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카시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Abbazia di Montecassino)
몬테카시노(Montecassino)는 우리말로 카시노 산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해발 519m의 산 꼭대기에 세워진 수도원입니다.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에서 태어난 베네딕도 성인은
수비아꼬를 떠나 529년경 이곳에 정착하여 베네딕도회의 모체가 되고
서양 수도회의 모델이 되는 수도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중용과 공동생활을 중시하는 수도 규칙서를 저술하여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547년 선종하실 때까지 이곳에서 사셨고 선종 후에는
그의 쌍둥이 여동생인 스콜라스티카 성녀와 함께 묻혀계십니다.
역사 속에서 이 수도원은 네 번의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첫 번째는 577년 롱고바르도족의 침입으로,
두 번째는 883년 사라센인들의 침입으로 파괴의 시련을 겪었고,
세 번째는 1349년 대지진으로 수도원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2월 18일
연합군의 리더인 미군이 당시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항하는 독일군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무려 1250톤의 폭탄을 투하한 폭격으로
거의 대부분의 수도원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티칸의 재건사업으로
현재 수도원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이 수도원은 11세기 말~12세기 초 데시데리우스(교황 빅토르 3세)와
오시데리우스 아빠스 시절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17세기 중반에는 수많은 고문서와 사본을 갖춘 유럽 최고의 도서관이 되어
서양문화의 중심이 된 수도원입니다.
입구 정원
수도원 내부에 있는 세 개의 정원 가운데 첫 번째 정원으로
이 정원은 베네딕도 성인이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
아폴로 신전이 있었던 장소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이교도 신전을 허물고 그 위에
투르의 성 마르티노(4세기 프랑스의 첫 수도회 창설자) 주교를 기념하는 성당을 짓고는
처음 수도생활을 시작하셨던 장소입니다.
정원 중앙에는 성인이 선종(善終) 하시는 모습을 표현한 청동 조각이 보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전기를 쓰신 그레고리우스 대교황님의 기록에 의하면
베네딕도 성인이 돌아가실 때 마지막 성체를 모시고 난 후
일어서서 죽음을 맞이하셨다고 합니다.
청동작품은 1952년 독일의 수상이었던
아데나우어(Adenauer)가 기증하였습니다. (작가: Attilio Selva)
정원 바닥에는 당시 아폴로 신전의 석재 일부가 보입니다.
그리고 이 정원 지하에는 현재 복원된 성 마르티노 성당과
베네딕도 성인의 방(Cella)이 있습니다.
반대편 벽에는 성모 마리아와 마르티노 성인 사이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표현한 모자이크 작품이 있습니다.
(작가: F. Vignanelli)
브라만테 정원
르네상스 양식의 정원으로 1595년에 완성된
일명 "브라만테의 정원"입니다.(크기 30m * 40m)
발코니에서 리리(Liri) 계곡의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으며,
한쪽 편으로 1944년 몬테카시노 전투 당시
이곳에서 희생을 당한 폴란드 병사들의 묘지도 볼 수 있습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좌우 양쪽에는
베네딕도 성인과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석상이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석상은 1735년 (Pier Paolo Campio di Carrara)의 작품으로
1944년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원형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석상의 발아래 빵을 물고 있는 까마귀를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를 시기하였던 플로렌시오 신부가 독이 든 빵을 성인에게 보내어
독살하려고 했던 수비아코에서의 일화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Benedicius qui venit in nomine Domini”-
베네딕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이곳에 오셨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석상 원본은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현재는 새로 만든 석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녀의 상징인 비둘기를 볼 수 있습니다.
성녀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의 영혼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베네딕도가 보았다고 합니다.
아래쪽 글귀는 “Veni colomba mea, veni, coronàberis“-
오라 나의 비둘기여(성녀 스콜라스티카), 오라, 왕관을 받을 것이다.
후원자들의 정원
회랑 내부에는 1666년에 24분 후원자들의 석상을 설치하고
후원자들의 정원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역사 속에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후원했던 중요한 후원자분들입니다.
성당 정면에는 “Benedicti numine sancta“ -베네딕도 성인의 소원으로 지어졌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성당 입구에는 3개의 청동문이 있는데,
좌우 양쪽 2개의 문은 1954년 이탈리아 대통령인
루이지 아이나우디(Luisi Einaudi)가 기증한 문입니다.
중앙문은 106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작된 청동문으로 정면에는
11~12세기 몬테카시노 수도회 소속의
성당과 수도원의 명단들이 기록되어 있는 중요한 문입니다.
