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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위치한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조선 초기의 명유(名儒),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을 배향하였다. 1568년 지방의 유림(儒林)들에 의해서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고 하였고, 1573년 같은 이름으로 사액(賜額)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소실(燒失)되었다가 1605년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祠宇)를 중건(重建)하여, 보로동서원 (甫勞洞書院) 이라고 하였다. 1607년에 다시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 (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 ... 도동서원의 강당, 사당 및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으며, 담장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唯一)한 예이다.
김굉필 金宏弼
동국5현 東國五賢
도동서원을 얘기하려면 먼저 ' 한훤당 김굉필 '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김굉필의 인간상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배 가고,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 당한 사림파(士林派)의 문인(門人)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역사 교과서의 서술이란 간혹 이렇게 가볍고 잔인한 데가 있다. 옛 사람들이 훌륭한 유학자를 표현할 때 흔히 거유(巨儒), 굉유(宏儒)라고 하는데, 이것으로도 김굉필을 말했다고 할 수 없다.
동양화에서 달을 그릴 때에는 달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의 달무리를 그려 달이 드러나게 하는 공염법(空染法)이 있는데, 한훤당 김굉필의 주위를 보면 점필재 김종직(粘畢齋 金宗直)이 그의 스승이고, 벗으로는 일두 정여창(一竇 鄭汝昌),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임계 유호인(林溪 兪好仁)이 있고, 제자로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를 비롯하여 이장곤, 성세창, 김일손, 김안국 등이 있으니 일세의 거공명유(巨公名儒)들이 망라된다.
한훤당 김굉필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퇴계 이황이 김굉필을 가리켜 ' 근세도학지종. 近世道學之宗 '이라고 말했듯 그는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태종(太宗)이다. 그리하여 중종 때부터 근 50년간의 논의를 거쳐 광해군 2년(1610)에 문묘(文廟)에서 제향할 유학자로 동국5현(東國五賢)이 결정될 때 그 순서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등의 순서이었으니, 한훤당 김굉필은 오현 중에서도 수현(首賢)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명예에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라는 그늘은 있을 수 있다. 중종은 반정(反正)에 성공한 후, 조광조 등 신진 사림(士林)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정치세력으로 삼았고,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의 직계 제자이었다. 당연히 김굉필의 명예는 실제 이상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특히 각종 사화(史禍)로 김굉필의 학문적, 예술적 업적을 평가, 증명할만한 근거들이 없는 상황에서 그저 동국오현으로 지목되었다는 것만으로 그의 전부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굉필의 일생
김굉필은 1454년(단종 2), 무관으로 어모장군(御侮將軍)이었던 김뉴(金紐)의 아들로 서울 정동(貞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다. 본관은 황해도 서흥이지만, 예조참의를 지낸 증조부가 현풍곽씨와 결혼하여 처가인 현풍(玄風)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현풍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개국공신인 조반의 사위가 되어 서울 정동에서 살게 되어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던 중소지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 그는 호방하고 거리낌 없어 저잣거리에서 잘못된 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메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살에 순천 박씨와 결혼해, 합천군 야로현(冶爐縣)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건너편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지내다가 뒤에 현풍으로 돌아와서는 지금 도동서원 뒷산인 대니산(戴尼山) 아래에 살았다. 이 시절 한훤당은 서울의 본가, 야로의 처가, 성주 가천(伽川)의 처외가(妻外家) 등지를 오가며 선비들과 사귀고 학문에 힘썼다.
1474년 봄 20살의 한훤당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는데, 그때 한훤당이 <독소학. 讀小學 .. 아래에 소개>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를 보고 점필재 김종직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기(根基)"라며 찬탄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오로지 <소학>만 공부했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했다. 10년 동안 소학만 읽고 다른 책은 보지 않았으며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하였다. 이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의 몸가짐을 얘기하는 "小學"만 10년간 읽고 다른 책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佛家)로 치면 거의 수도승의 자세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는 학승(學僧)이 아니라 수도승(修道僧)의 자세이었고, 이렇게 해서 얻은 그의 도력(道力)은 주위로부터 자연히 존경을 받게 되었다.
성리학이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조선 왕조 들어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유학자들은 출세를 위한 기본 학문으로 익히는 풍조가 생기고, 문장도 이른바 사장(詞章)으로 흘러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만 힘쓰는 경향이 생겼다. 이에 성리학은 의리지학(義理之學)이고,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근본 철학, 즉 도학(道學)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한훤당 김굉필이 나타난 것이다.
나이 36세 되던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1494년에는 학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점을 들어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어 여러 낮은 관직을 거쳐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형조좌랑까지 올랐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 수양대군의 찬탈행위를 비난한 글>에서 유발된 무오사화 때, 김굉필은 오직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같은 도당(徒黨)이라는 혐의를 받고 곤장 80대에 원방부처(遠方付處)라는 유배형을 받고 평안북도 희천(熙川)으로 귀양갔다. 그때 김굉필의 나이 45세이었다. 여기서 김굉필은 운명적으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조광조는 14살의 나이로, 찰방인 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 어천(魚川)에 가 있었는데, 인근에 김굉필이 유배왔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사제(師弟)의 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47세 되던 해 김굉필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되어 북문 밖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나 무오사화 관련자들에게 죄를 추가하여 김굉필은 사사(賜死) 당하니 7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향년 51세이었다. 묘소는 현풍 선영 가까이에 모셨다. 그의 저술은 이미 후환이 두려워 모두 불태워버렸고, 친지간에 오간 글의 소장을 꺼렸기 때문에 집안에 내려오는 <경현록. 景賢錄>이 전부인데, 10여 수의 詩와 네댓 편의 문(文)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의 도학을 문헌으로 알아볼 길이 없다.
소학동자 小學童子
소학(小學)은 주희(朱熹)의 친구 유자징(劉子澄)이 지은 책이다. 여덟 살부터 열네 살까지의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한 도덕 교과서인데, 크게 내편(內編)과 외편(外編)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에는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계고(稽古) 등이, 외편에는 가언(嘉言), 선행(善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즉 내편에서는 태교에서부터 시작하여 교육의 과정과 목표, 자세 등을 밝히고(立敎), 인륜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明倫), 학문하는 사람들의 몸가짐과 마음자세, 옷차림과 식사예절 등 몸과 언행을 공경히 다스리는 일(敬身), 본받을만한 옛 성현의 사적을 기록하여 놓은 계고(稽古) 등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내편에서는 유교사회의 도덕 규범과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자세 등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사항들만을 뽑아서 정리하였다. 외편에서는 한나라 이후 송나라까지 옛 성현들의 교훈을 인용하여 기록한 가언(嘉言), 선인들의 올바른 행실만을 모아 정리한 선행(善行)의 두 개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아동들이 처신해야 할 행동거지와 기본 도리를 밝혀 놓았다.
