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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철학의 세계지도
철학의 항해 선장 안재오입니다.
철학의 역사는 길고 철학사도 있지만 각 나라를 중심으로 철학을 소개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그리이스의 대표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있는 것과 없는 것
2. 중국의 철학. 장자의 철학. 자연의 철학
3. 로마의 철학.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4. 아프리카의 철학. 성 어거스틴의 철학
5. 인도의 철학. 불교철학. 화엄경(華嚴經)의 사상
6. 프랑스의 철학 :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원리
7. 영국의 철학 :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8. 일본의 철학. 소세키의 반(反)군국주의(軍國主義)적 개인주의
9. 독일의 철학.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탄생
10. 덴마크의 철학 : 키엘케골의 “반복”
11. 미국.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
12. 한국. 퇴계(退溪)의 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과 주리론 (主理論), 경(敬)사상.
이 중 4와 12는 다른 사람의 글을 옮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제가 썼습니다. 한국 철학의 세계화 K철학을 꿈꾸며 새로운 발상을 펼쳐 봅니다.
12 지역의 사상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이스의 대표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고대 그리이스는 서양철학의 발상지입니다. 대표적인 철학자는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이전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를 대표적인 철학자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존재 자체” (being itself)를 처음으로 철학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자연 철학”(nature philosophy)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연의 원리를 탐구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론과 논리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토대로 형성이 이루어졌습니다.
2. 중국의 대표 철학자 “장자(莊子)”
중국 철학의 대표로 필자는 장자를 꼽습니다. 그는 자연을 이치. (logos)를 가진 무한한 창조력으로 봅니다. 조화옹(造化翁)이 그런 표현입니다. 이런 무한하고 절대적인 자연에 비해서 인간은 힘이 유한하고 그의 인식은 항상 상대적인데도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만이 참이라고 우긴다고 합니다. 즉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 이것이 있다, 혹은 생명이 있으니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니 생명이 있다” 등의 논리입니다. 이를 통해서 중국 철학의 형이상학적인 토대를 놓았습니다.
3. 로마의 철학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고대 로마의 철학은 실용적이며 실천적이다. 이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키케로이다. 보통 노년은 힘이 약해진다, 활동력이 떨어진다, 육체적인 쾌락이 사라진다 혹은 죽음에서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사에 소극적이 되고 스스로를 약하게 하다가 실제로 더 그렇게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등등. 이 나이에 뭐하랴 하는 체념주의가 있다. 그러나 키케로는 노년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될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하 생략
12 가지의 철학중 4와 12는 다른 사람의 글을 옮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제가 썼습니다. 한국 철학의 세계화 K철학을 꿈꾸며 새로운 발상을 펼쳐 봅니다.
1. 그리이스의 대표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있는 것과 없는 것
(1) 존재의 의미를 처음으로 밝힌 철학
서양 철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를 존재로 ㅡbeing qua beingㅡ 다루는 학문이 있다” 라고 했다. 이를 제 1철학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존재를 존재로 다룬다는 말은 우선 탐구의 대상이 어떤 특정한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일반” 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서양 철학을 존재의 철학으로 만드는데 최초로 그리고 가장 많이 기여한 사람이 B.C. 6세기 그리스에서 난 철학자 피르메니데스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서양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철학적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 있는 누구도 “존재 자체” (being itself) 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자연 철학”(nature philosophy)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연의 원리를 탐구했다. 그러나 자연물이나 현상도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에 앞서 존재 즉 있음 자체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구름이나 산이나 사람 등의 공통점은 그들이 있다, 혹은 존재 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은 존재의 일부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처럼 존재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는 존재의 철학의 창시자, 즉 존재론(ontology)의 창시자이다.
그는 동시에 존재와 사유의 관계를 밝혔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유, 즉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다”. 라고 했고 더 나아가서 “존재는 사유(思惟)가능하고 언표(言表) 가능하다” 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라고 선언하여 서양 철학의 방향을 설정했다. 그러나 이를 위한 길을 예비한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이다. 하여간 피르메니데스는 존재와 사유 혹은 이성을 결합하여 철학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선구자이다.
이제부터 파르메니데스의 저술 “자연에 대하여”를 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은 6보격의 운율로 이루어진 시(詩)이다. 그 구성은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서론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진리의 여신의 인도를 받아서 밝은 진리의 신전에 도착한다는 내용이고 2부는 진리(aletheia), 3부는 억견 (doxa)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명제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2. 좋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어떤 탐구의 방식이 유일하게 사유되는지를 말하겠다. 당신이 듣는 말을 잘 새겨 두시오.
첫 번째 길은 : “있음은 있음이며”, “있지 않음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신의 길이다, 왜냐하면 이는 진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 있지 않음이 있다는 것이며 있지 않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 길은,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만, 탐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있지 않음을 인식할 수도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3. 왜냐하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명제의 문제는 현실 세계 즉 생성과 변화의 세계를 부정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다” 는 철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붕괴된다. 왜냐하면 자연철학은 변화와 생성, 소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원인을 밝히려 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와 생성 자체가 잘못이다」라고 한다, 설령 그런 것이 눈에 보이는 자명한 사실이기는 하나, 어쨌든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오류라는 것이다.
이런 철학에 의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변화 역시 오류이다. 현실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라는 이야기이다.
2. 중국의 철학. 장자의 철학. 자연의 철학
(1) 도(道)와 신(神)적인 자연(自然)
우선 장자서의 최초의 문장인 소요유편(逍遙遊篇)에 자연의 위대성을 다룬 내용이 많이 나온다. 가령 이런 예화가 있다 :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태산과도 같고 날개는 하늘을 드리운 구름과도 같아서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구만리나 솟아오른다.
이런 과장되고 기괴한 생물이나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도사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유한성과 왜소성 혹은 무지 등에 대조되는 자연의 위대성을 말한다.
이런 광대한 자연의 이야기는 공자(孔子)류의 인간과 사회만을 중시하는 휴머니즘, 실천철학에 대한 반발이다.
자연의 기묘한 이치는 자연을 단순한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창조주로 본다는 사상과 연결된다. 이런 자연을 장자는 조화옹(造化翁)이라고 일컫는다. 즉 피조물로서의 자연과 구별되는 창조주로서의 자연 개념이다. 이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순종을 가르친다. 자연에 따르는 삶이다. 자연에는 다 이치(logos)가 있다는 스토아 학파 비슷한 사상이 장자에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장자의 일화에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그 나무는 인간에게 쓸모가 없기에 자신의 수명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를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고 한다.
자연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자연은 단순한 외적 자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지닌 자연, 결국 신적인 자연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도(道)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장자의 관심은 오직 인간의 길(仁) 만을 말한 공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중국 철학의 방향은 고대 그리스와 반대로 휴머니즘(실천철학)에서 자연철학으로의 방향을 보여준다.
