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되고 타락한 예루살렘과 유다를
정화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과 조처를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다.
가장 먼저 혁파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물론 우상들이다.
8장에는 네 종류의 우상숭배가 등장한다.
첫째는 ‘질투를 일으키는 우상’이다.
성전에 우상을 들여놓고 하나님과 함께 섬긴다.
둘째는 장로 70명의 은밀한 우상숭배이다.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이다.
셋째는 담무스를 위해 우는 여인들이다.
하나님 아닌 곳에서 생명과 복을 구한다.
넷째는 태양을 향해 절하는 사람들이다.
성전에 있으면서도 아예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다른 것을 숭배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갖가지 다른 것들을 함께 숭상하는 모습,
성전에 몸을 두고 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모습.
그 모습들이 오늘의 신앙과 연결되어
마음이 어두워진다.
교회에 몸을 두거나
교인으로 이름을 등록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입으로 수없이 언급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예배하고 있다고
보증할 수는 없다.
반대로 변변한 예배 장소가 없고
‘교회’라는 제도적 테두리 안에 있지 않더라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으며
삶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대비이기는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의 외형이 신앙의 실체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형 너머의 중심과 동기이며,
그곳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시작된다.
10장에서는 마침내
죄악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기 시작한다.
성전 건물이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곳에 머무시는 것은 아니다.
예배가 있고, 지도자가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 불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임재까지 보증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배반한 성전을
분명히 떠나고 계신다.
그런데 그 무거운 심판의 과정에서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9:3~4이다.
‘예루살렘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역겨운 짓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의 이마에 표를 해놓아라.’
공동체의 죄악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어느 편에 있어야 하는가?
오늘 한국 교회의 상당 부분에서도
오래된 리더십과 정치적·사회적 성향이 신앙과 뒤섞이면서
하나의 강한 경향성과 관성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본다.
평범하고 순전한 성도들도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은 혼자 판단하기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편하다.
더구나 그 집단이
오랫동안 다닌 교회이고,
존경하는 목회자와
신실하게 헌신하는 성도들이 함께 있는 곳이라면
그 영향에서 벗어나 판단하기는 더욱 어렵다.
어떤 정치적·사회적 판단이
오랜 시간 신앙 자체와 결합되면,
나중에는 그 판단을 의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에스겔 8장에서
‘성전 안에 있었고,
장로였고,
다수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 틀렸다.’
종교적 권위와 다수의 동의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을 보증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반대로
소수라고 해서 옳은 것도 아니다.
“다수는 타락했고 우리만 깨어 있다.”는 생각은
수많은 이단과 극단적 집단에서도 발견된다.
결국 기준은
다수인가 소수인가가 아니다.
에스겔 9장이 보여주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들이 소수라는 데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것을
그들도 아파했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사람’은
자기편이 이기는 것만을 원하는 사람도
상대편의 잘못을 발견하고
통쾌하게 비난만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보다는
공동체의 죄악을
남의 죄로만 보지 않고 자기 일처럼 아파하는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내가 아파진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를
끝까지 보려 하는가?”가 먼저인 것 같다.
그렇다면
다수의 편에 설 수도,
소수의 편에 설 수도,
때로는 아무도 함께하지 않는 자리에서
혼자 서야 할 수도 있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Agreement & Validation.
진정으로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