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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내의 원고입니다. 분실 우려도 있고해서 올려놓습니다.
바흐찐의 눈으로 이문구의 『우리 동네』 읽기
Ⅰ. 시작하는 말
이문구의『우리 동네』가 발표된 시대(1977년-1981)는 긴급조치와 18년 장기집권의 말년 그리고 80년 광주 민주화 항쟁의 발발과 관련하여 욕망과 가치관이 다층적으로 혼재했었다. ‘국민소득 100억불 수출‘이라는 명분으로 일인 독재가 이루어졌고, 이에 맞서 민주화의 열기가 체화되었던 시국이며 흑백 TV로 상징되던 개발도상국 시대였다1). 고등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학도호국단 조회를 섰으며, 필자의 학창시절 오전 수업을 마치고 어떠한 이유도 불참을 허용하지 않으며 오후 시간 내내 단체 마스게임 훈련2)에 한 달 이상 동원되었던 지긋지긋한 기억도 있었다. 거리에서 가위와 자를 가진 경찰이 아가씨들의 치마길이를 재고 청년들의 머리를 가위질했다. 젊은이들은 수시로 불온 유인물 소지를 핑계로 가방속까지 불쑥불쑥 침탈당해야했다.
소설『우리 동네』의 특징은 전체주의적 유신독재, 군사문화에 저항하는 장삼이사의 존재에 주목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일상의 크로노토프에서 ‘형식적 감시와 소극적 저항’을 통하여 독재시대를 살아남은 몸짓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연히 이문구 소설의 인물은 모더니즘 소설의 ‘산책자’보다는 리얼리즘 소설의 ‘문제적 인물’, ‘세계사적 개인’에 가까울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아우라를 함께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도 이 세계사적 개인은 놀이형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하지 않다. 시대성을 담는 동시에 개성적 인물로서 전형성을 성취한다는 것은 때로는 하나의 이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우리동네』는 이 이상을 성취하기 위한 장치를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특히 창작의 자유가 극도로 제약되었던 상황에서 새로운 소설 장치를 통하여 민초들의 닫힌 울분을 카타르시스 하였던 것이다. 순박하고 목가적이며 자기희생적인 농민의 모습이 아닌, 저항하고 즐기면서 상황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였다. 1970년대를 온몸으로 밀고 가는 진짜배기 생존형 농민의 모습이 창출된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농민은 소위 ‘투사형’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우리 동네』장삼이사 인물들은 점잖음 ․ 진지함과 거리를 두며 때로는 소소하게 저항도 하고, 공격하거나 공격당하면서 상황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킨다. 역동적 상황의 변화에서 발생하는 신명으로써 억압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순간이나마 놀이판으로 만들면서 타자로서의 농민이 주체가 되는 소통의 순간을 창출한다.
이 놀이판은 ‘말’이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또한 이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나 비속어는 일상의 공간에서 행할 수 있는 자기표현의 기호로 작용한다. 직설적 언어가 금지되었던 시대, 흑백 TV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흑백논리의 권력 담론만이 허용되던 시대에 이 ‘말의 놀이판’은 생존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말로 벌이는 일상의 향연이 억압의 시대에는 그 자체만으로도 곧 저항의 논리와 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을 ‘말’로 뒤집어 상황을 새롭게 이끌어가는 ‘다성성의 ‘대화’가 탄생한다. 이러한 대화 형식이 이문구 소설읽기의 핵심 줄기가 될 때 텍스트 안과 밖, 그리고 작품의 중심과 주변을 넘어서는 더 많은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더 풍요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문구 소설을 ‘대화’와 관련하여 의미 찾기를 시도하는 것은 일찍이 한수영 등이 주목하여 지적한 바 있다.3) ‘다성성 대화’이론으로 이문구 소설을 읽을 때 비로소 작품의 한계로 지적된 부분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시사점을 언급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성성 대화’란 바흐찐의 문학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담론에 담긴 다양한 계층과 사회적 관점을 담아내는 소설의 특성에 주목하여 다양한 갈등과 세계관이 대화의 층위로 표출될 때 울림과 반향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문구 소설의 키워드를 ‘다성성 대화’로 보고, 작품『우리 동네』를 중심으로 ‘주체 구성의 농민 보여주기’, ‘형식적 감시와 소극적 저항’, ‘언어의 카니발’ 세 가지 의미의 색채를 밝혀보고자 한다.
