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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좋은 내고장 예천(醴泉)에서 정자와 사찰을 둘러보고
예천 읍내를 중심으로 외곽지역으로 답사하는 권역을 택해서 둘러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예천읍내로 들어가는 길목(남본리)에 논 밭에는 좋은 탑 하나가 서 있다. 보물 제53호인 개심사지오층석탑이다. 여러 번 이 곳을 찾은 적이 있으나 늘 변함 없이 묵묵히 이 곳을 지키고 서 있다.
이 탑은 고려 전기에 창건된 개심사에 있던 탑이었으나,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현재는 주변이 다 논으로 변해있다.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4면마다 둥근 테두리선인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머리는 짐승, 몸은 사람인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차례로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4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나눈 다음 그 안에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모습인 팔부중 입상을 새겨 놓았다. 이는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기단의 맨 윗돌은 그 윗면에 몸돌을 받치기 위한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놓았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한 특징이라 하겠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에는 문고리 모양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 칼을 꽉 거머쥔 금강역사상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모두 4단씩의 받침을 깎아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탑 전체에 경쾌함을 실어 준다. 상층기단 갑석밑에 새겨진 '통화(統和) 27(二十七) 경술년(庚戌年)'이라는 석탑기에 의하여 이 탑이 고려 현종(顯宗) 원년(1010)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매우 온화하여 좋은 비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탑이다.
이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예천읍 동본리에는 보물 제426호 예천 동본동삼층석탑이 있는데 한천(漢川) 북쪽의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27호) 앞에 있는 탑이다.
기단부는 윗층 기단 아래가 파묻혀 있어서, 원래 기단이 2층인지 1층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현재는 윗면에 경사진 돌이 있고, 기단의 가운데 돌을 그 위로 얹고 있다.
가운데돌은 4장의 널돌로 짰는데 각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그 사이에 사천왕상을 조각해 놓았다. 현재 마멸이 심해서 일부 부분만 잘 남아 있고 나머지는 확실히 알아 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짜고, 각 층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ㆍ2층이 5단, 3층이 4단인데 1층의 몸돌이 2ㆍ3층보다 두드러지게 큰 점이 특이하다. 상륜부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한 돌로 되어 남아있지만, 후대에 보충한 듯 하다. 3. 12m로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몸돌의 줄어드는 비율과 지붕돌의 크기 등에 짜임새가 있는 탑이다. 기단에 새겨진 사천왕상의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427호 예천동본동석조여래입상은 역시 동본동 3층석탑과 함께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으로 하나의 돌에 새겨진 전체 높이 3.46m의 거대한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풍만한 얼굴에는 길다란 눈, 짧은 코, 적당한 입이 적절하게 표현되어 부드러운 곡선의 얼굴과 함께 자비롭고 온화한 미소를 실감나게 나타내고 있다. 큰 얼굴에 비하여 작아진 상체는 굵고 짧은 목과 좁은 어깨, 짧은 팔 등이 평판적인 가슴과 함께 움츠린 듯하여 다소 위축된 느낌을 준다.
오른팔은 옆으로 내려 몸에 붙인 채 옷자락을 살짝 잡고 있으며, 왼손은 앞으로 들어 새끼 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을 안으로 굽히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허벅지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고 양 다리에서는 타원형의 주름을 만들면서 흐른다. 아쉬운 점은 검게 촛불에 거을린 흔적이 남아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며 후대에도 계속 이러한 일이 생길까 걱정도 되었다. 밑에는 큰 연꽃대좌가 있는데 조각 수법이 우수하다. 양 다리에서 있는 긴 타원형의 옷주름, 부피감 없는 둔중한 신체, 그러면서도 아직 경직화되지는 않은 얼굴 모습 등을 고려해 볼 때 통일신라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본동 석불입상에서 얼마 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동악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6호)이 있다. 도로변에 동악사라는 태고종 사찰이 있다.
