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를 움직이는 사람들]⑤ 기관사

[전영석]

KTX를 움직이는 사람들]⑤ 기관사

엄히 가려 뽑은 247명이 안전운행 책임져


고 건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에게 '승무신고'를 하고 있는 서울고속철도기관차승무사무소 이병남 기관사.
"5년이라는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꿈만 같습니다. 막상 개통을 앞두고 나니 설렘보다는 부담감이 앞섭니다."
경부고속철도 개통식이 열렸던 지난 30일, 서울 서부역사내에 위치한 서울고속철도기관사승무사무소.
이날 고 건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에게 '승무신고'를 했던 이병남 기관사는 예상과 달리 표정이 굳어 있었다. 고속철 경력만 따지더라도 전체 기관사 중 불과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베테랑이지만, 경력과 상관없이 엄습해 오는 부담감을 떨쳐버리기에는 그에게 집중된 주변의 기대가 너무 크다.

현재 고속철 운행을 위해 투입된 기관사는 총 247명. 그 중 행정요원과 중간관리자 38명을 제외하면 실제로 조종간을 잡는 기관사는 209명이다. 물론 38명도 기관사들과 똑같은 훈련과정을 마친 실전요원들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곧바로 현장에 투입된다.

알려진 대로 고속철 기관사들은 5대1의 경쟁률을 뚫고, 5년 이상 무사고 운행, 까다로운 적성·신체검사를 통과해 선발된 최고의 기관사들. '베테랑 기관사'라는 쉽지 않은 명예를 접어둔 채 '신참 기관사'로 거듭나기 위해 과감히 도전장을 냈다.

그 중에서도 이병남 기관사는 이른바 고속철 1세대. 1999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철 기관사로 선발돼 시속 200㎞와 300㎞ 돌파를 직접 시연한 그다. 뿐만 아니라 고속철 시험운행과 관련, 대부분 가장 먼저 조종간을 잡았던 그다. 고속철 기관사 역사에 능히 이름을 올리고도 남을 산증인인 셈이다. 또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 만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고속철을 먼저 경험했기 때문일까요? 동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중압감과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혹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고속철의 위상에 작은 오점이라도 남기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은 공연한 엄살이라며 그의 위축된 심정을 일축해 버린다. 한마디로 그만큼 일을 즐기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특히 궁금한 것은 꼭 찾아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일에 관한 한 '독종'이라는 전언이다.


고속철 기관사들의 '대부'로 통하는 왕연대 운용팀장.
"이병남 기장만큼 자기 분야에 대해 고집스런 사람도 드물죠. 기관사들 사이에서는 '만물박사'로 통합니다. 모든 것을 '척척' 해내거든요."
왕연대 운용팀장. '고집' '독종'에 관해서라면 그 역시 둘째가라면 서운하다. 직원들은 오히려 이병남 기관사보다 왕 팀장이 '톱'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에게는 고속철 기관사의 '대부' '산증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다닌다. 신분은 일반직 공무원이지만, 이론에서만큼은 다른 기관사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고속철 기관사 선발에서부터 교육·평가 등 전과정을 직접 기획하고 주관함은 물론 기관사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직접 상담·해결해주는 그 이기에 기관사들은 나이를 떠나 그를 '형님'으로 여긴다.
"형님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전 단지 지원요원일 뿐인 걸요. 기관사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들 앞에서 감히 명함이나 내밀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기까지의 과정을 따져보면 그의 이러한 말은 단지 '겸손'에 지나지 않는다.

선발과정부터 엄격했다. 우선 기관사 경력 5년 이상으로 무사고는 기본, 적합성·집필·체력검사와 평가 등을 통해 부적격자를 골라냈다. 그리고 교육기간중에도 수시로 평가를 실시해 경쟁의식을 북돋는가 하면 누락자는 과감하게 퇴출시켰다.
교육 역시 이론과정·시뮬레이션 과정·실제운행 과정 등 13주 동안 철저한 1대1 방식으로 최고의 효율을 높였다.
특히 그는 기관사는 '만물박사'가 되어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이들을 집중 조련했다.

