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갈명(墓碣銘)
가선대부 성균관 대사성 월오 이공 묘갈명 병서
(嘉善大夫成均館大司成月塢李公墓碣銘 並序)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철균(鐵均)이며 자는 사형(士衡)이고 호는 월오(月塢)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벽진 장군(碧珍將軍) 휘 총언(忩言)으로부터 산화(山花) 선생 휘 견간(堅幹)을 지나서 도원수(都元帥) 휘 희경(希慶)에 이르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휘가 건지(建之)로 판서(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조부는 휘가 후(厚)로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아버지는 휘 말정(末丁)으로 서융(西戎)을 정벌한 공훈이 있었다.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현감을 지낸 치당(致唐)의 따님이다.
경태(景泰) 경오년(1450, 문종1)에 공이 태어나 일찍부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유학하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도의(道義)의 교제를 맺었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 세조 11)에 진사가 되었고, 병진년(1496, 연산군 2)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나 뭇 간사한 사람들의 모함을 받자 성산(星山)으로 은둔하였다. 이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을 칭찬하였다.
중종 갑오년(1534, 중종 29)에 돌아가시니, 칠곡(漆谷) 지리현(知理峴) 갑좌(甲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임금께서 특별히 관곽(棺槨)을 하사하였으며, 청백리에 기록되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성산 여씨(星山呂氏)로 사직(司直) 벼슬을 지낸 간(諫)의 따님이니, 묘는 쌍분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근(瑾)은 충순위(忠順衛)를 역임하였고 차남 충남(冲南)은 현감을 역임하였다. 근은 찰방(察訪) 벼슬을 지낸 사익(師益)을 낳았고 충남은 사인(師仁)을 낳았다. 증손자와 현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가정에서의 아름다운 전범과 조정에서의 업적은 모두 옛날 비석에 실려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병화에 비석이 갈라져 훼손되었으니, 애석하도다. 후손 병규(炳圭)와 승수(承洙)가 다시 비석을 세우기로 도모하여 공의 업적 중 큰 줄거리를 뽑아 나에게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산화의 먼 후손이며 / 山花遠胄
점필재의 고제이네 / 畢齋高弟
일찍부터 스스로 입신양명하였고 / 早自立揚
재앙이 올 기미를 밝게 알았네 / 炳幾隮螮
세월이 오래되어 옛 비석이 무너지니 / 歲遠石踣
상고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 莫曰無諦
임금의 기림과 역사책의 기록은 / 衮褒史錄
백세토록 질정할 수 있다네 / 可質百世
<끝>
[註解]
[주01] 서융(西戎)을 정벌한 공훈 : 이말정이 1467년(세조13)에 서융(西戎)을 정벌하는 공을 세워 벼슬의 등급을 뛰어넘어 절충 장군에
임명되었다.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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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嘉善大夫成均館大司成月塢李公墓碣銘 並序
公姓李氏諱鐵均。字士衡。月塢號。碧珍貫。自碧珍將軍諱忩言。歷山花先生諱堅幹。至都元帥諱希慶。寔公高祖。曾祖。諱建之 。判書。祖諱厚。縣監。考諱末丁。有征西勳。妣義城金氏。縣監致唐女。景泰庚午。公生。早遊畢齋門。與寒暄爲道義交。成化乙酉進士。丙辰。文科。官至大司成。見羣奸交搆。遯于星山。及戊午禍作。人稱其先見焉。中廟甲午。考終。葬㓒谷知理峴甲坐原。上特賜棺槨。錄淸白。配貞夫人星山呂氏。司直諫女。墓雙封。二男瑾忠順衛。冲南縣監。瑾生師益察訪。冲南生師仁。曾玄以下不錄。於乎。公居家▼(瑴/心)範。立朝事蹟。備載舊碣。而不幸泐毁兵燹。惜哉。後孫炳圭承洙。爲謀改竪。撮其大槩。屬福樞銘。銘曰。
山花遠胄。畢齋高弟。早自立揚。炳幾隮螮。歲遠石踣。莫曰無諦。衮褒史錄。可質百世。<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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