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21. 05. 29(토)
▲정난종 묘역
▲정난종의 6세손 정진원과 부인 전주이씨 묘비명 ...
전면에 ‘朝鮮國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蓬海君鄭公之墓 贈貞夫人全州李氏之墓
(조선국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봉해군정공지묘 증정부인전주이씨지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난종의 6세손 정진원과 부인 완산이씨 묘.
▲정난종 일가 묘역 ... 앞쪽이 정난종과 부인 완산이씨 묘.
▲정난종 묘를 지키는 좌측 문인석과 무인석
▲정난종 묘와 묘비
묘비(墓碑)는 135×44×20㎝로 종형이수(鐘型螭首)의 형태를 이루며, ‘有明朝鮮國純誠佐理功臣
資憲 大夫議政府右參贊兼同知經筵 事東萊君贈諡翼惠鄭公之墓(유명조선국순성좌리공신자헌 대
부의정부우참찬겸동지경연 사동래군증시익혜정공지묘)’의 명문(銘文) ...
▲정난종 묘와 부인 완산이씨 묘 사이의 장명등...장명등은 210㎝ 높이로 대석 위에 옥개석(屋蓋石)
을 얹었다.
▲정난종의 부인 완산이씨의 묘와 묘비.
▲정난종 묘를 지키는 우측 문인석과 무인석 ... 문인석은 높이가 각각 210㎝와 146㎝이다.
▲정난종의 장남 정광보(창원공)墓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정난종의 장남 정광보(창원공)와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대호군 이삼격(李三格)의 딸] 묘.
▲정난종의 장남 정광보(창원공) 묘지 동자석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
▲정난종의 장남 정광보(창원공)와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 대호군 이삼격(李三格)의 딸] 묘표명....
‘通政大夫行昌原都護府使金海鎭管兵馬同僉節制使鄭公之墓 淑夫人全義李氏之墓(통정대부
행창원도호부사김해진관병마동첨절제사정공지묘 숙부인전의이씨지묘)’
▲정난종의 장남 정광보(창원공)墓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정난종의 장남 정광보(창원공) 묘에서 바라본 갈치저수지.
▲정난종의 차남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묘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정난종의 차남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묘와 묘비 ...
묘비 전면에는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
象監事世子師贈諡文翼鄭公之墓(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
예문관춘추관상감사세자사증시문익정공지묘)’ 가 새겨져 있다.
▲정난종의 차남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 부인 송씨 묘지와 묘비 그리고 장명등.
▲정난종의 차남 정광필(문익공)부인 송씨墓와 묘비 ... ‘貞敬夫人恩津宋氏之墓(정경부인
은진송씨지묘)’가 새겨져 있다.
▲정난종의 차남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묘 우측 망주석과 문인석.
▲정난종의 차남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묘에서 본 마을과 갈치 저수지.
▲정난종의 차남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묘 우측 위에 있는 정유청 묘.
▲정유청 묘를 지키는 좌측 문인석 ... 뒤로 정광필 묘지 석물들이 보이고.
▲정유청과 부인 전주이씨 묘비.
▲정유청 신도비
▲정유성 묘 문인석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 4남 정복겸과 부인 완산이씨묘.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4남 정복겸과 부인 완산이씨묘.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4남 정복겸과 부인 완산이씨 묘비.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4남 정복겸 묘 좌측 동자상.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4남 정복겸묘 우측 동자상.
▲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4남 정복겸묘 우측 동자상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3남 정익겸의 아들 정유신과 파평윤씨의 묘와 묘비 문인
석 망주석.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 3남 정익겸의 아들 정유신 묘를 지키는 우측 망주석과
문인석.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3남 정익겸의 아들 정유신과 파평윤씨의 묘비.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 3남 정익겸의 아들 정유신과 파평윤씨의묘비.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 3남 정익겸의 아들 정유신과 파평윤씨의 묘를 지키
는 우측 망주석과 문인석.
▲정휘겸의 묘를 지키는 좌측 문인석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 2남 정휘겸의 묘.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 2남 정휘겸의 묘비.
▲정광필鄭光弼(문익공文翼公)의 2남 정휘겸의 묘비.
▲안동권씨 묘비명.
▲정휘겸의 묘를 지키는 우측 문인석.
