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나폴레옹 시대(3)
종신통령에서 황제로(2)
코르시카 섬의 한 모험가는 이제 프랑스 국민의 황제가 되었다. 브뤼메르 쿠데타 후 불과 4년 만에 그는 혁명을 종결시키고 프랑스와 그 정복지에 군림하였다. 그는 공화파의 폭력과 왕당파의 반격을 봉쇄하고, 부르봉을 복구시키지도 않고 혁명의 과실을 희생시키지도 않으면서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혁명이 이뤄놓은 사업을 다치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혁명을 계속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이 불 질러놓은 자유의 사상을 미워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 권위의 사상을 대치시켰다. 혁명이 만든 민주적 사회를 기본적으로 존중했으나 앙시앵레짐의 중앙집권적 행정을 더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을 복구시켰다. 그는 위대한 혁명을 수습한 위대한 영웅이었다.
영웅 나폴레옹은 혁명을 수습하고 한 시대를 지배하였다. 나폴레옹이 혁명의 정점에 등장한 다음부터의 역사를 흔히 이 거대한 하나의 인물에 환원시키는 경우가 있다. 영웅이 역사를 만든다는 역사관이다. 나폴레옹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을 만들어낸 것도 이 역사관이었다. 전쟁에서 전쟁으로, 스일에서 승리로 끊임없이 욕망을 찾아 쉬지 않고 달리는 거인 나폴레옹, 운명에 대한 무관심과 인간성에 대한 경멸과 우정이나 사랑 따위를 냉소하는 악마 같은 나폴레옹, 하루 네 시간만 자면 새 기운에 넘쳐 피로를 모르는 초인적인 정력과 과감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나폴레옹, 놀라운 직관과 뛰어난 구성력,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프랑스의 지성을 추상과 가설에서가 아니라 현실과 실제에서 번갯불처럼 적용하는 정확한 판단력을 갖춘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남에게 복종할 줄 모른다. 나는 지배를 좋아하고 지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정복과 권력의 충동에 사로잡힌 나폴레옹은 “야심은 나이 생래적, 선천적인 것, 내 혈관을 흐르는 피나 내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내 존재에 고유한 것”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야심가였으며, “나는 때로는 여우이고 때로는 사자이다. 통치의 열쇠는 어떤 때 여우가 될 것이고 어떤 때 사자가 될 것인가를 분간하는 데 있다”고 할 만큼 철두철미한 마키아벨리스트였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낱말은 없다”고 장담한 나폴레옹은 분명히 근대 최대의 군사적 천재이며 초인적인 판단력과 냉엄하고 단호한 행동력을 갖춘 영웅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도 그의 권력도 역사의 산물이 아닐 수 없었다. 영웅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영웅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권력은 역사에서 유리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발생한 일정한 사회관계의 필연성에 연결 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혁명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봉건 지배는 모든 토지에는 영주가 있다는 원칙을 세웠다. 성직자와 귀족만이 온갖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농민은 토지에 부속된 노예였다. 그러나 문명과 인지의 발달은 민중을 해방시켰다. 이 새로운 상황은 공업과 상업을 발달케 하여, 18세기에 이르면 민중이 토지와 재산과 지식의 대부분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귀족은 여전히 특권계급으로서 각급 재판권과 여러가지 칭호와 여러 형태의 봉건권을 가지고 최고의 명예로운 벼슬을 독차지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사회의 어떤 부담도 지지 않았다.
