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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주재이선생유지
无垠門 (무은문) ~ 끝이 없다
하남읍 명례리 1118(명례안길 50)에는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의 8세손 낙주洛洲 이번李𤃃이 권세를 멀리하여 생명을 보존코자 은둔하여 여생餘生을 보낸 곳이다. 구글 지도의 좌표로는 「위도 35°21'00.7"N 경도128°45'55.7"E」를 표시한다.
이곳은 김해 가동리와 마주하는 낙동강의 옛 멱례나루터로 위쪽에는 천주교 명례성지가 있으며 명례성지의 성역화 사업으로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가 된 모습이다. 이곳에 지은 모든 건물을 대표적으로 지칭하여 낙주재洛洲齋라 하지만 크게 3개의 영역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솟을삼문인 의멱문義覔門과 낙주재洛洲齋 그리고 사당祠堂인 경덕사景德祠가 하나의 영역을 구성하고 무은문无垠門과 관란정觀瀾亭이 또한 하나의 영역을 이루고 있으며 맨 왼편에는 관리사가 현대 콘크리트벽돌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낙주재洛洲齋와 관란정觀瀾亭의 영역은 경계가 없는 하나의 영역에 있으며 관리사는 담장이 있고 좁은 협문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편액들은 낙주재洛洲齋 내부에 걸려 있으며 특히 인조왕仁祖王이 내렸다는 낙주재洛洲齋 글씨의 편액이 황금색을 뽐낸다. 낙주재洛洲齋 마당 한편에는 낙주재사적비洛洲齋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의멱문(義覓門)~의리를 찾는 문
洛洲齋李公事蹟
公諱𤃃字巨源 我恭定王第二男孝寧大君靖孝公補七世孫也 歷誼城君寀 岑城正惇 松山都正健 縣監枝蕙 完山君軸 而至別座思齊娶 司果韓鏞之女 以萬曆乙亥三月二十七日 生公于漢陽西部 細橋之 第八歲隨別座公遊冠岳山 山有大君題詠 一寓目輒誦之 年十二受學于 梧里李先生纔成童遭 父喪盡禮 服闋拜童蒙敎官 明年島夷犯畿甸大駕幸龍灣時 母夫人疾革上 賜銀十斤及藥料 俾 救母病不許扈從 丙申拜典設署別座 庚子出守奉化縣 壬寅移淸河縣 俱有著績民賴而穌 乙巳侍 母病衣不解帶嘗糞占 差劇籲天請身代求鳶鱉 皆自至奏效遭喪毁幾滅性 癸丑光海幽慈殿于 西宮不通水火 公手具饌需乘夜輒 進慈殿痛宗社 將覆常欲自裁 公使侍女護持時 府夫人盧氏安置濟州公隨行 蓋禍將及己不能一日自安 故遠離西宮 然斷斷之誠 有不能已復還京城 與具公仁垕等 泣血相誓參御 龍興之巖隨 旗彰義之門 內亂旣定 大義隨明 仁祖踐阼進徽號于慈殿 復延興府院君金公悌男官爵 以公爲慈殿五寸 命公及弟 澬奉還府夫人盧氏 己巳以公奮忠扶義錄原從勳 公讓而逃之至 安東五味洞 屢辭召命挈家而南 築室于密陽之覓禮江上 以山冠野服耕釣自娛 上念公勤勞中外 不避禍殃命求之大妃亦 以諺敎徵之終不就 上歎曰此人所居 有何可樂泥視軒冕一至 於此命圖進所居覽之 嗟歎御書 賜號洛洲齋 又賜金枝玉葉四字 及玉硯錦屛以寵之 又以土田臧獲資之 公家居書愼字 揭座右命 子孫不事科業 與趙花川濈朴灌 隱弘美 柳明川汝恪 鄭後村昌詩 房竹溪斗元 全梅溪璥 賦詩追從人稱七賢 公嘗於癸丑有詩曰 國人無父母 三綱已盡頹 安得披雲霧 復看白日回 又於洛洲有詩曰 我心之悄悄兮 我行之遲遲攬 余轡其彷徨兮 去故國兮安之 瞻洛水之泱泱 兮爰可濯而可 釣旣安分而知 機兮侶含蘆之江鳥於 二詩而足以見 公之心矣 謹攷家乘及徐尙書文裕 所撰行狀而錄 其大槪以備外氏名顯古事一條云
光州 盧相稷 謹識
낙주재이공사적
공公의 이름은 번𤃃이요 자字는 거원巨源이니 우리 공정왕恭定王의 제 2남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효공靖孝公 보補의 7세손이다. 의성군誼城君 채寀 잠성정岑城正 돈惇 송산도정松山都正 건健 현감 지혜枝蕙 완산군完山君 축軸을 거쳐 별좌別座 사제思齊에 이르러 사과司果 한용韓鏞의 따님을 취하여 만력萬曆 을해년 3월 27일에 한양 서부西部 세교동細橋洞의 본가에서 공公을 낳으셨다.