▲정난종 종택
▲갈치저수지 / ⓒ푸른하늘 BlueSky
▲동래정씨 동래군파 묘역 최상단 산신재 지내는 상석 ...
④ 정난종선생묘 및 신도비 외 묘역일원(鄭蘭宗先生墓 및 神道碑 外 墓域一圓) <참고: 위키백과>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허백당 정난종(1433∼1489) 선생과 그의 두 아들 광보(1457∼1524), 광필(1462∼
1538)의 묘지이다. 1989년 6월 1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동래정씨종친회에서 소유, 관리한다. 정난종을 비롯하여 그의 장남 정광보, 차남 정광필과 정광필의 4남 정복겸, 6세 주손 정진원의 묘 등이 신도비와 혼유석, 석등, 동자석, 문인석과 함께 규례대로 갖추어져 있어 조선 전기의 분묘사 및 석비, 금석문 등 고고미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정난종(鄭蘭宗)은 세조 2년(1456)에 과거에 급제한 후 검열·이조좌랑·예조참판 등을 지냈고, 봉교로 있을 때 정자청과 함께 서얼 출신의 과거응시를 반대하였으며, 1467년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고 동래부원군에 봉해졌다.
1469년 《세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예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83년 성종 때 주문 부사로 명(明)에 다녀온 후, 우참찬을 거쳐 이조·공조·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는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글씨로 〈흥천사 종명〉,〈윤자운 신도비〉 등이 전한다. 묘역은 수리산(견불산)의 능선 중앙에 정란종 선생의 묘가 있고, 그 위로 장남인 정광보, 차남인 정광필의 묘가 차례로 있다. 모두 부인과의 합장묘이고, 봉분이 2개씩인 쌍분 형태이다.
정란종의 묘는 부인 완산 이씨와의 합장묘이며, 묘 앞에는 성종 20년(1489)에 세운 선생의 묘비와 성종 17년(1487)에 세운 부인의 묘비가 있다. 묘역 앞에는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床石)이 있고, 그 앞에 불을 밝히기 위해 만든 돌로 된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묘역 좌우에 크기가 다른 문인석 2쌍이 있고, 묘역 아래에는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신도비가 있는데, 남곤이 글을 지어 중종 20년(1525)에 세운 것이다.
정광보의 묘 역시 부인 전의 이씨와의 합장묘이며, 묘 앞에 묘비,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로는 동자상이 1쌍 있다. 상석 앞에는 장명등이 있고, 장명등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정광필의 묘도 부인 은율 송씨와의 합장묘이며,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이 있고 상석 앞에 장명등이 있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1쌍이 있으며, 묘역 좌측 아래에는 소세양이 글을 짓고 이황이 글씨를 써서 명종 17년(1562)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참고 : 위키백과)
익혜공(翼惠公) 정난종(鄭蘭宗)선생은 세종15년(1433)에 태어나 성종 20년(1489년) 57세에 이 세상을 뜬 조선전기의 중신입니다.
선생은 세조 9년(1463)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갑니다. 당대의 명필로 인정받은 선생은 세조 11년(1465)금속활자 「을유자(乙酉字)」를 만들어 『원각경』을 인쇄합니다. 창덕궁 현액 「敦化門」과 낙산종명, 대원각사비에서 선생의 글씨를 볼 수 있습니다.
세조 12년(1466) 문과 중시에 급제하고, 춘추관 수찬관이 되어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한 선생은 훗날 『세조실록』 과 『예종실록』 편찬에도 동참합니다. 세조 13년(1467) 황해도관찰사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 자리에 오릅니다.
이조, 형조와 공조판서를 두루 역임한 선생은 평안도 절도사에 봉직 중에 온성진 40리 장성을 축성했다고 동래정씨동래부원군파종친회에서 발간한 「정난종선생유적지」 안내전단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사후 중종 대에 이르러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동래부원군에 봉해집니다.
창원공(昌原公) 정광보(鄭光輔, 1457~1524)는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지(運之)이다.