(2) 인간의 유한성과 인식의 상대성
장자는 자연을 이법(logos)를 가진 무한한 창조력으로 본다. 위의 조화옹(造化翁)이 그런 표현이다. 이런 무한하고 절대적인 자연에 비해서 인간은 힘이 유한하고 그의 인식은 항상 상대적인데도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만이 참이라고 우긴다. 장자는 인간의 상대성을 주로 언어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즉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 이것이 있다, 혹은 생명이 있으니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니 생명이 있다” 등의 논리이다.
그러나 장자는 인식의 가능성이나 또 그 도구인 언어를 완전히 부정하는 회의론자 또는 불가지론자는 아니다. 자연 즉 도(道)에 대한 참된 인식과 이를 표현하는 언어 즉 이름(名)이 있다.
(3)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실천적 지혜(phronesis)
무위자연이라는 장자의 사상은 자연에 따르고 사심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천하는 잘 다스려진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천하는 자연에 의해서 나와 상관없이 굴러간다. 결국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사회와 역사의 진행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없다는 것을 말한다. 더 좋은 사회를 위한 인간의 개입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만약 폭군이나 악한 권력자가 인간을 괴롭혀도 순응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 이게 장자 철학의 단점이다. 그런 면에서 노장 철학이 중국에서는 절대 군주의 지배권 강화를 위해서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인(仁) 개념을 가지고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를 주장한 공자와는 다른 것이다. 사실 공자의 적극적 참여주의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하는 장자, 노자보다 더 고상한 것이다. 공자의 실천 역시 논어보다 장자에 더 잘 나타나 있다. 그런 면에서 장자의 사료적 가치는 높다. 그러나 공자 역시 난세에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장자의 공자에 대한 태도는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종종 아주 긍정적이다. 장자의 무위자연이 난세를 사는 지혜가 될 수 있다.
3. 로마의 철학.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1) 노인의 나라 – 나이를 핑계대지 말자
고대 로마 시대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라는 책을 읽어보자. 키케로는 스토아 학파에 속한다. 이는 흔히 금욕주의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요즘은 오래 살기 때문에 예전의 노인은 지금은 중년에 해당한다. 그래서 제목을 중년의 철학이라고 했다.
보통 노년은 힘이 약해진다, 활동력이 떨어진다, 육체적인 쾌락이 사라진다 혹은 죽음에서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사에 소극적이 되고 스스로를 약하게 하다가 실제로 더 그렇게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등등. 이 나이에 뭐하랴 하는 체념주의가 있다.
그러나 키케로는 노년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될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것이다. “기력이 쇠하다” 혹은 “지병이 있다”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삶의 잘못된 습관의 결과이므로 만약 그렇다면 이제라도 나쁜 습관은 버리고 운동과 식이요법을 잘하여 다시 회복해야 한다. 필자도 40 대 후반에 당뇨병에 걸려서 그 후는 운동을 열심히 하여 이제는 젊어 보이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현재 65세이다.
(2) 체력의 적절한 분배
자신의 힘을 적절히 쓰되 최선을 다하면, 체력이 부족하다고 안타까워할 일은 없다고 단언한다 노인이 되어도 적당한 운동과 적당한 식이요법, 절제를 통해 건강과 예전 체력을 상당히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60세 이후에 시니어 모델 활동을 하는 노인들이라든지, 70대에 근육대회에 출전하여 상을 거머쥔 노인들을 보면, 키케로의 주장이 그리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은 아닐지도 모른다.
(3) 정신력과 지력
더 나아가 체력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들면서 더 증강될 수 있다는 정신력과 지력이다. 키케로는 은퇴 이후 노년의 활동으로 농사 활동과 배움의 활동을 추천한다. 우선 농경 생활은 노년에도 잘 할 수 있고 현인의 삶에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학문을 닦고 덕을 실천하는 배움의 활동 역시 노년의 최선의 무기로, 오늘날 평생교육의 차원에서 노인들을 위한 여러 교육 프로그램 마련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강조되는 것이다. 이 책의 화자인 카토 역시 노년에 그리스어를 배운다고 했다.
(4) 신체적 쾌락 감소 및 불능 상태
또한 노인이 되면 활동뿐 아니라 신체적 쾌락이 감소한다는 문제점에 대해, 키케로는 노년기에 신체적 쾌락이 없다는 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더 나은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육체적 쾌락을 덕이 핵심인 진정한 행복과 구별하려고 했다. 쾌락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정신의 빛을 완전히 꺼버리기도 하며 이성적 활동을 방해하고, 마음의 눈을 멀게 하여, 덕과 함께 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년이 되어 신체적 쾌락의 감소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5) 죽음의 공포 극복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해서는 유물론적 입장과 관념론적 입장이 있다. 영혼이 물체라는 유물론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더불어 영혼도 소멸되기 때문에, 불안과 걱정의 감정 역시 죽음과 동시에 사라진다. 다른 한편으로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영육-이원론적 입장에서, 죽음이란 감옥 같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오히려 기뻐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어떤 설명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걱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키케로 역시 죽음 이후의 영생을 믿었고, 죽는 순간의 고통은 잠시며, 사후에는 그런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즐거운 것이 되리라고 믿었다.
4. 아프리카의 철학. 성 어거스틴의 철학
(1) 인식론
인식론적 관심사는 어거스틴의 지적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에 쓴 초기 대화록인 “학문에 대하여” (386)와 “지혜에 대하여”(389)는 회의론적 주장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하며 신적 조명 교리의 발전을 보여 준다. 조명 교리는 신이 인간의 지각과 이해에 적극적이고 규칙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인간이 신이 제시하는 이해할 수 있는 실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마음을 조명한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조명은 모든 이성적 정신이 얻을 수 있으며 다른 형태의 감각 지각과는 다르다. 이는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실체와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대한 설명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다른 작품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삼위 일체에 관하여” 에서 다른 마음의 문제를 제기하고 표준 해결책이 된 유추로부터 다른 마음에 대한 논증을 개발했다.
플라톤과 다른 초기 철학자들과 달리 어거스틴은 인간 지식에 대한 증언의 중심성을 인식하고 우리가 그들의 증언 보고서를 믿을 독립적 인 이유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지식을 제공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 정의로운 전쟁
어거스틴 주장 기독교인은 평화 주의자 개인적이고 철학적 인 입장으로 그러나 폭력으로 만 막을 수있는 중대한 잘못에 직면 한 평화는 죄가 될 것이다. 특히 합법적인 기관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는 자신이나 타인을 방어하는 것이 필수적일 수 있다. 어거스틴은 전쟁이 정당화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세분화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품 “신의 도시”에서 이 문구를 만들었다. 본질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려면 장기적인 보존을 위해 싸우는 옵션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한 전쟁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선제적일 수 없고 방어적이어야 한다. 수세기 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쟁이 정당할 수 있는 조건을 규정하기 위해 어거스틴의 주장의 권위를 사용했다.