선현들의 언행 가운데 아동들에게 모범이 될 내용들을 뽑되 " 물 뿌리고 청소하며 어른을 대하는(濾掃應對) " 일상의 생활 습관부터 바르게 하는 것을 강조한다. 孝와 敬을 제대로 익혀 자신을 온전하게 닦는 < 수기. 修己 >를 이룬 뒤에야 사회인이자 위정자로서 남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업문유미식천기 / 業文猶未識天機 / 글을 읽었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는데
소학서중오작비 / 小學書中悟昨非 / 소학 책 속에 어제의 잘못를 깨달았도다
종차진심공자식 / 從此盡心供子識 / 이로부터 마음을 바쳐 자식의 직분 다하려 하니
구구하용선경비 / 區區何用羨經肥 / 구차스러운 부귀를 어찌 부러워하리오
김굉필이 남긴 <소학을 읽고. 讀小學>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귀이다. 하늘의 이치를 깨우치려는 거창한 공부에 매달리기에 앞서, 당장 어제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부모에게 제대로 효도할 수 있는 일상의 공부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이 확고한 詩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자, 조광조(趙光祖)의 스승이었고, 조선을 대표하는 오현(五賢...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퇴계)의 한 사람으로서 문묘(文廟)에도 모셔진 김굉필의 소학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였다. 그는 말년까지 "소학동자. 小學童子"를 자처하면서, 사람들이 시사(時事)에 대해 의견을 물으면 " 나는 소학동자이니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바탕으로 소학 교육을 강조하였다. 조선 초부터 향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학생들에게 소학을 온전히 익힐 것을 주문하였다. 세종대에는 소학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다량으로 찍어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내내 과거 응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 소학은 어린아이들이나 배우는 유치한 학문"이라고 여기어 외면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이었다. 이때문에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은 " 지금 사대부들이 글을 조금만 알면 성리학과 도학을 논하지만, 몸과 마음에서 체험한 것이 아니라 껍데기만 주워 형식만 꾸민 것이니 명성이 아무리 높아도 실제에는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신랄히 비판하였다.
갈라선 스승과 제자 .. 김종직과 김굉필
스승과 제자이었던 士林派의 거두 김종직과 그의 제자 김굉필은 결별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원칙론과 현실론 사이의 괴리, 후배들의 선배에 대한 가혹한 비판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김굉필의 벗이었던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이 그의 저서 <사우록/師友錄>에서 기록으로 남긴 스승과 제자의 결별 사건을 적어 두었다. 점필재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조정에 건의하는 일이 없자, 제자 김굉필이 詩를 지어 올렸다. 도(道)란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는 것입니다. 날이 개면 나다니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을 어찌 완전히 잘할 수야 있겠습니까?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誰信牛耕馬可乘)?
이에 스승 김종직은 그 운(韻)을 따라 화답하기를 " 분수 밖에 벼슬이 높은 지위에 이르렀건만, 임금을 바르게 하고, 세속을 구제하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으랴. 후배들이 못났다고 조롱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권세에 구구하게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네(勢利區區不足乘)"이라 하였으니, 이는 점필재 김종직이 한훤당을 덜 좋게 생각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갈라섰다(貳於畢齋).......
이 결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견해가 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한훤당은 철저히 도학(道學)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스승 김종직은 사정이 좀 달랐다. 김종직은 사림파(士林派)의 세력을 키워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싫어도 훈구파 한명회(韓明澮)의 압구정에 붙인 찬시(讚詩)도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제자 김굉필은 이것이 거슬려 이런 시를 지어 비판하였고, 종국에는 갈라서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찌되었건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자처했던 제자 김굉필은 스승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김굉필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사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윤리적 배반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의 평가는 달랐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김굉필을 두둔한 것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학문상의 이유로 갈라설 수 밖에 없었다고 김굉필을 이해하고 있다. "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할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갈라질 수 있는 것이다. 점필재 선생은 그 뜻이 항상 문장을 위주로 하였으며, 학문을 강구하는 면에 종사한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한훤당 김굉필의 마음은 오로지 옛 사람의 의리를 힘써 행한 것은 분명하이,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이 김굉필을 두둔함은 심히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며 김굉필을 두둔하였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처신(處身)의 문제로 보면서 한훤당 김굉필을 지지하였다. "점필재의 행동은 뒷세상에 비난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만일 한훤당이 점필재와 갈라지지 않았더라면 또 뒷날의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선생이 갈라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었다"고 하며 김굉필의 행동을 이해하여 주었다.
서원과 은행나무 ... 김굉필 나무
도동서원 앞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굳건히 서 있다. 수령이 400년 넘은 이 은행나무는 어른 5,6명이 안아도 모자랄 정도로 굵다. 나무는 세월의 풍상을 이기지 못해 FRP 지주 5개가 뻗어난 가지를 받치고 있지만, 의연한 자태는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비슬산을 굽어보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도동서원 뒷편 사당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함께 모셔진 외손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심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강 정구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서원을 士林의 도움으로 1605년에 이곳에 복구하고, 지명(地名)을 따 보로동(甫老洞) 서원이라 불렀으며, 2년 후 선조는 '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 '는 의미의 <도동서원. 道東書院>으로 사액되자 이를 기념하여 입구에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대체로 서원이나 향교 앞에는 은행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는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공자(孔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으며, 유생들의 학문이 은행처럼 주렁주렁 달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이곳 도동서원 입구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마주선 나무가 없어 결실기에도 은행이 달리지는 않지만, 가을철 은행잎 단풍은 주변 경관과 어울려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내력
위에 적은대로 한훤당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나서 1507년(중종 2)에 신원(伸寃)되어 도승지로 추증되고, 1575년에는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610년에 문묘(文廟)에 동국오현(東國五賢) 중 으뜸가는 수현(首賢)으로 받들게 되었으니, 생전에 받지못한 대우를 사후에 더 없는 영광으로 받은 셈이었다.
16세기 중반, 서원이 곳곳에 건립되기 시작할 때 퇴계 이황과 한훤당의 외증손자이자 예학에 밝았던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1568년 한훤당을 모시는 쌍계서원을 현풍현 비슬살 기슭에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04년 지금의 자리에 먼저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과 서원 일곽을 완공하였다.
선조(宣祖)는 이 서원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려주니, 그 뜻은 " 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이었다. 도동서원은 1865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47개 서원, 사당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때에도 훼절되지 않아 조선 5대 서원(소수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흥선대원군 당시 보존 대상이었던 47개소 서원들은 모두 정치문제에 초연하였고, 수탈행위가 덜했던 사액서원들이었다.
대니산 戴尼山
도동서원은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대니산(戴尼山) 밑에 있다. 본래 이 산의 이름은 태리산(台離山) 또는 제산(梯山)이라고 불렸는데, 한훤당이 이 산 아래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사람들이 대니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대(戴)는 머리에 인다는 뜻이고, 니(尼)는 공니(孔尼)를 뜻하는 것이니 공자님이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 높이 받드는 산이라는 의미가 된다. 孔子는 짱구이어서 공구(孔丘)라고도 하였고, 니구산(尼丘山)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공니(孔尼)라고도 불렸다.