이 곳 동악사(東岳寺) 보광명전에 주존불로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나 어디서 옮겨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얼굴은 둥근 편이며 눈썹 사이에는 백호(白毫)가 있다.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코는 석고로 보완하였다. 귀는 길지만 어깨에는 닿지 않으며, 머리에 바짝 붙혀 만들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왼쪽 어깨에만 걸친 옷에는 옷주름이 나타나 있다. 오른손이 왼손 검지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을 취하고 있다. 하체는 넓게 표현되어 안정감이 있으나 어깨가 좁아 당당한 감이 없다. 불상 전체에 흰 가루(백분)가 두텁게 칠해져 있어 세부 묘사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보광명전 앞에는 일부 옛 석재들이 남아 있으며 탑신석도 있어 주목된다.
동악사는 신라 문무왕 1년(671)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그 이후의 기록은 없으며 사악 사찰 중 서악사와 함께 남아 있는 곳이다.
다음으로 가는 표지판은 물론 가는 길도 멀고 먼 청룡사를 찾았다. 현재 직지사 말사로 작은 암자인 듯 하나 이곳에는 보물 제424호 청룡사석조여래좌상과 보물 제425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는 곳이다.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9세기 불상으로 청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25호)과 함께 나란히 법당 안에 모셔져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크고 나지막한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눈ㆍ코ㆍ입이 섬세하고 작게 새겨져 있으며 짧은 귀와 뚜렷한 목주름 또한 인상적이다. 어깨는 좁은 편이며 손과 발이 섬약하고 체구 또한 몹시 약화되어 긴장감이 빠진 듯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평행한 주름이 나타나고 가슴에는 띠매듭이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통일신라 불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광배(光背)는 끝이 뾰족한 타원형을 하고 있다. 두광과 신광은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는데, 두광중심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신광에는 보상화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신광의 주변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8각형인데 아래 부분에는 엎어진 모양의 연꽃무늬가, 윗부분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연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당당하면서도 움츠러든 것 같은 조각수법, 긴장감이 줄어든 부드러운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형식 등에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보물 제425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크고 나지막한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4각형에 가까워 넓고 풍만하지만 볼륨이 별로 없이 평판적인 느낌을 주며, 코와 입이 매우 가깝게 붙어있는 독특한 인상을 준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넓적하고 평면적인 신체를 두껍게 감싸고 있다. 어깨에서부터 양 손에 걸쳐 흘러내린 평행의 옷주름은 부드럽기는 하나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가슴 부근에 있는 두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지권인을 취하고 있다. 4각형의 대좌는 상ㆍ중ㆍ하대로 나뉘어 진다. 상대의 4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지고, 중대에는 각 면에 큼직한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하대는 앞부분이 파손되어 있으며, 옆면에 안상이 2개씩 배치되어 있다. 8~9세기에 유행한 비로자나불좌상의 양식을 계승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4각형의 대좌, 형식적인 옷주름 및 긴장감이 줄어든 신체 표현 등으로 볼 때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당 앞면에는 탑의 부재를 모아 쌓은 탑신석이 남아 있는데 몸돌에 자물쇠 문양이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 초기의 탑으로 추정되었다.
다음으로 죽림리로 들어가면 예천권씨 종택(중요민속자료 제201호) 별당채(사랑채:보물 제457호)가 있다. 안채는 그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육간대청의 넓은 사랑채가 앞으로 쑥 나와 있고, 안채와 마루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독립적인 편이어서 별당채라고 부른다. 서쪽은 온돌방이고 동쪽은 마루인데 높직이 앉은 누마루가 한껏 권위를 살리고 있다. 대문간채와 사랑채의 좌측에 연접된 부속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철거되고 없다. 경내에는 안채, 사랑채(별당), 사당 및 유물보호각이 있는데 우측 전면으로 돌출한 보물 제457호인 별당은 잡석으로 쌓은 축대위에 난간을 돌려 樓집 모양으로 꾸몄으며, 좌측으로 ㄱ자 꺾어 후퇴시킨 안채도 이단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문앞에 여러 단의 계단을 설치하고 있어 건물전체가 매우 웅장한 느낌이며 사당은 안채 우측 후방에 위치하고 있다. 유물 보호각은 별당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 소유자가 자부담으로 근년에 시멘트 블록조로 건립하고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으나 도난경보장치 및 화재경보장치 등의 불비로 보물급 등 다수의 문화재가 도난, 소실의 위험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이 곳에는 독특한 모양의 아궁이가 있어 눈낄을 끌었다.
