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1:1-6절)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145 靑少年이나 청년(靑年)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얼마나 꽃피우느냐? 는 그들이 과연 어떤 선생이나, 코치를 만나느냐? 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실 그들은 거의 무한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 지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 소질을 키워 줄 선생을 만나지 못한 탓에 혼자서 조금 몸부림쳐 보다가 대부분 평범하게 인생을 마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대가를 만나 훈련받을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크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세계적인 대가를 만날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거의 무한대로 능력 있는 삶을 살고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17:20절)...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한 겨자 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저마다 무언가에 미쳐 있습니다. 즉 게임에 미치거나, 인네넛에 미치거나, 영화와 음악에 미쳐 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께 미쳐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왜 세상 것에는 미치면서 나에게는 미치지 못하느냐? 라고 책망하십니다.
무언가에 미친 사람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그것을 좋아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에 미친 젊은 남녀(男女)는 마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사랑을 얻거나, 지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한대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해서 하나님께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어떤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 그림을 그린 사람도 좋아할 것입니다. 또 어떤 곡(曲)을 좋아한다면, 그 곡을 작곡(作曲)한 사람도 좋아할 것입니다. 물론 그림은 좋아하면서 화가(畫家)는 좋아하지 않거나, 곡(曲)은 좋아하면서 작곡가(作曲家)는 싫어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세상의 부귀영화(富貴榮華)나, 지식(知識)이나, 물질(物質)은 전부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가능성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는 이것입니다. 젊음이라는 가능성(可能性)을 방탕한 생활로 낭비하는 사람도 있고, 또 돈이라는 가능성을 자신만을 위해 오용(誤用)하는 사람도 있으며, 지식이라는 가능성을 자기 것으로 여겨서 교만해지는 사람도 있고, 권력이라는 가능성을 악(惡)한 일에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젊음이나,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는 없느냐? 는 것입니다. 즉 돈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한 결 같이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는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도 어느 정도 돈이 생기고, 유명해지면, 사랑이 식어서 결국 자신이 받았던 축복(祝福)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면 한번 이혼(離婚)한 부부가 재결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혼하기 전에 별거 기간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불화(不和)를 일으킨 문제에 대해 각자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간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기간을 갖는다고 해서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간을 통해 갈등의 원인을 찾고, 그것을 제거해야만 다시 결합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時期)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직후(直後)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를 그토록 소망했던 유다 백성들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폐허(廢墟)더미였습니다. 무너진 성전(聖殿)을 재건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좌절되었고, 성전(聖殿)은 무려 15년 동안이나 방치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의 몸은 돌아왔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일종의 별거 기간으로 여겨서‘그간의 포로생활을 했으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서 쫓겨났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조상들의 패역(悖逆)한 죄(罪)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하나님도 그들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약속(約束)하십니다. Ⅰ.스가랴의 사명 스가랴의 사명과 학개의 사명은 어떤 점에서 달랐습니까? 1:1절)다리오 왕 제2년 8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스가랴는 학개와 같은 시기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서‘다리오 왕 2년 8월’은 학개가 성전 재건을 촉구한 다리오 왕 2년 6월에서 두 달이 지난 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유다 백성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주어진 시기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직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때였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돌아오자마자 성전(聖殿)을 짓겠다고 열심을 냈지만, 그것은 믿음에서 나온 열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열심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열심은 오래가지 않는 법입니다. 그들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하자, 무려 l5년 동안이나 성전을 폐허 속에 팽개쳐 놓고, 저마다 자기 집을 짓고, 자기 농사를 짓느라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 15년은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하고, 이기적인지, 그들이 가진 신앙의 실체가 얼마나 형편이 없는 것인지, 드러내 주는 기간이었습니다. 그 15년이 지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이중적으로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라는 강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둘째, 스가랴를 통해 그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구원계획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를테면 학개가 건축 기술자의 역할을 했다면, 스가랴는 그 건물 안을 단장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학개는 성전 재건을 중단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다시 그 일을 시작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언은 아주 거칠고, 사실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이를테면, 공사판에서 들을 수 있는 거칠고, 투박한 말투를 떠올리면 될 것입니다. 그에 비해 스가랴는 전반부에서 무려 여덟 가지의 환상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보여 주는 환상(幻想)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완공된 건물 내부를 섬세하게 장식하는 인테리어 작업에 비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짓고 있었던 초라한 성전에는 아주 어려운 문제가 걸려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이 성전이 포로생활 이전에 있었던 솔로몬 성전은 신정정치(神政政治)의 상징이었습니다. 즉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셨고, 온 세상을 통치하셨습니다. 그런데 겨우 5만여 명의 난민들이 이방 왕 고레스의 도움으로 짓는 이 초라한 성전이 과연 과거의 성전이 감당했던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무려 여덟 가지의 환상과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예언을 주심으로써 이 초라한 성전이 온 세상에 미칠 영향력과 여기에서 일어날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대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갇혀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유다 백성들을 그 안으로 불러 모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성령의 불을 전 세계에 퍼뜨리고자 하십니다. 이 성전은 그 봉화대(烽火臺)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실망해서 오랫동안 중단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너무나 좁게 생각해서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범위 그 이상의 것입니다. Ⅱ.과거와 단절하라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조상들의 죄를 정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지금 유다 백성들은 과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즉 과거를 기준 삼아 지금 자신들이 한 일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거가 어떤 과거였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말씀 하십니다.
