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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강화 100코스 제3부
루미에르스테이-길직1리마을회관-길원목장-
이규보묘-연등국제선원-나들길흙집-참기름-
부부느티나무-길정저수지-곤릉버스정류소
20241009
1.코스 개요(두루누비)
1)코스개요
- 섬 자체가 하나의 역사관이자 박물관인 강화도로 떠나는 역사 탐방길
- 외세에 대한 저항이 남아있는 문화유산과 오감을 깨우는 짜릿한 루지를 체험할 수 있는 코스
2)관광포인트
- 조선 효종 때 구축한 요새 '초지진'
- 중력만을 이용해 트랙을 내려오는 무동력 바퀴썰매로 동양 최대규모의 길이를 자랑하는 '강화씨사이드리조트루지'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병인양요 때 승려들이 참전하여 호국도량으로 불리는 '전등사'
- 고려의 문신 이규보의 묘소와 석물이 있는 '이규보묘'
3)여행정보(주의사항)
- 시점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517-4 김포함상공원 옆 북측
대중교통) 김포골드라인 구래역에서 60-3, 직행 8000번 승차, '대명항' 정류장 하차 후 도보 600m
- 종점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156-5 곤능버스정류장 옆
대중교통)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지선 48번 버스 이용, 곤능 버스정류장 하차
- 대명항은 수산시장과 어부들이 운영하는 횟집이 있어 신선한 해산물을 구입하고 맛볼 수 있음
- 전등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음
- 길이 16.5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보통
- 주요경로 : 대명포구 1.5Km 초지대교 6.1Km 전등사 입구 5.6Km 이규보선생묘 3.3Km 곤릉버스정류장
2.혼탁한 시대를 살아간 이규보의 처세술
제3부 : 피미길32번길을 따라 길직1리 마을회관으로 올라간다. 피미길은 피 직(稷), 미(뫼) 산(山)의 합성어로 길직리 지역은 예전에 '피뫼' 지역으로 불리다가 '피미'로 소리가 변화된 것 같다. 서해랑길은 이규보 묘가 내려다 보이는 까치골길 언덕까지 피미길32번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길직1리 마을회관으로 올라가며 북쪽을 바라보면 가까이에 화려한 현대식 사각형 건물들이 있다. 무엇이지? 루미에르스테이 펜션으로, 강화도 신축독채빌라 중 최대 규모 펜션이라고 한다. 루미에르스테이 펜션 뒤쪽 언덕에는 여러 채의 기와집들도 보이는데 개인 주택 같지는 않다. 아마 저 기와집들도 펜션일 것이라 추정한다.
길직1리 마을회관은 경로당을 겸하여 다목적회관이라 불리는 것 같다. 그런데 운형 지붕의 조립식 건물이 회관 앞에 맞붙어있다시피 지어져 있는데, 아마도 농산물 보관창고인 것 같다. 회관 앞 농지에는 순무를 재배하는 대규모 비닐하우스와 포도농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농작물들을 이 창고에서 저온으로 보관하는 게 아닐까? 길직1리 마을 피미길32번길에서는, 길상산과 정족산, 마니산, 진강산 등이 훤히 조망되며, 길원목장 앞에는 우아한 소나무 한 그루가 멋지게 하늘로 솟아서 길손의 마음에 풍요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길원목장 앞에서 길동무와 지명에 관해 얘기를 나누며 왈가왈부하고 있으니, 주민 한 분이 관사마을과 권촌마을 그리고 장씨마을 등에 대해 설명하여 준다. 덧붙여 진강산과 덕정산의 위치, 피미길의 유래에 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강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는 이 분의 설명에 이 지역이 새롭게 보인다.