8세 때에 별좌공別座公을 따라 관악산冠岳山에 놀러 갔는데 산에 대군의 제영題詠이 있거늘 한번 보고 바로 외우셨다. 12세 때에 오리梧里 선생에게서 글을 배우고 어린 시절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예를 다하였다. 복服을 벗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 되었고 이듬해 왜적들이 경기 땅을 침범하여 임금께서 압록강으로 피난 할 때 모부인의 병이 깊어지니 임금께서 은십근과 약재를 내리시며 모친의 병구안을 하게하고 호종扈從을 허락지 않으셨다. 병신년丙申年에 전설서典設署 별좌別座를 제수 받고 경자년庚子年에 봉화현감奉化縣監이 되고 임인년壬寅年에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옮기셨는데 모두 뛰어난 치적治績이 있었으며 백성들이 그에 의지하여 기운을 차렷다. 을사년乙巳年에 모친의 병을 구완할 때 옷을 편안히 입지 아니하고 대변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살피며 하늘에 내 몸으로 어머니를 대신해 달라고 비셨다. 약으로 소리개와 자라를 구함에 모두 스스로 찾아와서 약이 됨에 효험이 있었다.
상을 당하여서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른 것이 몇 번이나 되었다. 계축년癸丑年에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물과 땔감을 공급치 못하게 하거늘 공이 손수 식량과 반찬을 갖추어 야음을 틈타서 올렸다. 자전慈殿이 종사宗社가 장차 망할 것을 통탄하여 항상 자결 하시고자 하거늘 공이 시녀로 하여금 옆을 떠나지 못하게 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때 부부인府夫人 노씨盧氏가 제주도濟州道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됨에 공이 수행하였다. 대개 화가 장차 미칠 것 같아 하루라도 스스로 편안할 수 없었던 까닭에 멀리 서궁과 떨어지나 지극한 정성은 끊어 질 수 없어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는 구공인후具公仁垕 등으로 피눈물로 서로 맹서하여 용흥암龍興岩의 모임에 참가하여 기旗를 따라 창의문으로 들어 가셨다. 내란이 이미 평정됨에 대의가 맑아졌다. 인조仁祖께서 왕위에 올라 자전慈殿에 휘호徽號를 올리시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공제남金公悌男의 벼슬을 회복하고 공이 자전의 오촌이 된다하며 공과 공의 아우 자에게 명하여 부부인府夫人 노씨盧氏를 모셔 오게 하였다. 기사년己巳年에 공을 분충부의奮忠扶義 원종훈原從勳에 기록하니 공이 사양하고 도망하여 안동 오미동五味洞에 이르렀다. 몇 번이나 임금의 부르시는 명을 사양하고 가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밀양 멱례강覓禮江가에 집을 짓고 산관야복山冠野服으로 밭갈이와 낚시로 스스로 즐겼다. 임금께서는 공이 안팎에서 힘써 화와 재앙을 두려워하시지 않음을 생각하시고 명하여 부르시고 또 대비께서 언문교지로 부르시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임금께서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의 사는 곳에 무슨 즐거운 일이 있어 벼슬보기를 진흙같이 함이 이에 이르렀는고? 