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티아는 열두 사도 중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의 배반과 죽음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도로 선출된 예수님의 제자이다. 사도들은 성 요한(Joannes, 6월 24일)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줄곧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서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을 뽑고자 했다. 그래서 후보자로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Josephus)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한 다음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사도 1,15-26). ‘마티아’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한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 ‘마티아스’(Mattias)와 히브리어 ‘마티티아’(Mattithiah)에서 유래했는데,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성 마티아는 주님의 선물로서 열두 사도단의 일원이 된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서 열두 사도로 선출된 사실 이외에 성 마티아에 관한 언급이 더는 나오지 않는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파견한 72명의 제자(루카 10,1-12)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 외에도 자캐오(Zachaeus)나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와 동일 인물이라는 전승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성 마티아에 대한 전승은 모호하고 불확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순교 방식에 대해서도 십자가형 또는 참수형을 받았다는 두 가지 전승이 주로 전해지고 있다. 전승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는 사도가 된 후 오랫동안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 지역으로 갔는데, 남쪽으로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내륙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하고, 다른 전승은 북쪽으로 흑해 연안의 콜키스(Colchis, 오늘날의 조지아 일대)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Jerusalem)에서 유다인에게 돌에 맞은 후 도끼 또는 미늘창(도끼와 창을 합친 무기)으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그를 표현할 때 십자가를 들거나 도끼 또는 미늘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사도 성 마티아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도로 뽑혔으며,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또 축일도 2월 24일에 기념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이듬해부터 매년 5월 14일, 주님 승천 대축일과 가까운 부활 시기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8월 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4일 목록에서 이전 판과 같은 내용을 전하며 ‘유다 지방에서’라는 말을 빼고 그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처럼 로마 순교록은 그의 순교 방법이나 장소 그리고 무덤 등에 대해서는 전승의 다양함을 인정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사도 성 마티아의 유해는 나중에 성녀 헬레나(Helena, 8월 18일) 황후에 의해 발굴되어 로마로 이장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다시 독일 남서부의 트리어(Trier)로 옮겨 모셨다. 나중에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분실되었다가 발견되어 다시 안장되었고, 현재 그의 지하 무덤 위에는 베네딕토회의 성 마티아스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성 마티아는 오늘날까지도 트리어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기술자의 주보 성인이자 목수와 재단사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고 있다.♧ 굿뉴스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