Ⅱ. 주체 구성의 농민 보여주기
소설『우리 동네』는 ‘타자로서의 농민’을 넘어서는 ‘주체 구성의 농민’을 보여준다. 그 모습에는 이기영의「고향」에서 성취한 전형적 인물로서의 동경 유학생 출신 이희준을 넘어서는 새로움이 있다.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면서 저항하는 동시에 생을 즐기는 인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경제적, 정치적 타자로서 체념과 불신의 이미지를 지닌 농민의 모습을 벗어나려는 주체적 의지를 지닌 존재로 보여진다. 이러한 주체 구성의 지향은 자기풍자(자기비판)와 소극적으로 저항하기 측면에서 드러난다. 농민의 존재를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존재로 대상화시키거나 농민투쟁을 선도하는 투사형 인물로 이상화하지 않으면서 문제적 인물로 설정하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이중 삼중의 희생을 감내하면서 경제적 또는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소설속의 등장 인물들은 분노할 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생을 즐기며 자기발언을 한다. ‘말이 많을수록 일을 끝내면 죄용허더라’처럼 함께 일을 논의하고 책임진다는 의식이 있다.
“그러믄요. 되는 동네는 이렇다구유. 워떤 사람은 말 많은 걸 질색허구, 가급적이면 쉬쉬 허려구 허는디, 그것은 워디까지나 독째…… 하여간 다시 말허면, 말이 많은 동넬수록이 일을 끝내면 죄용허더라 이거유.” (「우리 동네 황씨」, 410쪽)
장삼이사로서의 주체적 농민은 어떤 존재인가? 이문구가 창조한 새로운 농민형 인물은 소시민적 근성을 보이면서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즐길 줄 알며, 주체적으로 삶을 향유한다. 이러한 주체적 농민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이 장에서는 주체로서의 농민형 인물 창조의 방법과 그 의의를 탐색하고자 한다.
『우리 동네』는 담론의 다양한 층위가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을 읽는 재미는 등장인물인 장삼이사가 보편성을 지니면서 구체적이고 개성적인 인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가의 전략적 장치이기도 하다. 이문구는 채만식의 『태평천하』처럼 ‘말해주는 글’이 아니라 ‘보여주는 육성’4)의 재미를 준다고 했다. ‘보여주는 육성’의 재미를 성공적으로 창작에 반영한 것이 『우리 동네』 연작이다.
여기에서 등장인물을 이름이 아닌 성씨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이는 보편자로서 형상화하겠다는 작가의지로 볼 수 있다. 소설 속의 이 아무개는 특별한 개인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농촌에 몸을 담은 갑남을녀 모두를 대표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별자를 보편자로 보여주었는가’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주장하고 보여준다. 이때 작가는 등장인물의 말 즉 그 육성의 생산자가 된다. 다시 말하면, 담론 형성의 과정, 담론 자체에서 개별자와 보편자의 합일된 존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작가와 독자가 자신만의 목소리와 색채를 지니면서 대화에 참여하는 점이 중요하다. 즉 인물의 캐릭터가 소중하다는 얘기다. 작품「우리 동네 리씨」에서 크리스마스나 망년회를 앞두고 리낙천씨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농촌 구석까지 파고드는 소비문화에 황폐해지는 농촌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물론 소비적 욕망을 향해 치닫는 행태는 부정적이므로 가족의 대화가 오순도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린 것이라도 자나깨나 크리스마스와 징글벨 소리로 귀가 닳창나다 보니 그것이 무슨 푸짐한 구경거리처럼 여겨진 눈치였다. 아내가 말했다.
“그 오백 원 같은 소리 작작 해둬라. 돈은 왜 나버러 달라네? 등장에 댓진 바른 사람 니 옆댕이 누워 있는디……. 니미는 늬 애비 만난 뒤루 돈 안부 끊겨서, 오백 원짜리에 시염이 났는지, 천 원짜리가 망건을 썼는지, 질바닥에 흘린 것두 못 알어봐서 못 줏는단다.”