하고는 명하여 거처하는 곳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여 보고 감탄하신 후 친히 낙주재洛洲齋 세 글자와 금지옥엽金枝玉葉 네 글자 그리고 옥벼루와 비단병풍을 내려 총애하셨으며 또 토지와 노비를 내려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게 했다. 공이 집에 거처하실 때 ‘신愼’자를 좌우에 걸고 자손에게 명하여 과거공부를 금지하였다. 그리고 조화천趙花川 즙濈 박관朴灌 은홍미隱弘美, 유명천柳明川 여각汝恪, 정후촌鄭後村 창시昌詩, 방죽계房竹溪 두원斗元, 전매계全梅溪 경璥으로 더불어 시부詩賦로 서로 따라 노니니 사람들이 칠현七賢이라 일컬었다. 공이 일찍이 계축년癸丑年에 지은 시에 “나라 사람이 부모가 없어 졌으니 삼강三綱이 이미 무너졌도다. 어찌하면 저 운무를 걷어내고 다시 밝은 태양을 볼 수 있을꼬?” 하고 또 낙주洛洲에 이르러 지은 시에 “내 마음이 조급함이어 정든 나라를 떠나 어디로 갈거나 낙동강의 흐름을 봄이여. 발 씻고 낚시 질 하기에 좋도다. 분수를 지켜 기틀을 앎이여 갈대꽃 입에 문 물새들의 벗이 되리.” 하니 이 두 시에서 공의 마음을 알기에 족하다. 삼가 가승家乘과 서판서徐尙書 문유文裕가 지은 행장을 참고하여 그 대략을 기록하고 다른 사람의 채택에 대비한다.
광주 노상직盧相稷 삼가 지음.
낙주재현판
이번(1575-1633) 선생은 효령대군 7대손으로 자는 거원(巨源) 호는 洛江 (낙강)이었으나 임금이 내린 사액 낙주재(洛洲齋)로 많이 알려져 있다
12세에 오리 이원익의 제자로 들어가 유학을 배우고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 임진왜란 7년 동안의 공적으로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녹훈되어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연산 청하 현감을 거쳐 봉화 현감 재직시 계축옥사 때 가까운 인척 관계로 파직되어 밀양에서 이곳 낙동강 풍경을 구경하며 한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인조반정의 공으로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했는데 사양하고 이곳 풍경을 잊지 못하 낙동강으로 돌아와 은거했습니다
인조대왕이 선전관을 보내 힘들게 찾아서 여러 번 벼슬을 권했지만 사양하여 어필 사액과 친필 금지옥엽 옥벼루 병풍과 전답을 내렸습니다
永慕門
景德祠
경덕사에는 문화류씨, 재령이씨 위패 봉안
음력3월 춘향제, 9월에 추향제 봉향
*洛洲齋重建記
洛洲李先生之七世孫邦烈氏 旣重建洛洲齋 齋丁舊址以記事屬余 余惟秉筆非其人不敢當 是役三四彊終不應 然顧惟親知之世德 閥閱名勝之發起沿革 卽不可以不知遂與叩焉 而得之曰 吾先祖卽孝寧大君近裔 仁穆大妃異姓五寸 光海時大珩纘男輩 受二凶嗾謀變西宮 國人無母公抗節 不參庭請 且以大妃至親 禍將剝狀 遂遠遯于 荒野構齋 江上以居 此洛洲齋之所刱也 癸亥改玉後 上以 大妃念公不已之故物色 以求之於是 上及 大妃以手詔諺簡宮使還至 以徵終不起遂加 以二州卬綬又不受 上乃歎曰李?