도동서원의 중요한 동선(動線)들은 모두 중심축 선상에 놓여져 있다. 수월루 앞의 계단부터 환주문 앞의 돌계단, 그리고 환주문과 강당인 중정당 사이에 놓여진 좁고 긴 포장로 그리고 내삼문(內三門)으로 오르는 계단들, 이들 통로와 계단은 아주 정성스럽게 가공된 석재들로 만들어졌다는 점 외에도 폭이 65~70cm 정도로 아주 좁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넉넉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통로들의 폭을 좁힌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향사 때에 참여하는 모든 인원들은 직책과 서열이 정해지는 바, 모든 이동은 그 서열에 따라 일렬로 이루어진다. 가장 원로가 앞에 서고 2~30명의 인원들이 좁은 통로와 계단을 오르내리는 유림들의 기다란 줄은 그 자체가 바로 예(禮)이며 성리학적 질서가 된다. 좁은 계단들은 철저하게 일인용으로 졔획된 것이며, 일상적인 이동조차 예(禮)와 서(序)에 적합하도록 훈련시키기 위한 장치들이다.
이러한 禮와 序는 건물의 크기와 위치에도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 성리학적 건축의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특히 도동서원과 같이 예학적 규범이 강조된 건축에서 부분들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로지 전체적인 통일성(統一性)이 강조될 뿐이다. 도동서원은 대지 조성과 지붕과 담장의 동일한 형태를 통하여, 그리고 그것들의 규모와 면적과 스케일이 다양한 변화를 통하여 통일성과 전체성(全體性)을 동시에 달성하고 있다.
다른 모든 건축적 부분들도 이 전체적 목표를 위해 조절되어 있다. 이 서원의 독특한 석물과 돌조각들도 특정 부분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라, 환주문 입구의 계단부터 사당의 기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사용되고 있다. 이 역시 부분적 장소감 보다는 전 영역적 이미지의 구축을 우위에 둔 결과이다. 한 직선이 중심축 위에 수월루 - 환주문 - 중정당 - 내삼문 - 사당이 배열되어 있다. 서원의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중심축 선상에 배열된 것이다. 이 정도는 다른 향교나 서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도동서원은 중심축(中心軸)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한 한 가지 장치를 더하고 있다. 좁은 폭의 길과 계단을 모두 중심축 선상에 놓았고, 잘 정제된 석물들로 마감하여 중심축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도동서원의 건축 디테일 (유흥준)
도동서원의 건축적 평면은 여느 서원과 다를 것이 없다. 높직이 올라앉은 중정당을 중심으로 안마당 아래쪽 동서로 東齋와 西齋 두 기숙사를 두고, 뒤편 위쪽으로는 사당을 모셨다. 이는 우리나라 서원 전체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건축 형태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살펴보는 낱낱의 디테일은 정말 도동서원만의 특징이고 자랑이 되고 있다.
환주문을 보면 문지방이 있을 자리에 꽃봉오리 돌부리가 있어 여닫이 문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고있다. 지붕은 사모지붕에 오지로 구운 절병통이 예쁘게 얹혀 있다. 환주분에서 중정당으로 가는 안마당에는 가지런히 돌길이 놓여 있고, 중정당 석축 앞에 낮게 단을 쌓았는데, 이 돌길과 석단이 만나는 자리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돌거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돌거북은 위에서 보면 꼭 올빼미 같지만 바짝 쪼그리고 앉아 정면으로 보면 이빨이 옆으로 나온 영락없는 거북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중정당으로 오르는 석축에는 두 개의 돌계단이 좌우로 비껴 있는데 디딤돌이 일곱 단이나 될 정도로 높다. 이 석축은 마당의 얼굴이기 때문에 막돌허튼층쌓기로 되어 있지 않다. 반듯한 돌을 차곡차곡 이 맞추어 가지런히 쌓았는데, 돌의 크기도 제각기 다르고, 빛깔도 연한 쑥색, 연한 가짓빛, 연한분홍빛 등 연한 색이 은은히 퍼지면서 아름다운 조각보를 보는 듯하다.
석축이 머릿돌을 받치고 있는 자리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네 마리의 용머리가 실감나게 조각되어 앞으로 돌출해 있다. 이 용머리 조각을 근래 어느 문화재 절도범이 뽑아간 것을 찾게 되어, 네 마리 중 한 마리만 원래대로 남겨놓고, 세 마리는 복제품으로 대신하고 원본은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치장을 하고도 모자람이 있었는지, 석축에는 다시 세호(細虎)라고 불리는 다람쥐 모양의 조각을 양쪽에 배치하였다. 이것도 " 비대칭의 대칭"원리에 의하여 한 마리는 올라가고, 한 마리는 내려가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꽃 한 송이씩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건축에서 이처럼 곳곳에 조각을가하여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한 곳은 도동서원 외에는 창덕궁에나 가야 있다. 왜 도동서원에는 이처럼 많은 조각이 새겨져 있을까? 돌 축대가 18단이나 되고 보니 이 지루하고 딱딱한 돌길에 조각을 새겨 시각적 긴장을 풀어주려던 것은 아닐까 .... 도동서원의 중정당을 나라에서 보물 제380호로 지정할 때 돌담까지 포함시켰다. 그만큼 도동서원의 기와돌담은 아름답고 특징이 있다. 자연석 석축으로 기초를 삼고, 그 위에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반복하여 가지런히 쌓고 기와지붕을 얹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수막새 기와로 별무늬를 넣었다.
도동서원은 멋이 아니라 기능에서도 다른 서원보다 뛰어나다.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구조물을 빠짐없이 갖추었다. 사당 옆 담장에는 사각형으로 뚫린 빈 공간이 있는데, 이는 제사가 끝난 다음 제문을 태우는 차(次)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정당 서쪽 마당에는 사각 돌기둥에 네모난 판석을 얹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생단(牲壇)이라고 해서 제사 때 사용하는 생(牲 ... 소, 양, 염소 같은 고기류)을 제관들이 제사에 적합한지 아닌지 검사하는 단이다. 이들 시설물은 기능도 기능이지만, 서원 건축의 한 액서사리 같은 장식효과가 있다. 그 점에서는 중정당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정료대(정료대)가 압권이다. 긴 둘기둥 위에 네모 판석을 앉은 이 정료대는 일종의 조명시설로, 제사 때 이 판석 위에 관솔이나 기름통을 올려놓고 불을 밝힌다.
병산서원과 도동서원
어느 곳이 좋다는 표현을 하고 느낌을 가질 때는 이유가 있다. 다녀 본 서원들 중 병산서원과 더불어 이곳 도동서원이 기억 속에 가장 남는 곳이다. 두 곳 모두 누대(樓臺)와 강당, 사당의 순서로 배치된 산지형 서원의 형식을 빌려 배산임수가 잘 되는 터에 지은 곳들이다.
