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세 고등학교 입학을 하고 굽이진 언덕을 오르면서 삼년을 또 다닐 수는 있을까,
중학교 삼년도 무릎 통증으로 방학동안 인공관절 수술을 하고 오층 교실을 오르내리며, 불편한 다리
젊은 친구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감추어가며 어렵게 졸업을 했다.
고등학교 입학 하던 날 들어선 교정 안 늘어진 나뭇가지에, 새움이 트고, 꽃이 피고,
낙엽을 밟으며 오르던 언덕길에, 몇 번의 흰눈이 쌓이고 해가 바뀌더니 어느새 3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고, 아쉬움만 남기고 졸업반이 되었다.
지난 육 년을 생각해 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늦은 나이에 날마다 해야 하는 원격수업과, 시험 때만 되면 긴가 민가 가물가물
생각도 안 나는 벼락치기 공부를 해야 하고, 조금은 부담도 되고 힘들었지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너무나 반가웠다. 다시 힘을 내고 용기를 얻어 철원에서 세 번씩 차를 갈아타고
가야하는 학교를 먼 거리 마다않고다녔다.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지각도, 결석도, 조퇴도
한번 안 하고 6년을 즐겁게 다녔던 것 같다.
“자, 공부는 안하셔도 됩니다, 학교로 친구 만나러 오시면 됩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라고 특혜를 주신건지
처음에는 농담인줄알고 아ㅡ니 선생님이 어떻게 이런 말씀을, 내 귀를 의심 했지만
차츰 반갑기 그지없는 그 한마디가 익숙해지면서. 어느새 나는 공부는 뒷전이고
학교로 놀러가는 불량 학생이 되어 버렸다. 때로는 개구쟁이 막내 남동생 같기도 하고,
활짝 웃는 모습 속에서 엔도르핀을 팡팡 풍기는 우리 반 담임 수학선생님.
선생님은 수학공식을 설명하고 또 하면서 4문제라도 맞혀보라고 하지만 콩나물 시루에 물붓 듯
머리에 남는 건 없고, 3시간 거리인 집에는 가기도전에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공부는 안중에도 없고 재미있어 학교 가는 날만, 달력에 동그라미 그려놓고 목 빠지게 기다리는 할머니 학생이 되었다. 생활과학. 감상비평. 지구과학. 제일 어려운 수학. 영어. 아들은 외울 수 없으면 눈으로
익히라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었다. 암기도 안 되고 졸업해서 취직을 할 것도 아니면서 생활에 도움도 안 되는, 어려운 공부를 이 늦은 나이에 왜 하는지 중학교 때는 그럭저럭 상위권에 들었지만
고등학교 들어가니 공부는 점점 어려워졌다. 이왕에 생각이 나지 않아 답도 바르게 못 쓸 바엔 신경 쓰기 싫어
공부는 포기했나보다.
그후 손녀딸이 일년 재수하고 대학 다니는 아이에게 ‘너는 공부는 잘하고 있니’하며
농담이라도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해본일이 없다.
밥하고 김치하고 도토리묵 쑤는 시험만 본다면 100점 맞을 자신 있는데 하면서...
사실 나도 우리들의 부러움의 대상인 전교1등한 젊은 친구 1번 학생처럼, 잘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늘 마음뿐이었다. 선생님의 제자가 이 모양이라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콩나물시루에서 나물은
밤낮으로 자라듯 내안에 잠재하고 있는, 보여 줄 수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6년 동안 배운 지식과
나의 인격은 숨어서 잘 자라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고3이아니던가. 6년의 추억들이 곳곳에 쌓여있는 언덕위에 자그마한,
아담하고 조용한 우리모교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꿈속에서만 그리워하던 소원을 이루어 이제는 죽어도 원도 한도 없다.
그 옛날 옆집 친구와, 동네부자 이장님 댁 막내딸이 흰색 칼라에 후리아 치마를 입고 학교 가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남모르게 숨어서, 부러워 엄마 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동안 학교생활 속에서 소풍가서 보물찾기, 신발던지기도 하면서 상품타고 기뻐하며 보냈던 시간들, 삼삼오오 모여 김치하며 친구들과 사진 찍던 순간들.
체육관에서 하나라도 더 쳐보겠다고 반복해서 만져보지도 못했던 배드민턴과 탁구 치며 시험 보던 시간들,
축제 땐 잘해보겠다고 옆 친구 커닝하며 혼신을 다해 몸을 흔들며 춤추던 할머니 학생은,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웠다.