뒤통수가 무럽고 군시러운 것이, 아내가 두 눈을 모들뜨고 노려보는 게 분명해 리는 견딜 수가 없었다. 리가 기침을 참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만근이는 다시 아망을 떨었다.
“돈 안 주면 가만 있을 중 알구? 그럼 저금통을 찢지, 씽.”
만순이 만실이가 여으내 가으내, 구무정, 거리티, 솔미, 저무니, 늦들잇들 같은 이웃 동네 들판까지 쏘다니며 논두렁 밭고랑을 뒤져, 소주, 콜라, 음료수 병을 주워모아 내년에는 기어이 서울로 피서여행을 가겠다고 모은, 책상 위의 돼지 저금통더러 한 말이었다.
“옳지 그렇게 쓸 것만 닮어라. 그늠으 크릿스마쓴지 급살을 맞쓴지는 왜 생겨설랑 웂는 집 새끼덜 간뎅이만 덜렁그리게 허는구…….”
아내는 절로 나오던 탄식을 짐짓 긋더니.
(『우리 동네』,「우리 동네 리씨」, 민음사, 39-40쪽. 1981)
아내는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처지의 가난에 대한 남편의 무능을 원망하면서 세태의 변화에 흔들리고 있다. 아이는 당연한 권리로서 크리스마스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사항을 당당하게 주장하며 신세대의 입장을 대변한다. 아내는 아이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지만 가난함 때문에 해줄 수 없는 처지를 남편의 무능 탓으로 몰아 부친다. 또한 남편은 자신의 무능은 인정하지만 소비지향으로 변질된 크리스마스를 인정할 수는 없다. 아이와 아내와 남편의 서로 다른 세대, 성별, 관점의 차이가 혼성되어 울려 퍼지는 하모니에는 독자와 작가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작가는 남편 리씨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입장과 소망 역시 비슷한 비중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노래 제목 하나는 제 소리나게 붙였네. 징글징글헌 늠으 징글벨…….’ 하는 대목에서 소비풍조를 조장하는 대중문화에 대한 노여움과 풍자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따라서 이 부분을 '가족끼리의 공격적 가학적’ 의미로 해석해서 ‘세태 풍자’와, ‘농촌사회의 공동체 붕괴’로 규정하는 견해를 따르기보다는 ‘다성성의 대화’로 읽는 것이 작품의미를 살리는 지향점이 될 것이다. 농촌사회에 급속하게 파급되는 ‘대중적 소비문화에 대한 다층적 이질혼성성’으로서 남편과 아내와 아들 입장을 표현하는 ‘다성성의 대화’로 추론할 때 세태에 대한 풍자라는 의미부여도 더욱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때 풍자의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 된다. 작품 속의 리씨는 변화된 세태를 인정하지 않는 무능함으로 희화화된다. 따라서 ‘크릿쓰마쓰는 예수 믿는 사람이나 소용있는 날이라구 타이르지두 못혀?’ 하는 리씨의 원리원칙적인 발언은 공허할 뿐이고 아내의 말이 현실적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초파일날 지달려 꽹매기 치메 노는 것덜치구 부처 위허는 것 봤어?’ ‘헐 말 웂걸랑 윤 서방네서 델러 오기 전에 여물솥에 연탄이나 갈아놓으.’ 하는 타박까지 듣는다. 여기에서 독자들의 가슴이 답답해지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농촌사회에까지 파급된 소비성향의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예문과 같이 풍자의 대상이 ‘농민, 장삿꾼, 사내들, 사람들’이 되면서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소통의 순간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누가 누구를 풍자하는가?