길원목장 앞에서 까치골길 언덕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며, 까치골길 언덕에서 이규보 선생의 묘가 보인다. 이규보 묘를 설명하는 여러 매체에서 묘의 위치를 진강산 동쪽이라고 설명하는데, 직접 와서 보면 이규보 묘와 진강산은 한참 거리에 있음을 알게 된다. 까치골길 언덕에서 이규보 선생 묘역으로 내려갔있다. 그런데 재실인 사가재(四可齋) 건물의 기와를 교체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묘역 앞이 몹시 어수선하다. 묘역 앞에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 묘 설명안내판, 그 왼쪽 뒤에 묘역정비기념비(墓域淨備紀念碑)와 백운이규보선생문학비(白雲李奎報先生文學碑), 그 왼쪽 뒤에 이규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유영각(遺影閣)이 있다. 문학비에는 김동욱 박사가 지은 이규보 선생의 문학적 위대함을 예찬한 글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백운선생 문순공 신도비(白雲先生文順公神道碑)가 있는데, 신도비(神道碑)의 가첨석(加檐石, 비갓) 바로 아래에 '고려평장사 백운선생 시문순공 신도비명(高麗平章事白雲先生諡文順公神道碑銘)'이라고 전서체(篆書體)로 적혀 있다. 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의 뜻은 '고려 평장사 벼슬을 역임한 백운선생 시호(諡號) 문순공의 신도비에 고인의 일생을 새긴 글'이라는 정도로 이해한다. 이 신도비는 이규보가 죽은 지 699년 후인 1939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신도비 오른쪽에 재실(齋室)인 사가재(四可齋) 건물이 있는데, 현재 지붕의 기와를 교체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사가재(四可齋)’란 이름은 이규보가 개경에 있을 당시의 별장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네 가지에 만족한다는 4가(四可)는, "농토가 있어 가히 양식을 공급할 수 있고, 뽕밭이 있어 누에를 쳐서 옷을 지을 수 있고, 샘물이 있어 가히 마실 수 있고, 나무 숲이 있어 가히 땔감을 조달할 수 있어 살만한 곳"이라고 한데서 유래된다고 한다. 이규보는 '사가재기(四可齋記)'에서 “내가 이 집에 살면서 만일 전원의 즐거움을 얻게 되면 세상일을 팽개치고 옷을 떨쳐 입고 옛동산으로 돌아가 늙으면서 태평성세의 농사짓는 늙은이가 되리라."라고 적었다고 한다. 이규보의 진심과 진실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맨 위쪽 이규보 선생의 묘 앞으로 올라갔다. 묘 앞에는, 상석, 형태만 남은 문인석 1쌍, 석양(石羊) 1쌍, 망주석 1쌍, 장명등(석등) 1기, 묘비 2기, 그 앞에는 사적지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근래에 새로 복원한 묘비는 무덤 바로 앞에 있는데, 묘비에 "고려이상국하음백문순공휘규보지묘(高麗李相國河陰伯文順公諱奎報之墓) 배정경부인진양진씨부(配貞敬夫人晉壤晉氏祔)"라고 새겨져 있다. 상국(相國)은 재상, 하음(河陰)은 강화도의 고려 때 지명, 하음백(河陰伯)은 강화를 다스리는 수령, 문순공(文順公)은 이규보의 시호이니, 묘비명의 뜻을 "고려의 李상국(재상) 하음백에 봉해진 문순공 규보의 묘. 배우자 정경부인 진양진씨(晉陽晉氏)와 합장" 정도로 이해한다.
묘 앞에서 사가재 옆 건물들을 확인한다. 묘 왼쪽 아래에는 묘역 관리자가 생활하는 백운정사(白雲精舍)가 있고, 그 오른쪽에 화장실, 그 오른쪽에 사가재가 자리한다. 이규보 선생의 묘 뒤쪽에서 내려보면 길상면 길직리, 온수리, 선두리 지역이 펼쳐져 있고, 정족산과 그 뒤 왼쪽의 길상산이 멋지게 시야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활짝 열린 풍경에 가슴의 창문이 절로 열린다. 이 풍경을 보는 것으로 행복해진다. 이곳이 명당인 것 같다.
이규보 선생의 짧은 글 양식인 '설(說)' 몇 편을 읽은 기억이 난다. '슬견설(蝨犬說)', '이옥설(理屋說)', '경설(鏡說)' 등이 기억에 떠오른다. '슬견설(蝨犬說)'은 이를 죽이는 것과 개를 죽이는 것은 생명체의 죽음이라는 면에서 같은 것인데, 인간은 이(蝨)를 죽이는 것은 당연시하면서 개의 죽음에 대해서는 슬퍼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며, 인간 중심적 편견과 생명 평등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이옥설(理屋說)'은 집을 수리한 이야기로, 지붕이 조금 샐 때 고치지 않았다가 그 틈이 더 벌어져 결국 지붕을 고치는 문제로 커진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문제는 처음 작다고 여길 때 바로 개선해야 함을 일깨운다. '경설(鏡說)'은 흐린 거울을 닦지 않고 사용하는 거사(居士)의 이야기로, 시대가 혼탁할 때는 흐린 대로 제 본성을 지키며 살고, 시대가 맑아지면 그때 흐린 거울을 맑게 닦듯이 잘못된 사람들을 정화해야 함을 일깨운다. 이 '경설(鏡說)'은 자신이 최충헌과 무인정권에 참여하고 봉사한 것에 대한 변명처럼 보인다. 그의 처세술이 분명히 드러나는 글이다.
이규보는 문재에 뛰어났으나 과거시험에 낙방하다가 네 번째 응시에서 수석합격을 했다. 급제 후에 관직을 받지 못하다가 32세 때 무신집권자인 최충헌이 연 시회(詩會)에서 그를 국가적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우리 나라의 명필로는 최충헌(崔忠獻)이 으뜸이요, 탄연(坦然)이 둘째요, 유신(柳紳)이 세째다.’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이렇게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벼슬길에 나갔지만 동료들이 비방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벼슬길 1년 만에 면직 당한다고 한다. 그 뒤에 최씨 정권에서 문필가로서 무인정권을 보좌하며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무인정권에 봉사한 입신출세주의자이자 보신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대가 혼탁하더라도 그 혼탁한 시대에 참여하여 자신의 맑음을 잃지 않는 것이, 그 시대를 밀쳐 버리는 것보다 낫다는 논리가 이규보의 생각인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가 높아져 벼슬길에서 물러나서 그가 쓴 시의 내용은 흥미롭다. 오히려 은거의 자족을 표현한다.