조선 선조 때 학자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1591)의 조부 권오상(權五常)이 지은 집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신선이 학과 노니는 형국(仙人弄鶴形) 이라는 이 명당에 터를 잡을 적에 만석꾼이 부자가 나는 자리와 당대의 학자가 날 자리를 놓고 비교하다가 학문하는 자리를 택했다한다. 이 곳에는 대동운부군옥(보물 제878호), 초간일기(보물 제879호), 해동잡록(유형문화재 제170호)가 보관되어 있다.
인접해 있는 초간정(草澗亭: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은 초간 권문해가 1582년 49세에 세운 것으로 심신을 수양하던 정자이다.
권문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백과사전류인『대동운부군옥』 20권을 지어 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겨 놓았다. 이 정자는 조선 선조 15년(1582)에 처음 지었고, 선조 25년(1592) 일어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광해군 4년(1612)에 고쳐지었지만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으로 다시 불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생의 원고 등을 보관하기 위해 고종 7년(1870)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앞면 3칸ㆍ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앞면 왼쪽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4칸은 대청마루로 4면에 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기암괴석과 주변의 경관이 조화를 이루어 예천의 대표적인 정자로 각광받고 있다. 자세히 보면 밑에 바위돌에 草澗亭이라 새겨져 있다.
이웃한 용문면 구계리 도로변에는 의성김씨남악종택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막상 그러나 현지 주민들 조차도 잘 알지 못하여 몇 번 주변을 맴돌았다. 이정사를 어찌 찾아가니 바로 옆에 있었다.
의성김씨남악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7호)은 국사봉을 배경으로 동남향하여 배치된 조선 중기의 옛 집이다. 남악 김복일의 종질이며 병자호란 때 척화파였던 불구당 김주(1606~1681)가 태어난 곳이라 한다. 1981년 지붕을 고칠 때 발견된 기록으로 보아 인조 12년(1632)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앞면 9칸ㆍ옆면 7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며, 안채의 앞면 왼쪽에 사랑채가 배치되었다. 안채는 영남 북부지방 민가의 기본적인 평면을 가지고 있어 간소하고 고졸하다. 또한 사랑채는 민가의 전통적인 누각형식을 따랐는데 처마곡선을 우아하게 처리하였다. 조선 중기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사람이 살고는 있으나 관리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인근에 있는 이정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4호)는 조선 태종의 열 번째 아들인 희령군 타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원래는 서울 동대문 밖에 있었으나, 병자호란 때 불에 타 없어진 후 150년이 지난 정조 16년(1792)에 왕의 명으로 사당을 세웠다. 희령군의 시호를 따서 이정사라고 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ㆍ옆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집이다. 특이한 평면구조와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사당은 종묘의 건축 양식과 비슷한 구조ㆍ양식을 띄고 있어 일반 사대부 가정집의 사당과는 격식을 달리하고 있다.
희녕군어사금(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1호)은 조선 태종이 보관해오던 거문고를 그의 여섯째 아들인 희녕대군에게 주었다고 하여 '어사금'이란 이름이 붙은 거문고로, 현재는 전주이씨 희녕군파의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 길이 120.3㎝, 너비 15.9㎝, 두께 12㎝로 작은 편이며, 오동나무와 밤나무로 만들었고, 부재료로 명주실과 소가죽이 사용되었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6줄의 현을 술대로 쳐서 소리를 내도록 하였다. 이 거문고에는 섬세한 솜씨로 조각한 문양이 있고, 전체적인 모양새가 매우 아름답다.