사내들은 술 생각이 나면 떼지어 장터로 몰려나가곤 했다. 그전 같으면 기껏해야 호미씻이하는 백중에 보릿되나 여투어 개를 한 마리 도리기해 먹거나, 안는 닭 비틀어놓고 막걸리 두어 되 추렴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옛날이었다. 이제는 본전을 찾자면서 장터로 몰려나가 일 년 동안 드나든 단골집들을 훑는 게 버릇이었다. 동네 청년들과 장터 장사꾼들은 피차 상대방을 물주로 여기고, 서로 꾀를 다하여 등쳐먹으려고만 들었다. 장사꾼들이 일 년 동안 갖은 물품에 웃돈을 얹어 농민들에게 바가지를 씌웠으므로 얼핏 생각하면 동네 청년들이 본전을 빼먹으려 덤비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올가미였다. (「우리 동네 리씨」, 44-45쪽)
동네 청년들과 장터 장사꾼들이 ‘서로 꾀를 다하여 등쳐먹으려’하며 ‘장사꾼들이 일 년 동안 갖은 물품에 웃돈을 얹어 농민들에게 바가지를 씌웠다’고 여기며 ‘단골집들을 훑는 게 버릇’이 된 농민의 모습은 작은 이익을 계산하는 속물적 존재이다.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속물적 근성이 존재한다. 이를 합리화하지 않고 ‘그 역시 올가미였다’고 보는 ‘우리 동네 리씨’는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고 영악을 떨어보지만 결국 농민들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리씨’의 비판은 농민들이 선호하는 음식과 술로 이어진다. 생일초대 자리에서도 소박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즐기지 못한다. ‘술을 가리는 꼴’이 ‘우스운 것은’ 유행에 따르는 모습 때문이다. ‘환타, 콜라, 사이다, 박카스 따위를 영양제로 믿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혐오에 가깝다.
전에는 먹던 김치 짠지에 진닢국만 끓여놓고도 부를 만한 이면 나이 없이 부를 수 있었고, 투가리에 우거지 지져 간장 곁에 놓고, 바래기에 시래기 무쳐 장아찌 앞에 올린 상을 받더라도 허물한 적이 없었으나, 시절도 시잘 같잖던 것이 어느새 옛말하게 바뀌어버린 거였다.
사람들은 미역국에 고깃점만 드물어도 눈치 보며 수저를 넣었고, 동태찌개도 물태로 끓인 게 아니면 쳐다보기를 꺼렸으며, 반드시 울긋불긋한 과일 접시가 보여야만 남을 부르려고 차린 줄로 여겼다. 그중에서도 우스운 것은 술을 가리는 꼴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날탕이라 해도 맛이 흐린 막걸리는 맥주 무서워하듯 물어도 안 보다가, 영양제 탄 소주라면 횟국으로 쳤다. 환타, 콜라, 사이다, 박카스 따위를 영양제로 믿는 탓이었다. (「우리 동네 리씨」, 55쪽 )
이러한 상황에서 리씨는, 습관적인 불법행위나 원칙 깨기가 일상화된 세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즉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자신만의 ‘리’씨를 찾겠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다성성의 대화’ 보다는 단성성의 독백이 느껴지면서 오히려 소통의 장애가 된다.
늬덜이나 늬 어매는 나를 넘덜허구 똑같이 치는 모양인디, 나는 원래가 그렇지 않다. 시방 구신이 옆에 있지만, 나는 내 양심 내 정신으루, 내 줏대, 내 나름으루 살자는 사람이다. 지금까장은 이리 가두 흥, 전주 가두 흥 허메 살어왔지만 두구 봐라, 아무리 농토백이루 살어두 헐 말은 허메 살 테니. 그렁께 늬덜두 오늘버텀은 공책이나 시험지에 이름을 쓸 때두 꼭 리만순, 리만실, 이렇게 쓰구, 명찰두 당장에 새루 써 달어라. (「우리 동네 리씨」, 58쪽)
따져봐라 우리게만 해두 이가가 좀 많데? 이동화, 이창권, 이낙수, 이낙만, 이낙필이……그러나 이 리낙천은, 그것덜허구 씨알은 비스름헐지 몰러두 줄거리가 다르다. 그것덜은 세상이 꺼구루 돌아가두 나만 괜찮으면 장땡인 중 아는 상것덜이여. 그런디 내가 그런 상것덜허구 하냥 이가 노릇을 허면 쓰겄네? 이짜는 원래 오얏 리짜여. 그렁께 우리는 원리원측대루 리씨루 쓰자는 겨. 원리원측대루 허는 게 곧 바로 사는 행세다 (「우리 동네 리씨」, 58쪽)