所居有何可樂 而泥視軒冕一至於是 其人旣不可得見 其居當取畵圖看仍命宣傳官往寫以進 御覽訖咨嗟良久手筆賜額曰 洛洲齋錄原從功勳 賜土田臧獲以寵之於是 齋之前後左右 皆長廊環宇 羅絡山上 照耀江中 往來舟船 不敢撐颿 而過此洛洲齋之盛也 極熾而壞便作平泉花石不知幾年非 但宏搆傑閣掃地 無餘至於一片基垈 亦爲人有旭價不得 而吾從昆弟 皆圭篳無策乃傳 謀於遠近宗族辨得若干錢 以復舊址而地 勢傾仄不如余所居即撤屋 而代之遂復鳩材囑匠經始于 戊子春齋之舊制 即不可徵無以模倣 而第以意匠三架而疊之東西爲室西 則促而短之連于 廳事以助敞豁也 中央爲大廳廳之南緣 以曲檻便倚坐齋之北立 別廟以先祖功業禮不遷也 凡計齋西外門 又若干架此洛洲齋之原委也 若夫含遠呑長之勢風 帆沙鳥之勝記 岳樓黃樓者爲是 齋之預備文字也 又何贅焉余曰 唯唯無以尙矣 乃書其所聞以歸之
聖上三十年庚寅三月癸亥 密城朴世喆記
낙주재중건기 洛洲齋重建記
낙주洛洲 이선생李先生의 7세손 방열邦烈씨가 예터에 낙주재洛洲齋를 다시 세우고 그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나에게 부탁하거늘 내가 오직 그러한 글을 쓰는 일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하여 3~4번을 넘게 강하게 응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친한 벗의 세덕世德 및 벌열閥閱과 명승名勝이 없어지고 일어난 내력을 모르는 일이 옳은 일이 아니다. 이에 따라 물어서 알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우리 선조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가까운 후손이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이성오촌異姓五寸인 광해군光海君 시대에 대형大珩 찬남纘男의 무리가 흉악한 두 간신奸臣의 사주使嗾를 받아 서궁西宮의 사건을 일으키니 나라와 백성에 어머니가 없어졌다. 공께서 항거하여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아니하시고 또 대비의 가까운 친척으로 앙화殃禍가 장차 미칠 조짐이 있음에 드디어 멀리 떨어진 거친 들판에 숨어들어 강가에 집을 지어 거처하니 이것이 낙주재가 지어진 연유이다. 계해년癸亥年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임금과 대비께서 공을 잊지 못해 하시는 까닭으로 널리 찾아 친필조서親筆詔書와 언문편지諺文便紙를 내리시고 대궐의 사신을 여러 번 보내 부르셨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고 두 고을의 인수를 또한 받지 않았다. 임금께서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이번李?이 사는 곳에 무슨 즐길만한 것이 있길래 벼슬 보기를 이와 같이 하는고, 그 사람을 이미 볼 수 없다면 마땅히 그 사는 곳을 그림으로라도 보리라” 하시고 이에 명령命令으로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하여 보고는 길게 찬탄하시고 친필로 쓴 현판을 하사하니 바로 낙주재洛洲齋이며 또 원종공훈原從功勳에 기록하고 논밭과 노비를 내려 총애 하였다.
재실의 앞뒤좌우는 긴 회랑과 둥근 지붕이 산의 능선과 어우러지고 그 모습이 강 가운데 뚜렷이 비치는데 오고가는 배들이 감히 돛을 높이 달고 지나지 않았으니 이는 낙주재洛洲齋의 번성함이었다. 그러나 지극히 번성함은 무너지는 것이라 문득 그 자취마저 아득해진 지가 몇 년이나 된지도 모른다.