예천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이며 대표적인 사찰인 용문사는 예천읍에서 북쪽으로 약15㎞ 떨어진 용문면 내지리 소백산 남쪽 용문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이 고장 출신 두운선사가 신라 경문왕10년(870)에 창건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삼한통합의 큰 뜻을 품고 두운선사를 방문하고 자 동구(洞口)에 이르니, 갑자기 바위 위에서 쌍용이 나타나더니 절로 가는 길을 인도했다고 하여 태조는 산 이름을 용문산, 절 이름을 용문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고려 명종1년(1171)에 태자의 태를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고 창기사로 고쳤다가 다시 용문사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 사찰에는 맞배지붕의 균형미를 보여주는 대장전(보물 145호), 회전식 불경보관대인 국내유일의 윤장대(보물 684호), 왕이 내린 용문사 교지(보물 729호), 대추나무에 불상을 조각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좌상 및 목각탱(보물 989호), 용문사팔상탱(보물 1330호) 등이 있다.
가장 먼저 들어서면 자운루(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9호)가 맞는데,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 20년(1166)에 자엄대사가 세웠으며, 조선 명종 16년(1561) 고쳐 짓고, 광해군 13년(1621)에도 고쳐지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ㆍ후기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 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회전문을 지나 오르면 근래에 지은 진 듯한 보광명전이 있고 옆으로 대장전, 진영당, 응진전 등이 있다. 2002년 8월 찾았을 때는 대장전이 전면 보수중이었는데 지금 근래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이번에도 찾아보려고 했으나 다른 일정으로 인해 찾지 못했다. 자료는 모두 2002년 당시의 곳이다.
용문사대장전목불좌상및목각탱(보물 989호)은 숙종 10년(1684)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본존불은 넓적한 얼굴, 날카로운 눈, 작은 입 등에서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ㆍ중ㆍ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목각탱의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워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造成記)에 의하여 숙종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 조각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이제 감천면 증거리 주마산 자락에 있는 한천사를 찾았다. 이곳에는 경북지역에서 드물게 남아있는 철조여래좌상(보물 제667호)이 있어 주목된다. 한천사는 사실 우리에게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인 금동자물쇠(보물 제1141호)로 유명한 곳이다.
한천사는 신라 문무왕 18년(678)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대적광전에 주불로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광배(光背)와 대좌(臺座)가 없어진 상태로 높이 1.53m이다.
우아하면서도 침착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 건장한 신체, 의젓한 앉음새, 탄력 있는 다리 등은 통일신라 후기 9세기 불상으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뛰어난 기량을 나타내고 있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주름이 비교적 힘있어 보이고 자연스럽게 처리되었으나, 팔과 두 무릎의 주름에서는 형식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긴 상체, 평평한 콧잔등, 유난히 두드러진 인중 등에서 추상화된 경향이 대두되는 작품으로 당시 유행하던 철불상들 가운데 우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유리광전이라는 작은 전각에 모셔진 약사여래좌상이었으나 79년 수리이후 수인과 귓불, 육계 부분의 모습이 후대에 변형돼 원래모습이 아니라는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었다. 주된 논쟁은 수인의 모습이었다.
2001년 법의와 가슴부위 등에서 청동 녹이 슬어 보수 필요성이 제기됐고, 문화재위원회는 수리보수와 원형 복원을 결정했다. 각종 문헌조사와 감마선 촬영 등을 통해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 수인이 아닌,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잡고 있는 지권인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따라 지권인으로 바뀌었다.
수리 보수는 2002년 5월27일부터 8월 26일까지 진행됐으며, 불상의 수리는 대전시 무형문화재 제6호 불상조각장인 이진형씨 등이 맡았으며, 수리과정에서 전상운, 강우방, 김리나 문화재위원과 김창균 문화재전문위원이 자문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 인터넷 자료나 책자에는 약사여래불 즉 예전의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어 새로운 사실을 알리는게 절실히 요구된다.
