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1. 아차성 전투 - 온달장군의 전사
서울 광진구 광장동 산 16-46번지와 구의동 산 1-2번지에 걸쳐 있는 아차산성은 사적 제234호로 아단성(阿旦城). 아차성(峨嵯城), 양진성, 광진성 등으로 불린다.
아차산성은 광개토왕비에 적힌 영락 6년(서기 396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로부터 빼앗은 58개 성 가운데 아단성이란 이름이 보이며,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백제의 한성을 점령함에 따라 개로왕이 사로잡혀 아단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한 곳이다.
즉 아단성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곳이었으며, 한강 유역을 통치한 고구려의 남쪽 터전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지금부터 1,600여 년 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부터 3국을 통일한 때까지 약 300년간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흙과 돌로 쌓았던 아차성이야말로 그 당시 3국이 필사적으로 적을 막기 위해 쌓았던 것임이 틀림없다.
아차성을 처음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다. 백제을 쫓아낸 고구려는 한강 지역을 77년간 차지할 수 있었다. 한편 백제는 잃은 땅을 되찿기 위하여 신라와 함께 고구려군을 공격한 끝에 겨우 한강 지역을 회복하였지만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가 되찾은 한강 지역을 다시 빼앗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빼앗긴 한강 지역을 수복하기 위하여 신라군이 수비하고 있는 아차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바보 온달장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온달에 관한 설화가 소개되어 있다. 온달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불행히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부하 군사들이 장사를 지내려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평강공주가 평양에서 달려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 되었으니, 돌아갑시다”고 말하자 비로서 관이 움직여 장례를 치룰수 있었다. 영양왕이 이를 듣고 몹시 슬퍼 하였다.
2. 한양천도 - 태조 이성계의 도읍
태조 이성계는 옥좌에서 앉은 지 1개월도 채 안된 1392년 음력 8월에 새로운 국가의 면모와 인심을 일신하기 위해 오늘날 국무회의와 유사한 도평의사사 에게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준비하라 고 명하였다. 원래 한양은 고려 5백년 동안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고 이 씨 가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도참설이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4개월 정도 지났을 때 계룡산에 도착한 태조 이성계는 지세를 살피고 도시 계획도에 따라 측량을 해 본 끝에 이곳을 도읍지로 확정짓고 새로 궁궐을 짓게 하였다.
새 궁궐공사가 10개월이 지난 어느 날, 경기 좌우도 관찰사 하륜이 전하, 새 도읍지 계룡산은 국토의 중앙에 있지 않고 남쪽에 치우쳐 있는 데다가 강물이 흉(凶)한 쪽에서 나와 길(吉)한쪽으로 흐르니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나라가 쇠약해져 패망하게 됩니다. 고 아룀에 따라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의 궁궐 공사를 중단 시킴으로서 오늘날까지 ‘계룡산 신도안’ 이란 명칭이 남아 있게 되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태조 3년(1394) 7월 태조 이성계는 초조해진 나머지 하륜이 명당으로 손꼽는 무악을 친히 살피기로 정하였다.
태조는 무악을 살피기 위해 양주 회암사에 있던 무학대사를 모셔오게 하고, 중신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서울을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의 확고부동한 결심을 알게 된 서운관에서는 의견을 모은 후 우리나라에서 도읍지로는 개경이 명당으로서 첫째요, 한양이 둘째인데 천도를 꼭해야 한다면 한양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건의 하였다.
그러자 측근의 여러 중신들도 전하, 반드시 천도를 하려면 이곳이 좋습니다. 라고 찬성을 하였다. 이로써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8월 추석날 한양의 남경 궁궐터에서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양으로 도읍하기에 앞서 궁궐과 도성 축조 위치에 대해 개국공산 정도전과 무학대사 간에 의견이 달라 두 사람이 격론을 벌였다는 후문이 있다.
정도전을 태조 5년(1396)에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부 52방으로 정할 때 방(坊)의 명칭을 유교의 경전에서 찾아 붙였으며 그 일부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한양에 천도한지 이듬해인 1395년 6월 6일, 조정에서는 한양(漢陽)이라는 명칭 대신 한성부라고 고쳤다. 이로부터 한성부란 이름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길 때까지 518년간 공식명칭으로 쓰였다.
