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의 건강 지킴이, 독락당 중국주엽나무
대구에서 포항을 잇는 4차선 국도, 안강읍을 조금 못 미쳐 좌회전하여 잠시 들어가면 옥산서원이 있다. 조 선 중종 때의 문신 이언적의 공덕을 기리는 사액서원이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잡은 인물이며 다음 세대인 이퇴계의 학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대부인 그와 깊은 인연을 맺는 나무 가 있다. 중종 27년(1532)년 동료 문신 김안로의 재임용을 반대하다 쫓겨나 잠시 낙향할 때이다. 지금의 옥 산서원을 따라 흐르는 옥계의 안쪽에다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은거 하면서 건물 뒤뜰에는 특별한 나무 몇 그루를 심는다.
그 중에서 한 그루가 독락당 뒷담, 새로 지은 어서각 앞에서 470년 풍상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천연기념물 이 되었다. 나무는 밑동부터 썩어버려 우레탄수지로 뒤집어쓰고, 겨우 생명을 부지한 줄기 셋을 간신히 비 끄러매고 있다. 밑 둘레 5m, 높이 14.5m에 이르는 중국 주엽나무다. 이름 그대로 중국에서 들어온 주엽나 무다. 특별히 이 나무를 심은 데는 이유가 있다. 거의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만큼 널리 쓰이는 약나무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50대 초반에 몸이 아파 벼슬을 그만두려고 한 적이 있고, 벼슬살이 동안에도 병든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었다. 자신이고 어머님이고 병약하였던 사람들로 보인다. 낙향할 때는 41살의 장년이었지만 약에 널리 쓰이는 중국 주엽나무를 찾아 심을 만큼 건강에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아울러 학문에 정진하고 재충전의 시간으로 활용한 덕분에 칩거 5 년 만에 김안로가 죽자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20년에 걸쳐 요직을 두루 거친다. |
중국주엽나무를 어디서 구해다 심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자신은 중국에 다녀온 적이 없으니 중국 가 는 사신에게 부탁하여 ‘직수입’한 것인지, 아니면 그전부터 민간에 널리 심겨진 것을 옮겨 올 수도 있다. 잠 시 나무의 과거를 들춰보면, 고려중엽 경기가사 한림별곡 8장 그네 뛰는 모습을 그린 글에 주엽나무가 등 장한다. '호두나무, 조협(皂莢)나무에 붉은 실로 붉은 그네를 매옵니다./그네를 당기시라, 밀어시라 정 소 년이여...‘하였다. 조협나무가 바로 주엽나무다. 우리나라에도 토종 주엽나무가 있으나 집 가까이 호두나무 와 같이 일부러 심었다면 중국주엽나무로 보아야 될 터이다. 민간 약나무로 벌써 고려 때 들어와 있었을 것 으로 짐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여러 지방의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잎사귀는 아까시나무 잎 생기듯 하였다. 나무껍질은 아름드리가 되어도 매끄러워 나무를 보는 느낌은 평안 하다. 그러나 줄기 아무데서나 갑자기 솟아오른 이 나무의 가시를 만나면 그 지독한 험상궂음에 크게 놀란 다. 한번 내민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가시 자체가 두 번 세 번 가지치기를 한다. 이 가시를 조각자(皂角刺) 라 하여 옛 사람들의 명약이었다. 동의보감에 보면 부스럼을 터지게 하고 이미 터진 때에는 약 기운이 스며 들게 하여 모든 악창을 낫게 하고 문둥병에도 좋은 약이 된다고 한다. 조협이라는 열매 역시 '뼈마디를 잘 쓰게 하고 두통을 낫게 하며 가래침을 삭이고 기침을 멈추게 한다.'고 하였다. 세종 때 명의들이 모여 저술 한 ‘향약집성방’을 찾아보니, 주엽나무 가시와 열매를 약제로 한 처방전이 백여 가지에 이른다. 중국주엽나 무의 정식이름은 조각자나무이고 열매가 꼬이지 않고 똑 바르다. 반면에 우리 주엽나무는 다른 이름이 쥐 엄나무이고 열매가 꽈배기처럼 꼬여 있다.
이언적은 독락당에서 약나무로 건강을 돌보면서 유유자적한 만년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을사사화 뒤이어서 벌어진 ‘양재역벽서사건(1547)’에 연루되어 쉰일곱의 나이에 북한 자강도 강계로 유배 되어 버린다. 찬 바람 드센 객지 강계 땅에서 6년을 더 살고, 그리던 독락당도 중국주엽나무도 영영 만나 지 못한 체 63세로 세상을 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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