특별히 우리 반을 이끌고 솔선수범해서 봉사하며 헌신하던, 말괄량이
삐삐를 연상케 하는 귀여운 회장과, 없어서는 안 되는 부지런하고 재치 있고
분위기 메이커인 약방의 감초 같은 꼬마신랑 부회장의 열의는 나를 감동케 했다.
공부를 잘해 전교 일등으로 우리 반을 빛내준 연순이,
학교 대표로 천안 전국학예경연대회 글쓰기 가서 은상 타고 오던일. 건강이 허락지 않아 병원으로 학교로 힘들게 다니면서 졸업까지 함께 와주어 고맙고 감사한 늦깎이 친구들, 우리들에게 축제를 위해 라인 댄스 가르치며
수고 많았던 재주꾼인 예쁘고 멋진 친구도 있었다. 마음은 언제나 이효리인데 몸이 안 따라주는 이 고충을 젊은 친구들은 알고는 있는지, 젊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때는 나도 몰랐다.
6년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들의 못다했던 꿈과 소망을
이루게 해주었던 사랑하는 학교를 뒤로하고 우리들은 부족했지만
후배들에게 잘 지켜달라고 부탁하며 날로 발전하여 멋지고 훌륭한 인재들이 뒤를 이을 수 있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모교가 되기를 바라면서 정들었던 학교를 뒤로 하고 떠났다.
2025년 새해 아침이 밝았다.
올 일 년은 또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
일 년의 계획을 세워 본다.
자식에 짐이 되는 노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 안방에 누워 TV나 보며 세월 보내는
무능한 할머니로 살고 싶진 않다. 일할 수 있으면 숨 쉬며 살아 움직이는 시간까지
건강에도 좋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좋고 활동은 해야 한다.
남은 인생 보람 있게 후회 없도록 살아야지, 이제 내 인생도 살아온 날보다,
가야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주변정리도 하며 한해한해 보내는 마음이 아쉽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전화기에 문자가 왔다.
"신영숙님,합격을 축하 합니다,저희 학교,오신것을 환영 합니다"
새벽바람을 가르며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모임에 갔다.
2년의 계획이 4년이 될지도 모르는 대학 강당에 앉아 교수님의 주의사항과 학교의 규칙 알아두어야
할 말씀을 듣고 있다. 내가 지원한 사회복지과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계단을 오르면서
넒은 학교 전경을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그래 가는대까지 가 보는 거야, 건강이 허락만 해준다면’
마음속으로 몇 번을 되 뇌였다. 지금은 담임교수가 누구인지 두 시간 강의는 들었어도
기억을 다하진 못하지만, 정신 줄 바짝 붙들고 한번 두 번 가다보면 대학생활도 익숙해지겠지,
대학교는 어떤 곳이며 선생님이 아닌 교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대학에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함에 기대와 희망을 안고
나는 지금부터 마음이 부풀어 학교 입학하는 날자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 삼월부터 세무서 근무 하실 거예요”
노인일자리에서 직원이 전화를 했다.
작년말까지 집개공무원으로 3년 일하다가 사표를 내고
올해는 안 해본 일자리에 원서를 내고 기다리고 있다.
집개공무원으로 남은 인생 마감하고 싶진 않았다.
무언가 발전하는 삶을 살고 싶고 모르던 일에도 도전하고 싶었다.
평일에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에 3시간 일하고, 틈틈이 원격수업도 하며
주말에는 가방 메고 새벽바람 가르며 학교 가는 78세 할머니 대학생이 되었다.
작년에는 월30시간 근무했지만 올해부터는 월60시간 일할 생각이다.. 학비에 보탬도 되고
젊은 친구들과 식사도 함께하며 ‘돈은 왕언니가 낼게’ 하며 즐겁게 다니고 싶다.
학교 커피숍에서 친구들에게 차도 한잔씩 사주는 멋진 할머니 학생으로 남고싶다.
열심히 살아가는 25년 나의 삶을 그리니 지금부터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잊히지 않는 지나간 나의 아픈 기억도 희석시키며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할머니,
독서동아리 신청하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마감되기 전 신청하여 남은 인생 행복해지려고 바삐 집을 나서고 있다.
2025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