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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7월 22일, 지중해에서 6개월 동안 전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미 해군 항공모함 CVN-73 조지 워싱턴 호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출격 임무가 벌어졌다. 때마침 그곳을 방문한 버지니아 주지사 조지 알렌(George Allen)의 수신호로 제34공격비행대 소속의 A-6E가 갑판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인데, 이는 역사상 최고의 공격기로 명성이 드높았던 A-6 인트루더(Intruder)의 마지막 비행이었다.
A-6 인트루더의 마지막 비행
도열한 갑판 운영 요원들과 함교에서 이를 지켜보던 항공모함 승조원들은 한 시대를 풍미한 공격기의 마지막 출격에 경례를 붙이며 경의를 표하였다. 그렇게 마지막 출격 비행을 마친 A-6은 7개월 후인 1997년 2월 28일,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그 중 상태가 양호한 것들은 치장물자로 전환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6년에 있었던 항공모함 탑재용 제공기였던 F-14 톰캣(Tomcat)의 은퇴와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조촐한 그들만의 행사였다.
영화 '탑건(Top Gun)'등을 통해 널리 소개 된 F-14는 수많은 애호가들을 양산하였을 정도로 멋진 전투기여서 퇴장을 안타까워하던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미 해군 당국이나 현역 부대원들이 은퇴를 가장 아쉬워하였던 함재기는 A-6이었다. 물론 제공 전투기와 공격기를 동일 선상에 넣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운용 당시에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호평을 받은 함재기가 바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A-6다.
새롭게 제기된 필요성
제2차 대전 말기에 도래 한 제트 시대는 군용기의 급속한 세대교체를 불러왔는데, 한마디로 1950년대는 수많은 종류의 제트기들이 제작되어 사용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기였다. F-35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은 여러 업체들이 콘소시엄을 구성하여 개발에 나서야 할 만큼 개발 환경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많은 나라와 업체들이 각각 군용 제트기 개발에 뛰어들었을 정도였다.
미 해군도 이 시기에 다양한 종류의 제트기를 개발하여 운용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당시 여건에서 항공모함 탑재용 전투기로는 과분하다고 할만한 F-4 팬텀 II(Phantom II) 같은 불세출의 전투기까지 등장하였다.대함, 대지 타격을 목적으로 하는 공격기도 마찬가지로 급속한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프로펠러 공격기로부터 중폭격기 수준의 공격기에 이르는 다양한 기종이 동시에 사용 되었다.
당시 미 해군은 제2차 대전 말기에 제작된 A-1, 작지만 강력한 무장이 가능한 A-4등을 전술 폭격에 사용하였고 적진 깊숙이까지 침투하여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A-3, A-5를 마치 공군의 전략 폭격기처럼 운용하였다. 물론 각각 사용 목적이 다르지만 작전기가 이러 저리 나뉘는 것은 유지 보수 측면에서도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미 해군은 이들을 하나로 대체할 새로운 공격기의 필요성을 느꼈다.
제시된 요구사항
1955년 당국이 새로운 공격기 개발 사업을 선언한 후 1957년 2월 제안서가 각 개발사에 전달되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엔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피스톤 엔진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는데, 제트 시대가 본격 도래 하였음에도 신형 공격기에게 있어 속도는 그다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핵심은 장거리를 적의 레이더망을 피할 수 있도록 저공으로 침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즉, 멀리 있는 목표 지점까지 안전하게 날아가 작전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 것인데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폭장량은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함재기는 좁은 항공모함에서 운용할 수 있도록 기체에 제약 사항이 많아 육지에서 운용하는 공군기에 비해 폭장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폭탄을 많이 달면 이함하는데 문제가 생기고 장거리 비행도 어려우므로 기존에 운용하던 공격기 수준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해 8월까지 모두 미국의 8개 항공기 제작사가 설계안을 제출하였고 그 중 그루먼(Grumann)이 제시한 128Q안이 채택되었는데 그루먼은 이를 A2F 인트루더로 명명하고 본격 개발에 나섰다. 이처럼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한국전쟁을 전환점을 하여 냉전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의 개발과 획득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를 경악시킨 스펙
실험기인 YA2F-1이 1960년 4월 19일에 초도 비행에 성공하였을 만큼 개발 과정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그런데 허겁지겁 개발된 것 같은 A2F가 보여준 성능에 모든 이들은 경악하였다. 우선 5,000km가 넘는 항속거리는 기대 이상이었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자동항법 및 폭격 시스템인 DIANE을 장착하여 초저공 침투가 가능하였다. 하지만 진정으로 놀라웠던 것은 폭장능력이었다.
A2F은 최대 8톤의 무장을 하고 이함할 수 있었는데 B-29 중폭격기가 9톤의 폭탄을 탑재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예상을 뛰어 넘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제2차 대전 당시의 중폭격기를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었다. 특히 DAINE으로 인하여 정밀 폭격이 가능하였는데 이 때문에 베트남전에서 주로 융단 폭격에 투입된 공군의 전략폭격기인 B-52보다 효율이 높았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실험 결과에 대 만족한 미 해군 당국은 양산을 서둘렀고 1962년 군용기 제식부호 통일 사업에 따라 A-6 인트루더로 이름을 바꾼 후 1963년 2월 전환훈련 비행대가 편성된 후 빠르게 기존의 공격기들을 대체하여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5년부터 베트남전에 투입되어 실전에서 활약하였다. 초기에는 DIANE이 수시로 오류를 범하여 애를 먹기도 하였지만 실전 결과를 바탕으로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A-6의 능력을 증대시켰다.
