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생활생물 연구회
 
 
 
 

친구 카페

 
등록된 친구카페가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역사 이야기 스크랩 프랑스, 루이 14세 초기의 부르봉 왕조(2)
임광자 추천 0 조회 119 08.05.09 08: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프랑스, 루이 14세 초기의 부르봉 왕조(2)

 

다. 재상 마자랭의 시대(1653 ~ 61)

 

(1) 중앙집권과 왕권 강화

 

섣부른 치료는 오히려 상처를 악화 시키기 마련이다.

 

 파리시민과고등법원, 그리고 대 귀족들이 왕권에 대항해서 일으킨 프롱드의 난은 결과적으로 중앙집권과 왕권 강화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프롱드의 난이 마무리 된 1653년, 루이 14세는 아직 열 여섯 살의 어린 나이였고, 섭정 안 도트리슈는 모든 것을 마자랭에게 맡겼다. 다시 마자랭(Mazarin, Jules)의 시대가 된 것이다.

 

루이 14세는 그의 수(壽) 77년 중 다섯 살에 왕이되었으니까 72년을 프랑스 왕위에 있었다. 그 가운데 초기 18년간은 그의 모후가 섭정으로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왕권을 행사한 것은 54년 간, 53년을 왕위에 있었던 조선왕조의 영조(英祖) 보다도 수(壽)는 짧았지만 왕권을 행사한 햇수는 길다.

 

이렇게 오랜 그의 재위 기간 중 초기 18년 간, 즉 섭정모후와 재상 마자랭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때를 섭정(攝政)시대라 하고, 그가 직접 정치를 맡았던 시대를 친정(親政)시대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는데, 친정시대 절대왕정의 틀은 이미 섭정시대에 마자랭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세운 파리 개선문프롱드의 난을 진압한 마자랭은 다시 자신감이 넘쳤고, 왕권 강화를 위한 일단의 개혁을 차분히 진행시켰다.

 

그는 우선 폐지했던 지방 총감제(앵탱당)를부활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전에 없었던 곳까지 새로이 지방 총감을 임명해서 왕권이 모든 지방에 미치도록 하였다.

 

이것이 관료기구가 되어 힘을 얻게 되고 관료 지배체제를 만들어 갔다.

 

지금까지 왕권을 억압하고 있었던 고등법원의 정치적 발언권을 제한 내지는 봉쇄해 버리고, 귀족들에게는 실권 없는 한직에 임명하여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중세(重稅) 정책에서도 직접세는 줄이고, 간접세를 늘려서 민중의 저항을 사전에 차단하였으며 계속적인 중상주의 정책으로 금융업자와 대상인들을 크게 성장하였으며 상대적으로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되었다.

 

대외 정책에서도 30년 전쟁의 결과 처리를 위해 체결(締結)된 베스트 팔리아 조약(1648)에서 많은 영토를 얻었으며, 프랑스의 우위를 지키는데 이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스페인과는 1636년 이래 전쟁을 종식 시키는 피레네조약(Treatyof the Pyrenees)을 체결(1659)하여, 루시옹, 아르투아 등의 영토를 스페인으로부터 얻고, 루이 14세와 스페인 왕녀 마리아 테레사를 정략 결혼 시켜, 스페인을 프랑스의 종속하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된 찰스 1세의 왕비 앙리에타 마리아의 망명 처를 제공해 주어 영국의 왕실과 네덜란드에 호감을 샀고, 크롬웰의 혁명정부와도 동맹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리슐리외 이상으로 그는 프랑스부르봉 왕조를 위해서 헌신했다.

 

(2) 루이 14세의 결혼

 

루이 14세가 동갑내기인 스페인 왕녀 마리아 테레사(MarieTheress : 1638 ~ 83)와 정략 결혼은 한 것은 1660년 6월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전 1657년, 그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질녀 오랑프 만시니를사랑했는데,...