만대루를 앞에 두고 대청마루에 앉아 병풍처럼 둘러싸인 병산을 바라보는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 중 제일이다. 휘감아 도는 강의 고운 모래톱과 더불어 고적한 느낌의 병산서원과 비슷한 지형에 자리 잡은 곳이 도동서원이다. 다만 병산서원보다 강에서 좀 더 떨어진 거리에 자리를 잡고 있고, 앞은 들녘으로 툭 트여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조선 말기에 건축된 외삼문인 수월루(水月樓)가 병산서원의 만대루의 격에 미치지 못함도 아쉬움이다. 잠시 수월루 위에 앉아 강가를 조망해 보아도 만대루 같은 느낌은 나지 않는다. 앞의 江은 보이지만, 누각 자체가 전체 건물터에 비해 너무 높고 둔중한 느낌이어서 부자연스럽다. 1855년 수월루 증축 전의 모습도 이러했을까?
수월루는 1888년 화재로 소실되었었다. 그러다가 1962년 강당과 사당 그리고 담장 일곽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1973년 수월루 역시 복원되었다. 현존 수월루는 구조도 빈약하고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 도동서원 전체의 품격에 맞지 않는 졸작이다. 1987년 수월루 앞면 석축을 복원하였는데, 역시 손을 대면 댈수록 품격을 훼손한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줄 뿐인 정도이다.
수월루(水月樓) .. 낙동강 위에 뜬 달이라는 의미의 누각으로, 도동서원 맨 앞의 건물이다. 공부하던 선비들이 잠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누각(樓閣)에 오르면 낙동강과 고령 일대의 평야가 한 문에 들어온다.
불필요한 과장, 어울리지 않는 수월루
본래 1605년 도동서원 창건 당시에는 수월루가 없었다. 그랬던 것을 1855년(철종 6)에 증축한 것이다. 증축한 이유는 "서원의 제도에 맞으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유형학적 생각과 "서원 출입하기가 가파르고 갑갑하다"는 공간적인 것이었다. 과연 그랬을까? 그저 문중이나 따르는 유림들의 허세는 아니었을까..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 수월루는 도동서원 건축의 높은 격조에 큰 손상을 주고 있다는 주장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즉 수월루는 불필요한 건축적 과장(誇張)이라는 것이다.
도동서원은 가파른 비탈에 자리 잡아 앞마당부터 사당까지 계속 석축으로 이어진다. 막돌허튼층쌓기로 폭과 높이를 달리하며 전개해 올라가는데, 우선 은행나무에서 서원을 가로막듯 서 있는 2층 누마루인 수월루까지만도 4단이다. 사당까지는 모두 18단이다.
이처럼 자연의 형질을 변형시키지 않고 각 레벨을 살리면서 건물의 배치한 것이 도동서원 건축의 큰 자랑이고 특징이다. 그런데 도동서원 건축이 이러한 특징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서원 안쪽을 가로막고 버티듯 서 있는 수월루 때문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를 연상하면 바로 문제제기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도동서원 본래의 대문은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 갈 수 없는 매우 작은, 낮은 환주문(喚主門)이었다.
수월루는 19세기에 창건된 것이고,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의 복원품이다. 현재의 수월루는 너무 높게 지어서 강당에서 바라보는 전면의 경관을 방해하고, 건물 자체의 비례도 어정쩡하여 형태적으로 문제가 있다. 빈약한 부재들과 엉성한 결구법들에 덧씌워진 요란한 단청은 오히려 천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19세기의 누각은 이럴 정도로 졸작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월루가 뒤늦게 세워진 이유는 앞서 밝힌바 있지만, 그러한 명목상의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원이 향촌사회의 본거지로 자리 잡으면서 각종 향음례와 양로회 등의 연회상 집회를 열 장소가 필요했던 점이다. 또 평시에는 유생들이 휴식하고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였다. 서원 앞에 있는 누각은 그야말로 서원의 필수시설이었다.
수월루는 그 위치와 형상에 문제가 있지만, 철저하게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창건 당시의 기록을 보면, 수월루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경관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동쪽으로는 흐르는 물의 원류를, 서쪽으로는 푸르른 못산의 장관을, 남쪽으로느 제일강산정의 풍류가, 북쪽으로는 낙고재의 모습이, 위쪽으로는 사물(四勿)과 삼성의 서원 규칙이, 아래로는 조한정과 강변의 경치를 볼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東西南北上下의 6방향으로 선택된 특정한 경관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변에 부속 정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조한정은 수월루가 없던 초창기에 누각의 역할을 대신하여 휴식과 풍류의 공간을 제공했을 것이다.
환주문 喚主門
수월루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좁고 높이도 낮은 문이 있다. "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른다 "는 뜻의 환주문이다. 도동서원의 중심이자, 강학이 이루어지던 중정당(中正堂)에 이르는 문으로 갓 쓴 유생도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겸양의 문이다.
본래 1605년 도동서원의 창건 당시에는 수월루가 없었고, 창건 당시의 대문은 매우 작고, 낮은 환주문이었다.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갓 쓴 이의 갓이 닿을 정도로 낮다. 그러던 것을 1855년 수월루를 증축한 것이다.
도동서원에 들어서려면 관리사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수월루를 지나 환주문을 들어서야 하지만 수월루를 통하는 문은 평소 굳게 잠겨 있기 때문이다. 관리사는 이곳 도동서원을 관리하는 분이 살고 있는 곳인데, 그저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중정당의 앞 마당, 동재와 서재가 있는 넓지 않은 마당을 통해 환주문을 나선다. 환주문과 수월루와의 공간은 거의 없다. 환주문의 입구와 수월루의 누각이 바로 바라보일 정도로 수월루에서 환주문을 오르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다. 환주문(喚主門)은 키 작은 사람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낮다.
도동서원은 수월루에 이르는 거대한 4단의 석축이나 중정당이 앉아 있는 높은 기단처럼 위엄 어린
모습 속에서도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다. 위엄과 소박함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 눈으로는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조화로움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오랜 세월을 버텨내서 이제는 닳아빠진 느낌이 드는 돌계단의 부재들 하며, 그 부재들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들, 중정당 앞까지 나있는 아담한 돌길, 사당으로 오르는 길에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있는 거북이, 중정당 앞의 사나워 봉디는 거북머리, 중정당 기단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용과 짐승과 꽃이 조각된 돌들이 바로 그러하다.
동쪽에 도(道)가 있는 곳에 서원이 있으니 도동서원이다. 그 도(道)의 주인을 만나러 갈려면 환주문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 주인을 부르는 문 " 밖에서 문 안에 있는 주인을 부르는 門일 수도 있고, 내가 주인이라 내 마음 속의 주인을 부르는 소리일 수도 있다.