즉‘너희가 기준으로 삼는 과거가 과연 어떤 과거냐 겉은 화려 했을지 몰라도 속은 썩을 대로 썩었던 과거 아니냐 그런데 그런 과거를 기준으로 삼아 무슨 유익을 얻으려고 하느냐 너희는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
유다가 멸망해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조상들이 말씀을 떠나 심히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이 저지른 첫 번째 죄는 성전의 기능을 죽여 버린 것이었습니다. 즉 성전의 외양(外樣)은 화려하고 장엄했지만, 그 기능은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성전(聖殿)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까? 죄(罪)를 치료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즉 성전은 죄를 치료하는 병원(病院)과 같습니다. 그런데 죄를 치료하지 못할 때, 성전은 죄인들의 집합(集合)소로 전락해 버립니다. 병원(病院)이 병을 치료하지 못할 때, 병자들의 수용소(收容所)로 전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치료하는 성전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즉 죄(罪)가 무엇이며,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백성들에게 가르쳐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게 해야 합니다.
성전 건물이 얼마나 화려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모이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참된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권세 있게 선포해서 사람들이 그 말씀에 전폭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것,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사람들의 죄를 태우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성전이 감당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입니다.
그 기능만 살아 있었다면,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의 비위(非違)를 맞추어 주는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만 가득 차 있었을 뿐, 진정한 말씀도 없었고, 회개의 눈물도 없었으며, 변하여 새사람 되게 하는 역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조상들이 저지른 두 번째 죄(罪)는 삶과 예배가 일치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예배 따로, 삶 따로’였습니다. 원래 예배란 삶의 열매를 그대로 가져와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즉 승리했으면 승리한 삶을 그대로 가져와‘하나님 제가 부족한 믿음으로 살았는데도 이기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하면서 기쁨의 예배를 드리고, 또 죄에 빠져 실패했으면 실패한 삶을 그대로 가져와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하나님 이번에는 실패했습니다.’하면서 회개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삶과 예배가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아와‘하나님 이렇게 축복해 주시니 기뻐죽겠어요’라면서 자신을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즉 울면서 회개해도 모자랄 판국에 오히려 잘못된 방법으로 돈 번 것을 자랑하며, 허세(虛勢)를 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백성들은 제단 위에서 죽어가는 짐승을 보면서 자신의 심장(心腸)이 도려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병원에 진찰 받으러 가는 사람이 진하게 화장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을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아픈 모습 그대로 가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의 예배는 위선(僞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즉 죄를 많이 지은 날일수록 더욱 거룩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세 번째 죄는 노골적으로 우상(偶像)을 섬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다를 멸망시킨 치명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보란 듯이 우상(偶像)을 섬겼으며, 아예 성전 안에까지 우상(偶像)을 들여놓았습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신앙이 전혀 없는 자들, 즉 어려서부터 기독교 문화에 접촉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거듭난 체험이 없는 자들이 점차 늘어남으로써 초래된 결과였습니다.