이 문은 아말피 공국의 집정관이었던 판타레오네(Pantaleone)의 아들인
마우로(Mauro)가 당시 아빠스였던 데시데리우스(Desiderio)-
훗날 교황 빅토르 3세가 된다.-에게 기증한 것으로
이는 당시 교회에서 금기시하였던 노예 매매로 부자가 된 판타레오네가
자신의 죄에 대한 보속으로 로마 성 바오로 대성당의 청동 문과 함께
동방에서 제작하여 이곳에도 기증하였습니다.
성당(Basilica)
내부길이 62m의 라틴십자가 형태로 좌우에는
각각 4개씩의 소경당들이 있습니다.
화려한 내부는 이탈리아 남부 바로크 양식입니다.
1944년 폭격으로 파괴된 이후 17세기 코시모 판자기(Cosimo Fanzago)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예전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내부 입구 부분에는 규모가 큰 프레스코 벽화가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영광(베네딕도의 파라다이스)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1979년 피에트로 안니고니(Pietro Annigoni)의 작품입니다.
성당 제대위 천장도 그의 작품입니다.
그림 중앙에 베네딕도 성인과 베네딕도 수도회의 회칙에 따라
충실하게 살다 죽은 베네딕도 수도자들의 모습이 있고,
아래쪽에는 왼쪽부터 순서대로 세 분의 교황님이 등장합니다.
1) 베네딕도 성인의 전기를 쓴 성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2) 1964년 복원한 새 바실리카를 축성하시고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신 교황 바오로 6세.
3) 11세기 아빠스 재임 시절 몬테카시노 수도회를 크게 발전시키고
교황이 되신 성 빅토르 3세 교황.
제단은 계단으로 높여져 있고, 제단 뒤편에 베네딕도 성인과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무덤이 있습니다.
1944년도의 폭격 당시 이곳에 떨어졌던 폭탄이 폭발하지 않았고
기적적으로 두 성인의 유해도 온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성인이 마주 보고 누워계신 장면의 그림(Cavalier d’Arpino, sec. XVII)도
온전하게 발견되었다.
제단 뒤편으로는 1692~1708년에 만들어진 호두나무로 된 가대(Coro)가 있고,
새로 설치된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은 5000개가 넘는 파이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도 수시님들이 모여 매일 성무일도를 바칠 때
그레고리안 성가로 하시며 매주 주일 중심 미사 때도
창미사(그레고리안 성가)로 진행합니다.
지하 경당(Cripta)
지하경당(Cripta)는 중앙제단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1544년 중앙제단 아래의 암반을 파서 만든 경당입니다.
그 덕택에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내부 16세기 벽화 장식은 1913년(독일 베네딕도 수도회 모자이크 스쿨에서)
현재의 모자이크 장식으로 새로 교체하였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1964년 베네딕도 성인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2월 10일) - 최초의 베네딕토 수녀회 원장
2월 10일 오늘은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축일입니다.
그녀는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투스의 쌍둥이 누이동생이었고,
성 베네딕투스와 함께 어릴 적부터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베네딕투스 성인이 수비아코 동굴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에는
근처의 한 수녀원에 있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성 베네딕투스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 대수도원을 설립한 후
그곳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피우마롤라에 설립한
최초의 베네딕도 수녀회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대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가 남긴 "대화집 제33장"에는
그녀가 선종하기 직전 성 베네딕투스와의 만남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평소 성 베네딕투스는 1년에 서 너번 그녀를 방문하여
안부를 확인하고 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함께 기도하고 영적인 대화를 나눈 후
성 베네딕투스는 자신의 수도원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빠와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한 성녀가
베네딕투스 성인에게 다음날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하였으나
베네딕투스 성인은 수도회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성녀가 하느님께 잠시 기도를 드렸고,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베네딕투스 성인 일행은
한 걸음도 밖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베네딕투스 성인이 스콜라스티카 성녀에게 방금
"네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라고 묻자,
성녀는 "오빠가 들어주시지 않은 제 소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두 남매는 그날 밤 밤새도록 하느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더 함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운명하셨고,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영혼이
하얀색 비둘기의 모습으로 승천하는 모습의 환시를 보았다고 합니다.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동생의 시신을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안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안장하였습니다.
8세기 말 베네딕토 수도회의 성무일도에 그녀의 축일이 수록되었고,
9세기가 되면 전 세계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성녀의 축일을 기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1~13세기가 되면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 예절이
범교회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나,
로마 전례력에 정식으로 축일이 수록된 것은 18세기경입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 성녀로 공경받고 있고,
비둘기는 그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