미국의 무기 욕심이란…
그런데 A-6의 개발 과정 중에서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새로운 무기 획득에 대한 미국의 놀라운 욕심이다. 그들을 경악시킨 A-6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미 해군 당국은 인트루더가 막 배치되기 시작한 1963년에 A-4를 대체할 새로운 경공격기 도입 사업을 시작했다. 기존의 모든 공격기를 대체하려는 A-6의 도입 이유를 망각하고 예전처럼 A-6은 장거리 공격기로, 새로운 공격기는 경공격기로 이원화 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하여 1967년부터 실전 배치된 새로운 공격기가 바로 A-7 콜세어 II(Corsair II)다. 보우트(Vought)사의 항모 탑재 제공기로 인기가 높던 기존 F8U을 베이스로 제작되었는데, A-6와 달리 외국에도 수출이 되었고 자존심이 강한 미 공군도 채택하였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한편 이것은 모든 작전에 무턱대고 투입하기 곤란할 만큼 A-6의 위력이 너무 강력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즉, 닭 잡는데 굳이 소 잡는 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처럼 미국의 무기 도입 정책이 중구난방이었던 이유는 당시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제2차 대전 종전 후 1960년대까지는 정치적으로는 냉전시기였고 경제적으로 미국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던 황금기였다. 따라서 지금과 달리 이런 시대 배경을 바탕으로 미 군부는 그들이 원하는 무기를 쉽게 취득할 수 있었고 여기에 자신들의 제품을 팔기 위한 미 군수업체의 치열한 로비도 크게 한 몫 하였던 것이었다.
미 해군의 마당쇠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그 동안 야심만만하게 제작하였던 수많은 공군, 해군기들을 투입하였는데 정작 일선에서 호평을 받았던 기종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결과는 눈으로 적을 확인한 후 공대공미사일을 사용하라는 엉뚱한 교전 규칙을 강요한 정치권의 간섭 등이 겹쳐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지만 생각만큼 새로운 전술기들이 일선의 요구를 충족하여 주지 못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A-6의 활약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당시 투입된 미군의 전술기 중에서 A-6은 우기나 야간에도 상관없이 전천후로 저공 침투작전을 수행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종이었다. 물론 저공으로 침투하다 요격되기도 하였지만 여타 전술기들에 비해 특별히 피격 비율이 높았던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미군 당국의 신뢰도는 더욱 커졌고 다양한 형태의 개량형이 등장하여 와일드 위즐(Wild Weasel)형인 B형, 야간 정밀 폭격이 가능한 C형, 공중급유기인 KA-6D형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개량 과정을 거쳐 1970년에 최종 형이라 할 수 있는 A-6E이 등장하여 1997년 퇴역 시까지 미 해군의 주력 공격기로 맹활약하였다. 그레나다 침공전, 레바논 분쟁, 리비아 공습, 걸프 전쟁 등 미군이 참전한 거의 모든 싸움터에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주로 개전 첫날 기선제압을 위한 저공 침투 공격의 주인공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냉전의 종식은 냉전이라는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탄생한 A-6의 퇴장을 불러왔다.
조용히 사라진 걸작
A-6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진 미 해군은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기 위해 E형을 개량한 F형 개발에 나섰지만 전격 취소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냉전 종식 이후 도입 비용 절감, 정비 편이성 등을 위하여 함재기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일하기로 한 결정 때문이다. 따라서 제공기는 F-14, 공격기는 A-6로 구성된 기존 미 해군의 전술기를 전투공격기인 F/A-18로 단일화하면서 A-6도 일선에서 은퇴하였다.
물론 A-6가 맹활약하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장거리 미사일을 이용한 초정밀 폭격이 대세인 시대가 되어 현역으로 계속 활약하기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임무를 대신할 F/A-18E/F 슈퍼 호넷(Super Hornet)의 최대 항속거리가 3,300km인 점을 고려한다면 비록 기체의 노후화와 정책적인 문제로 퇴역하였지만 아직까지 A-6에 맞먹는 전술기는 없다. 따라서 아쉬움이 큰 미 해군 당국은 예비기로 보관 중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출현과 퇴장에 있어 약 10여 년 정도 차이가 있지만 제공기와 공격기로 명성이 자자하였던 F-14와 A-6의 하선 과정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자는 그 특유의 카리스마와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매니아들의 아쉬움과 매스컴의 조명 속에서 떠들썩하게 이별을 고하였지만 후자는 자고 일어나니 없어졌다는 말이 들 정도로 조용히 사라져 갔다. 가장 큰 이유는 외형에서 풍기는 선입관 때문이다.
사실 미 해군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극구 찬양하는 성능과는 별개로 A-6은 한마디로 외모에서 인기를 끌 요소가 거의 없는 못생긴 함재기였다. 때문에 보고 즐기기만 하는 매니아들에게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그러나 A-6은 비록 못생겼지만 그 진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보물대접을 받는 진정한 걸작이었던 함재기였다.
제원 (A-6E)
전장: 16.6m / 전폭: 16.2m / 전고: 4.75m / 최대이륙중량: 27,500kg / 최고속도: 1,040km/h / 항속거리: 5,222km / 실용상승한도: 12,400m / 폭장량: 8,170kg
글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