인간 세상 비방하는 소리 떠드는 소리 피하노라 (爲避人間謗議騰위피인간방의등)/ 문 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흩어졌네 (杜門高臥髮鬅鬊두문고와발붕승)/ 처음은 방탕한 계집 생각하는 사내 같더니 (初如蕩蕩懷春女초여탕탕회춘녀)/ 점차로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漸作寥寥結夏僧점작요요결하승)/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兒戱牽衣聊足樂아희견의료족락)/ 찾아온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客來敲戶不須譍객래고호불수응)/ 가난과 영욕은 모두 하늘의 뜻이거늘 (窮通榮辱皆天賦궁통영욕개천부)/ 어찌타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斥鷃何會羡大鵬척안하증선대붕) - 이규보의 '두문(杜門, 두문불출하며)' 전문
이규보 선생의 묘 뒤쪽의 숲길을 내려가면 고갯길인 강화동로, 이 길을 따라 서쪽 방향으로 내려가면 연등국제선원이 나온다. 연등국제선원은 외국인들이 수행하는 곳이며, 일반 시민들도 수행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연등국제선원에 들억라지 않고 지나치며 바라만 보았다. 선원을 지나면 북쪽 언덕에 전원주택들이 옹기종기 자리한 곳이 보이며 이곳을 지나서 서해랑길은 왼쪽 숲길로 이어지는데, 숲길로 들어가 허둥지둥 헤매었다. 숲길을 들어서서 맨 왼쪽 숲길을 따라가야 한다. 숲길은 평탄하고 아래에는 펜션들이 자리하는 것 같으며, 숲길 끝 나들길흙집 펜션으로 내려가면 숲길을 벗어나게 된다. 이곳에서부터 길은 평탄하며 큰 도로인 고려왕릉로까지 까치골길을 계속 따라가게 된다.
까치골길 고개를 넘어가는데 왼쪽에 참기름 전시장이 있다. 참기름이라니? 참기름 전시장은 옛 참기름 공장을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개조하였는데, 참기름을, Charm(참)+(ㅁ+示)(기)+稟(름)으로 조합한 용어를 쓰고 있다. 이렇게 문자를 만들어도 되는 걸까? 의역하면 더 쉽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렇게 용어를 조합하여 관람객들에게 신선함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복합문화공간인 참기름 전시관에 관람객들이 많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참기름 전시관을 방문한 버스 한 대가 서 있어, 참기름 전시관의 인기를 말해 준다. 참기름 전시관은 '아트팩토리 참기름'이라 불리며 1관과 2관 전시관이 있다고 한다. 입장료가 1만 8천원, 언젠가 한 번 관람해 보고 싶다.
길상면 길직리 까치골길 들녘은 황금벼 물결과 속노랑고구마 캐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곳 속노랑고구마 캐는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다니러온 외지인 같다. 그 모습은 황금벼 물결과 어우러져 더욱 평화롭고 정답다. 느티나무 두 그루가 300~450년의 세월을 애정으로 동고동락했다. 이 느티나무는 강화군 큰나무로 지정되었으며, 부부느티나무로 불린다. 마을의 정자목으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가을에는 고운 단풍으로 길직리마을의 자랑거리였던 나무라고 한다. 부부느티나무에서는 쉬워가야 하는데, 그냥 지나친다. 이규보 선생은 큰나무와 시원한 샘물의 즐거움을 이렇게 읊었다.
더운 날씨 쉬기에 편해 좋고 (好是炎天憩호시염천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 피해서 좋구나. (宜於急雨遮의어급우차)/ 시원한 그늘 양산 같으니 (淸陰一傘許청음일산허)/ 주는 혜택 또한 많구나. (爲貺亦云多위황역운다) : '대수(大樹, 큰나무 아래의 즐거움)' 오가는 행인 더위에 지쳤는데 (南北行人暍남북행인갈)/ 시원한 물을 길가에서 만났네. (寒漿當路傍한장당로방)/ 조그만 샘물 온 나라를 적시니 (勺泉能潤國작천능윤국)/ 두 번 절하고야 맛볼 수 있네. (再拜迺堪嘗재배내감상) : '한천(寒泉, 시원한 샘물)' -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노방이영(路傍二詠, 길가에서 두 수를 읊다)>
까치골길에서 고려왕릉로로 나왔다. 이제부터 서해랑길 100코스 종점 곤릉 버스정류소까지 2km를 고령왕릉로를 따라간다. 이미 걸어온 까치골길과 참기름 전시장을 확인하고, 아침에 걸어온 길상산과 정족산을 조망하며 내닫듯이 달린다. 강화 동쪽 해안의 덕진진과 광성보로 나가는 길직로 갈림길을 지나면, 길상면 길직리에서 양도면 길정리로 넘어간다. 여기서부터 강화도의 최고봉이며 민족의 성산인 마니산의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진강산도 북쪽에 솟아 늠름하다. 고려왕릉로 해나무 버스정류소가 나온다. 해나무? 해나무는 홰나무의 방언으로, 일반적으로 회화나무 또는 괴목(槐木)이라 이른다. 버스정류소의 홰나무 한 그루가 잎들을 무성하게 달고서 우아하게 멋지다. 이 해나무가 이곳을 상징하는 대표이다. 그렇기에 버스정류소 이름이 해나무이다. 홰나무의 생애는 곧 우리 삶과맞닿아 있다. 마종기 시인은 홰나무를 그냥 지나칠 때 부끄럽다고 한다. 주객이 바뀐 느낌 때문일 것이다. 길손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버스정류소의 해나무 아래를 스쳐간다.