한천사 삼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5호)은 2중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과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층급 받침이 4단씩으로, 처마의 네 귀퉁이가 날카롭게 하늘로 들려있어 경쾌한 멋을 풍기나 다소 과장된 듯 하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 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비교적 균형이 잘 잡힌 탑으로 9세기 후반의 탑으로 추정된다.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에는 우리나라에서 세금내는 소나무로 유명한 석송령(石松靈 : 천연기념물 제294호)이 있다. 부귀, 장수, 상록을 상징하는 우산 모양의 이 반송은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마을 앞의 석간천 상류에서 홍수로 떠내려오는 어린 소나무를 어떤 주민이 건져 심었다고 전해 온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나무를 베려다가 큰 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이 나무는 나무 높이 10m, 흉고 직경 4.2m, 수폭 동서 32m, 남북 22m이며 그늘 면적만 320평이 넘는다.
이 나무가 석송령으로 불리게된 연유는 이 마을에서 자식없이 살던 이수목(李秀睦)이라는 노인이 1920년 그의 소유 토지를 이 나무 명의로 기증하고 세상을 뜨자 주민들은 그의 뜻을 모아 "석평동의 영험 있는 소나무"라는 뜻의 "석송령"이라 명명하여 등기를 하였다. 영험있고 전설이 많이 서려있는 이 나무에게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동신제(洞神祭)를 지내며, 석송령장학회를 조직하여 우수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한다. 특히 토지를 4,558㎡ 소유하고 세계 최초로 세금을 내는 부자 소나무로 유명하다. 세금은 매년 1만원 정도 낸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너무 쇠약해져가고 있어 걱정스럽다.
지난 6~7년 사이에 석송령의 주변 마을 환경이 많이 변해 석평마을에는 방문객이 많이 늘어났으나 많은 관광객들이 함부로 막걸리를 주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이런 행위는 나무에게 치명적이며, 석송령이 쇠약해진 원인의 하나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빈번한 출입은 흙바닥을 단단하게 만들고, 다져진 흙속의 뿌리는 영양분이나 산소를 충분히 흡수할 수 없게 되어 나무는 차차 쇠약해져 고사하고 말 것이다. 앞으로라도 잘 가꾸고 보존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예천에는 토지를 소유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나무가 또 하나 있다고 한다. 용궁면 금남리 금원마을에 있는 수령 500년의 황근목(黃根木:천연기념물 제400호)이라는 이름을 가진 팽나무인데 토지를 4000평이나 소유하고 있다.
이제 예천 나들목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보문사를 찾아갔다. 학사나 보문사라는 푯말을 따라 산길을 계속 오르니 넓은 주차장과 함께 나타난 보문사는 직지사의 말사였다.
보문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다. 이후 여러 차례 재난을 당하여 무너진 것을 고려 명종 14년(1184) 보조국사 지눌이 극락전을 비롯하여 7동의 건물을 복원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고 극락전과 반학루, 삼층석탑만 현재 남아 있다.
사찰을 오르기전 옛 역사를 짐작키나 한 듯 맷돌이 보이고 염불당과 극락전이 맞는다.
극락전(문화재자료 제203호)은 앞면 3칸ㆍ옆면 2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이다. 건물은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고, 뒤쪽 기둥은 새 날개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 양식을 섞어 놓았다.
조선 중ㆍ후기의 건축물로 두 가지 건축 양식을 사용하여 건축의 시대적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내부 중앙에는 옥으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뒷면에는 후불탱이 걸려 있다.
극락보전 동쪽에는 적묵당이 있는데 현재는 인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는 최근에 지어진 나한전이 있고 앞에는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6호)이 있다.
이 석탑은 문화재 안내판에는 대웅전 오른쪽이라 되어 있으나, 극락보전 오른쪽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고려 명종 15년(1185) 승려 지눌이 절을 새단장하면서 나한전의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경내의 운계암 뜰에 이 탑을 세웠다 한다.
땅 위에 커다란 자연석 암반을 두어 바닥돌을 삼고 그 위에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독특한 모습이다. 위ㆍ아래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위로 들려 있다. 지붕돌 받침수가 4단으로 줄어드는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보전 뒤로는 작은 파손된 석조 광배편이 남아있다.
