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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장편경쟁 부문에 초청된 영화 ‘시’의 출연진이 19일(현지시간) 공식상영 직전 레드 카펫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창동 감독, 배우 윤정희, 이다윗. [칸(프랑스) 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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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추억의 옷을 던져버리고 망각의 잔을 마시고 싶어….” 19일 오후 7시(현지시간) 제63회 프랑스 칸영화제가 열리는 팔레 드 페스티벌 앞에서 최유나의 ‘와인 글라스’가 울려 퍼졌다. 경쟁 부문에 오른 영화 ‘시’에서 주인공 미자(윤정희)가 부른 노래였다. 칸 영화제 갈라 스크리닝(공식 상영)에서는 배우와 감독이 레드 카펫에 등장할 때 해당 작품에 쓰인 음악을 틀어준다. 레드 카펫 앞에 이창동 감독과 배우 윤정희·이다윗, 제작자인 파인하우스필름 이준동 대표가 나란히 서 세계 각국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윤정희는 한복 차림이었다. 청색 저고리에 분홍색 치마가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잘 어울렸다. 여배우들이 보통 레드 카펫에 설 때 해외 명품 브랜드의 드레스를 입는 것과 달리 그는 한국에서 손수 구입한 한복을 골랐다. 머리 손질과 메이크업도 스스로 했다.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66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단아한 한국여인의 자태가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윤정희 눈가에 살짝 흐른 눈물=이날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아내가 앉은 바로 뒷줄에 자리잡고 끝까지 열렬한 응원을 보내 눈길을 끌었다. 바이올리니스트 딸 진희씨도 함께했다. 백건우는 앞서 열렸던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디지털 캠코더에 아내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광경을 담았다. 평소 자신의 연주여행에 무슨 일이 있어도 동행해 내조를 펼치는 아내에게 보내는 흐뭇한 외조였다.
관객들은 한 꿈 많던 여성이 손자의 비행과 시 쓰기 작업을 통해 삶의 고통에 서서히 눈 뜨는 과정을 숨 죽인 채 지켜봤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극장 안에서 웃음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2시간 20분 후 영화가 끝나자 커다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립박수는 약 5분간 계속됐다. 이 감독은 두 손을 모아 이어지는 박수의 물결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박수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자 그때까지 침착하게 서 있던 윤정희의 눈가에도 순간 물기가 어렸다. 경쟁 부문에 ‘몽펭시에 공주’를 내놓은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도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이때만큼은 ‘경쟁자’가 아닌 ‘오퇴르(auteur·작가)’로서 이 감독을 바라보는 듯 했다.
관객들은 미자가 간병하는 강 노인(김희라) 집에서 샤워기를 틀어놓고 오열하는 장면, 강 노인과 욕조에서 관계를 맺는 장면 등을 인상적으로 꼽았다. 영화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재미동포 신민주씨는 관람 중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며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결코 관람하기 편한 작품은 아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외신들 찬사 쏟아내=이날 상영 후 축하파티에 참석했던 전양준 부산영화제 부위원장은 “대다수 해외 평론가들과 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이 ‘시’가 이창동 감독의 최고작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전했다. 외신들의 반응은 열광적이다. AFP 통신은 “성폭행을 저지른 10대 소년과 시라는 전혀 어울릴 법 하지 않은 조합이 칸영화제를 뒤흔들어놓았다. ‘시’는 황금종려상을 차지하려는 아시아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은 윤정희에 주목했다. “한국의 베테랑 여배우 윤정희가 오랜 기간의 침묵을 깨고 파워풀한 복귀를 했다. ‘시’는 ‘밀양’처럼 주연 여배우의 훌륭한 연기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고 평했다. 20일 오전 발행된 영화전문지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평점은 4점 만점에 2.7점을 받았다. 올해 경쟁 부문에 오른 19편의 영화 가운데 13편(19일 현재)이 상영된 가운데 영국 켄 로치 감독의 ‘루트 아이리시’와 함께 세 번째로 높은 수치다. 영국 마이크 리 감독의 ‘어너더 이어’가 가장 높은 3.4점을 기록 중이다. 칸영화제는 23일 폐막한다.
칸(프랑스)=기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