밤마다 부엉새가 와서 울던 그 나무를 동네 사람들은 홰나무라고 불렀다. 홰나무는 우물가에 넓은 그림자를 던져주었다. 두레박이 없어지고, 펌프가 생기고, 뒤이어 공중 수도가 설치되었던 그 자리에 얼마 전에는 주유소가 들어섰지만, 홰나무는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6.25 때는 홰나무 아래 폭격 맞은 군용 트럭의 잔해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고철 장수가 쓸 만한 부속품들을 뜯어간 뒤,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그 커다란 쇳덩어리는 3년 가까이 시뻘겋게 녹이 쓸다가 마침내 해체되어 사라졌다. 홰나무에도 파편이 몇 개 박혔는데, 그 쇳조각들은 차츰 녹아서 수액으로 흡수되고, 그 자리에 옹기가 생겨났다. 언제부터인지 거기에는 자연 보호 팻말이 붙어 있다./ 홰나무를 바라보면 지금도 그 거대한 나무를 만지고 싶고, 그 나무에 기대고 싶고, 기어올라가고 싶고, 때로는 그 나무의 뿌리나 가지가 되고 싶어진다. 그리고 부리나케 걸음을 재촉하거나, 택시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은 바로 저 홰나무이고 예나 이제나 한자리에 서 있는 것은 정작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 김광규(1941~)의 '홰나무' 전문
해나무를 지나면 길정저수지 북쪽 언덕에 콩밭과 인삼밭이 펼쳐져 있다. 강화의 특산품 인삼과 명품 서리태를 재배하는 밭에서 길상저수지 동남쪽을 바라본다. 아침에 길정저수지 동쪽 언덕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진강산과 덕정산을 살폈었지. 언덕의 고구마밭에서 속노랑고구마를 캐는 아낙들을 보며 길상저수지를 돌아나왔었지. 그 풍경을 북쪽에서 추억한다. 서해랑길은 길상면 길직리를 빙글빙글 돌아 이규보 선생의 묘, 연등국제선원, 참기름 전시장을 거쳐서, 지금 길정저수지 북쪽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한다. 정족산 삼랑성이 강화 남쪽을 대표하듯 살포시 부드러운 능선을 그린다. 아련해지는 마음으로 고려왕릉로 앞쪽을 바라보면 진강산이 뒤쪽에 솟아 있고, 아! 아름다운 느티나무 한 그루가 품 넓게 자리하고 있다. 서해랑길 100코스 종점이요, 101코스 시작점 앞, 품 넓은 느티나무 아래서 강화 100년을 지켜온 금풍양조장의 막걸리를 길동무와 함께 마시며 먼 그리움에 젖었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7.8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7분
오른쪽 피미길32번길을 따라 오른쪽에 보이는 길직1리 마을회관 앞으로 이어간다. 왼쪽은 루미에르스테이 펜션이다.
강화도 신축독채빌라 중 최대 규모 펜션인 루미에르스테이 펜션이 앞에 있다. 왼쪽 맨 뒤의 기와집들도 펜션일까?
피미길32번길을 따라 길직1리 다목적회관&마을회관 앞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에 정족산이 부드러운 능선을 그린다. 그 뒤에 길상면 선두리 길상산이 살짝 보이며 그 왼쪽에 회전전망대가 보인다. 순무 재배 비닐하우스가 앞쪽에 있고, 오른쪽 뒤 구릉지 앞 해란길을 따라 산촌마을 앞으로 왔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은 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산이다. 높이 220m의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큰 사찰인 전등사와 정족산성 등 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삼랑성이라고도 하는 정족산성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하는 석성이다. 특히 정족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 터가 남아있다. 정족산 정상에서는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전등사 풍경과 서쪽으로 마리산, 남쪽으로 인천 앞바다의 섬들을 볼 수 있다. - 두루누비
강화도의 최고봉인 마니산이 맨 뒤 오른쪽에 보인다. 맨 왼쪽 구릉지 오른쪽 해란길 산촌마을에서부터 이곳으로 걸어왔다.
서해랑길 101코스 탐방에서 진강산 둘레길을 걷게 된다. 오른쪽 건물은 루미에르스테이 펜션이다.
피미길32번길을 따라 길직1리 다목적회관&마을회관 앞으로 이어간다. 둥근 지붕 건물의 용도가 무엇일까?
왼쪽은 쓰레기 분리수거 창고, 다목적회관 앞 둥근 지붕 건물은 농산물 보관 창고일까? 서해랑길은 왼쪽 길로 올라간다.
길직1리 다목적회관&마을회관 앞 느티나무와 쉼터정자를 거쳐 올라오면 피미길32번길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오른쪽(남쪽)은 길직리 들녘으로 내려가고, 서해랑길은 왼쪽 북쪽 방향으로 올라간다.
피미길32번길 삼거리에서 청록색 건축물이 있는 길원목장 앞으로 올라간다.
