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사신 것 같이
2023.10.15.(성령강림후제20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6/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1서 2:1-6)
들어가는 말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한 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창조론을 믿습니다. 그럼 미생물에서 시작한 생명이 유인원을 거쳐 인간으로 진화되었다는 진화론과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어냈다는 창조론 중 어느 것을 믿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이해하며 창조론을 믿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나요, 아니면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믿나요? 저와 여러분 모두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도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태양이 지구를 도는 모습은 어제도 오늘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과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믿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두 가지 즉 말씀과 지식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을 통해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은 각 시대의 지식에 근거해 이해한 ‘말씀’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지식에 근거해서 창조를 이해했습니다. 오늘날 창조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식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조는 부정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계를 창조한 적이 없으니까요. 진화론은 현대 지식의 결론이며, 138억 년 전에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빅뱅이론도 시공간이란 존재의 출현에 대한 이해의 현대적 결론입니다.
지식은 믿음에 이르는 초석
말씀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지식 위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갖는 두려움은 현대 과학을 인정할 때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과학적 지식을 최대한 부정하는데, 결과적으로 이들은 성경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범하는 오류는 지식이 곧 믿음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들과 닮아 있습니다. 요한이 서신을 쓴 당시에는 영지주의자들과의 논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요한은 영지주의에 맞서 기독교를 명쾌하게 변증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겐 지식이 곧 믿음이었습니다. 당연히 성경의 말씀과 예수님의 삶조차도 참된 지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볼 때 모순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의 이해를 돕는 가현적인 수단, 즉 속임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들은 지식이 말씀보다 중요하며 지식이 곧 구원의 수단이며 구원의 완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과학 자체를 믿음의 대상으로 하는 종교가 있다면 이는 현대 영지주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점으로 삼은 과거의 지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스스로를 과거에 머물게 합니다. 이로써 미래의 완성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과거의 사람들이나 우리나 똑같이 평편한 지구 위에서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과거 사람들은 본 것을 지식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 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을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을 위해 과거와 같은 지식을 고집한다면, 기독교는 현대사회의 이단아가 되면서 하나님의 자리를 좁힐 뿐입니다.
지식에 기초한 믿음으로 이해되는 말씀
과거의 사람들이 당시의 지식을 가지고 믿음의 대상을 설명했듯이, 현대인은 현대적 지식을 기반으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오늘날 종교가 사회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적 지식 위에서 진리의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긴 해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곧 구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그것이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영지주의며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현대적 지식에 근거해 이해한 말씀의 실천에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실천’이란 지금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현재적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첫 번째 서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1)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가 너무나 대단한 것처럼 보였기에, 구원이 이 지식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죄에 갇힌 육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기에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요한은 신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죄를 짓지 않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2) 그런데 요한은 이 화목제물이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향해 열어놓습니다.
믿음의 완성은 말씀의 실천
그분은 온 세상 사람들의 화목제물이십니다. 여기서 구원은 영지주의자들을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구원의 핵심이 지식이 아닌 실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3) 여기서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영지주의자들의 말로 반박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라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참된 앎이라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고 있다면 불행한 일이며 오히려 죄를 짓는 일입니다. 지식은 완전이라는 시점에서 보면 언제나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불완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일 뿐이며, 유한한 인간이 이러한 죄를 중보자 없이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4)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즉 계명을 모를 수 없는데, 그 계명을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 거짓말쟁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알면서도 그 속성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5)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앎이 진정한 앎이며,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진리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6)
나가는 말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그의 삶을 본받아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사랑하기 위해 현재적 지식에 근거해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선민주의 지식에 근거한다면 우린 믿지 않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폭력을 부추길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과 성별과 모든 요소들을 뛰어넘어 인류가 하나라는 현대적 이해에 동의해야 합니다.
보편적 인류에 대한 이해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오늘날 우주론에 근거해야만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우주론으로는 지구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도 자신만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우리가 이룬 결과물들은 지금 살아가는 현재를 이해한 지식에 바탕을 둔 말씀의 실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여전히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앎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를 믿는데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