커다란 집채가 없어져 남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집터마저 남의 소유가 된 바 값이 올라 사들일 수 없었다. 우리 종형제들이 모두 가난함에 도리가 없어 널리 멀고 가까운 일가들의 힘을 모아 약간의 돈을 모아 옛터를 회복했으나 지세가 기울고 깎여 내가 거처하는 곳보다 못한 즉 집을 헐어 대신하여 복구하고 재목材木을 모아 대목大木에게 부탁하여 무자년戊子年 봄부터 짓기 시작하였다. 재실의 옛 제도制度는 고증考證할 길이 없어 모방하지 못하고 임의로 3동을 궁리하여 겹쳐지었으며 동쪽과 서쪽에 있는 집은 실室로 하고 서쪽은 지세가 급하고 짧으므로 대청에 연결시켜 앞이 탁 트이도록 하였다. 가운데는 대청인데 남쪽 가장자리에는 굽은 난간을 설치하여 편히 기대앉을 수 있게 하였다. 재실의 북쪽에는 별묘別廟를 세웠으니 선조의 공업功業을 예禮에 따라 체천遞遷하지 않음이다. 무릇 재실 서쪽 바깥문에는 또 몇칸의 집이 계획되어 있는데 이는 낙주재洛洲齋가 원래 있던 자리이다. 무릇 먼 곳을 품어 길게 토하는 형세와 바람 실은 돛과 모래위의 물새가 함께 어우러진 경치는 악양루岳陽樓와 황학루黃鶴樓를 읊은 글이 이 재실을 위하여 미리 준비된 글이라 할 것이니 무슨 군더더기가 더 필요하겠는가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래그래 더 보태고 꾸밀 것이 없네 하고 이에 그 들은 바를 써서 마친다.
성상30년 경인(1890) 3월에 밀성 박세철朴世喆이 기록하다.
洛洲齋原韻
瞻彼洛江萬折東 저 낙동강이 굽이쳐 동으로 감을 보노니
有亭在岸獨無窮 강 언덕에 있는 정자는 홀로 다함이 없구나!
古松秀氣依山碧 고송古松의 빼어난 기상은 산에 의지하여 푸르고
瘦石餘神向日紅 앙상한 바위의 넉넉한 모습은 해를 향해 붉도다.
興廢隨人期再起 흥망은 사람 따라 다시 일어남을 기약하고
經營閣世竟成功 세상을 경영함에 반드시 공업을 이루었도다.
兩綃寶墨心多恨 명주에 쓴 두 개의 어필御筆에는 안타까운 마음 쓰려 있고
嘉號久傳聖化隆 아름다운 호가 오래 전하니 임금의 은혜가 융성하구려!
戊子仲秋 府伯 李和淵 무자년 가을에 부사 이화연
次韻
恩額洛洲耀我東 은혜로운 편액 낙주재는 우리 동쪽에서 빛나고
江流朝海逝無窮 강물은 흘러 바다로 나아감에 다함이 없구나.
退休南土浮雲白 남녘땅에 물러나 쉬니 흰 구름 떠있듯 한가롭고
扶植西宮隻日紅 서궁西宮의 위험을 구하니 충정은 태양보다 붉도다.
行客每多興感意 지나는 길 손 언제나 그 자취를 일러 말하노니
仍孫承襲輯修功 후손들이 대를 이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도다.
平沙曠野遺臺上 편평한 모래사장과 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는 대臺에서
玉葉芳名百世隆 금지옥엽의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토록 드높구나.
宗下府使 象億 집안의 후생 부사 상억
訪洛洲齋
數間精舍臨江上 몇 간의 정사가 강위에 서 있나니
景物依然杜老居 두공부杜工部의 초당이 아마 이와 같았으리
沙岸忘形來去鳥 모래 언덕에는 무심한 새들이 오가고
蘭舟玩意躍潛魚 그림같은 배 옆에는 물고기가 뛰고 잠기며 노는구나
風淸野濶心無累 맑은 바람 탁 트인 들판에 마음은 걸림 없고
雨霽山浮興有餘 비 그친 산은 높아 흥겨움이 절로 이네
賓主坐看淸趣足 손님과 주인이 함께 앉아 바라보니 맑은 정취 가득하여
不須豊觶勸相如 가득찬 술잔을 굳이 서로 권하지 않아도 좋더라.