‘원리원측대루’ 살겠다는 의지가 ‘리씨루 쓰자’는 결심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바로 사는 행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원칙이 이웃과의 소통 공간을 차단한다. 심지어 아내까지 비웃고 아이들은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이 소통 부재 속에서도 자신만의 원리원칙 지키기에 충실하고자 했던 리씨 역시 철저하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기 생각에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남과 달리 원리원칙대로 행세해야 올바로 사는 길이라며 손수 갈아 단 문패를 스스로 떼어버린 셈이었다. 그는 부끄러웠다. 뉘우침과 후회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오늘만 해도 자고 나서 일변 지금까지 남과 다를 것 없는 짓만 골라 한 꼴이었다. 그것은 허당이었다. 그는 그 허당을 느낀 순간 문패를 그전대로 다시 고치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나온 김에 문패 만드는 도장포에 들러 이낙천으로 문패를 새로 맞출 작정이었다. 그것은 자기가 떳떳지 못한 행위에 대해 스스로 사과하고 과오를 반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우리 동네 리씨」, 77쪽 )
‘리씨’는 특별한 존재로서 원리원칙을 지키고 싶었지만 인정하고 스스로의 과오를 반성한다. 원칙도 없이 세태에 떠밀려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자신을 향한 풍자가 결국 새로운 결심으로 이어지지만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과오를 반성하게 한다.
작중화자 ‘리씨’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시선보다 강하게 자신을 향해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 ‘리씨’에 대한 풍자를 통하여 타자로서의 존재와 ‘리씨’의 관계는 가까워진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하루하루 새롭게 결심하고 반성하면서 의문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주체를 자각하는 신뢰성을 준다.
시대를 자각하고 문제의식을 지니면서 말을 통하여 자신을 표출하는 장삼이사의 보여주기는 ‘리씨’와 같은 새로운 농민형 인물을 창출한다. 이들은 조직 속의 일원이 아닌 개별자이다. 마을 사람의 한 명으로서 주체적으로 저항하고 주체적으로 즐길 줄 알며 주체적으로 삶을 향유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지닌다. 이를 보다 세분하여 다음 장에서는 주체적으로 저항하는 양상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Ⅲ. 일상의 크로노토프- ‘형식적으로 감시하기와 소극적으로 저항하기'
크로노토프는 문학작품 속에 ‘예술적으로 표현된 시간과 공간 사이의 내적 연관’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문구 소설의 ‘다성성 대화’의 의미를 크로노토프의 형식과 관련지을 수 있다.5) 소설『우리 동네』에서 그려지고 있는 인물은 시대의 억압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던 농투성이 민초였다. 그들 작중 인물은 100억불 수출과 1000불 국민소득’을 목표로 ‘총화단결’을 부르짖으며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던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농촌은 관주도의 식량증산을 위해 품종개량과 퇴비증산 운동에 열을 올려야 했고 이는 저임금 유지를 위한 저곡가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 속에서 ‘일상의 크로노토프’의 표정은 ‘형식적으로 감시하기와 소극적으로 저항하기’의 형식을 구성한다. 이는 억압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야했던 민초들이 굴종을 최소화하면서 저항의 몸짓을 표출하는 의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Ⅱ장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우리 동네』집필 당시 작가는 관찰보호대상으로 담당형사가 딸려 있었다. 물론 담당형사가 불온작가로 지목된 이문구를 감시하는 것은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작가 역시 이런 구조적 환경을 인정하기 때문에 담당형사의 업무상 감시에 대한 저항은 소극적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벌어지는 ‘관과의 충돌’ 또한 마찬가지이다. 정부에서 추구하는 농업정책 때문에 이를 지시하는 입장에서 면장 이장 등은 벼 품종이나 정부 시책을 강제한다. 하지만 이러한 강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힘도 없고 해서 면장 등의 입장도 고려하여 농민들은 소극적인 저항을 감행할 뿐이다.