1457년(세조 3) 정난종(鄭蘭宗)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여러 고을의 군수를 거쳐 당상관에 이른 후 정치에 회의를 느껴 [연산군에게 직간을 하다가 길주(吉州)에 유배되었으나 중종 때 다시 기용되어 창원부사에 임명되었다.] 경남 의령의 도굴산에 시완당을 짓고 낙향해 68세(1524년 중종 18)에 사망하였고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자손중에 둘째아들 사룡(士龍)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현손 기원(期遠)은 정유재란 때 선무공신으로 일하던 중 순직합니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1538)는 선생의 차남으로 중종 때 영의정에 두 번 오른 조선전기의 명신입니다.
성종 23년(1492) 식년문과에 급제해 출사한 정광필은 사화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는 왕에게 극간하다 아산으로 유배되었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는 조광조를 구하려다 영의정에서 영중추부사로 좌천됩니다.
중종 5년(1510) 전라도 순찰사로 일하면서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함경도관찰사였을 때는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한 공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를 맞아 영중추부사로 좌천됩니다. 정광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불천위(不遷位)로 종묘 중종묘정(中宗廟廷)에 모셔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저서로 『정문익공실기(鄭文翼公實記)』를 남긴 정광필은 영의정 3인, 좌의정 7인, 우의정 2인 등 12인의 정승들을 후손으로 남겼습니다.
안산공(安山公) 정광좌(鄭光佐, 1466~1520)는 선생의 삼남으로 연산군에서 중종에 걸쳐 김천도찰방, 흥덕현감, 한성부판관 등을 역임합니다. 안산군수를 마지막으로 별세한 정광좌는 묘지가 이곳 정난종선생묘역이 아니고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다고 합니다.
한글학자 정인승(鄭寅承, 1897~1986)이 정광좌의 후손이라는 것은 「정난종선생유적지」 안내전단을 보고 알았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던 중 작고하신 이이화선생의 『한국사 이야기』에서 정난종선생과 차남 광필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몇 구절을 읽었습니다.
세조 4년(1458) 서얼출신의 어머니를 둔 안유와 안혜 형제가 과거에 응시합니다. 정난종(鄭蘭宗)은 이들의 처지가 불쌍하다며 과거응시를 허락해달라고 건의하고,(봉교로 있을 때 정자청과 함께 서얼 출신의 과거응시를 반대하였으며) 세조는 “하늘이 백성을 낼 때 본디 귀천이 없다”며 쉽게 허락합니다.
과거에 응시한 두 형제는 조준의 서녀가 낳은 자식들입니다. 적서를 차별하지 않고 대하는 정난종 선생의 휴머니즘은 세조의 응낙으로 서얼의 과거응시를 결실합니다. 향약운동을 적극 지원한 조광조에게 처분을 내리기 직전 중종은 향약에 든 사람들이 자의로 형벌을 써서 법사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그 폐단을 지적합니다.
이에 정광필(鄭光弼)은 “초상에 서로 돕는 것으로 서울[한양] 상공인들의 향약활동을 제한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정광필이 기묘사화를 맞아 처벌을 기다리는 조광조 등 9명을 적극 변호해 중종께 이들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결말을 맺자고 주청합니다.
중종도 이들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정광필의 말을 따라 8명을 귀향 보내고 유배 중인 조광조에게는 사약을 내립니다. 조광조와 김식 등이 적극 지원한 향약활동을 제한해야한다고 나선 정광필이 기묘사화를 맞아 조광조를 적극 변호한 것 또한 정광필에 잠재한 휴머니즘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먼 곳에의 동경-아직도 가보지 못한 먼곳을 동경하는 마음이 끊임없는 여행의 원동력입니다. 118. 군포명소 탐방기5(정난종선생 묘역/김만기선생 묘역)
▲정재륜과 숙정공주 부부 묘지
▲정재륜.숙정공주 묘역 좌측 문인상
▲정재륜. 숙정공주 묘역 좌측 망주석
▲정재륜.숙정공주 묘역 좌측 동자상 .
▲정재륜. 숙정공주 묘
▲정재륜. 숙정공주 묘비
▲정재륜. 숙정공주 묘비.
▲정재륜. 숙정공주 묘역 우측 동자상
▲정재륜.숙정공주 묘역 우측 문인상
▲장명등
▲장명등의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모습
▲정재륜과 숙정공주의 외아들 정효선 묘.
▲정재륜과 숙정공주의 외아들 정효선 묘.