前副正 五休子 安㺬 전부정 오휴자 안신
覓禮八景 멱례팔경
三郎歸帆 삼랑진에 배 돌아오는 풍경
千古江流去不窮 아득한 예부터 강물은 흘러흘러 다함이 없고
三郎遺跡摠成空 삼랑三郎의 긴 자취는 간곳이 없구려.
漁翁豈解興亡事 고기 잡는 늙은이가 어찌 흥망의 일을 알겠냐만
閒掛蒲帆倚夕風 한가로이 걸린 부들 돛이 저녁바람을 안고 있네.
龍津喚渡 용나루에서 강 건너는 이 부르는 소리
向晩西風起白蘋 늦 저녁 서풍이 하얀 물풀을 일렁이니
離宮臺下古龍津 이궁대 아래 옛날의 용나루로세.
篙師急棹孤舟去 뱃사공 급한 노질에 외로운 나룻배 떠나는데
知有沙邊喚渡人 모랫가 언덕에는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 있네.
烏山暮雲 오산의 저녁 구름
日暮繁陰欲作寒 해 저물고 어둠이 내려 추워지는데
烏峯雲氣入窓間 까마귀봉우리 구름기운이 창문 틈으로 들어오네.
兒童報道前村韻 아이는 앞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소리치고
風滿長江雨滿山 긴 강위에 바람 몰아치고 비는 산 가득 묻어오누나.
子庵曉鐘 자암의 새벽 종소리
雲鎻千林月隱峰 구름은 숲에서 일고 달은 봉우리 뒤로 숨으니
滿山風露滴寒松 바람과 이슬 차갑게 산 속의 소나무를 적시네.
幽人欲識江天曉 산 속 사람들이 강 하늘의 아침을 알고자 하면
聽取三岩寺裡鐘 저 삼암사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어라.
漁村落照 어촌의 낙조
歷歷風帆漸近沙 줄지어선 돛배가 모래사장에 다가오면
渡頭烟樹盡漁家 나룻터의 저녁연기 어촌을 감싸도네
紅波一抹連霞氣 붉은 파도 일어나 저녁노을과 이어지니
知是西山落照斜 서산에 걸린 낙도의 비췸을 알겠더라.
中沙落鴈 모래사장에 기러기 앉은 모습
鴻鴈群飛集晩沙 저녁 모래사장에 기러기 떼지어 날아와서
月明終夜宿蘆花 달 밝은 밤 끝까지 갈대꽃 속에 머무네
稻梁豈乏謀身地 벼 있는 들판이 어찌 앉을 자리가 아니랴마는
只是人間有綱羅 다만 인간의 그물이 두려워서 일세.
後浦泛月 후포의 달 그림자
凄凄風露襲人衣 쌀쌀한 바람과 이슬이 옷 속으로 스며들고
孤棹時鷺白鳥飛 외로운 삿대질 소리에 흰 해오라기 놀라 나르네
傾罷一鐏無盡物 한 동이 술은 바닥을 보았는데
滿船空載月明歸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누나
苔磯釣漁 이끼낀 바위에서 낚시하는 모습
桃花春漲鱖魚肥 복숭아꽃 만발한 봄에 쏘가리는 살이 찌는데
釣伴平分一片譏 낚시 친구 사이좋게 강가 바위에 앉았네
牽興不知歸去晩 즐기느라 돌아감을 잊었는지
水風吹月上蓑衣 도롱이 위엔 강바람과 달빛만이 스쳐 지나네
출처 및 참조
낙주재선생실기-전주이씨효령대군파 낙주재종중/오정인쇄주식회사(1998.3.1)
자료 참조하여 이태규 올림 (2023년 5,20,초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