(3) 자유 의지
어거스틴의 초기 신론에는 신이 인간과 천사를 자유 의지를 가진 이성적 존재로 창조했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자유 의지는 죄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선과 악에 똑같이 기울어지지 않다. 죄로 더럽혀진 의지는 물질적인 것에 얽매여 잃어버리거나 헤어지기 어려워 불행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죄는 자유 의지를 손상시키지만 은혜는 자유 의지를 회복시킨다. 한때 자유로웠던 의지만이 죄의 타락을 받을 수 있다. 412년 이후 어거스틴은 자신의 신학을 바꾸어 인간에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유 의지가 없고 죄를 짓는 자유 의지만 있다고 가르쳤다: “나는 사실 인간의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해 노력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정복했습니다.”
히포의 어거스틴 (412) 이전에 주제에 대해 쓴 현존하는 저술을 가진 모든 초기 기독교 저자는 결정론적인 신보다는 인간의 자유 선택을 발전 시켰다고 주장한다. 윌슨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싸울 때 이전의 마니교와 스토아주의 결정론적 훈련으로 돌아간 412 년까지 전통적인 자유 선택을 가르쳤다. 루터와 칼빈이 어거스틴의 결정론적 가르침을 전심으로 받아들인 개신교 개혁 때까지 소수의 기독교인 만이 자유 의지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받아 들였다.
가톨릭 교회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자유 의지와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종종 누구나 원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누가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알고 있지만 후자는 그들의 삶에서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지만, 이 지식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나타낸다.
(4) 사회학, 도덕 및 윤리
자연법
어거스틴은 인간의 법칙의 정당성을 조사하고 인간이 임의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법과 권리의 경계를 정의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지혜와 양심을 가진 모든 사람은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법, 즉 자연법을 인식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인간의 법은 사람들에게 옳은 일을 하도록 강요하거나 그른 일을 피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의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불의한 법은 전혀 법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불의한 법, 양심과 이성이 자연법과 권리를 위반한다고 말하는 법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
5. 인도의 철학. 불교철학. 화엄경(華嚴經)의 사상
(1) 화엄경
전통적으로 “화엄경”은 고타마 붓다가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한 직후에 '부처의 연꽃[佛華]'으로 상징되는 그 깨달음의 경지와 그것의 증득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을 그대로 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렇게 믿어져 오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다. 그렇기는 하나 “화엄경”은 매우 웅대한 희곡적 구상과 유려한 서술로 법계(法界), 즉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즉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이는 우주, 즉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묘사하고 있으며, '진리의 연꽃[法華]의 경전'이라는 뜻의 “법화경(法華經)” 즉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함께 대승경전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2) 화엄경의 기원
화엄경은 깨달은 존재에게 현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대승불교 경전이다. 모든 현상의 상호 존재에 대한 화려한 묘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화엄경은 또한 보살의 성장 단계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이 경의 제목은 보통 꽃 화환, 꽃 장식 경으로 영어로 번역된다.
간단히 말해 화엄은 “법계(法界) 즉 다르마다투 (dharmadhatu)의 보편적 인과관계”를 가르쳤다. 이 맥락에서 다르마다투는 모든 현상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매트릭스이다. 무한한 것들은 서로 상호 침투하며 동시에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다. 우주 전체는 스스로 생겨나는 상호 의존적 조건이다.
(3) 화엄경의 가르침
모든 현실은 완벽하게 상호 침투한다고 경전은 말한다. 각각의 개별 현상은 다른 모든 현상을 완벽하게 반영할 뿐만 아니라 존재의 궁극적인 본질도 반영한다. 화엄경(Avatamsaka)에서 부처님 바이로카나 즉 (비로자나(毘盧蔗那)불은 존재의 근거를 나타낸다. 모든 현상은 그에게서 나오며 동시에 그는 모든 것에 완벽하게 퍼져 있다.
모든 현상은 동일한 존재의 근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 안에 있다. 그러면서도 많은 것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화엄경의 두 부분은 종종 별도의 경전으로 제시된다. 그 중 하나는 십지경(十地經), 보살이 성불하기 전 10단계의 성장 과정을 제시한다.
다른 하나는 순례자 수다나 즉 (선재동자)가 53명의 보살 스승과 함께 공부하는 이야기를 담은 간다비유하. (Gandavyuha) 즉 화엄(華嚴)이다. 보살들은 창녀, 사제, 재가자, 거지, 왕과 왕비, 초월적 보살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대표한다. 마침내 수다나. (선재동자)는 끝없는 공간의 다른 탑들이 있는 끝없는 공간의 장소인 미륵의 탑에 들어간다. 수다나의 몸과 마음의 경계는 사라지고, 그는 법계(法界)를 유동하는 물질의 바다로 인식한다.
(4) 화엄경의 변증법적인 속성
“하나의 털구멍 안에서 시방의 세계를 보니, 그 세계는 미묘하게 장엄한 모습을 띠고 있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화엄경(華嚴經)제13장 초발심보살공덕품 (初發心菩薩功德品)
여기서 우리는 일(一)과 다(多)가 서로 “교통한다” 혹은 “상호-침투한다” (reciprocal infiltration) 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대립의 일치” 라고 할 수 있다. 단 이런 “다양성의 통일” 혹은 “대립의 일치”가 어디서, 어떻게 생기는지는 한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 (Immanuel Kant)는 이런 일치가 사물 자체에서 라기 보다는 인간의 정신 내지 의식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이를 (선험적 통각에 의한) “다양성의 종합적 통일” 이라는 말로 개념화했다. 그 밖에 피히테나 헤겔의 경우는 이를 더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즉 “일(一)에서 다(多)로” 이행한다. 칸트의 경우에도 정신 혹은 의식 안에서 일과 다의 교류 혹은 이행이 일어난다고 전제를 해야 한다.
따라서 불교 화엄경에 나오는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이나 “일미진중 함시방” (一微塵中 含十方) 사상은 이해가 된다. 즉 일과 다의 상호침투이다.
단 후자의 경우, 즉 “일미진중 함시방” (一微塵中 含十方)의 경우는 “작은 것”과 “큰 것”의 관계가 덧붙여져 있다.