▲정재륜과 숙정공주의 외아들 정효선 묘비 .
▲정효선과 여주이씨 부부 묘.
▲정효선 묘의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⑤ 정재륜.숙정공주 묘.
곡장이 둘러져 있었으며 장명등과 망부석 망주석 동자석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었다. 비수에는 화려한 용무늬를 장식하였다. 숙정공주(1645~1668)는 효종과 장유의 딸 인선왕후 장씨 사이에 태어나 12세인 효종 4년(1656년)에 좌의정을 지낸 정치화에 입양된 영의정을 지낸 동래 정씨 정태화의 아들 정재륜(1648~1723)과 혼인 한다.
정재륜은 동평위가 되었다. 정재륜은 부인인 숙정공주가 24세에 죽고 숙종 7년(1681년) 외아들인 효선도 요절하자 정재륜은 재취할 것을 상소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으나 대간의 반대로 띁을 이루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공주의 남편은 재혼할 수 없다는 법까지 만들어 진다. 정재륜은 주위사람들이 모두 왕의 사위인지 모를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 서인(西人) 가문의 정재륜 집안은 김만기와 같은 당색이었다. 친부 정태화는 영의정에, 양부 정치화는 좌의정에 오를 정도로 인조~효종 대까지 상당히 잘나가던 집안이었다. 정태화의 5남이었던 정치화의 양자가 되어 9살에 부마가 되었다. 그때 숙정공주는 세 살 많은 12살이었다.
이때 양부 정치화는 도승지가 되어 효종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숙종의 고모부였던 정재륜은 정치적 밀사 역할을 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정재륜은 아내가 24세로 죽고, 그후 10년 새에 친부, 양부, 처남(현종)도 줄줄이 죽게 된다.
그리고 1720년 처조카 숙종도 60세로 승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정재륜의 슬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친딸과 양자 정효선 역시도 차례로 죽는다. 그리하여 그는 가문을 잊기 위해 친형의 아들 정재대를 양손자로 들인다. 그해 그는 76세로 세상을 뜨게 된다.
정재륜은 <공사견문록>이라는 책을 남겨 효종~경종 년간에 왕실을 출입하며 듣고 본 것을 기록했다.
한편 묘표를 보자니 웃음이 왔다. 보통 묘표는 죽은 이의 본관과 이력이 나와 있다.
남자가 오른쪽에, 아내는 왼쪽에 이름도 없이 본관과 성만 쓰여 있다. 그런데 공주 묘표는 달랐다.
여자인 아내가 오른쪽에 남편 정재륜은 왼쪽에 이름이 위치했다. 묘자리까지 그런지는 알지 못하겠다.
또한 아래에 있는 양자 정효선 묘표를 보면 좋은 관직을 다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살아 생전에 그 관직을 주지는 않았지만 왕실 가문이었으니 죽어서 인심을 쓴 모양이었다. 묘 인근에는 당숲을 조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는 수령 100~200년 가량의 굴참나무·갈참나무·너도밤나무·서어나무 등 고목 60여 그루가 두 줄로 서 있다. 나름 군포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으로 인기가 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이 고목들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성시하며 해마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출처] 동기답사3 - 숙정공주와 정재륜 묘|작성자 크눌프
- 조선 효종의 왕녀 숙정공주淑靜公主(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적5녀.)
참조: 위키백과. 조선왕조실록
출생 1646년(인조 23년) 11월 7일 ~ 사망 1668년(현종 9년) 5월 5일(향년 21세)
1646년(인조 22) 당시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봉림대군이 다음 동궁으로 결정되었으나, 책봉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공주는 봉림대군의 사저인 어의동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산실까지 쫓아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식이 한탄했다.
[세자빈 장씨(張氏)가 사저(私邸)에서 분만하였다. 이조판서 이식이 많은 사람이 모인 데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국가가 동궁의 요속(僚屬)을 두는 것은 장차 세자를 시강(侍講)하여 예(禮)로써 세자를 돕고 인도하기 위해서인데 첩부(妾婦)의 도리를 먼저 행하였으니, 또한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듣는 이들이 그 말을 바르게 여겼다.]