"현재 한국고속철 기관사의 수준은 세계 최고라고 자신합니다. 운전은 물론 고장조치·응급상황 대처요령 등 전분야에 걸쳐 완벽한 멀티플레이어죠. 빡빡한 교육일정 속에서도 큰 불만없이 따라 준 기관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5년간 왕연대 팀장이 다른 업무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기관사 양성을 위해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김웅배 소장의 전폭적인 지원 '덕'이 크다.


고속철 기관사들의 '큰 형님', 김웅배 소장.
"최고 시속 85㎞짜리 디젤기관차를 운전하다 300㎞짜리 고속철을 운전한다고 하면 누구든지 속도에 적응이 안돼 처음엔 겁부터 먹게 됩니다. 그래서 당초 교육 목표를 속도 적응에 중점을 뒀죠. 특히 기관사와 열차가 서로 한 몸에 될 수 있도록 시험운행중 실제로 고장을 내 응급조치토록 하는 등 다양한 시뮬레이션 교육도 병행했습니다. 최고의 기관사라고 확신합니다. 이렇게 된 데는 역시 왕 팀장의 공이 크죠."
84년도 이후 조정간을 놓았지만, 지금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꼭 한번 KTX를 운전하고 쉽다는 김 소장. 4월1일 오전 5시30분 부산행 첫차 운전의 행운을 잡은 전길호 기관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실력이나 경력으로 치면 무사고 주행기록 100만㎞가 넘는 훌륭한 기관사들도 많은데 우연히 행운을 잡게 돼 부끄럽습니다. 고속열차는 기존 열차에 비해 배가 넘는 300㎞ 이상의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지만, 선로가 워낙 좋고 차량도 특별한 주행장치가 설치돼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고속철이 될 것입니다"

부산행 첫차 운전의 행운 잡은 전길호 기관사.
가족에게 아직 '첫차 운행'의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는 전길호 기관사. 새마을호 10년 등 기관사 경력은 총 23년의 베테랑이지만, 사실 고속철 경력은 5개월 남짓한 '초짜'다. 이러한 그가 행운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침착함'과 임기웅변에 뛰어난 '순발력'이 우선 고려됐다는 것이 김웅배 소장의 귀띔이다.

"지난 5개월간 가족들과 얼굴 대하는 것은 고사하고 2∼3시간씩 밖에 잘 수 없는 날도 많았지만, 개통을 앞두고 나니 지난 시간이 이렇게 짧고 아쉬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만큼 결과 또한 좋으리라 확신합니다. 고속철 시대의 첫 테이프를 끊는 만큼 고객들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잘 모실 각오입니다."

4월1일, 전국을 3시간대로 묶는 '고속철도 시대'가 1992년 6월 첫 삽을 뜬지 약 11년10개월만에 첫 기적을 울리게 된다. 각 분야에서 땀 흘리며 준비해 온 노력이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시운전과정에서 반복되는 차량 점검에도 힘들다는 티 한번 낸 적 없는 '무결점 Zero' 고양고속철도차량정비창 직원들에서부터 '최고의 서비스와 고객 안전'을 위해 두발이 '퉁퉁' 부르트도록 뛰어다니는 KTX 승무원들, '스마일 서비스'를 위해 성격마저도 개조하려는 역무원, 매일매일 긴장 속에서 일과를 보내는 수송조정실 직원들, 아이들에게는 좋은 '아빠'가 되지는 못하지만 고객 안전의 든든한 '파수꾼'이고자 노력하는 기관사 등 맡은 바 분야에서 묵묵히 땀 흘려온 숨은 일꾼들이 있기에 평양을 거쳐 시베리아로, 유럽으로 뻗어나갈 한국고속철도의 밝은 미래가 그려진다.


취재: 채수일(sooil@news.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