6. 프랑스의 철학 :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원리
제1장 :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
근대 철학은 데카르트와 함께 시작되었다.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이 한 때 서구 사상을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철학의 전통은 데카르트에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온다.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의 존재론조차도 데카르트의 사고 즉 에고 코기토 (Ego Cogito = I think) 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두 철학은 데카르트와 근대 철학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데카르트와 근대를 극복하기 어려운 점은 “내가 생각한다“는 전제가 없다면 모든 철학이나 사상은 독단적인 함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에고 코기토의 원리는 주관 혹은 주관성의 원리와 동일합니다. 사람들은 주관성이나 주관-객관 관계의 개념을 쉽게 비판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철학의 틀은 쉽게 비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더하여 데카르트는 철학 역사상 처음으로 정신, 영혼, 이성, 또는 지성으로 종종 표현되는 인간의 마음을 간결하게 파악했습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사고(思考) 혹은 생각(Thinking)의 기능으로 정리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단지 생각하는 존재이다, 즉 마음(mind), 영혼(soul), 지성(intellect), 이성(reason), 이런 단어들은 내가 이제 막 그 의미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고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진실하고 실존하는 존재이다. (“제 일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중 두 번째 명상)
이전에 사람들은 정신, 영혼, 마음, 지성, 이성등에 대해 이리 저리 이야기했지만 데카르트 이전까지는 이러한 것들의 본질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 대한 데카르트의 정의(定義)를 알면, 인간 정신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집니다 : 즉 하나의 사고하는 존재 (a thinking thing)입니다. 게다가 데카르트는 성경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는 생각한다” (ego cogito) 원리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신이 나를 창조했다는 사실은
내가 어떻게 그의 이미지와 유사성을 따라서 민들어졌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그 유사성을 내가 나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인식한다.
(세 번째 명상: 하나님)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창조자가 피조물을 만들 때는 자연히 창조자의 이미지(형상) 혹은 창조자와 비슷함을 토대로 만들었고 그 이미지 혹은 비슷함이란 바로 나의 본질인 사고(I Think)라는 것입니다.
제2장 : 절대적인 의심을 통한 “생각하는 나”의 발견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I-Think) 원리에 대한 발견은 끈질긴 의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하나의 “앎”을 찾고 싶어했습니다. 확실한 인식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는 오류와 실수의 하나 하나의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하늘이나, 산 혹은 나무같은 감각적인 현실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는 자신의 신체마저 의심, 부정하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이런 의심을 필자는 절대적 의심이라고 규정합니다. 한 마디로 최고로 극단적인 의심입니다.
눈, 머리, 손 등등은 가상(假想)일 수 있다. (첫 번째 명상)
자신의 머리나 손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몸을 의심할 수 있을까요? 내 손과 발이 환상적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데카르트는 자신의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절대적인 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데카르트가 자신의 신체를 불신하는 것은 소위 "환상 사지" 감각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글에서 "환상 사지" (phantom limb)를 언급했습니다. 참고로 이 현상은 최근 “뇌과학” (腦科學 = brain science) 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사지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은 가끔 “없어진 팔·다리의 통증”을 느낀다고 들었다. (6번째 명상)
“유령 팔다리” 혹은 “환상 사지 현상”은 절단되거나 없어진 팔다리가 여전히 붙어 있는 감각입니다. 이 증세를 앓는 사람들 중 상당한 비율은 고통스러운 유령 팔다리 감각을 경험합니다. (환상 사지, 위키백과)
이 관점에서 데카르트의 “자신의 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라는 가설이 이해될 것입니다. "뇌·과학과 라마찬드란 박사 (Dr.Ramachandran)와 관련된 “환상사지” 혹은 “유령 팔다리” 이야기는 여기서 더 이상 논의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여간 뇌·과학에 의하면 우리의 뇌 속에 유령이 있다고 합니다. Phantoms in the brain.
제 요점은 단지 자신의 몸을 부정하는 “사고 실험”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데카르트의 철저하고 극단적인 의심 방법은 뇌·과학과 관련하여 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7. 영국의 철학 :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제1장 : 공적 쾌락주의로서의 공리주의
공리주의의 아버지 제레미 벤담은 대중의 즐거움을 윤리의 원리로 만들었고 그의 행복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가리킨다. (행복 = 쾌락)
그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쾌락주의라는 고대의 윤리적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쾌락주의의 원조는 에피쿠로스이다. 쾌락주의는 특정한 철학 학파라기보다는 인간의 일반적인 습관과 가치관에 가깝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한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라는 문구는 쾌락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즉 내일을 위해서 오늘 희생하지 말고 오늘을 잡아라, 순간적인 즐거움을 잡아라- 라는 인생관입니다. 이처럼 쾌락(pleasure)의 기본적 의미는 신체적, 감각적, 순간적인 즐거움이다. 우리 가요에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란 노래가 있다. 이런게 다 쾌락주의, 향락주의를 말한다.
제2장 : 공리주의의 장점
공리주의의 본질은 "가장 많은 수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공식에서 볼 수 있듯이 공공적이고 대중적인 쾌락주의이다. 단지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기보다는 다수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대중적 쾌락주의로서 공리주의는 쾌락주의에 대해 흔히 가해지는 비난 즉 "쾌락주의자 = 이기주의자" 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동안 쾌락주의자들은 순간적, 찰나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 라는 비난을 받았다.
제3장 : J. S. Mill의 질적 공리주의
벤담의 공리주의가 넓은 호응을 받고 도덕과 국가 정책에 대한 큰 기여를 한 반면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들의 공리주의 반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공리주의는 돼지들에게만 가치 있는 교리다. 그 이유는 사람은 즐거움 외에도 많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공리주의는 쾌락, 즉 육체적 순간적인 쾌락만을 최고의 가치로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리주의가 행복을 말하기도 하지만 주된 행복은 쾌락입니다. 그러므로 공리주의는 사람을 돼지처럼 취급하는 사상이다- 라는 비판을 받는다.
2) 공리주의가 말하는 것, 최대행복 the greatest happiness 은 실제로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행복은 환상에 불과하다- 고 한다.
3) 공리주의는 사람을 차갑고 냉정하게 않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윤리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행동을 다루는 것이며 개성과 동기는 민감하고 동정적인 행동에 중요하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이를 무시하고 행동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춘다- 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 “공리주의”, “Utilitarianism”의 목적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에 반박하고 공리주의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밀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1) 공리주의는 돼지에게만 적합하다는 비판에 대해 밀은 육체적 쾌락과 지적 쾌락을 동시에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를 크게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 벤담은 모든 쾌락은 질적으로 동일하다 라는 “양적 공리주의”를 주창했다.
그리고 모든 쾌락의 동질성에 대한 벤담의 이론에 반대하여 밀은 쾌락의 질적인 차이를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종류의 쾌락은 다른 것보다 더 바람직하고 가치있다. (· · ·)
쾌락의 양뿐만 아니라 질도 고려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지적 쾌락(예: 우정, 예술, 독서, 대화의 쾌락)은 육체적 쾌락보다 높고 바람직한 종류의 쾌락이다.
또한 밀은 행복에 있어서 지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즉 지성 혹은 합리성이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한다. 예를 들어, 육체적인 운동은 순간적으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은 한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고 장기적으로 더 행복한 삶을 살게 할 것이다. 이 말은 지성이 행복과 쾌락에 필요하다는 말이다.
만족스런 돼지가 되기 보다 불만족스러운 인간이 되는 것이 낫고, 만족스런 바보가 되는 것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
2) 공리주의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프랑스 혁명'의 작가 토머스 칼라일을 비롯한 일부 도덕가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들은 ①행복은 어떤 형태로든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삶과 행동의 합리적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②사람들은 행복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들은
③“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없다” 라고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분명히 비관론자라고 말할 것이다. ④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도덕과 미덕(Virtue)을 위해서 행복을 포기한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가치관은 금욕주의자(Stoic)들의 지지를 받은바 있다.