이 모든 폐혜는 시민을 자극하여 분연히 일어서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주요한 목표는 모든 특권의 분쇄, 영주권의 불가분의 속성이었던 영주 재판권의 폐지, 인민의 오랜 예속 상태의 유물로서의 봉건권의 폐지, 모든 시민과 모든 재산에 대한 공평한 국가적 부과이다. 끝으로 혁명은 권리의 평등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시민이 그 재능에 의하여 어떤 직업에도 취임할 수 있게 되었다……
혁명이 진전함에 따라 그것은 왕실과 성직자와 귀족의 반항을 받고 외국 열강과는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거기서 망명자 탄압법이 제정되고 망명자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 몰수 재산은 전비 조달을 위항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국토의 반이 그 소유자를 바꾸어, 농민도 시민도 부유해졌다. 농업과 공장제 수공업 및 대공업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발달하였다. 프랑스는 국토가 자연의 국경으로까지 확장되었고, 통일적인 법과 규칙과 질서에 의하여 통치하게 되었고, 부르주아지가 한 계급을 구성하는 3,00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장대한 나라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혁명관은 정확할 뿐만 아니라 구조적 이해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단지 왕위 쟁탈의 정치혁명으로 보지 않고 사회혁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사회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봉건제도와 함께 봉건귀족의 권력 및 소유 관계를 전복한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제도와 함께 시민계급의 권력 및 소유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 새 제도와 권력 및 소유 관계를 고수하려고 할 때 그것을 위협하는 세력이 둘 있었다. 하나는 오른편의 왕당파였고, 또 하나는 왼편의 평등주의자였다. 전자는 새 질서를 부정하고 옛 질서를 회복하려고 했고, 후자는 혁명의 과실을 얻지 못한 계층에 대한 과실의 공평한 분배를 주장했다. 부르주아지는 이 둘을 다 제거해야 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후자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전자의 위협을 가중시켰다. 총재정부는 부르주아적 안정이라는 과제를 제대로 수행치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부르주아지는 매우 불안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역사적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나폴레옹의 군사독재였다.
그러기에 나폴레옹의 역사적 필연성은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의 종결과 완성에 있었다. 브뤼메르 쿠데타 직후 “혁명은 그 당초의 원칙에 고정된다.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한 총재정부의 선언은 그 쿠데타의 성격을 정확히 표현하였다. 이 선언을 나폴레옹은 다른 말로 표현하였다.
우리는 혁명에 관한 낭만을 끝냈다. 이제 우리는 혁명의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 혁명 원칙을 적용하는 데에 현실적이고 가능한 것만을 보아야지 사변적이고 가설적인 것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통치가 아니라 철학이다.
요컨대 나폴레옹은 혁명의 낭만을 종결시키고 혁명이 현실을 정리하고 혁명을 완성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가 내세운 통치의 기본 목표는 부르주아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사회의 토대로서의 자본주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 국민경제를 확대하여 부르주아의 이익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민적 사회관계의 제도화는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으로 비로소 실현되었다.
프랑스에는 본래 통일적인 법전이 없었다. 더구나 혁명 기간에 여러 가지 법령과 법률이 아무 원리도 없이, 종래의 관례도 고려하지 않고 남발되었다. 따라서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법전 편찬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혁명정부는 국민공회 이래 이 사업에 착수하기는 하였으나 하등의 실적을 보이지 못하고 방치 상태에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드디어 그것을 완성하였다. 그는 마렝고의 승리에서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1800년 8월 12일 저명한 법학자들로 민법전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 장식 초안이 될 때마다 토론과 심의를 거쳐서 입법부의 의결로써 확정 공포하였다. 36장을 모두 합쳐서 ‘민법전(Code civil)’이라는 하나의 법률로 선포한 것이 1804년 3월 21일었다.