환주문 계단을 오르면 점차 중정당(中正堂)의 편액이 가까이 다가온다. 갓을 쓴 유생이라면 고개를 숙여야 들어설 수 있는 낮고 좁은 문은 사모지붕 위에 절병통이 얹혀 있어 소박하고도 귀여운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다. 문턱이 없는 대신 돌에 꽃 봉오리를 조각하여 놓은 정지석은 아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두기에 충분하다.
고개를 숙여야 들러갈 수 있는 곳에 고개를 숙인 것이 부끄럽지 않게 배려하고 있는 이 정지석이야말로 그저 문을 고정시키는 정지석에 불과한 돌에 뜻과 멋을 담아내는 옛 선비들의 지혜를 알게 되어 절로 미소가 나오고 고개가 숙여진다. 환주문 대들보 끝에 새겨놓은 연꽃은 이 작은 문 하나에도 온갖 정성을 다 담아 둔 것 같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강당으로 돌어서며 자신이 이곳에서 진리를 깨닫기 위한 주체자임을 환기시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짐작이 있다. 환주문은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는 낮고 좁은 사주문(四柱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필시 경건한 마음으로 강학의 공간에 들어 서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또한 여닫이 문을 세워 놓는 정지석이 필요 이상으로 큰 꽃봉오리 형태로 박혀 있다는 것은 이 또한 이곳을 들어서는 선비들이 낮은 문을 통하여 들어오면서 몸가짐과 걸음걸이를 조심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쨍한 햇살에 꽃봉오리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낸 정지석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구(警句) 한 마디도 이렇게 돌 하나에 예술적 감성을 얹어 표현하는 슬기로움에 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절병통 節甁桶
환주문 지붕 위의 꽃병모양 절병통은 선비의 갓을 떠오르게 한다. 비록 선비는 고개를 낮추고 들어오지만, 선비는 갓을 쓰고 들어오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환주문 지붕 위에 얹어놓은 항아리 모양의 절병통이 소박하기만 하다. 절병통(節甁桶)이란 궁전이나 육모 정자(亭子), 사모정자 따위의 지붕마루의 가운데 세워두는 塔 모양의 기와로 된 장식을 말한다. 이 절병통은 문을 만들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빗물이 지붕으로 스미는 것을 막는 용도라고 한다. 마치 라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주 마곡사의 5층석탑의 상륜부를 연상하게 한다. 이렇듯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몸가짐에 겸손함을 가르치는 환주문이 낮고 좁은 또 다른 이유는 강당인 중정당에서 수월루를 넘어 낙동강을 조망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함도 있다.
보물로 지정된 담장
토담으로서는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담장은 진흙과 큰 돌을 몇 줄 쌓아올리고 황토 한 줄, 암기와 한 줄을 교대로 놓고 지붕을 덮었다. 중간중간 수막새를 끼워넣고 지형에 따라 높낮이를 달리하여 자연미가 그대로 살아 있다.
토담은 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이용하여 튼튼하게 쌓아올리고, 암키와를 지붕으로 덮어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드문드문 그러나 대칭의 효과를 살리면서 수키와를 엇갈리게 끼어 넣어 무늬효과를 최대한으로 살리고 있다. 암키와와 숫키와를 함께 사용하여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앞면은 직선으로 수평의 담을 쌓아올렸고, 시선 차단효과를 노렸다.
옆면은 지형의 경사에 맞추어 높낮이를 바꾸어 가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듯 꾸몄다. 특히 사당 아래의 왼쪽 토담은 주위의 배롱나무와 함께 자연며조화를 이루어, 마치 선경(仙景)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분위기로 미끌고 있다. 비록 토담이 사람의 손을 거쳐 지어졌지만, 전혀 사람이 손을 타지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넘쳐 흐르고 있다.
도동서원은 다른 서원 그 어느 곳도 갖지 못한 독특한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름아닌 건물의 구성에 사용된 돌이 주는 아름다움이다. 이곳에서 나는 잡석을 원형대로 혹은 다듬어 여기저기 사용한 모양새가 예사로움을 넘어 하나의 미학적인 요소를 완성단계에 올려놓고 있다.
낙동강으로부터 형성된 낮은 구릉에 지어진 도동서원의 가장 앞자리에는 잡석 기단 위에 수월루가 세워져 있다. 질박하고 낮게 몇 단으로 나누어 쌓은 기단은 멀리서 보면 마치 논두렁처럼 소박하게 보이기도 한다.
수월루을 이어주는 담장과의 어울림도 그만이며 오른쪽 담장 아래로부터 서원 바깥으로 이어진 돌로 만든 돌길도 대충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기단 가운데로부터 외삼문이 나 있는 수월루 오르는 돌계단도 대충 비슷한 크기로 다듬은 돌을 잇대어 만든 것으로 오랜 세월동안 빛바래고 날카롭지 않게 깎인 모양이 밟아 오르는 사람을 마음 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지나치게 통일적인 형태는 이미 죽은 것이고, 자칫 획일적인 지루함으로 흐르기 쉽지만, 도동서원의 각 건물들은 변화있는 스케일을 채택함으로써 이 함정을 벗어나고 있다. 여기에 담장은 도동서원을 전체화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수단이다. 급한 경사지에 위치한 까닭에 담장들은 경사를 따라 몇 개의 수평선으로 分切된다.
그 분절된 면들의 형태는 동일하지만, 담장 면들의 크기와 길이는 서로 달라 변화있는 집합적 조형을 이루고 있다. 분절된 담장면들 사이의 관계는 독립적이지만, 그것들이 감싸고 있는 건물들과 명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한 차원 높은 전체성을 이룬다. 도동서원과 같이 담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아마도 크고 작은 돌과 견고하게 쌓여진 축조기법이나 별모양, 무늬장식 등 의장적 우수함 때문에 보호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보호해야할 내용은 담장면들의 비례와 변화있는 스카이라인일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담장을 보물로 지정한 것은 대단한 탁견이며,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차 次
사당의 담장 한 부분을 정사각형으로 파내고 담장 바깥과 통하도록 숫기와를 끼워 굴뚝의 역할을 하게한 감(坎.. 제문을 불사르는 곳) 또는 차(次)이다.
환주문을 중심으로 둘러 싼 담장은 도동서원의 또 다른 볼거리이다. 담장은 자연석을 정렬시킨 지대석 위에 자연 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를 5단으로 줄 바르게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올리고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었다. 암키와와 수막새를 끼워 넣는 이유는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생명력(生命力)을 불어넣고, 또한 장식성(裝飾性)을 최대로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곳의 담장은 전국 최초로 보물로 지정된 곳이다.