그러나 이 교리(=공리주의)에 반하여 또 다른 계층의 거부자들이 생겨나는데, 그들은 행복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삶과 행동의 합리적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먼저, 행복은 달성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경멸하듯 묻는다. 당신은 행복할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러한 세 번째의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밀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행복이 없다고 해도 효용 Utility의 공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행복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취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고통이나 불행을 줄이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이 공리주의의 다른 얼굴이다. 공리주의 = 행복의 증대와 불행의 감소 둘다를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행복이 없다고 할지라도), 공리주의 이론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효용성의 원리(최대의 행복) 단지 행복의 추구뿐만 아니라 불행의 예방이나 완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8. 일본의 철학. 나쓰메 소세키의 반(反)군국주의(軍國主義)적 개인주의
한국과 주변 국가의 비극적인 역사 인식 문제와 관련하여 근대 일본의 대표적 소설가이며 양심적 지식인인 나쓰메 소세키(1805에서 1915)의 개인주의 사상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요즘 일본은 독일과 달리 자신이 제국주의 시대에 이웃의 나라들과 민족들에게 끼친 사악한 과거사를 반성할 줄 모르고, 다시 군국주의화 그리고 우경화되고 있다. 이런 파렴치한 일본에 대해 소세키는 경종을 울리는 인물이다.
소세키는 “나의 개인주의”라는 강연문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의 근대화와 달리 개인의 권리의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발달한 문물을 도입하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양의 법과 각종 제도를 수입한 기형적인 근대화였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근대화는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빠진 국가적인 행사였다. 소세키가 강연을 하던 당시, 일본에서는 러일전쟁의 승리 후 군국주의를 찬미하는 분위기가 만연했으며 개인주의는 악이라고 비난받았다. 그리고 권력자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었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국가주의가 찬미되었다. 당시 일본은 주변국들과 패권전쟁에서 승리하여 한껏 국민의식이 고무되어 있었다.
전쟁에 의한 국가발전이 찬미되던 그 때, 소세키는 개인주의가 국가주의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주의 요소를 유린하지 않으면 국가가 망할 것처럼 주장하는 자도 적지 않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일본이 타국으로부터 침략당하는 경우가 있다면 국가를 위해 일어서는 것이 당연하지만 국가가 강해서 전쟁에 대한 우려도 적고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할 염려가 없다면 국가적 관념이 희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서술했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 풍조에 편승해서 아무런 국민적 필요성도 없이 오직 정권의 유지만을 위하여 전쟁을 획책한 일본의 군국주의 정치를 비판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국가만을 강조하여 꾸민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임을 주장했다. 국민, 즉 개인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당시 일본의 침략주의적인 정책을 소세키는 비판한다. 이처럼 소세키는 국가주의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목적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9. 독일의 철학.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의 탄생
1. 비판전기와 비판기를 가르는 칸트철학의 분수령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으로 유명하다. 칸트는 그의 저서에서 독단주의와 비판주의를 구분했다. 독단적 철학은 신, 영혼, 자유의지와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들을 추측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 방법, 즉 과학의 영역에서 그들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다.
비판적인 시기 이전에 칸트는 독단적인 형이상학을 믿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에 관심이 있었다.
신의 존재론적 증명은 독단적 형이상학의 이론 중 하나이다.
존재론적 신 증명 이란 신의 관념에서 신의 존재를 도출하는 증명이다. 그것은 처음에 그의 “프로슬로기온”(1077–78)에서 성(聖) 안셀무스에 의해 명확하게 공식화되었다. 이는 신의 개념 즉 신은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이 인간의 머리 속에서만 있고 실재로는 없다면 이는 가장 위대한 존재 라는 개념에 모순된다. 따라서 신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라는 논증 방식이다.
이처럼 칸트는 비판 시기 이전에 전통 철학에 머물렀다. 그러나 칸트는 영국의 경험주의자 데이비드 흄의 회의론을 통해 독단주의의 꿈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흄은 실제로 외부 세계의 존재를 부정했을 뿐 아니라 인과관계의 법칙을 부정했다: 즉 사물의 경험적 연결에서 인간은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추론할 수 없다 고 한다. 따라서 흄 이후는 종전의 형이상학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연과학도 그 보편타당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2. 칸트 : 철학의 코페르니쿠적 혁명
그러나 나의 질문은 “칸트가 어떻게 전통적인 독단주의와 그리고 회의주의 마저 극복하고 그의 진정한 철학, 즉 비판적 관념론을 확립할 수 있었는가?” 이다.
지금까지 칸트의 사상의 발달에 있어서 그의 사상의 분수령, 즉 급격한 변화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었다.
완전히 다른 두 형태의 철학 사이에서 칸트는 1769년 그에게 "큰 빛이 주어졌다"고 고백했다. 그의 주요 작품인 《순수 이성의 비판》은 1781년에 출판되었고 루소의 “에밀”은 1762년에 출판되었다. 칸트는 루소의 "에밀"이 출판(1769)된 지 7년 후 특히 “에밀”의 "사보이 보좌신부의 신앙 고백" 에서 루소의 철학에 접했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본 큰 광명의 실체이다. 이것은 필자의 추측이고 그 증명은 이제 시행한다.
칸트 자신도 자기 사상의 급진적인 변화를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렀다.
임마누엘 칸트에 의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루소의 “에밀” 이 칸트의 패러다임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루소의 철학의 핵심
루소의 "에밀"에서 작중 화자는 그의 시대의 철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자아의 확실성 원칙에 동의한다. 데카르트는 외부적 세계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러나 “생각하는 나” 즉 자아의 존재는 결코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루소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쉽게 자신의 바깥세계도 의심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의 감각은 ego cogito 처럼 명백하다. 자아와 감각은 모두 내면적이기 때문에 모두 확실하다. 나의 감각은 나만큼 뚜렷하다. 게다가 자아는 그의 감각에 영향을 주거나 파괴할 수 없다. (이게 바로 루소가 버클리주의를 벗어나는 계기이다)
"생각하는 나"와 나의 감각(=외부 세계)는 둘 다 독립적으로 나란히 존재한다. 그러나 나(the I=ego)는 사물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다. 주어진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를 아는 것은 우리의 지성 능력 안에 있다.
3.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
데카르트적인 에고와 감각의 연관성에 대한 루소의 생각은 실로 독일 관념론 철학 전체의 비밀이다.
루소는 나무나 집과 같은 외부적인 것들의 진정성을 인정한다. 이 점에서 그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그는 세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지성의 역할을 인정한다. 이 점에서 그는 관념론자이다.
이처럼 루소는 유물론과 관념론을 조화시킨다.