미션스쿨을 다녔다고 해서 전부 신앙인이 아닌 것처럼, 유다 백성이라고 해서 전부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결사적으로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거듭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믿겠지 뭐’하면서 안일하게 주저앉아 있으니까 그 자녀들이 반발심으로 보란 듯이 하나님을 비판하며, 우상(偶像)을 섬기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유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도록 복음(福音)을 전해서 자녀들을 거듭나게 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새 우상(偶像)이 유다를 뒤 덮어 버린 것입니다. 부모는 먹고사는 문제나, 교육 문제보다, 자녀들을 진정한 신자(信者)로 만드는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믿는 집이니까 당연히 잘 믿겠지, 유아 세례도 받았고 어렸을 때부터 교회 다녔으니까 언젠가는 돌아오겠지’하면서 안일하게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경제적으로는 좀 못사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키며, 자녀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확실한 신자(信者)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의 다른 어려운 문제들은 하나님이 친히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문제들에만 떠밀려서 말씀을 뒷전으로 밀어내면, 결국 우상(偶像)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립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제 막 바벨론에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70년 동안 깨달은 바가 있겠지. 조상들이 무슨 짓을 하다가 망했는지 이제는 분명히 알았겠지’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과거의 외적(外的)인 영화(榮華)와 번지르르했던 성전(聖殿)을 기준 삼아 현재의 초라한 형편을 불평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을 망하게 만든 조상들의 행위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4절)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에서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기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저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곧장 우상(偶像)을 섬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의 초기 증세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은 소홀히 한 채, 자기 집을 짓고, 자기 농사를 짓는 데, 급급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목숨 걸고 말씀을 붙드는 것이며, 하나님께 미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자연히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22:37절)...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께 미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께 잘 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친 것처럼 보일까봐 자꾸만 주저하면서 계산할 때가 더 많습니다.
무언가에 미친 사람은 자기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법입니다. 우리도 남들이 보든, 말든,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 할 수는 없을까? 내가 이렇게 믿어도 굶어죽지 않을까? 라는 식의 계산(計算)일랑 집어치우고, 무모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을까? 하나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소수의 난민들에 대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솔로몬 시대의 영광으로 복귀시키려는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을 믿음의 선구자(先驅者)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군대(軍隊)로 치면, 적진(敵陣) 한가운데 뛰어 들어가 본대(本隊)가 올 때까지 진지를 구축하고, 믿음의 깃발을 높이 든 채, 진지를 사수하는 선발대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제 얼마 후면,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뒤엎는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선구자(先驅者)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며, 율법을 사수(死守)해야 합니다. 앞으로 이 성전을 무너뜨리고, 믿음을 빼앗으려는 사탄의 공격이 수도 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오시고, 성령의 시대가 도래 할 때까지 그 모든 공격을 이겨내며, 믿음을 지킬 사명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전투(戰鬪)상황에서 부대장이 소대원들에게 적진 깊숙이 들어가 고지(高地)를 빼앗고, 본대가 올 때까지 그곳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소대원들이 포병의 지원을 받아 고지를 빼앗는데 성공했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재빨리 진지를 구축하고, 그곳을 방어(防禦)할 모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밤이 되면, 그곳을 되찾으려는 적군(敵軍)들이 새까맣게 몰려올 것입니다. 고지를 빼앗았다고 해서 계란을 풀어서 라면 끓여 먹고,‘왜 계란이 상한 거야 신경질 나 죽겠네 납품업자가 대체 누구야? 하면서 불평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빨리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본대(本隊)가 아니라, 선발대(先發隊)였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적인 구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성전을 사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무려 15년 동안이나, 성전은 방치해 둔 채, 자기 집만 화려하게 지어 놓고, 먹고사는 일에만 몰두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집 없이, 자기 생활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나라에 돌아와 자기 땅을 갖게 되었으니, 얼마나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았겠습니까? 게다가 성전을 지으려 하니까 사마리아 사람들도 와서 방해하고, 바사 왕도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포기한 채, 자기 집 짓고, 자기 생활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나라를 빼앗기고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으면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왜 포로생활 이전과 똑같은 옛 생활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고 책망하십니다. 물론 이들과 그 조상들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은 선지자가 말씀을 전할 때, 자신들이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떠들었습니다. 