1652년(효종 3) 8세가 되자 숙정(淑靜)의 작호를 받고, 1656년(효종 7) 12세에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이자, 좌의정을 역임한 정치화의 양자가 된 정재륜[본관은 동래, 자는 수원(秀遠), 호는 죽헌(竹軒), 시호는 익효(翼孝)이다.]과 가례를 올렸다.(부마간택시에 정재륜, 원몽린(초명 원몽치), 변광보가 경합했는데 정재륜이 최종 간택되었다.
이후 원몽린은 숙정공주의 동생인 숙경공주의 남편이 되었고, 변광보는 소현세자의 3녀 경순군주의 남편이 되었다.) 정재륜은 고조부가 정유길인데, 정유길은 인선왕후의 외조부인 김상용의 외조부이다.
즉, 정재륜과 인선왕후는 8촌간이 된다. 언니 숙안공주와 마찬가지로 안하무인격에 남의 토지와 세금 등을 빼앗는 등 여러 악행을 저질렀다.(현종실록 5권, 현종 3년 7월 13일 갑신 2번째기사 1662년 청 강희(康熙) 1년 무사의 양성책, 직전제의 부활, 궁가의 민전 탈취 등에 대해 의논하다.
- 이에 앞서 숙정(淑靜)·숙안(淑安) 두 공주가 계하(啓下)된 공사(公事)라는 핑계를 대고 신천(信川)·재령(載寧)·평산(平山) 등지의 민전(民田)을 불법으로 탈취했는데, 평산 부사 윤겸(尹㻩)이 공갈 협박하는 말에 겁먹은 나머지 아첨할 목적으로 꾀를 내어 허다한 민전을 모조리 궁가의 소속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이에 본도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분개함을 금하지 못해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자 호조에 계하(啓下)하였다. 호조참판 서원리(徐元履)와 참의 홍처후(洪處厚)가 매우 원통한 민사(民事)라고 회계(回啓)하면서 이정두(李廷枓)와 임전(林荃)이 서로 짜고 악행을 저지르며 문기(文記)를 위조한 정상을 낱낱이 진달드리고, 또 허다한 화전(火田)을 일구어 경작하여 먹고 산 지 30년에 이른 것도 있으니 주인없는 진전(陳田)으로 논할 수는 없다는 것과 감영(監營) 소속의 화전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역시 중대한 관계가 있는 만큼 둘 다 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진달드렸기 때문에, 상이 진노하여 이렇게 미안한 분부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고, 사대부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으나, 그녀는 아버지 효종과 오빠 현종의 보호를 믿고 계속 비리를 저질렀다. 1668년(현종 9)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현종은 여동생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묘는 본래 경기도 광주시에 마련되었으나, 현재는 군포시에 있다. 3남 2녀를 낳았으나 1남[정효선(鄭孝先, 1663년~1680년)] 1녀[김석주의 아들 김도연(金道淵, 1664년~1689년)과 혼인. 김석주의 아버지는 김좌명으로 대동법을 주창한 김육의 장남이다.
김육의 차남이자 김좌명의 동생이 김우명으로 그의 딸이 현종 왕비 명성왕후 김씨이다.
김석주와 명성왕후 김씨와는 사촌이며 김도연은 5촌 조카이다. 숙정옹주와 명성왕후는 왕실로는 시누가 되며 시가로는 사돈이 되는 셈이다.]만이 살아남았다.
[편집]
부마 동평위 정재륜은 열성지장통기를 증보, 간행하였고, 《공사견문록》 , 《한거만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공사견문록 덕분에 조선 왕실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알려졌다. 정재륜은 아내인 숙정공주와 외아들 정효선이 일찍 죽자 숙종에게 재혼 요청[정재륜은 작은아버지 정치화가 아들이 없어서 양자로 들어갔는데, 정작 자신마저도 후사가 끊어졌으니 매우 난처한 입장이었다.]을 했지만 도리어 부마 재혼 금지법이 더 강화되었다.
결국 종손(從孫)[핏줄로는 친형이자 법적으로는 사촌형인 정재대의 손자]인 정석오(鄭錫五)를 양자로 들여 죽은 아들의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정석오는 이후 영조 때 좌의정에 올랐다.
ⓒ태백산 jumok /20210423 경기군포 김만기묘/정난종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