이제 내가 스스로 감지하는 것 그리고 감각기관에 작용하는 모든 것을 물질(matter)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물질의 그 부분들은 개별적인 존재에서 결합된다. 그런 개체를 나는 물체(body)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관념론자들과 유물론자들 사이의 모든 논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체에 대한 현상과 실체 사이의 차이는 환상에 불과하다. (에밀)
여기서 언급한 루소에 의한 관념론과 유물론의 화해는 이에 대한 칸트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칸트의 관념론은 버클리(Berceley)와 달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감각 데이터를 인정하기 때문에 "선험적 관념론“ (transcendental idealism) 이라고 불린다. 즉 칸트의 개혁적인 관념론은 ese est percipi를 내세운 버클리의 관념론과는 다르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 역시 유물론과 관념론을 조화시킨다. 칸트가 새로운 관념론을 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모든 감각 데이터를 종합하는 주체 즉 생각하는 나의 기능이다. 이처럼 칸트는 루소의 수집(연결)하고 판단하는 나의 기능을 좀 더 철학적으로 심화시켜 ”종합하는 나“ 혹은 ”결합하는 나“로 발전시킨다. 이는 뒤에 나오지만 ”통각의 종합적 통일“ (synthetic unity of the manifold, synthetische Einheit des Mannigfaltigen) 라는 순수이성비판 고유의 사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나의 모든 표상에 동반될 수 있어야 한다. (C.P.R. B 132, C.P.R은 순수 이성 비판을 말한다) Das : Ich denke, muss alle meine Vorstellungen begleiten koennen.
칸트에 의한 "I Think"즉 생각하는 자아가 나의 모든 표상에 동반된다는 것은 데카르트의 사상이라기보다는 루소의 사상을 가리킨다.
사실 칸트는 데카르트와 루소의 철학을 은밀하고 집중적으로 다루며 이는 순수이성비판 안에 있는 “오성의 순수 범주의 선험적 연역" 이라는 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
칸트 역시 외부로부터 주어진 자료를 받아들인다, 이 점에서 그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그는 객관적인 세계를 인지하는 데 있어서 "생각하는 나"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정도까지 칸트는 실제로 루소를 흉내낸다.
칸트에게 왔다는 "큰 빛"은 실로 루소의 에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생각하는 나"에 대한 이해는 루소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루소의 지성이나 "생각하는 나"는 비교와 판단의 역할을 담당한 반면, 칸트의 "생각하는 I"는 과학적 지식을 가능케 한다.
칸트는 생각하는 자아의 기능을 모든 감각, 표상(表象)에 수반되는 "순수한 통각"이라고 말한다.
4. 수집(연결)하는 나와 다양성의 종합적 통일
앞서 언급했듯이 칸트의 모든 표상에 수반되는 "I Think"는 실제로 루소의 지성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루소의 지성 역시 자아의 능동적 기능을 말한다. The active role of I = Intelligence by Rousseau.
루소는 내 감각을 수집(연결)하고 비교하는 정신의 힘에 대해 말했다. 루소에 의해 나의 감각을 수집하고 비교하는 이 힘은 그 감각들의 대상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한다.
내 감각을 연결하고 비교하는 그 정신의 힘에 어떤 이름이 주어지든 간에 - 그것을 주의력, 명상, 성찰, 또는 당신이 좋아하는 무엇이라 부르든 - 그것이 그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에밀)
그러나 칸트는 루소에 의한 자아의 수집(연결)기능을 주체 자체의 결합기능으로 재해석했다.
모든 표상 중에서 결합의 표상은 사물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주체 자체만으로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기 활동의 행위이기 때문이다.(C.P.R B 130)
루소와 유사하게 칸트는 자기 활동의 기능을 주체에 귀속시킨다.
이런 전통은 실은 플라톤 이래 주장되어 온 것이다. 즉 영혼은 자기 활동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루소에 의해 주장된 “정신은 대상의 수집(연결)기능이 있다는 사상을 "다양성의 종합적 통일"로 개념화했다.
이것이 칸트가 철학 발전에 기여한 큰 공헌이다.
결합은 다양성의 종합적 통일을 나타낸 표상이다. < C.P.R. B I31> Verbindung ist Vorstellung der s y n t h e t i s c h e n Einheit des Mannigfaltigen.
다양성의 종합적 통일 기능은 순수통각 혹은 생각하는 나에 귀속된다.
"생각하는 나" 또는 "순수한 통각"은 자발성의 행동으로 이해된다. 순수 통각은 주어진 다양한 감각 자료들을 통일하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산출한다.
# 통각(統覺, 영어: apperception)이란, 심리학, 철학, 인식론에서의 개념이다. 이는 라틴어의 ap-(ad-) "를 향하여"와 percipere "지각, 이해"의 합성에서 유래한 말로, 일반적으로 자신의 상태나 스스로의 경험 등 자신의 내면적인 것을 조회하고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10. 덴마크의 철학 : 키엘케골의 “반복” -
반복과 기억의 철학적 의미
키엘케골 : 실존주의 철학의 효시
# 유신론적 실존주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실존주의 : 체계(보편)보다는 개인을 중시한다.
주제: “반복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만 상기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다”.
여기서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좋았던 어떤 일이 다시 일어남을 말한다. 회복(回復)과도 같은 말이다. 그 반면 상기 역시 아무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좋았던 과거의 기억을 말한다. 비학문적인 개념 구성!
이 책의 제목은 콘스탄틴 콘스탄티누스 저(著) 반복, 부제 : 실험적 심리학에 관한 시도 이다.
콘스탄틴은 가상의 인물이고 이 책의 서술자이다. 주인공이기도 하다. 작중화자이다. 이는 키엘케골 자신을 지시한다.
다른 등장인물 : 사랑에 빠진 청년 – 잘 생김, 그는 처녀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서로 약속한 사이다. 상호간의 오해와 실수로 청년은 그녀를 떠난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이는 키엘케골 자신을 묘사한다. 레기네 올첸과의 파혼
결혼은 해도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 는 말을 남김
그녀와의 만남 이후 청년은 시인이 된다. 여기서 현실과 이상(관념)의 혼동이 일어난다. 여신 혹은 뮤즈 같은 역할을 기대한다.
본문 : 그의 내부에서 시적 창작력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처녀는 그의 연인이 아니었고 다만 그로 하여금 시정신을 일깨워 그를 시인으로 만들어준 동기적인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그녀 자신의 사형선고장에 서명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청년은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과 번뇌에 시달린다. 연애 상담자 역학을 하는 콘스탄틴은 여자를 떼어 낼 작전을 짠다. 즉 가짜 애인을 만들어 정혼자가 떨어여 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청년을 이를 수행하지 않는다.
결국 청년은 멀리 떠나고 그런 사이에 정혼자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문제가 해결된다.
여기서 성경의 욥기가 등장한다. 욥이 악마의 시련을 당하여 가족과 재물을 다 잃어 버리고 악성 종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이를 친구들은 모두 욥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 간주하여 욥과 심각한 논쟁을 벌린다. 죄없는 자가 당하는 고난 이라는 주제이다.