그런데 환난을 겪은 후손들은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할 때, 일단은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일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70년의 대가를 치르고, 배운 결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소망이 없는 곳으로 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의 중요한 기능0]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적으로는 상당히 화려해졌습니다. 전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 모일뿐 아니라, 건물도 웅장해졌고, 의식도 화려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기능은 죽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죄(罪)를 치료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즉 끊임없이 말씀을 선포해서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로 이끌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죄(罪) 설교를 듣기 싫어하고, 남들 앞에서 울면서 회개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말씀의 증거가 죽고, 회개의 눈물이 사라지며, 새사람 되는 역사가 희귀(稀貴)해 지니까 세상이 더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계모임 하듯이 모여서 웃고 떠들고, 고기를 구워 먹고, 서로 칭찬하면서 추켜세워 주면, 자기들끼리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나라는 중병(重病)이 들어 버립니다. 우리는‘교회 잘 다니는 사람이 좋은 신자’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좀 관계가 불편해지더라도 성경을 있는 그대로 외쳐서 울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 죄를 깨달아서 울든지, 분해서 울든지, 울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에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는 너무나 고상해져서 더 이상 죄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찾아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병자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달아 내리기도 했으며, 반대자들이 몰려와 고소할 틈을 엿보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전쟁터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서 말씀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치료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특공대(特攻隊)로 겨우 진지를 구축한 처지입니다. 잠시 후면, 사탄의 엄청난 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하게 총과 대포를 쏘아 대면서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진리(眞理)를 사수할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한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생활을 즐기면서 세상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유다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이나 찾으며, 살기에는 영적(靈的)인 전쟁(戰爭)이 너무나 치열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땅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까지 기도의 망부석(望夫石)이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즉‘나는 내 기도의 자리를 사수하겠다 이 자라에서 기도하다가 죽겠다’는 각오로 힘써 기도하며, 말씀을 지키고, 전해야지. 마치 전쟁(戰爭)이 다 끝난 것처럼 긴장을 풀고 안일해서는 안 됩니다.
즉‘나만 잘되면 된다 우리 집만 편하면 된다 우리 애만 좋은 대학 들어가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벧전4:7절)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Ⅲ.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은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 한마디마다‘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얼마나 진지하고, 참된 하나님의 요청인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에게 생기는 의문(疑問)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벨론에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수십만 명의 유다 백성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과 달리 이 땅으로 돌아온 소수의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그런데 또 어디로 돌아오라는 것일까? 그 대답이 다음절에 나옵니다. 4절)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거와 단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를 통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녀가 부모의 영향을 끊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부모는 나를 낳고, 길러 주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 영향이 내 몸 속에 배어 있고, 내 체질 속에 녹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는 사랑으로 자녀를 기르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분노로 가르칠 때가 있고, 몹쓸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식들은 그 분노(忿怒)와 죄(罪)를 그대로 물려받게 됩니다.
수년 전에‘저주의 대물림’이라는 주제를 놓고 신학적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저주가 대물림 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대물림 되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분노(忿怒)입니다. 부모가 분노(忿怒)로 자식을 키우면, 그 상처를 받은 자녀가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똑같이 닮아 가게 되고, 결국 자신도 분노(忿怒)로 자녀를 키우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의 영향을 끊지 못한 자녀는 부모를 닮으면서 늙어 갑니다. 오히려 부모와 부딪치고 싸우던 자녀, 부모를 단호하게 부정했던 자녀가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분노(忿怒)의 유전(遺傳)도 무섭지만, 나쁜 행위의 유전도 무섭습니다. 즉 부모가 성적(性的)으로 문란한 생활을 할 때, 자녀도 도덕적인 불감증(不感症)에 걸려서 자신도 모르게 그 문란한 생활을 답습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려면‘아버지가 틀렸다.’라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든지, 사람들 앞에서든지,‘아무리 나를 키워 주신 아버지이지만 어머니를 버린 것은 죄다’라든지‘우리 아버지는 알코올중독 자였기 때문에 나는 어른아이로 자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부모의 잘못된 영향을 끊을 수가 있습니다.
