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도시이며, 최악의 살상 무기가 최초로 민간인에게 사용된 도시이다. 그 결과, ‘히로시마’라는 이름은 완전한 파괴와 엄청난 불행과 영원히 연결되었다. 그런 한편, 히로시마는 “기도는 원자폭탄보다 강하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1945년 8월 6일 02시 45분, B29 전투기가 태평양 티니안 섬에서 일본 본토를 향해 출격했다. 목적지는 약 30만 명의 주민이 사는 도시 히로시마였다. 그날 히로시마 시각으로 아침 8시 15분, 전투기 폭탄실의 문이 열렸고, 원자폭탄이 지상을 향하여 돌진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강력한 폭발, 엄청난 섬광, 뜨거운 열파가 발생했다.
그때까지 아무도 경험한 적 없고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일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도시 전체가 생지옥이 되었다. 온통 짙은 연기, 암흑, 불길, 비처럼 내리는 재, 선혈, 신음, 급속히 번져가는 공포가 뒤덮었다. 버섯 모양의 거대한 핵 구름이 원자폭탄 투하 직후 3분 만에 13km 상공까지 솟아올랐다.
그 미국 폭격기의 부조종사로 그 현장과 순간을 모두 목격한 로버트 루이스(Robert Lewis) 대위(1917-1983)는, “내가 백 년을 더 산다고 해도 이 몇 분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날 모든 것을 목격한 이 조종사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충격에 휩싸였다! 히로시마는 모든 시대에 경고가 되었다.
로버트 루이스 부조종사는 그날 자신이 행한 임무를 모두 기록하고는,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로 위장하여 고위 장교들의 눈을 피해 보관했다. 8쪽 분량의 그 기록들은 경매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묵주기도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하신 일이 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의 그 지점에서 겨우 여덟 블록 떨어진 노보리초에는 예수회의 성모 승천 성당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사제관이 있었다. 독일 예수회 신부 4명이 사는 사제관이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이 성당과 사제관과 사제들을 기적적으로 보호해주셨다!
그 당시 서른 살이던 후버트 쉬퍼(Hubert Schiffer) 신부(1915-1982)는 훗날 자주 그 일을 생생한 기억으로 말했다.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41회 국제성체대회에서 만 명의 신자들 앞에서도 말했다. 그날 쉬퍼 신부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에 있을 때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숨 한 번 쉴 짧은 순간에 갑자기 히로시마의 푸른 하늘에 말로 표현할 길 없이 날카롭고도 강렬한 눈부신 섬광이 비쳤다. 번쩍이는 밝은 빛이 나를 에워쌌다. 무언가를 볼 수도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모든 게 멈췄다. 나는 혼자였고, 이 빛의 바닷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완전히 공포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공간이 죽음 같은 적막 속에서 숨을 멈춘 것 같았다. 강력한 천둥소리를 동반한 어마어마한 폭발이 갑자기 대기를 가득 채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의자에서 들어 올려 공중에 내동댕이쳤다. 나를 이리저리 흔들어대고 두들기고 빙빙 돌렸다. 가을 돌풍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그러다 갑자기 빛이 사라지고 모든 게 아무것도 없는 암흑과 적막 속에 가라앉았다.
나는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완전한 어둠 속에서 내 몸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았다. 부서지고 쪼개진 나뭇조각들 밑에 엎드려 있는데, 무거운 무엇인가가 내 등을 누르고 있었고 얼굴에는 피가 흘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죽은 것인가?’라고 생각하다가 내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끔찍한 재앙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는 무시무시한 확신이 내 안에서 생겨났다!
그렇게 나와 세 명의 동료들은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꼬박 하루를 화염과 연기의 지옥 속에서 보냈다.”
8월 6일, 시계바늘이 8시 15분에서 막 16분을 가리키는 순간 히로시마 상공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당시 일본의 여덟 번째 도시 히로시마는 "지구 역사상 전례가 없는 파괴의 비"를 맞고 완전히 무너졌다. 그나마 생존해 있던 이들은 비에 섞여 떨어지는 방사능 낙진을 맞고 마시며 방사능에 더 노출되었다. 구토, 설사, 피부병, 백혈병, 각종 암에 시달리며 서서히 죽음에 이르렀고, 피폭의 끔찍한 휴유증은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졌다.
그로부터 9일이 지난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이 네 명의 예수회 신부들, 라살레(Lasalle) 신부, 클라인소레(Kleinsore) 신부, 시스릭(Cieslik) 신부, 그리고 쉬퍼(Schiffer) 신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폭발과 동시에 죽음에 이른 7만에서 9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 무리에 어떻게 포함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네 명의 신부들은 방사능에도 노출되지 않았고, 어마어마한 압력파와 열파에도 청력 손상이나 화상도 입지 않았다. 그들의 사제관 역시 원자폭탄이 폭발한 지점에서 1.5km도 안 되는 곳에 있었지만, 무사히 건재했다. 그보다 더 먼 반경 이내의 거의 모든 것이 불타거나 완전히 파괴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쉬퍼 신부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 네 사제는 그 후 30년 동안 200회에 걸쳐 의사들과 전문가들의 검사를 받았다. 1976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성체대회 때까지 4명 모두 건강하게 아무런 후유증 없이 여전히 살아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쉬퍼 신부는, 동료 세 명과 마찬가지로, 폭탄 투하부터 37년이 지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닌 확신이 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보호해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파티마 성모님의 메시지대로 살고자 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고, 그래서 살아남았다고 나는 믿는다."
히로시마의 예수회 신부들은 원자 폭탄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1마일도 안 떨어진 곳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방사선 중독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파티마 메시지를 실천하고 매일 묵주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 Triumph des Herzens
마음의 승리 No. 184>에서
이선영 옮김
(마리아지 2024년 9•10월호 통권 24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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