결국 욥은 믿음은 신의 인정을 받고 그를 정죄한 친구들을 용서하고 나중에는 다시 재물을 쌓고 또 자녀를 많이 낳아 복받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청년 역시 그의 실존적인 고통과 시련을 신의 연단으로 간주하고 의미를 발견한다.
주제와 연애 스토리의 관련성
상기(recollection) 혹은 회상 이는 플라톤 철학의 상기와 관련성을 가진다. 플란톤은 그의 메논 편에서 인식을 상기로 보았다. 영혼은 불멸이고 탄생은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는 사건이다. 탄생하면서 영혼은 그가 천국에서 알았던 지식을 잊어 버린다. 사람은 사물을 보면서 그가 출생 전에 알았던 지식을 기억한다. 이는 이데아의 지식이다.
이런 상기는 실제 생활에서 불행과 관련된다는 것이 키엘케고르의 발상이다. 즉 현실의 여자를 만나면서 미적인 관념과 이를 동일시하면 불행에 빠진다.
이 여자가 바로 이데아 지식 혹은 천상의 지식을 발견하는 동기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청년은 그녀를 만난후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플라토닉 러브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반복 혹은 회복 개념은 헤겔의 매개(연결) 개념과 관련이 있다. 당시 키엘케골은 헤겔 철학의 합리성 내지 체계성에 반기를 느꼈다. 그 대신 그는 반복이란 말을 썼다. 반복이 관념과 실재를 연결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매개(mediation, Vermittlung)이란 직접적인 것, 개별적인 것 혹은 유한한 것이 실은 보편적인 것 불변적인 것, 무한한 것과의 연결을 가진다는 사상이다.
그는 헤겔처럼 개별자가 보편자로 지양되는 것보다는 개별자의 개별성을 중시한 것이다. 개별자 혹은 실존의 고유성(unique)는 보편성 속으로 환원될 수가 없다. 욥기를 통해서 보는 것처럼 개별자의 문제는 결국 신의 섭리 안에서 풀린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이다.
이 청년의 경우는 결국 처녀를 통해서 시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살리는 것이 구원이다.
11. 미국.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
1) 사회복음주의 비판
미국의 종교학자 니버(R.Niebuhr 1892~1971)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라는 저술을 통해서 인간의 도덕성과 이기심 등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했다. 그는 개인의 도덕성과 그 개인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비도덕성을 대립시킨다. 즉 개인은 도덕적이나 사회는 비도덕적이다. 이는 그간의 사회개혁에 대한 희망을 부정하고 정치적인 각종 신념과 이상주의에 대해서 회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당시 미국에 유행했던 사회 복음주의 (Social Gospel Movement)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사회 복음주의는 19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활발했던 개신교 지식인들의 진보적인 신학운동이다.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적 정의, 범죄, 빈곤, 아동노동, 전쟁 등의 사회적 주제들에 대해 기독교 사상으로 접근했다. (위키피디아)
그러나 니버의 윤리학은 어느덧 사회복음주의의 피상성(naivete)을 비판했다. 그에게 사회복음의 주창자들은 "인간과 사회의 깊은 죄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채 산상수훈을 그저 실천하려 했고 이를 통해 불의한 사회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순진한' 이들로 보였다. 교갱뉴스(http://www.churchr.or.kr)
다시 말해서 사회는 그 이기심을 벗어 날 수 없다 개인의 이기심보다 집단의 이기심이 더욱 강력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니버는 집단의 도덕이 개인의 도덕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the inferiority of the morality of groups to that individuals) 그 이유는 3가지인데 1) 집단이라는 것이 개인보다 통일성이 없기 때문이다. 2) 개인들은 집단 속에서 더욱 충동적이고 공격적이기 때문이다. 3) 개인의 자기 교육과 자기 초월능력에 비해서 사회의 자기 교육과 자기 초월성은 극히 저조하기 때문이다.
2. 통일성의 부족
집단이란 대개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 (aggregation)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간의 모임으로서의 사회는 결속력과 응집력이 부족하다. 구성원들의 자연적인 충동을 규제할만한 이성적인 사회력의 확립이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등산인들의 모임을 생각해 보자. 등산 클럽의 회원들은 각자 연령이나 성별이나 직업이나 모두 다를 것이다. 그들이 친한 이유는 단지 산에 올라 간다는 것 뿐이다. 이처럼 집단은 단순히 하나의 특성을 말할 뿐이다.
3. 집단적인 충동성의 증대
집단 속에서 개인들은 평소보다 더욱 자신들의 자연적, 이기적 충동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는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도 무슨 모임이나 집단 속에 있을 때에는 갑자기 용감하게 질서를 어기고 이를 도리어 즐거워하는 경우를 본다.
이는 또한 폭도들의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혼자 있으면 토끼 한 마리 못 잡을 사람이 집단적으로 흥분된 군중 속에서는 방화(放火)를 하고 자기 몸에다 휘발유를 붓거나 할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들의 집단심리이다. 이는 달리 말해서 집단 곳에서 인간들의 공격성과 충동성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4. 자기 교육과 자기 초월의 가능성 부족
개인은 본래 이기적이지만 때에 따라서 이기심을 떠나 사회 정의나 도덕성을 위하여 투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한 한국인 유학생이 일본의 노인을 구하기 위하여 달려오는 전철에 자기 몸을 던져 희생한 일이 있었다. 인간에게는 이런 이타적인 성격도 있다. 이를 자기 초월이라고 부르자. 그러나 집단에서는 그런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다시 말해 개인은 변화하기 쉬우나 그 집단은 그런 가능성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집단은 자기를 초월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집단의 특성은 무제한적 이기주의 혹은 집단적 이기주의 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인간 집단에서는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보다 충동을 견제하고 인도할 이성이 적고, 자기 초월에의 능력이 적으며,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적고 따라서 무제한의 이기주의가 그들의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적적인 사회” 9~10 쪽)
5. 이상주의와 낙관주의 비판
이처럼 인간 집단 윤리의 취약성 때문에 사회적 발전은 지체된다는 것이 니버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니버는 근대의 계몽적 낙관주의와 이상주의 등을 비판한다. 계몽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은 개인들의 계몽과 교육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인류 사회의 정의, 진보, 복지, 평화가 도래하리라는 강력한 낙관주의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니버는 이를 의심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 지성의 성장이 사회적 불의를 자동적으로 제거해 중 것이라는 신념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성의 시대는 사회적 불의와 중세기의 전통과 미신이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사회적 불의의 제거는 중세기의 전통과 미신의 철폐를 초래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성의 시대의 열렬한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콩도르세 (Condorcet)는 보편적인 교육과 인쇄술의 발전이 태양이 환하게 비추이는 이상사회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의 시대의 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태양은 자유인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지구 위를 환하게 비출 것이다. 어떤 주인들도 이성을 줄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폭군도, 노예도, 성려도, 그들의 위선적인 도구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적적인 사회” 40~41쪽)
6. 지배 계급과 특권층의 집단이기주의
니버는 경제적으로 확립된 계층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들을 소위 기득권층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능력의 다양성으로부터 소유권이 생기는데 (...) 이러한 능력들을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제일가는 목적이다. 재산을 습득하는 상이하고 불평등한 능력과 서로 다른 정도의 형태의 재산 소유를 보호하는 데서 직접적인 결과가 생긴다. 사회는 각 소유자들의 정서와 관점의 영향에 따라서 상이한 이해관계와 당파들로 구분된다”. (117~118)
이 글은 우선 사람들의 재산의 차이가 그들의 능력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 이론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다고 하지만 실제 사회를 관찰하면 인간의 능력은 하늘과 땅처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능력의 차이 (불평등)에서 재산과 권리의 차이 (불평등)가 초래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발생한 재산의 차이나 권리의 차이가 꼭 그대로 정당화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진정 능력대로만 살아간다면 이 사회에서 굶주리고 노약해서 죽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한 가정에서도 능력있는 한 가장의 노력으로 3-4인의 식구가 살아간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벤처기업의 사장이 내일의 실직자 (失職者)가 되지 못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기득권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두는 정치를 보수주의라고 한다. 보수주의는 계급정치를 포함하고 있다. 니버는 이를 비판한다.