서쪽을 바라보면 양도면 능내리 진강산이 솟아 있다. 그 앞 구릉 아래의 기와집들은 펜션인가? 주택일까?
길원목장 앞 삼거리에 소나무 한 그루가 멋지게 자란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왼쪽은 피미길84번길이며 관사마을 방향, 서해랑길은 오른쪽 피미길32번길을 따라 권촌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권촌마을로 올라가는 피미길32번길 언덕에서 뒤돌아서 멋진 소나무와 민족의 성산 마니산(오른쪽)을 바라본다.
피미길32번길은 길원목장에서 올라와서 왼쪽으로 굽이돌아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피미길32번길을 따라 언덕 끝까지 올라간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피미길32번길에서 남쪽을 돌아보면 길상면 선두리 길상산과 그 왼쪽 아래의 회전전망대가 보인다.
피미길32번길을 따라 언덕 끝까지 올라오면 까치골길과 만난다. 이규보 묘는 까치골길 건너편으로 내려간다.
중앙의 나무 뒤 피미길32번길에서 까치골길로 올라와 이곳으로 내려왔다. 중앙의 나무 뒤에 정족산, 그 왼쪽에 길상산이 보인다.
맨 뒤에 이규보 선생의 묘가 있다. 오른쪽 건물 사가재(四可齋)를 정비하는 공사 중이어서 묘 앞이 어수선하다. 이규보 묘 설명안내판이 차량 왼쪽 뒤에 있고, 맨 왼쪽에 묘역정비기념비, 그 오른쪽에 문학비, 사가재 왼쪽에 신도비가 있다.
이규보 묘(李奎報 墓), 인천광역시 기념물 :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의 묘소이다. 고려 무신 정권기에 활동한 문인으로 명종 20년(1190년)에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많은 글을 썼다. 고구려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은 「동명왕편」, 몽골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장경을 조판할 때 지은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남겼다. 이외에도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 설명안내판
여주 이씨 문순공파 대종회에서 1991년 5월 묘역정비 기념비를 세웠다.
이 문학비는 1983년 1월 15일, 강화군에서 세웠으며, 비문 내용은 학술원 회원 문학박사 김동욱(金東旭) 선생이 지으셨고, 글씨는 방손(傍孫) 이필용(李弼龍)이 적었다. 문학비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을 옮긴다.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 선생은 고려 중기 무인정권 밑에서 한 자루의 붓으로 문장경국대업(文章經國大業)의 신념에 산 분이다. 선생은 여주(驪州) 이씨 시조 은백(殷伯)의 후손으로 의종 22년(1168)에 父 윤수(允綏) 公과 母 금양(金壤) 김씨 사이에 태어나 고종28년(1241) 몽고의 난에 천도한 이곳 강화도에서 74세로 돌아가니 나라에서는 문순공(文順公)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선생은 명종20년(1190) 진사에 급제한 후 고종 24년(1237)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관계(官界)에서 물러나기까지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지만 문신으로서보다 특히 문인으로서 동국이상국집(56권)과 백운소설 등 많은 저술을 통하여 고려 시대의 문운을 가름할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선생의 문장을 일컬어 그 시대의 진화(陳澕)는 적선(謫仙)의 일기(逸氣)가 만상(萬象) 밖에 서있는 것 같다고 하였고 최자(崔滋)는 일월(日月)과 같아서 감히 칭찬할 수가 없는 준일(俊逸)한 천재의 한 분이라고 평하였으니 선생은 실로 광세(曠世)의 문호(文豪)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분이다. 선생은 자호(自號)를 백운거사(白雲居士), 삼혹호(三酷好) 선생, 지지헌(止止軒) 등으로 일컬은 것처럼 품성이 초탈하고 청백한 분이었다. 선생은 유불선 삼교에 출입하고 신사(神祠)에도 기고문(祈告文)이 많으며 전통적인 신격(神格)에도 유념하여 구삼국사(舊三國史)에 의거하여 웅작(雄作) 동명왕편(東明王篇)의 서사시를 남겨 만유(萬有)를 엄유(奄有)하는 기상을 가졌다. 선생은 문집에 2천여 수의 시(詩)가 남아 있으나 생전에 지은 시는 이의 몇 배에 이르렀다고 하니 선생은 참으로 천부(天賦)의 시인이었다.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막히는 데 없이 뻗어 나가는 시사(詩詞)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정언(李正言) 진한림(陳翰林) 쌍운주필(雙韻走筆)로 이름을 떨치고 백운시(百韻詩)를 경각에 짓기도 하였다. 몽고의 정복 야욕이 고려에 미쳤을 때 선생은 그 예봉을 한 자루의 붓으로 멈추게 한 일이 있었는가 하면 이 나라 국보로서 세계문화사에 찬연히 빛나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판각(板刻)할 때에는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기고문(祈告問)을 짓기도 하였다. 상정예문(詳定禮文)의 발문(跋文)에서는 주자(鑄字)를 사용하여 이 책이 간행된 사실을 명백히 밝힘으로서 세계 최초의 활자 주성(鑄成)을 알려주었다. 또 당시 나라의 중요한 외교문서는 선생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이는 신불(神佛)과 이적(夷狄)을 감동케 할 수 있었던 선생의 문장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로써 문장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선생에게 합당한 말이니 고려 수백만 백성 위에 선생이 보여준 천재의 일기(逸氣)는 이 나라 문운(文運)의 역사에 길이 빛날 표감(表鑑)이 되었다. 경기도 강화군에서는 항몽(抗蒙)의 고장 강화에서 문장에 살고 문장으로 생을 마친 백운 선생의 유적을 기리기 위하여 정부 보조와 지방비를 들여 선생의 묘역을 정비하고 문학비를 세우니 참으로 뜻있는 일이다. 1983년 1월 15일, 학술원 회원 문학박사 金東旭은 짓고, 傍孫 李弼龍은 쓰고, 강화군에서 세우다.