 

모후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은 이들 간의 결혼을 극구반대하였다. 반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마자랭과 도트리슈 두 사람 사이의 애정 관계때문이라고도 하고, 스페인 왕녀와 정략 결혼을 위해서 였다고도 하는데, 후자가 더 설득력이 강하다.

 

어쨋거나 이를 말리는 수단으로 마자랭은 자기의 조카 딸인 오랑프 만시니를 다른 사내에게 시집 보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루이 14세가 또 다른 마자랭의 질녀, 마리 만시니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모후와 재상은 역시 반대하고 스페인 왕녀를 왕비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루이 14세와 마리 만시니는 서로 사랑을 굳게 약속하고, 모후와 재상에게 애걸도 하고, 위협도 하고, 타협도 모색해 봤다. 그러나 마자랭의 대답은 한결 같이 "폐하와 왕국, 모두의 영광과 행복과 명예를 위해...."라는 꼬리표를 달고서 여전히 두 사람의 결혼을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스페인 왕녀와 거의 강제로 결혼시켰다. 결혼 조건으로 스페인 왕실은 50만 에퀴의 금화를 신부 지참금으로 내 놓기로 했으나, 이미 기울기 시작한 스페인 왕실에서는 이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이것이 후일 루이 14세가 스페인 왕위계승 권을 주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멀리 개선문이 보이는 상제리제결혼 후에도 루이14세와 마리 만시니는 자주 만나 밀회를 즐기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 마자랭은 이미 출가한 또 다른 그의 질녀 오랑프 만시니까지 동원,

 

두 사람을 갈라 놓기 위해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서로가 미워 하도록 조종했다.

 

이래서 루이 14세는 마리 만시니를 미워하게 되었고, 마리 만시니 역시 국왕의 배신에 보복이라도 하듯, 보라는 듯 이탈리아 귀족에게 시집 가기로 결정해 버렸다.

 

그러다가 루이 14세는 자기가 마리 만시니를 오해했다는것을 곧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마리 만시니는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드디어 마리 만시니가 떠나는 날, 루이 14세는 한숨을 쉬었지만 아무 말없이 마차 속의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 숙여 인사했고, 그녀는 떠나가는 마차에서 울고 있었다.

 

마리 만시니를 대려 간 이탈리아인 신랑은 이미 그녀는 처녀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고, 결혼 지참금에만 관심이 있었으나 첫날 밤을 보내고 나서 그녀가 완전한 처녀임을 알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동안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서로를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마자랭은 자기의 조카딸을 희생 시키면서까지 그 두사람의 결혼을 그처럼 집요하게 왜 반대했는가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러가지 추측을 낳게 만들었고, 이런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의 소재를 제공했다.

 

마자랭은 또한 문화정책에도 힘써 작곡가 J. 륄리를 후원하는 한편, 왕립미술학교와 마자랭도서관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1661년 3월 9일, 그는 5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뛰어난 권모술수(權謀術數)는 안으로 중앙집권을 강화했고, 대외적으로도 프랑스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마자랭이 죽었고, 섭정 안 도트리슈는 정치에서 손을떼고, 루이 14세의 친정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다, 같은 시기 영국에서는 왕정이 복고되어 루이 14세의 고모가 되는 앙리에타 마리아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라 스튜어트왕조가 부활되었으며, 23세의 청년 왕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모든 정치를 직접 펼치게 되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이들 사촌(內外從)들을 정치무대의 전면에 등장시켜,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라는 혁명의 전철을 다시 밟게 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이라는 역사의 장면들을 남기게 만들었다.

 

그의 치세 기간 중, 프랑스의 화려한 절대왕정은 그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루이 14세가 마자랭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었다면, 루이 14세가 그의 후손에게 물려준 유산은 화려한 궁정생활과 대외 전쟁으로 비롯된 엄청난 재정적자였고, 이런 것들이 원인을 제공하여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부르봉왕조의 위기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다음 이야기 - 영국의 명예혁명-

Face On - 영화 Face Off 삽입곡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