민법전은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유지했으나 혁명적 입법의 철학적 원리를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혁명의 집약인 동시에 혁명의 수정이었으며, 시민혁명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민법을 종교적 영향에서 해방시키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혁명의 원리를 방어하고, 신분의 세습을 금지하고 상속과 소유에 관한 혁명적 입법의 일반적 원리를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민법전은 가족 관계에서 가장의 우월적 지위와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규정하여 보나파르티슴의 권위주의적 색체를 반영하였다. 민법전에는 권위주의적 가족제도를 바탕으로 하면서 이를 기본 유형으로 피라미드식 국가 체제를 세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반영되어 있었다. 요컨대 혁명 입법에 비하면 반동적이고 앙시앵레짐의 법률에 비하면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 민법보다도 가장 진보적이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가는 곳마다 민법이 미친 혁명적 영향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비단 유럽만이 아니라 민법전은 그대 세계의 모든 나라에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 정치적 이념을 전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민법전은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가히 보편적, 세계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정 시대에도 나폴레옹은 계속 법전 편찬에 힘을 기울였다. 민사 소송 법전이 1806년에, 상법이 1807년에, 형법 및 형사소송법이 1810년에 각각 완성되었다. 이 법전들은 제정 시대의 엄격한 온정주의와 전제주의 사상을 반영하여 혁명 원리의 적용을 한결 더 약화시키고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혁명이 가져온 변화를 제도화하고 있다.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의 완성은 제도 면에서는 나폴레옹 법전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완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르주아의 경제적 번영과 그 안정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우선 재정의 균형과 통화가치의 안정을 요구하였다. 앞에서 우리는 프랑스 은행의 창립을 언급한 바 있었는데, 프랑스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곧 가치가 하락하여 사태가 매우 심각해졌다. 재정의 파탄을 겨우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오스트리아에서 받아들인 전쟁 배상금으로 우선 은행 준비금을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만성적 적자 재정을 재건하여 재정과 통화의 안정을 실현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서 갓 출발한 프랑스의 산업 자본주의를 본 궤도에 올려놓았는데, 그의 재정 정책의 요점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간접 세제였고 둘째는 정복 국가에 대한 배상과 강제 수탈이었고, 셋째는 국유재산의 판매였다. 1803년 공화 11년, 제르미날 7일 순금 320밀리그램을 함유한 제르미날 프랑이라는 금화를 발행했는데, 이 화폐는 19세기를 거쳐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큰 인플레이션시기까지 꾸준히 그 가치를 유지하였다. 그 덕택에 계속된 나폴레옹 전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경제는 안정된 재정하에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리하여 1804년에 2,700만 이었던 프랑스의 인구가 계속 증가하여 1814년에는 2,900만 명이 되었다.
나폴레옹 제국 시대의 경제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토건 사업이다. 1804년에서 1813년까지 10억 프랑 이상의 돈이 토건 사업에 쏟아졌다. 운하, 항만, 도로, 관개시설, 그리고 파리를 아름답게 만든 수많은 기념 건물들과 센 강의 다리가 그때 건설되었다.
나폴레옹 체제가 프랑스 혁명의 종결을 의미했다면, 나폴레옹이 왕당파에 엄격했던 것만큼 노동자의 노동운동에도 엄격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자본과 노동의 조종자로 자처하고 있었지만 고용주에게는 관대하고 노동자에게는 엄격하였다. 19세기 및 20세기의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은 나폴레옹의 노동 억압 정책을 격렬히 비난하고 있다.
나폴레옹의 사회정책에서 특기해야 할 것은 농민과의 관계였다. 프랑스 혁명이 전형적인 시민혁명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농민 혁명이 가장 광범하고 가장 철저히 수행되었기 때문인데, 나폴레옹은 농민 혁명의 결과를 잘 보호하였다. 언젠가 나폴레옹은 “우리는 선량한 농민이 필요하다. 그들이 군대의 힘을 만든다. “고 말한 바 있는데, 사실 나폴레옹의 군국주의는 많은 농민을 군대로 징발하였다. 따라서 농민은 나폴레옹을 싫어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혁명을 통하여 새로 얻은 농토를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안전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군사력이 등장하기 이전에 농민은 항상 자신의 새 토지에 대하여 불안해했는데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토지 문제에 관한 한 혁명의 결과를 철자히 보호하는 데 세심하였다. 그만큼 농민은 나폴레옹에게 고마워했고, 또 그만큼 보수화하였다. 농민의 보수화야말로 보나파르티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이상에서 보나파르티슴의 역사적 필연성이 무엇인가를 프랑스 혁명 후의 사회관계에서 찾아보았다. 결론은 한마디로, 당시 프랑스 자본주의는 아직 미성숙의 단계에 있었기 대문에 부르주아 혼자의 힘으로는 정치적 안정을 확립할 수 없었고, 결국 군사 독재의 힘에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