“능력과 기능에의 차이가 실제로 특권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형성된 불평등의 정도를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사회제도 안에 존속하는 불평등의 형태와도 거의 관련이 없다”. (118쪽)
위의 사상은 능력의 차이로 인해 생긴 재산과 권리의 불평등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를 니버는 형성된 불평등의 정도라고 표현한다. 즉 열심히 일해서 번 돈과 재산은 마땅히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대로일 수는 없다는 것이 니버의 생각이다. 즉 세금이나 규제를 통해서 소득을 재분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 어느 정도까지 불평등의 정도를 허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회적 합의와 결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논객들은 이런 소득의 재분배와 사회복지 혹은 약자 보호라는 원리를 거부한다.
12. 한국. 퇴계(退溪)의 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과 주리론 (主理論), 경(敬)사상. 내외신문
○ 퇴계(退溪)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주자성리학에서는 마음이 사물에 감촉되지 않은 상태, 즉 심(心)의 미발(未發)을 성(性)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에 이미 감촉되어 의식이나 감정이 발동한 상태, 즉 심의 이발(已發)을 정(情)이라 한다.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칠정으로 대표되는 ‘정(情)‘,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에서 그대로 직출(直出)한 정인 ’사단(四端)‘. 대개 이 논법은 주희의 <중용장구서 中庸章句序>의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생기고, 도심(道心)은 성명(性命)의 바름[正]에서 근원한다.”는 논법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뒤 논변 과정에서 발견한 ≪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사단(四端)은 이의 발이고, 칠정(七情)은 기의 발이다.”라는 주자의 말에서 이황이 확신을 얻은 것이다.
다만 그 뒤의 논변과정에서 이황은 이 구절을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고쳐 그의 주장을 완화시켰으나,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 이발(理發)의 주장을 끝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이황(李滉)은 이러한 이발설(理發說)을 통해서 기에 대한 이의 우위를 분명히 하고, 이로써 인간의 순수심성의 발현인 사단을 소중히 해 인간의 선의지(善意志)와 이성을 지켜 가려는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성선론(性善論)] 이황(李滉)의 이기론을 대표하는 학설로 사단과 칠정(七情)을 각각 이발(理發)과 기발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정통 주자학의 학설에 투철하면서도 나름대로 그의 철학적인 정신을 전개한 이황의 성리 사상의 핵심이라 하겠다.
○ 이론적으로 理와 氣 그리고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은 꼭 대립적인 것이 아니지만, 퇴계는 대립으로 보았다. 기(氣)와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인간의 악의 성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쓰였고, 칠정은 사람의 일상적 타락을 보여주는 감정으로 이해되었다.
기질지성(氣質之性)은 성리학에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혈기의 성을 이르는 말로, 이(理)에서 생긴다는 본연지성과 대비되어 기(氣)에서 생긴다는 성을 가리키는 유교용어이다. ‘통함과 막힘[通塞]’, ‘치우침과 바름[偏正]’의 차별이 생기게 된다. 타고난 기질과 성품인데, 타고난 기질의 청탁(淸濁)과 편색(偏塞)에 따라 선하게도 나타나고 악하게도 나타난다. 또한 본연지성(本然之性)은 사람이 본디부터 가지고 태어난 심성으로, 이(理)에서 생긴다. 지극히 착하고 사리사욕이 조금도 없는 천부자연의 심성(至善)을 말한다. 성선설(性善論)로 대변된다.
이기론(二氣論)에서는 본연지성은 이(理)에 해당되고, 기질지성은 기(氣)에 해당된다. 그런데 기질지성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수양에 따라 탁(濁)을 청(淸)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선한 본연지성의 회복을 위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선한 ‘본연지성’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라면, 지금 우리나라에 참된 교육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퇴계의 경(敬)사상 : 외경(畏敬)의 삶의 정신
경(敬)은 유가의 수양론의 핵심에 해당된다. 그들은 그것을 "학문의 처음이자 끝"이라 하여 지극히 강조하였다. 이는 경이 그들 특유의 인간관과 삶의 철학을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오늘날 학자들은 유가의 수양론을 논의할 때 거의 예외 없이 경(敬)사상을 언급한다. 퇴계의 삶의 철학, 경(敬 공경함)은 외경(畏敬 두려워하며 공경함)의 정신을 그 개념의 핵심에 두고 있다. 그 밖에 마음의 고요와 오롯함, 그리고 ‘나와 너’의 정신 등은 이의 외연에 해당된다. 퇴계의 외경의 정신은 그의 행동거지는 물론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 근저에는 ‘하늘의 말씀[天命]’에 대한 외경이 놓여 있다. 외경의 정신은 당면의 일을 갖지 않을 때에는 마음을 고요 속에 두고자 했다. 이 고요는 외경의 정신이 감각과 사려활동 이전에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의 공간이다. 표층의 감정과 사고에 오염되지 않은 심층의 순수의식이 거기에서 현전될 것이다. 퇴계는 그러한 공부를 “정좌(靜坐)”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 밖에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마음을 잡념과 공상으로부터 해방시켜 비워두려 하였다. 이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이 밝고 맑은 심리를 조성하여 사물을 올바로 인식하게 해주는 의의를 갖는다. 또한 그것은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의 정신을 길러준다. 한편 마음의 고요는 단지 감각과 사려부재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생명정신을 함유한다. 외경의 정신은 일에 당면해서 오롯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퇴계는 말할 때도 경(敬), 움직일 때도 경(敬), 앉아 있을 때도 경(敬)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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