이들 삶의 터전인 토지가 ‘공적이냐 사적이냐’에 대한 물음은 도시의 작은 가게나 공장이 ‘개인의 소유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과 차원이 다르다. 매매가 가능하고 소유자가 있는 것은 동일하나 토지와 건물의 본질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가 『우리 동네』에서 공간의 의미를 복잡하게 자리매김한다.
농민들은 벼의 품종 하나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한 채 국가시책에 따르도록 강요받는다. 식량자급, 식량증산이라는 명분으로 농민들을 존중하지 않는 영농정책은 ‘농민과 관의 대립’을 낳는다. 절대적인 관의 힘 앞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는 못하지만 내재된 불만과 불신은 나날이 커진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영농교육장, 민방위훈련장 등에서 치밀한 통제가 진행된다.
“사실은 이 시간이 교육시간입니다마는, 가만히 앉아서 자리 흐틀지 말구 담배들이나 피셔유. 지 자신이 교육에 대비하여 학습해 둔 게 있는 것두 아니구 해서 베랑 헐 말두 웂습니다. 또 솔직히 말해서 지가 예서 뭬라구 떠들어봤자 머릿속에 담구 기억허실 분두 웂을 줄루 알구 있습니다. 그냥 앉아서 죄용히 담배나 피시며 시간을 채우도록 허서유. 그런디 퇴비들을 쌓으실 때는 몇 가지 유의를 해주시라 이겝니다. 위에서 누가 원제 와서 보자구 헐는지 알 수 웂으닝께, 퇴비장 앞에는 반드시 패찰과 척봉을 꽂으시구, 지붕 개량허구 남은 썩은새나 그타 여러 가지 찌끄레기루 쌓신 분들은 흔해터진 풀 좀 벼다가 이쁘구 날씬허게 미장을 해주서유. 정월 보름날 투가리에 시래기 무쳐 담듯 허지 마시구, 혼인 쓸 때 두붓모처럼 깨끗허게 쌓주시라 이겝니다. 퇴비가 일 헥타당 멫 킬로 이상이라는 것은 잘들 아시구 기실 중 믿습니다마는, 아무쪼록 식전에 두 짐, 저녁에 두 짐쓱, 반드시 비시도록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때 김은, 퇴비는 지저분할수록 거름이 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입 밖으로는 무심히 “모냥 내구 있네. 멫 평이 일 헥타른지 워치키 알어“ 하고 두런거렸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거였지만, 순전히 남의 말에 토 달기를 예사로 해온 입버릇 탓이었다.
(「우리 동네 리씨」, 33-34쪽)
그러구 농사는 농민이 짓는 겐디, 실지루는 관에서 마름을 보는 심이라, 이래라저래라 몰아대는 양을 볼 것 같으면 농업농산지 관광농산지 당최 분간을 못 허겄더라 이게여. 분명 누구 보기 좋으라구 농사짓는 게 아닌 중 알련마는, 눠 시키는 걸 보면 관청 취미대루라. 그런다구 혹 제대루 된 게나 있으면 그러니라나 허지. 뽕나무 심으슈 심으슈 했던 게 불과 몇 해 전여? 인저는 그늠으 것 캐내 버리느라구 조합 돈까장 읃어댔으니……. (「우리 동네 리씨」 69쪽)
동네 이장은 감시하는 자인 동시에 감시를 받는 마름의 역할을 한다. 아침마다 들이닥치는 ‘서’와 ‘지’는 이러한 관공서 통제시스템의 견고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은 농민들을 힘들게 하면서도 인간적 친밀도를 유지한다.
