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도들과 월남 피난민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재미동포사회는 유달리 보수적이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관심 또한 재일, 재독 동포사회보다 적었다. 그러나 재미 동포들은 5·18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해서 조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5·18 이후의 조국 정세의 변화, 특히 반미 자주화운동의 확산은 재미동포들을 고민에 빠트렸다. 재미 동포들의 5월운동은 그러한 배경 속에서 진행되었다. '80년대 초반기의 미국내 5월 운동은 동포사회 중심의 대내적 운동 - 전·노 방미시의 규탄 시위, 5·18기념행사의 정례적 개최 등 - 이었고 시위나 기념행사의 기조 또한 전·노일당의 학살만행과 피해 실태의 폭로와 규탄에 맞춘 인권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5·18을 냉전·분단과 미국의 지배와 개입의 배경과 틀 속에서 인식하는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운동체 - 재미한청련('84)-의 출현을 계기로 해서 '80년대 중반 이후의 미국내 5월운동은 민주·자주·통일·평화운동 차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타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연대 활동과 교육·홍보활동의 강화 그리고 조국 5월운동과의 연대강화로 나타났다.
'99년까지의 미국내 5월운동을 몇 가지 분야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 타민족 상대 외교·연대활동
[재미한청련]이 캘리포니어의 진보적인 도시인 버클리(Berkeley)시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86년 5월 10일을 광주민중의 날(Kwang Ju People's Day)로 선포케 하는데 성공.
- 당일 버클리에서 궐기대회, 시가행진, 판화전시회, 풍선 날리기, 연주회, 강연회, 기록영화상영 등의 다양한 행사를 함.
2. 타민족 상대 교육, 홍보 활동
ㄱ. 분단과 5·18, 군사·핵 문제를 다룬 창작 마당극 -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을 가지고 동부지역 순회공연 ('85 - '86, 재미한청련, 뉴욕한인 문화패 "비나리")
ㄴ. 타민족을 대상으로 한 5·18 기념행사를 2회 개최('90, '92년 위싱턴D.C, 재미한청련, 재미한겨레, 국제연대위 동부위원회)
ㄷ. 타민족을 대상으로 한 공개 토론회 3회 개최
- Hartford('87), L.A('88), 워싱턴D.C('95),
:[재미한청련][재미한겨레]Korea홍보교육원(KIP)
* '87, '88 년 토론회는 분단, 5·18, 한미관계 등을 포괄적으로 다룸.
* '95 년 토론회는 5·18만을 주제로 함.
ㄹ. [한겨레 미주 홍보원](KIRC)에서 발간하는 부정기 간행물인 Korea Report에서 5·18 문제를 다룸.
ㅇ. 제2호('87) - 특집 "되돌아 본 광주민중항쟁"
ㅇ. 제7호('88) - "광주민중항쟁과 제주민중항쟁에 대한 재평가"
ㅇ. 제11호('90) - "광주민중항쟁 그 십년 후"
* Korea Rerort 는 조국의 현실과 운동을 다루는 부정기 영문기관지로 1회 평균 4000부를 제작하여 20개국의 독자들과 미국내의 각 도서관들과 진보적인 단체들과 개인들에게 보급, 판매함.
ㅁ. 각종 국제 행사에 대표들을 파견하거나(6회) 미주내 각종 집회와 시위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5·18 관련 비디오tape등의 자료들을 보급, 판매함.
ㅂ. 조국의 분단, 군사, 5·18, 한미관계 등을 주제로 한 창작극 "해방의 소리"를 가지고 유럽 7개국과 호주를 50일간 순회하며 21회의 공연을 함.
('91. 9월 - 10월. [해외 한청련],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연대위원회])
3. 전두환, 노태우 방미시의 항의, 규탄 시위
전·노가 방문할 때마다 도착 공항, 리셉션 장소 겸 숙소, 방문지 등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항의, 규탄 함.
4. 조국의 5·18 운동과 연대
ㄱ. L.A 에 [광주 수난자 돕기회]를 결성하여 자료보급 및 모금 활동('82.6 - '88.6)
- 3만여불 광주로 송금.