신도비의 가첨석(加檐石, 비갓) 바로 아래에 '고려평장사 백운선생 시문순공 신도비명(高麗平章事白雲先生諡文順公神道碑銘)'이라고 전서체(篆書體)로 적혀 있다. 이 신도비는 이규보가 죽은 지 699년 후인 1939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이범세(李範世)가 짓고 김교덕(金敎悳)이 적고, 후손 이병하(李秉夏)가 전서한 것이라고 한다.
유영각(遺影閣)은 이규보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제사를 지내는 재실(齋室)인 사가재(四可齋)는 현재 지붕의 기와를 교체하는 공사로 분주하다.
사가재는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의 묘 하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가재’란 이름은 이규보가 개경에 있을 당시의 별장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그는 그곳에서 ‘농토가 있어 가히 양식을 공급할 수 있고, 뽕밭이 있어 누에를 쳐서 가히 옷을 지을 수 있고, 샘물이 있어 가히 마실 수 있고, 나무가 있으니 가히 땔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규보 묘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것으로, 안쪽에 걸려 있는 백운재(白雲齋)란 현판은 윤보선 대통령이 1983년에 쓴 글씨이다. - 인천문화유산돌봄센터
상석, 형태만 남은 문인석 1쌍, 석양 1쌍, 망주석 1쌍, 장명등(석등), 묘비 2기가 있다. 아래 맨 오른쪽은 사적지 표석이다.
이규보는 고려시대 동지공거,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168년(의종 22)에 태어나 1241년(고종 28)에 사망했다. 문재에 뛰어났으나 형식적인 과거시험 글을 멸시하여 국자시에 낙방하다가 네 번째 응시에서 수석합격을 했다. 급제 후에도 관직을 받지 못하고 사회 혼란 속에서 『동명왕편』을 지었다. 무신집권자인 최충헌을 국가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서야 관직에 진출했고, 이후 최씨 정권에서 문필가로서 무인정권을 보좌하며 승승장구했다. 무인정권에 봉사한 입신출세주의자이자 보신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이상국문순공하음백규보지묘(高麗李相國文順公河陰伯奎報之墓)’라 새겨진 묘비(1919년 건립)가 석양 앞에 세워져 있으며 진양진씨(晉陽晉氏)와 합장되어 있다는 기록이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근래에 새로 세워진 묘비 인 듯. "고려이상국하음백문순공휘규보지묘(高麗李相國河陰伯文順公諱奎報之墓) 배정경부인진양진씨부(配貞敬夫人晉壤晉氏祔)" 배우자 정경부인 진양진씨(晉陽晉氏)와 합장되어 있다는 기록이 왼쪽에 새겨져 있다.
맨 왼쪽의 백운정사(白雲精舍)는 이규보 묘 관리실, 중앙에 화장실, 그 오른쪽에 재실 사가재가 있다.
이규보 묘 위쪽에서 정족산과 그 뒤 왼쪽의 길상산이 모두 보인다. 길상면 길직리, 온수리, 선두리 지역이다.
서해랑길은 이규보 묘 위쪽 소나무 숲길로 이어간다.
소나무 숲길을 넘어오면 길상면 길직리와 불은면 두운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가 나온다. 강화동로 왼쪽 방향으로 이어간다.
불은면 두운리와 길상면 길직리 경계를 이루는 고개에서 강화동로를 따라 연등국제선원으로 내려간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강화동로 349-60(길직리 85) 연등국제선원 앞을 지나간다.
연등국제선원은 1997년 성철 큰스님의 제자이신 원명스님의 발원으로 개원되었다. 10여년 동안 외국인 상대 포교를 해오면서 외국인들이 참선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원명스님이 연등국제불교회관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강화도에 개원한 것이다. 연등국제선원의규모는 법당, 요사채, 객실 등 모두 5개 동, 약 6,611m²(2,000여평)의 농지도 포함하고 있다. 연등국제선원에서는 미국, 스위스, 체코, 러시아 유럽권 국가 스님들뿐 아니라, 아시아 불교국가 스님들도 상주하면서 함께 수행하고 있다. 연등국제선원은 내국인들에게도 개방되고 있다. 도시생활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맑은 공기와 숲속에서의 참선과 기도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수행하는 개방도량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어 참선 지도는, 외국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1주일 단위의 단기연수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인들에게 선을 가르쳐왔다. 최근에는 국제포교사뿐 아니라 대학생불자들도 외국인스님들과 함께 수행하면서 해외포교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연등국제선원은 전통양식의 대웅전, 선방, 편리한 시설의 객실, 수련관, 공양간, 다양한 채소를 가꾸는 유기농 농장 등이 갖추어져 신행과 여가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도량이다. - 두루누비
연등국제선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나가면서 쳐다만 본다. 오른쪽 뒤에 대웅전이 보인다.
