 때에는 미리 깨끗이 가위질해 주어야 한다. 가위질을 하지 않으면 양의 살이 야위기 때문이다. 이슬 맞은 풀과 작은 거미와 같은 벌레를 먹으면 죽을 수 있으므로 주의한다.
이상 양을 기르는데 주의할 점이 매우 많다. 정리해보면 먹이가 풍족치 못하고 옴이 전염하면 떼죽음을 당하거나 종자가 끊어지는 일은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보는 일이니 우리나라의 염소만 재앙이 많은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고을 경내에 양을 기를 만한 곳이 있으면 관에서는 별도로 목장을 설치하고 백성들에게 양을 기르게 하여 차츰 보급한다면 자연스럽게 풍속을이룰 것이다.”
조선후기에 농사에 유용한 소를 몰래 잡아먹은 이들을 엄벌에 처하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심지어 소까지 나서서 원망의 글을 올렸다는 소설도 나돌았다. 다산은 우금의 근본 해법으로 소 대신에 이용할 양이나 돼지의 사육을 장려하고 이를 먹도록 하여 소고기만을 좋아하는 풍속을 바꾸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