보문면에 있는 또 다른 유적들을 찾아갔다. 예천 간방동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은 보문면 간방리 간실마을의 민가 옆에 서 있는 탑이다.
예전에는 이 마을 전체가 절터였다고 하나, 지금은 탑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을로 변하였고 다만 기와조각과 석탑의 부재 일부가 흩어져 옛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위ㆍ아래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복발(覆鉢)이 남아 있다. 기단 맨윗돌과 탑신의 2ㆍ3층 지붕돌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기단부의 구성이나 탑신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에서 한참 길을 새로이 확장하고 있는 승본리를 찾았다. 이곳에는 예천승본동석불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51호)이 있는데, 산 속에 서 있으며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가 현재 보호각에 보호되고 있는 높이 160cm의 석불이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뚜렷하고, 코와 귀에 약간의 손상이 있지만 온화한 인상이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배 앞에서 가지런한 옷주름을 나타낸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이 불상이 약사여래를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좌(臺座)는 둥근 형태의 돌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고식 대좌이다. 불상의 양식상 통일신라 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제 명봉사를 찾는다. 명봉사는 신라 헌강왕 1년(875년)에 두운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소백산맥의 깊고 고요한 골짜기에 위치하여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이 곳은 현재 대웅전은 얼마 전 새로이 신축하였다. 대웅전에 있던 문수보살좌상은 현재 밑에 있는 승방으로 옮겨서 보관 중이었다.
대웅전 옆으로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명봉사문종대왕태실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 또 하나는 소백산 명봉사 사적비이다.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돌로 만든 방으로, 태실비는 태실에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문종대왕태실비는 문종대왕의 태를 모신 후 세운 비로, 원래는 절 뒤편 산기슭에 있었으나 일제 때 태실을 발굴해간 뒤, 명봉사의 스님들에 의해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귀부 위에 화강암으로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려놓은 일반형으로, 지대석과 귀부가 돌 하나로 이루어졌다. 귀두는 용머리 모양으로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이수는 서로 엉켜 있는 두 마리 용을 양각했는데 전체적인 구성과 솜씨가 섬세하다.
대부분 책에는 비석 앞면에 문종대왕 태실(文宗大王胎室), 뒷면에 '숭정기원후 일백팔십을묘(崇禎紀元後一百八十乙卯)'라 새겨져 있어 영조 11년(1735)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현지에서 확인 결과 '숭정기원후 일백팔을묘(崇禎紀元後一百八乙卯)'라고 되어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명봉사 사적비명은 비신의 형태나 용 무늬가 조각된 양식은 문종대왕실와 거의 같다. 본래는 1785년 건립된 사도세자태실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때 비를 깍아내고 지금의 명봉사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지금의 사적기는 1940년 권상로가 글을 짓고, 고영찬이 글씨를 쓴 것으로 앞면과 뒷면 모두 명봉사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명봉사 사적비 옆에는 약사전이라는 작은 전각 안에 마멸이 심한 약사여래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안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불상은 근래에 다시 만들어진 곳이고, 대좌는 팔각이나 대석은 사각인 고식의 좌대가 있었다.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이 대좌는 양식적으로 아주 특이했다. 약사전 앞에는 부도의 상륜부와 몸돌이 남아 방치되어 있는데 몸돌에는 마멸이 심한 사천왕입상과 자물쇠 문양이 새겨져 있다.
약사전에서 내려와서 옆으로 난 산길을 약간 오르면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릉운탑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가 있다. 이 비는 자적선사의 인격과 공적을 기리고 있으며 현재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다.