연등국제선원 남쪽 강화동로349-65 주택 앞을 지나간다.
강화동로는 앞의 삼거리에서 까치골길134번길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직진한다.
까치골길134번길 고개에서 왼쪽 숲길로 진입한다. 단축하고자 하면 고개를 넘어 이어가도 된다.
맨 오른쪽 강화동로가 끝나는 삼거리에서 까치골길134번길로 나와 숲길로 들어왔다. 언덕 위의 집들은 전원주택인 듯.
이곳에서 서해랑길로 진입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맨 왼쪽 길로 이어간다.
숲길을 따라오면 나들길흙집 펜션 뒤쪽으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데 앞쪽으로 돌아간다.
서해랑길은 나들길흙집 펜션 뒤쪽으로 나오도록 유도한다.
나들길흙집 펜션 입구에 큰나무로 지정된 추정수령 200년의 까치골 소나무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소나무(Pinus densiflora]란 이름은 우리말 '솔'에서 유래되었으며, 솔은 으뜸이라는 뜻의 '수리'라는 말이 변한 것으로 나무 중에 최고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나무 줄기가 붉어서 '적송[赤松]'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로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陸松]'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송[女松]'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송은 소나무의 일본 이름이다. 한국의 옛 문헌에서 소나무를 적송이라 부른 예는 없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말을 없애고 강제동화 정책을 쓸 때 나무 이름도 일본식으로 부르도록 강요하면서 적송[赤松]으로 부르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 나오는 소나무는 송[松] 아니면 송목[松木]이다. 소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로서 장수의 상징인 십장생의 하나로 삼았다. 척박한 곳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사시사철 푸르고 강인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대나무와 함께 송죽지절을 상징하거나 송교지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소나무가 서 있는 까치골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사계절 푸르름이 가득한 마을이었으나 40년 전 강화도 전역이 송충이의 피해로 푸르고 아름답던 소나무들은 모두 고사하고, 현재 유일하게 살아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까치골을 지키고 있다.
나들길흙집 펜션과 큰나무로 지정된 수령 200년의 까치골 소나무를 뒤돌아본다.
서해랑길은 까치골길을 따라 까치골길 104호 농가 앞을 통과할 수 있고, 왼쪽 까치골길로 돌아가도 된다.
까치골길 104호 농가 앞으로 통과해 왔는데 까치골길을 따라 돌아와도 된다.
까치골길 고개 왼쪽에 아트팩토리 참기름 전시장이 있다. 서해랑길은 고개를 넘어 계속 까치골길을 따라간다.
참기름 전시관은 옛 참기름 공장을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참기름을, Charm(참)+(ㅁ示)(기)+稟(름)으로 조합하였다.
아트팩토리 참기름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옛 참기름 공장을 개조하여 만든 장소이다. 이곳은 약 7,000평 규모로, 다양한 미디어아트 전시와 공연, 식음료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트팩토리 참기름은 강화도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들에게 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주요 시설로는 1관과 2관이 있으며, 1관에서는 20분 단위로 순환되는 다양한 미디어아트 작품이 전시된다. 2관에서는 반 고흐의 일생을 주제로 한 40분 길이의 몰입형 미디어아트 작품이 상영되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또한, 특별관과 카페 참기름도 있어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한다. 아트팩토리 참기름은 넓은 주차 공간을 갖추고 있어 방문객들의 편의를 도모하며, 입장 시 지급되는 팔찌를 통해 전시관을 자유롭게 재관람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아트팩토리 참기름은 예술과 기술의 조화를 통해 강화도의 새로운 문화 명소로 자리 잡았으며, 방문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로 추천된다. - 대한민국구석구석
참기름 전시관 아래쪽 까치골길은 선교중앙교회와 열림기도원 방향이고 서해랑길은 오른쪽 까치골길로 이어간다.
까치골길 고개를 넘어와 뒤돌아본다. 왼쪽에 과실&채소 가공업체 엘에이치농산, 오른쪽에 참기름 전시장이 있다.
참기름 전시장 주차장이 넓다. 왼쪽 뒤에 진강산, 중앙 뒤에 덕정산이 보인다.
왼쪽은 연등국제선원에서 오는 까치골길134번길, 오른쪽은 참기름 전시장에서 내려오는 까치골길이다.
까치골길을 따라 고려왕릉로로 나간다. 까치골길은 강화동로에서 고려왕릉로를 이으며 길직리를 관통한다.
길상면 길직리 까치골길 들녘은 황금벼 물결과 속노랑고구마 캐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다.
왼쪽 피미길은 길직1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이어지며, 서해랑길은 오른쪽 까치골길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까치골길을 따라 부부느티나무 앞을 거쳐 고려왕릉로로 이어진다.
느티나무 두 그루가 부부의 애정으로 300~450년의 세월을 동고동락했으며, 강화군 큰나무로 지정되었다.