중정당 中正堂
중정(中正)은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염계 주돈이(廉溪 周敦이)가 지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인용되고 있다. 즉, 성인정이중정인의, 이주정, 입인극언(聖人定以中正仁義, 而主靜, 立人極焉) ... 성인은 알맞음과 올바름 그리고 인의(仁義)로써 모든 일을 정하였고, 고요함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의 기준을 세웠다는 의미이다. 中正은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실천한다는 뜻이다. 즉 중용(中庸)을 나타내고 있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605년에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고 잇는 담장과 더불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아한 건물이 주는 맛도 맛이거니와 이곳을 찾는 대개가 다 그렇겠지만 중정당 건물이 얹힌 기단이 특이하고 눈길을 끌고 있다. 기단 길이 17m, 높이가 1.5m에 이르러 건물의 위엄을 더해주는 것 이외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성을 하고있다.
마침내 중정당이 있는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측으로 서재가 있는데, 동재(東齋)를 거인재(居仁齋), 서재를 거의재(居義齋)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유교의 중심 사상인 인의(仁義)를 강조한 듯 하다. 환주문에서부터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는 납작하게 다듬은 볼을 깔아 사람 하나 지날만큼 돌길을 내었다.
특이한 것은 이 돌길과 중정당의 중앙 부위의 축대가 만나는 곳에 돌출된 돌거북의 머리가 조각되어있는데, 앙 다문 입 양족에 송곳니가 날카롭고 길게 나와 있으며, 이마에 잔뜩 힘을 준 사나운 형상이다. 이 돌거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강학 공간인 중정당 마당에서는 뛰지말고 조용히 하라는 묵언의 가르침을 주는 상징이며, 가운데 길은 스승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니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무엇 하나 말로 하지 않고 상징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의 속뜻을 새기기가 쉽지 않다.
화려한 기단, 검소한 강당
서원(書院)은 태생적으로 청빈(淸貧)한 건물이어야 한다. 청빈한 건축은 장식성이 배제되고, 구조체 자체가 노출되고 극히 필요한 기능만을 수용한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청빈한 건축의 극한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아무런 기능적(機能的) 욕심도, 일체의 장식과 가식과 은폐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극히 필요한 부재들로 극히 필요한 규모만큼 지은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곤궁함으로 인한 민가와는 달리 병산서원은 충분한 재력과 기술이 있으면서도 나타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 도동서원은 청빈의 이중성(二重性)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강당인 중정당의 기단은 대단한 기교와 정교한 기술로 축조되었지만, 기단 위의 건물은 위압적이기는 하지만 윤리적인 청빈한 건물이다.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중성이다. 강당의 기단은 여러 조각으로 다듬어 정교하게 맞추었다. 각기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을 정교하게 빈틈없이 잘 맞추었으며, 많게는 최대 12각형으로 까지 가공되었고, 평범한 사각형 부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단 윗부분에는 몇 개의 장식물을 조각하여 끼워 넣었다. 건물 정면 6개의 기둥에 맞추어 용머리를 조각한 4개의 돌과 다람쥐를 조각한 한 쌍의 판석을 끼워 넣었다. 기단 중앙에는 무엇인가 글자를 새기려고 준비한 것 같은 액자형의 미끈한 판석을 삽입하여 두었다. 기단의 윗면은 넙적한 가공석을 덮었는데, 두 단으로 처리하여 이중갑성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의 측면에는 돌판으로 만든 한 쌍의 툇마루가 놓여있다. 모두 다른 에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최고급의 구조물들이다.
반면 기단 위의 구조는 매우 청빈하여 대조적이다. 우선 초석들부터 가공되지 않은 덤벙주초이고, 그 위의 기둥은 민흘림이 있는 소박한 부재들이며, 포작은 출목이 있는 이익공 계통으로 고려 초이 주심포건물에서 볼 수 있는 강건함과 소작한 품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서원에 비한다면 다소 장식적이기는 하지만, 기단과 비교한다면 매우 가난한 건물이다. 귀솟음의 기법도 생략된 맞배지붕 때문에 건물의 형태는 직선적이다. 화려함이나 기교와는 거리가 먼 상부구조물이다.
도동서원의 경우 기단 축조에 상부구조물 공사비의 배 이상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면 왜 기단을 그처럼 기교적으로 처리하였는가? 아마 당대 최고의 서원으로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상부의 구조물에는 자제하였지만, 외부에서 눈에 잘 안띄는 하부구조에 노력과 경비를 집중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심증을 굳혀 주는 것은 당시의 재정적인 상황이었다. 1604년, 사당을 먼저 건립한 후, 서원 중건의 사실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의 유림들과 고위 정치가들이 앞다투어 성금을 보냈다. 강당 일곽을 신축할 때에는 이미 소요 공사비의 몇 배가 답지해 있었고, 그 잉여 비용을 강단 기단을 포함한 석물공사에 쏟아 부었을 것이다. 먼저 건립된 사당의 기단이 비교적 단순하게 처리된데 비하여 다른 부분들의 돌공사는 매우 장식적으로 처리된 이유가 될 것이다.
중정당 기단 中正堂 基壇
중정당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단도 아주 특이하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렸는데도 틈 하나 없이 끼워 맞추었다. 면도칼로 오린 듯 4각부터 12각 돌까지 튀어나온 모서리들을 정확하게 맞췄다.
중정당의 기단은 조각보를 연상시키는 무늬가 아름다운데, 유림회의의 총의로 추진되었던 재건 사업이었던 만큼 기단에 쓰인 돌은 한훤당 김굉필을 존경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보내왔다고 한다. 일본의 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일한 기념으로 오사카성을 지을 때, 각지의 번주들에게 그 지방의 가장 큰 볼을 바치라는 명령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번주들의 복종서약을 끌어낸 것과 같은가? 다른가? 물론 다르다.
12각형의 돌로 석축을...
우선 중정당 기단은 그 길이가 17m, 높이가 1.5m에 이르러 건물의 위엄을 더해주는 것 외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하고 재미있는 구성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돌을 쌓는 기술도 훌륭하고 아름답다. 우선 기단은 모양대로 잘 다듬은 돌을 격자를 맞추듯이 쌓아 올린 후 판석을 깔라 덮개돌인 갑석으로 삼았으며, 맨 위에는 좀 더 깔끔하게 한 단의 갑석을 더 얹었다.
마당 가운데 돌거북을 중심으로 기단 양편으로 계단이 잇으며, 기단은 사각형부터 12각형의 돌들은 조각보 잇듯이 돌 사이의 간격에 빈틈이 없게 정성으로 쌓아올려서 멀리서 보면 은은하고 조금씩 다른 색감을 가진 돌의 질감이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기계적으로 똑 같이 자른 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돌을 모서리만 다듬어 쌓는 데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었을 것이되, 후대에 남겨진 석면을 보는 이는 그 정성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12각형의 돌이 석축 기단에 사용된 예가 우리나라에서는 이곳 도동서원이 유일하다고 한다.
중정당의 기단은 우리 선조의 정성과 기술이 가득 들어있다. 기단은 가파른 산비탈에 튼튼한 건물을 세우기 위하여 보통 성인의 키만큼 앞면을 높이 쌓아 올렸다. 돌은 거의 같은 모양을 볼 수 없을 정도로, 6각형 내지 심지어는 12각형 모양으로 하나하나 다듬어서 모든 정성을 기울여 끼워 넣었다. 크기와 색깔을 더하거나 달리하는 돌들이 서로 섰여 조금의 틈도 없이, 서로 잇고 짝을 지어 맞물려서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높은 기단을 유지하고 있다.