혹 집안의 수치라고 생각해서 쉬쉬하고 덮어 버리거나,‘그래도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대...’라는 식으로 자꾸만 두둔하려 들면, 자기도 모르게 닮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조상들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고,‘우리 조상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상숭배자 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간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즉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일은 잠시 미루어둔 채,‘우리는 왜 망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제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가? 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은‘이제 과거의 기억은 지우겠다 더 이상 과거의 영화와 지금 우리의 형편을 비교하지 않겠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겠다.’라고 결단(決斷)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조상들의 죄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조상들의 악(惡)한 길과 행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래야 하나님도 그들에게 돌아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義)롭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영적(靈的) 중증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즉‘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재발 저를 책임져 주십시오! 라고 외치면 자신을 전적으로 맡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드렸던 제사에는‘우리 힘으로는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백을 믿음으로 여겨서 그들의 죄를 사해 주셨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신념(信念)은‘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믿음은‘나는 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라고 고백하는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암에 걸린 사람이 자기 의지(意志)로 낫기 위해 식이요법을 한다든지, 운동을 하는 것이 신념(信念)이라면, 이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수술대 위에 눕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내 모든 자랑과 소유와 능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수술대 위에 눕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치료할 부분은 치료하시고, 수술할 부분은 수술해서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인생을 사용하기 시작하십니다. 그것을 존귀(尊貴)하게 하시느냐? 천(賤)하게 사용하시느냐? 는 적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하면서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 자기 삶의 주도권을 맡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괜히 하나님께 맡겼다가 돌보아 주시지 않으면, 나만 손해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 많은 계획들을 세워놓고‘이것은 이렇게 해 주세요 저것은 저렇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하나님이 직접 계획을 세워 주십시오. 저는 그대로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은 내가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전부 맡기는 이것입니다.
그랬다가 하나님이 나를 중요하게 써 주지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혹 하나님께 인생을 맡겼는데, 생각지도 않은 오지(奧地)에 선교사로 보내 버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또 결혼 문제를 맡겼는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를 구해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나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어떻게 해서든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자기 집을 짓고, 자기 농사를 지으며, 자기 자녀들을 키우기에 앞서 심령의 부흥부터 일으켰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도 그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문제를 생각하느라 하나님을 생각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몸만 교회에 와서 앉아 있지, 마음은 세상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우선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계3:20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 없이 많은 계획을 세웠고, 많은 행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너희의 그 많은 계획 그 많은 잔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의 중심이 되는 일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나에게 문을 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간절한 소원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꾸만 과거를 기준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라는 식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가 어떤 과거입니까? 너무나도 열심히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던 과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은 과거와 같은 신정(神政國家)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역사의 선구자요, 새벽별로서 그때까지 성전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며, 언약(言約)을 지킬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초라한 성전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영혼(靈魂)을 치료하고, 살리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축복(祝福)은 아예 주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질적인 축복은 부산물(副産物)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면, 다른 것들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바른 신앙을 되찾은 것에만 만족하면 안 됩니다.‘나는 선구자다. 주님이 큰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실 때까지 이 믿음을 지켜야 한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5절)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말씀에 불순종하던 조상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대로 그들의 죄(罪)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6절)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범죄한 조상들도 사라졌고, 그때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도 사라졌지만, 그들이 전한 말씀은 남아서 성취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아마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공허(公許)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씀은 사실이었고 그 말씀대로 조상들은 전부 멸망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조상의 길을 버리고, 성취의 능력이 있는 그 선지자들의 말씀을 붙드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곧 이 자리에 주님의 깃발을 꽂고, 큰 부흥의 역사가 나타날 때까지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 사람이 붙들고, 그 사람이 죽으면, 또 그 다음 사람이 붙들어서 끝까지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역할은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드러내는 이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또 교인들이 이 진리(眞理)를 듣기 위해 모이지 않으면. 목사도 진리를 연구하지 않습니다. 또 교인들이 모인다 해도 진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진리가 온전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진리를 더욱더 밝혀 달라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나는 바른 신앙을 찾았으니 이제 돈 벌러 가자! 집 지으러 가자!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 진리를 붙들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면서 '하나님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큰 구원 역사를 다시 한 번 일으켜 주소서’라고 간구하십시오. 과거에 잘나가던 때와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왕년에는......’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렇게 잘나가던 왕년(往年)에 실제로 한 짓이 무엇이었습니까? 술 마시고, 제멋대로 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자꾸만 그때와 비교하면서‘내가 새벽에도 일어나서 기도하는데 왜 가계에 손님이 더 떨어지는 거야? 왕년에는 잘나갔는데 왜 예수 믿고 난 후에 더 가난해지는 거야! 라고 불평합니까? 설사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과감하게 끊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성공한 경험이 있다 해도 그것은 주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것이지, 내 공로가 아닙니다. 잘나가던 왕년에 대한 미련은 그만 털어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이 새로이 빚어 주실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께 다 돌아온 것처럼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께 미친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자칫하면 교회 건물이 우상(偶像)이 될 수 있습니다.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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