길직리 부부느티나무는 수령이 300년~450년으로 추정되며 나무 높이 18m, 나무둘레는 5.1m와 3.8m라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부부느티나무 두 그루가 정겹게 서있다. 예전에는 유일한 마을의 정자목으로 동네 처녀들이 그네를 타고 놀았던 장소였으며,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가을에는 고운 단풍으로 관심을 받던 길직리마을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너무 시원한 그늘 때문에 한여름 농사철에 잠시 휴식을 즐기며, 한 잔 두 잔 마시던 술이 하루해가 저물게 되고, 남자들이 농사일을 제대로 못하게 되자 이를 참다 못한 아낙들이 직접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변화되면서 느티나무에 대한 고마움과 관심은 예전 같지는 않아도 마을의 정자목으로서 문화적·생태적으로 보호의 가치가 큰 나무이다.
중앙 뒤의 까치골길 고개를 넘어 까치골길을 따라왔다. 왼쪽 뒤는 연등국제선원으로 이어지는 까치골길134번길이다.
까치골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주)엠테크놀러지 공장 앞을 지나 고려왕릉로로 나간다.
(주)엠테크놀로지 공장 앞을 지나 고려왕릉로의 까치골길 출입구로 나간다. 오른쪽 앞에 카페 보니파시오가 있다.
까치골길이 고려왕릉로와 만난다. 서해랑길은 고령왕릉로 왼쪽 방향으로 이어간다.
까치골 입구에서 고려왕릉로 북쪽 불은면 두운리 방향을 바라본다. 오른쪽에 카페 보니파시오가 있다.
고려왕릉로 까치골길 출입구 건너편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종점 곤릉 버스정류소까지 2km가 남았다.
고려왕릉로는 북쪽 불은면 도장리에서 길상면 길직리와 양도면 길정리를 거쳐 서남쪽의 양도면 도장리 도장삼거리까지 이어진다. 길상면 길직리 까치골길 출입구에서 고려왕릉로를 따라 양도면 길정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 고개에 참기름 전시장이 있으며, 까치골길을 따라 고려왕릉로로 나왔다.
의료용 기기 제조기업체 (주)엠테크놀러지 공장 앞을 거쳐 고려왕릉로로 나와서 서쪽 방향으로 이어가고 있다.
왼쪽에 열린문교회 출입로가 있다. 서해랑길은 종점까지 계속 고려왕릉로를 따라간다.
열린문교회 출입로에서 남쪽으로 길상면 정족산과 그 왼쪽 뒤 길상산을 바라본다.
오른쪽은 사격훈련장과 예비군훈련장이 있는 군부대이고, 서해랑길은 고려왕릉로를 계속 따라간다.
중앙 뒤의 고개가 참기름 전시장이 있는 까치골길이며, 왼쪽 뒤의 고개는 연등국제선원에서 넘어오는 까치골길134번길이다.
예비군훈련장 버스정류소가 앞에 있으며, 오른쪽은 예비군훈련장과 사격훈련장이 있는 군부대이다.
왼쪽의 길직로는 동쪽으로 길상면 길직리 강화동로 마그네사거리까지 이어지며, 서해랑길은 고려왕릉로를 따라 길정저수지 방향으로 이어간다. 길직로 갈림길부터는 양도면 길정리 지역이다. 중앙 뒤에 강화도의 최고봉 해발 472m 마니산이 보인다.
정면에 화도면 마니산이 솟아 있다. 고려왕릉로를 따라 군부대 철조먕 옆으로 이어간다.
고려왕릉로에 해나무 버스정류소가 있다. 해나무는 홰나무의 방언이며, 회화나무, 괴목(槐木)이라 이른다. 마니산이 보인다.
진강산이 가깝다. 서해랑길 101코스에서 진강산 자락을 돌아간다.
앞에는 강화의 특산품 인삼밭이 있으며, 맨 뒤에 덕정산 산줄기가 벋어내린다.
양도면 길정리의 회화나무(홰나무)가 우람하다.
길정저수지 북쪽 언덕에 넓은 콩밭과 인삼밭이 펼쳐져 있다. 뒤쪽의 두 산 봉 중 왼쪽 두 번째 산봉이 마니산이다.
강화의 특산품 인삼을 재배하는 강화인삼밭, 그 뒤에 길정YB낚시터와 길정저수지, 중앙 뒤에 정족산이 솟아 있다.
고려왕릉로 앞쪽의 남쪽 보도에 곤릉 버스정류소, 그 맞은편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있다. 느티나무가 우람하다.
왼쪽에 곤릉 버스정류소, 고려왕릉로199번길 출입로에 서해랑길 안내도, 중앙 뒤에 진강산이 있다.
고려왕릉로199번길 출입구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오른쪽 뒤에 길정리마을회관, 왼쪽 뒤에 진강산이 있다.
서해랑길 100·101코스 안내도 왼쪽 기둥 위에 서해랑길 101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 100코스는 거리 16.5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보통이다.
서해랑길 100코스를 실제 탐방한 결과, 전체 탐방거리 17.8km, 전체 소요시간 4시간 7분이 걸렸다. 그냥 지나친 곳이 너무 많다.
서해랑길 100·101코스 안내도와 함께 서해랑길 100코스 탐방길 완주를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