같은 사물이라도 미묘한 차이로 모양과 색깔을 다르게 하고 있어도, 어떤 미묘한 차이도 서로 짝짓기에 의해 안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여러 빛깔의 돌들이 농도를 달리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크고 작게 만들어내는 여러 모양과 빛깔은 말 그대로 예술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학술명으로는 다듬은 돌 허튼층 쌓기라고 한다.
그렝이질
그렝이 공법이란, 한옥을 지을 때 주춧돌 위에 기둥을 초석의 윗면 모양대로 깎아 세우거나, 기둥 옆에 벽선을 세월 댈 때, 또는 도리 왕지맞춤 위에 추녀를 앉힐 때, 추녀와 도리짜임면에 갈모산방을 밀착시킬 때 등 복수의 부재를 밀착시킬 때 그 밀착되는 면을 깎아내는 기법으로 주로 우리 옛 건축에 사용되었다. 그렝이 공법은 거의 모든 한옥 건축에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렝이 기법으로 지어진 불국사의 경우 경주 인근이 활성단층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수천년 동안 끄떡없이 견뎌 왔다. 이 기법은 다른 나라 건축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기법으로 우리나라 의 뛰어난 간축기법의 일례이다. 아래 사진은 강당인 중정당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운 모습으로 그렝이 기법이 적용되었고, 기단의 돌들도 그 기법으로 다듬어져 석축되었다.
기단 정면 갑석 아래에는 물고기와 여의주를 물고 있는 네 마리의 용(龍)이 머리만 내밀고 있는 조각이 튀어나와 있다. 이곳이 낙동강의 흐름 중에서 강폭이 좁아지고, 물이 돌아나가는 곳이라 수해(水害)가 잦았던 탓에 수해를 예방하는 액막이용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용은 물의 神이라 화재 예방의 의미도 담고 있다.
마치 이는 절집에서 당우의 처마 밑에 설치한 용두(龍頭)를 보는 듯하며, 도동서원에 설치된 용머리는 사납지 않고 각각 조금씩 다른 모습을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네 마리의 용 중 왼편에서 두 번 째 것만 원래의 것이고, 나머지 세 마리의 龍은 도난 당하여 새로 만들어 끼워 넣은 것이다.
정료대 庭燎臺
정료대(庭燎臺)는 궁궐이나 서원, 향교, 사찰 등 넓은 뜰이 있는 건물에서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하여 설치한 시설물이다. 특히 야간에 행해지는 제례를 위하여 활용되는데, 일반적으로 사당 앞에 놓여지는 것에 반하여, 도동서원의 경우에는 정료대가 강당인 中正堂 앞에 놓여 있어, 제례가 강당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불을 밝힐 때에는 이 정료대 위에 소나무 가지나 관솔불, 기름을 태워 그 불로 어둠을 밝혔다. 도동서원의 정료대는 상석과 간석(竿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둘은 각기 다른 돌로 만들어졌다. 간석은 8각형이며, 상석은 정방형 평면이다. 주로 사용된 관솔불이란, 소나무에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나 옹이를 말한다. 관솔은 불이 잘 붙고 또한 잘 꺼지지 않으므로 불을 붙여 등불 대신 사용하였다. 순 우리말로 불우리라고 한다.
위 현판의 글씨는 퇴계 이황이 경상감영 도사(都事)로 있을 때 현판 글씨를 썼다고 알려지고 있다. 아래 사진의 도동서원 현판은 소위 사액서원 현판이다. 이 사액서원 현판의 글씨는 모정 배대유(慕亭 裵大維)의 글씨이다.
중정당 벽에는 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제일 오른쪽에는 임금이 내리신 전교문(傳敎文) 현판이 걸려 있다.다음은 중국의 주자(朱子)가 제정한 백록동규(白鹿洞規)의 현판이 걸려 있다. 백록동규는 중국 백록동서원의 학규(學規)로서, 유교의 기본사상과 교육의 목적 및 방법에 대하여 간략하게 적혀 있다. 영남 서원의 원규(院規)는 거의 대부분 퇴계 이황이 최초로 제정하여 전국의 서원에서 시행한 영주(榮州)의 이산원규(伊山院規)를 모범으로 따르고 있다.
마침내 중정당이 있는 마당에 들어서면, 좌우측으로 학생들의 기숙사가 있는데, 동재(東齋)를 거인재(居仁齋), 서재(西齋)를 거의재(居義齋)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유교의 중심 사상인 인의(仁義)를 강조한 듯 하다. 환주문에서 부터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는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깔아 사람 하나 지날만한 돌길을 내었다.
중정당 앞마당에 좌우로 낮고 작게 세워진 동재,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라는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다. 居仁과 居義는 맹자의 글에, 자신이 仁에 머물러 義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다 (吾身, 不能居仁由義, 之謂自棄冶)라는 말에서 인용된 것이다.
이 말은 바로 자기의 재주를 뽐내지 말고, 언제나 仁을 바탕으로 義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가치있는 삶이라는 의미이다. 논어 학이편(學而篇)에서 군자는 생활에 편암함을 찾아서는 안된다(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는 공자의 말씀에 따라, 선비들은 불편한 생활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좁고 답답한 방이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을 익히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도동서원의 定員은 사액서원이므로 20명이다. 문중 서원은 15명으로 법으로 정하였고, 성균관 문묘에서 배향받는 선생을 모시는 서원은 30명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서원의 유생들은 군역 면제 등의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정원보다는 훨씬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사당으로 오르는 길
중정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사못 다른 풍류가 감도는 아름다운 정원이 다가온다. 나지막한 언덕을 적절히 나누어, 5단으로 석축을 쌓아올려서 편평한 정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높은 담장 아래에는 세월을 헤아릴 수 없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배롱나무는 청순하고 늠름한 기품이 흐르고 있어, 선비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 비록 사람이 만들었으되, 하늘이 스스로 열어 놓은 듯하다. (雖由人作, 宛自開天(수유인작, 완자개천)... 선비는 모든 자연의 경치를 자기의 삶 속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이상세계를 그려 나갔다.
사당으로 오르는 길, 내삼문(內三門)이 있다. 사당은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엄숙한 분위기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사당은 정신세계와 현실세계를 분명히 구분되도록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당 입구의 문은 삼문(三門)으로 갖추어져서, 내삼문(內三門)으로 부른다.
내삼문으로 오른 길에는 계단이 두 개만 놓여있다. 오른쪽 계단과 문은 제례를 집행하는 제관이 다니는 계단으로, 졔레를 집행하는 제관은 중정당 벽의 현판에 쓰여 있다. 내삼문 중 한 가운데의 門은 신문(神門)으로 부르며 위패를 모시거나 제물을 옮길 때 문을 열고 있다. 계단 아래에 봉황이 무서운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곳은 신성한 장소로, 사람이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묵묵히 말하고 있다.