선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8년(882)에 태어나 효공왕 3년(899)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으며, 고려 태조 22년(939)에 입적하였다. 태조는 시호를 '자적선사'라 하고, 탑이름은 '릉운'이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최언위가 비문을 지었고, 글자는 고서에서 따와 새겼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얹은 구조로 비교적 규모가 크다. 규모에 비해 작아 보이는 거북받침은 아쉽게도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갔는데, 용의 머리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조선금석총람』에 전체가 실려 있으며, 1976년에야 비로소 판독이 되었다. 당시 중앙관서였던 도평성(都評省)에서 승려들에게 내린 글로서, 행정적인 양식을 갖춘 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고려 태조 24년(941)에 세운 비로,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접어들던 과도기적인 이두문자를 사용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크기는 전체 높이 291cm이며 비신은 높이 190cm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이두문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이 갖추어진 본격적인 문서양식으로서, 당시의 사회 및 문자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용궁면 향석리 일대를 찾았다. 용궁면은 회룡포(의성포)로 유명한데 KBS2 TV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더욱 알려져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가 보고 싶어 하는 장소로 꼽히는 곳이다.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용의 비상처럼 물이 휘감아 돌아가는 지형으로 높이 190m의 비룡산을 다시 350°되돌아서 흘러 나가는『육지 속의 섬 마을』이다. 안동 하회마을보다 이 곳 예천 회룡포가 더 전형적인 물돌이동 마을로 맑은 물과 백사장이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인근 비룡산 자락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운명선사가 세우고 이규보 선생과 관련이 깊은 장안사가 산중턱에 있으며 이 사찰의 뒷산에 올라가면 팔각정의 전망대가 있어 회룡포(의성포)마을의 절경이 한눈에 들여 다 보인다. 고종 때부터 경북 의성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땅을 개간하고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의성포란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차 안다니는 마을로 한 때 유명한 곳이 이 곳이다.
장안사와 회룡포로 가기전 향석리 마을 입구에 향석초등학교 바로 옆 논에 보호각이 하나있다. 그 안에 예천향석리석조여래좌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7호)이 모셔져 있다.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1914년 보호각을 세우고 보광전이라 이름지어 옮겨 놓은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말 죽산 부원군이었던 김원발이 마을에서 분쟁이 자주 일어나자 풍수지리적 영향이라 믿고 부처님의 자비로 막아 보려는 의도에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호각 안에 걸려있는 일제 강점기 때 작성한 현판 애용에는 장안사에서 이 불상을 관리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의아심이 든다. 바로 앞에는 잘 생긴 고려시대 초기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나 비지정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은 풍만한 둥근 얼굴에 눈은 반쯤 감겨 있고 코는 떨어져 나간 것을 보수하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돌려졌는데 현재는 시멘트로 붙여놓았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화려한 옷주름은 무릎까지 덮여 있다.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모양을 하고 있다. 대좌(臺座) 중앙에 새겨진 연꽃잎은 정면을 향하게 처리하였고 좌ㆍ우로 갈수록 비껴지게 만들어 고려시대 연꽃무늬 처리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볼 때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회룡포를 보고 나와 용궁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0호)를 찾았다. 늙은 노 부부가 관리하고 계셨다. 이 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지금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00m 지점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인조 14년(1636)에 세심루를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출입문인 외삼문, 휴식공간인 세심루,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 사당인 대성전 등이 일직선으로 서있다. 또한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되어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ㆍ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병산서원을 연상시키는 듯 하였다. 향교 규모로는 큰 편이었다.
이제 긴 예천군 유적지의 탐방은 마무리 한다. 아직도 못 다본 곳들이 많지만 그런데로 중요한 유적지들은 다 불러 보았다. 예천은 경북 서북쪽에 자리하면서 안동, 문경, 상주, 영주 등의 인근 도시와 연결이 잘 되어 있고, 고택들과 많은 정자 그리고 자연과 벗삼아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하는 고장이었다. 회룡포의 전경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큼 좋았고 맑은 물과 주변을 벗삼아 지어진 초간정에서의 휴식은 뒤 늦은 더위도 다 잊게 해 주었다. 많은 문화유적의 보고인 예천은 앞으로도 늘 찾고 싶은 그런 고장이 아닌가 한다.
김환대 (2003)
<붓다뉴스>
첫댓글 세금내는 석송령까정^^여여님 잘 보고 갑니다^^_()_
거리도 가깝고 시간있을때 다녀오면 좋을것 같아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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