ㄴ. L.A, 북가주, 시카고, 뉴욕, 필라델피아에 [5·18 광주민중혁명 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모금활동('85 - '86)
- 3만5천불 광주로 송금.
미주 각 지역의 동포운동단체들은 해마다 5·18 기념행사를 지역별로 개최해왔다. (L.A, 북가주, 씨애틀, 시카고,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 캐나다 토론토). 행사는 대부분 기념식과 뒤이은 강연회 또는 5·18 기록영화 상영으로 꾸려졌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 동포들의 관심이 식어감에 따라 '88년부터는 일반 동포사회단체들의 후원을 받아 [한청련]과 [한겨레]가 주도하여 미주 각 지역의 기념행사를 통일적으로 개최하게 되었고 기념행사 내용도 동포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문화행사 중심으로 하게 되었다.
(미국 L.A와 캐나다의 토론토에서는 '92년부터 몇몇 단체들이 "5월제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행사를 주관했다.)
'89년 이후의 미주 전지역(캐나다의 토론토 포함) 5·18 기념행사 내역은 다음과 같다.
'89년(제9 주년) - 기념식 + 영화 "오, 꿈의 나라" 상영
'90년( "10 " ) - " + 영화 "파업전야" 상영
'91년( "11 " ) - " + 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 상영
'92년( "12 " ) - " +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 상영
*L.A에서는 4.29 폭동 직후라 기념식 후에 4.29 사태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가짐.
'93년( "13 " ) - 각 지역에서 다양한 행사를 가짐.
'94년( "14 " ) - 기념식 + 광주의 극단[토박이] 초청 연극 공연 ("모란 꽃")
'95년( "15 " ) - " + 광주의 오창규, 박문옥 초청 노래 공연 ("광주여! 우리의 노래여!")
'96년( "16 " ) - " + 광주의 극단[토박이] 초청 연극공연 ("금희의 오월")
'97년( "17 " ) - " + 광주 MBC제작 다큐멘타리 드라마 "시민군 윤상원" 상영
'98년( "18 " ) - 전·노일당 사면, 5월 관련 단체 및 관련 인사들의 사면동의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전 지역에서 행사를 하지 않음.
'99년( "19 " ) - 기념식 + 극단[토박이] 제작 영화 "붉은 벽돌" 상영.
맺음말
'87년의 조국 대통령 선거 때의 지역 대결과 그후 날로 심화되는 지역주의는 재미 동포사회에 조국과 민족에 대한 절망과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노태우 정권 초기('88년)에 5·18이 "5·18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불리우게 되고 관련자들에 대한 사면·복권, 전두환의 연금, 광주 청문회 개최, 그리고 피해 보상이 거론되는 등 5월 문제가 부분적으로 해결되기 시작하자 재미 동포들의 5·18에 대한 관심은 눈에 띄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동포사회운동단체들은 5월운동에서 손을 떼어버렸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한청련]과 [한겨레] 그리고, 일부 지역의 [호남향우회]에 의해 유지되어오던 5월운동은 '95년 조국에서 전국적인 5·18특별법제정 촉구운동이 일어나고 전·노가 구속되자 다시금 활기를 되찾아갔다. 그러나 '97년 대선을 전후한 조국 정치권의 정략적인 전·노 일당 사면 쑈는 미국내 5월 운동을 잔인하게 학살해 버렸다.
특히 당시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이중성은 미국내 5월 운동을 확인 사살하여 버렸고, 조국의 5월 관련 단체들과 관련 인사들의 음모적이며 기습적인 전·노사면 동의는 미국내 5월 운동 시신을 깊숙이 암매장해버렸다.
앞으로도 재미 동포사회의 5·18 기념식만은 해마다 계속될 것이다.
국가기념일이 되었으니까 현지 영사관이 주최하는 5·18 기념식장에서 전두환이나 노태우가 기념 강연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박정희 기념관도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비로 세우겠다고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