사당 祠堂
도동서원의 사당은 강당인 中正堂보다 6m 정도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여러 단의 석축을 쌓은 급경사면들은 계단식 정원을 이루며, 그 위에 담장을 두르고 있는 독립된 일곽이 사당이다. 사당 마당에 붙어서 "증반소(蒸飯所 ... 음식 등 제물을 만들거나 제기를 보관하는 곳)"가 있지만, 담장으로 격리하여 사당이 독립성을 유지한다.
넓적하게 가공한 판석으로 기단을 쌓고 기단 위에 전돌을 깔았다. 기단의 솜씨는 세련되었지만, 강당의 기단과 같은기교와 정교함은 보이지 않는디. 강당보다 먼저 건립된 탓일 것이다. 기둥의 초석은 원형으로 다듬은 정평주초로 역시 강당의 덤벙주초와 비교된다. 건물에는 귀솟음이 있고, 단청이 화려하여 소박한 강당과는 달리 상징성을 높이고 있다.측면 상부에 들창이 있어 내부를 어둡지 않도록 조절하였다.
석등 石燈
사당 앞에는 화사석이 분실된 석등이 놓여 있다. 정료대(庭燎臺)와는 달리 등잔이나 호롱불을 넣어 조명하던 시설이다. 사찰의 팔각형 석등과는 달리 사각형태를 기본으로 하였다.
次 또는 坎
사당의 서쪽 담장에는 차(次) 또는 감(坎)이라고 하는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장치는 제사 때 쓰인 제문(祭文)을 태워버리는 설비이다. 보통 서원에서는 이와 같은 별도의 설비를 두지 않고 사당 기단 한 귀퉁이에서 태워버리지만, 예법에 충실한 도동서원에는 특수한 장치를 고아ㄴ, 설치해 둔 것이다. 담장의 한 부분을 정사각형으로 파내고 담장 바깥쪽으로 수키와를 끼워 넣어서 굴뚝의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설비를 설치하면 담장이 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그 부분의 담장을 특별히 두텁게 쌓은 치밀함도 보여주고 있다.
사당 내부
사당 내부의 벽화
사당 내부의 단청은 17세기 창건 당시의 단청이 그대로 보존되어 흥미롭다. 특히 양 측벽 상부에 그려진 문인화풍의 산수화(山水畵)가 독특하다. 사당 안에 벽화가 있다는 사실은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 라는 화제의 그림과 "설로장송(雪路長松)"의 화제가 붙은 그림으로, 작가는 아마 김굉필의 제자들이거나 후손들로 추정되고 있고, 예사스런 솜씨는 아니다.
설로장송 雪路長松
일로창염임로진 / 一老蒼髥任路塵 /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노노영송왕래빈 / 勞勞迎送往來賓 /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세한여여동심사 / 歲寒與汝同心事 / 찬 겨울에도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경과인중견기인 / 經過人中見畿人 /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을고
강심월일주 江心月一舟
선여천상좌 / 船如天上坐 / 배는 하늘 위에 앉은 듯
어사경중유 / 魚似鏡中遊 / 물고기는 거울 속에 노니는 듯
음파휴금거 / 飮罷携琴去 / 술 마신 후에 거문고 끼고 돌아가
강심월일주 / 江心月一舟 / 강 복판 달빛이 배에 가득하네
전사청 典祠廳
중정당 좌측 사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단(牲壇)이 있다. 생단이란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사에 쓰일 희생물이 온전한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제사가 儒者들에 있어서는 가장 엄숙하게 거행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에 쓰일 제물(祭物)도 가장 완벽하고 고결한 것을 사용한다.
성리학의 중요한 규범 가운데 하나가 중용(中庸)이다. 중용이란 치우치지 않고, 바뀌지도 않는 것으로 모든 행동의 준거가 되는 규범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대칭의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유교적 예법은 유독 대칭과 균형을 강조한다.
대칭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건축적 수법은 바로 강력한 중심축을 설정하는 것이다. 유교건축에서 중심축이란 질서요, 기준이며 모든 구성원리의 근본이 된다. 비록 대칭이 유교건축의 규범이라 할지라도 도동서원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초기의 성리학자들은 명목적인 대칭이면 만족하였고, 어긋난 치수나 각도를 오히려 여유로 즐겼기 때문이다. 병산서원과 도동서원에서는 부분적인 비대칭은 물론 아예 사당영역을 중심축 선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명실상부한 대칭성의 규범을 적용할 때, 가장 문제가 발생하는 곳은 생활공간이다.
서원 내부의 생홀공간은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이다. 수십명의 유생들이 기거해야할 이 건물들은 동향과 서향으로 놓여져 매우 불리한 일조조건을 감수하고 있다. 또 서원 마당의 초월적규범을 위하여 일상적인 기능들은 모두 전면에서 제거되었다. 난방을 위한 아궁이 마저 모두 건물 뒷면에 은폐시켜, 비록 노복들의 임무이기는 하지만 불때기에 매우 불편하다.
강당이나 사당 등 일시적인 의례에만 사용되는 공간은 의례 자체가 대칭적으로 구성되고 잠깐동안만 참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은 그처럼 대칭적이지도, 일시적이지도 않다. 도동서원은 대칭성의 규범을 전사청 영역까지 적용하려 하였다. 전사청은 서원의 노복들이 기거하면서 유생들의 음식과 세탁, 청소 등을 수발하던 곳이며, 제사 때에는 제수를 마련하고 참례인들의 숙소로 제공되었던 공간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전연 비대칭적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전사청은 ㄷ자 집으로 대칭적인 방 배열을 하고 있다.
성리학적 질서란 인간의 모든 행위에 서(序)를 정하는 것이다. 흔히 향교와 서원의 모습은 공자께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으로 비유되고 있다. 서원에서 강당과 동,서재의 관계, 혹은 향교에서 대성전과 그 앞의 동서무와 주종적인 괸계를 빗대어 유추한 표현이다. 건축마저도 인간들의 관계로 의인화하여 서열을 매기고 위계화한다. 도동서원의 경우 우선 서원영역이 주인이며, 전사청 영역이 하인이다. 하인 영역은 주인 영역보다 커서도, 높아서도, 화려해서도, 튼튼해서도 안 된다. 서원 내부로 오면 사당 영역이 강당군보다 높아야 하고, 화려해야 하며 독립적이어야 한다. 도동서원이 이전 중건 되던 17세기 초는 이미 향사 위주로 서원의 기능이 변모하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학문은 이렇게 !!!
벽을 쌓은 벽돌의 크기가 다르다. 아래 벽돌은 두껍고 크며, 위로 올라갈수록 얇다. 학문은 이렇게 닦으라는 의미이다. 말 한마디없이 이렇게 조형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