3. 골육상쟁 -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한 지 3년 후 태조 7년 무인년 8월 26일 새벽 -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나 한양에는 피바람이 일었다. 이 난은 세자(世子) 책봉부터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안군 이방원은 그의 노복, 하인들로 편성한 사병과 이숙번이 거느린 정릉교안군 등을 지휘하여 경복궁을 포위하고 정도전, 남은 등이 모여 있는 곳을 습격하여 이들을 살해하였다.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없는 둘째형 방과(放課)를 세자로 삼게 하여 백성들의 비난을 피하고, 이복 동생인 세자 방석과 방번을 귀양 보내도록 한 뒤 중도에서 살해하도록 하였다. 또한 태조 이성계의 측근인 부마 이제도 죽이고, 나머지 무리들은 귀양 보내도록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옥새를 내어주고 나자 마음이 개운하였지만 문득 지난날 젊었을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거의 쓰러져 가는 집에서 서까래 셋을 젊어져 보았고, 또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진 꿈을 꾼 뒤에 그 해몽을 무학대사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고 전한다.
정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행정과 군사 등 실권은 이방원이 갖고 있었다. 정종은 민심이 흉흉하자 한양을 떠나 개경으로 향하였다.
물론 왕족과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정종을 따라 나섰으나 각 관청의 관원들의 반은 한양에 계속 남고, 반은 개경으로 떠났다.
정종 2년(1400) 정월 그믐날 - 일명 방간의 난이라 불리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제2차 ‘왕자의 난’은 태조 이성계의 3남 방간과 5남 방원(후일 태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골육상쟁 이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이 이방원의 승리로 끝나자 그 이튿날 하륜 등의 대신들이 정종에게 나아가 정안군을 세워 세자로 삼는 것이 가하다고 아뢰었다.
4. 동전 점괘 - 태종의 한양 재천도
정종은 동생인 정안군 이방원을 세자에 책봉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방원은 오랫동안 염원하던 왕위 계승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정안군이 세자로 책봉된 지 9개월이 지난 정종 2년(1400) 11월 11일, 정종은 정안군에게 왕위를 내어주기 위하여 도승지에게 옥새를 전하면서 대통(大統)을 잇는 것이 마땅하다는 전교를 내렸다. 이에 따라 정안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곧 조선 제3대 태종(太宗)이다.
태종이 즉위한지 1개월 뒤인 12월에 갑자기 왕이 거처하던 개경 수창궁에 화재가 났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모여 앉아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한양 천도를 논의하였다.
태종은 즉위한지 1년 3개월이 지난 2월에 하륜과 감사형을 불러 문무 관리들에게 한양 환도에 가부를 물어 결정해서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두 사람은 여론 조사에 나서 문무 각 관원들과 의논하였으나 개경에 정도하자는 의견, 한양으로 환도하자는 의견, 무악에 정도하자는 의견 등 분분하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개경에 그대로 정도하는 의견이 다수였다.
태종은 하륜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어 직접 무악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태종 4년(1404) 9월 26일, 태종은 종친, 중신들과 풍수지리가 등을 이끌고 개경을 출발하였다.
8일 후인 태종 4년 10월 4일에 무악에 도착한 태종은 무악을 살피고 나서 곧 회의를 열었으나 개경, 한양으로 정해야 옳다는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이치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종묘에 나가 점(占)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태종의 이 같은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태종 4년(1404) 10월 6일 - 태종은 종묘 앞에 도착하자 종묘에 들어가서 어느 곳을 도읍지로 정할 것인가를 조상께 고하고, 점을 치기 전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종은 “길(吉)한 곳을 도읍지로 정해진 뒤에는 절대로 이의를 제기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라고 장중한 어조로 다짐을 하였다.
이어서 태종은 대신들과 같이 종묘에 들어가 배례를 한 뒤에 그의 사촌 이천우을 불러 동전 3개를 던져 점괘를 내 보도록 하니 「한양은 길(吉)이 2번, 흉(凶)이 1번, 무악과 개경은 ‘길이 2번, 흉이 2번 나왔다」
이리하여 태종이 즉위한 후 5년간이나 의견이 분분하였던 천도 문제는 매듭을 짓게 되었다.
태종은 이듬해 1405년 10월 8일에 개경을 출발하여 3일 후인 11일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그러니까 정종이 한양을 떠난 지 만 6년 7개월 만에 환도한 셈이다.
강의 : 박경룡(문학박사, 서울역사문화포럼 회장)
첫댓글 좋은글 감사요^(^
아차산에 얽힌 전설따라 삼천리를 70년대 후반쯤인가 아련하게 기억에 조금남아있네 평안한밤 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