마침 우리 부락 담당 두 양반허구 동넷분덜이 죄 한자리에 뫼였으니 말씀이지만, 나 이 두 양반덜 땜이 증말 죽겄어. 일 년 열두 달을 하루걸이루 새벽 댓바람에 쳐들어와설랑은이 나만 볶는디, 자, 박다 말구 빼는 것은 두 째여, 이 양반덜이 올 적마다 아침을 해대는디, 있는 쌀이겄다, 밥은 월마든지 해디려. 문제는 건건이라. 짐치, 짠지, 짐장만 먹는 집에서 증말 죽겄다구. 이 양반덜이 입이 질구, 인제는 한 식구 거짐 다 돼설랑은이 그나마 숭허물이 웂으닝께 망정이지, 우리 여편네는 환장허여. 동넷분덜말유, 제발 서 주사, 지 주사 좀 내 집에 안 오게덜 해주셔. 이 변차셉이, 동넷분덜더러 밥 떠놓으달라구 안 헐 텡께 고것만 좀 봐주셔. 두말헐 것 웂이 관에서 시키는 대루만 해주셔. 그러면 이 두 양반은 새벽버텀 내 집 챚어올 일 웂구, 나 반찬 걱정 웂구……. 이장질 두 번만 했다가는 논문서 잽혀먹게 생겼으니, 오죽허면 이 두 양반 앉혀 놓구 이런 하소 연 허겄수. 제발 이 불우이웃 좀 도와주셔. 허라걸랑 허라는 대루 좀 해주셔.
(「우리 동네 리씨」, 67쪽)
이문구 소설에서 공간의 의미는 억압의 상처를 메꾸면서 회복해야 할 그 무엇과 관련이 깊다. ‘관촌’이 그러하고 ‘우리 동네’가 그러하다. 과거의 ‘관촌’에 대한 이상적 동경과 현재의 ‘우리 동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회복해야 할 공동체 공간 때문이다. 그 공간은 사생활이 보장되면서도 공동체 공간이 가능한 곳이다. 그러나 농촌의 사생활은 대개 공개된 형태다. 좋게 표현하면 공동체 의식이 보존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공동체를 의지하는 힘이 사라진 상황이라면 이러한 의미 부여는 다소 억지스럽다.
이중에서 특히 불편하면서도 인간적인 소통 기구는 마이크라는 도구이다. 아침과 저녁 그리고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마이크를 통하여 이들의 생활은 통제된다. 동시에 일터라고 할 수 있는 논과 밭 자체가 수시로 사람들이 오며 가며 소통가능성이 열려있는 공간이다.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 자체의 중요성과 관련시킨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농민 입장에서 식량 생산의 공적 중요성은 존중받지 못하고 오히려 희생을 강요당한다. 벼 품종조차 관의 통제를 받을 만큼 사생할의 영역이 침탈당하면서 피해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의 통제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은 자연스럽게 불법행위로 표출된다. 밀주 단속에 대한 알레고리적 대응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느닷없이 확성기에서 ‘징글벨’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며 변을 쳐다보았다. 변도 무슨 비상인지 영문을 몰라 눈만 허옇게 뜨고 움직일 바를 몰라 했다. 그런데 이내 노래가 뭉뚝 잘리면서 “동넷분덜에게 급히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부인네 목소리가 두서너 번 되풀이되는데 들어보니 이장 안식구였다. 그녀는 생전 처음 마이크를 쥐어보면서도 숫티라고는 없이 말씨부터 능청스러웠다. “시방 기별 온 것을 알려드립니다. 누가 와서 그러는디, 놔 멕이는 개를 찍어 간다구, 지금 막 우리게루 사람덜이 떠나더라구 합니다. 개를 단단히 감추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우리 동네 리씨」, 71-72쪽)
밀주 단속반이 떴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성 메시지다. 여기서 ‘놔 먹이는 개’는 ‘밀주’를 뜻하고 ‘개를 감추라’는 말은 ‘밀주를 숨기라’는 일종의 암호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크로노토프’가 감시와 저항의 형식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이때의 감시는 직업이나, 사회적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 감시가 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으므로 감시를 당하는 입장에서도 소극적 저항만이 가능하다. 일단 억압을 인정하면서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다성성의 대화’로 볼 때 몇 가지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먼저 관과의 대립이다. 수시로 밀주 단속이 뜨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러 구조상 술을 담가 먹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밀주 감시반의 단속에 대비하여 미리 암호를 만들어서 약한 자끼리 소통하는 것이다. 단속반 또한 이 암호는 일종의 알면서 속아주는 장치인 셈이다.
‘일상의 크로노토프’에서 구성되는 ‘형식적 감시와 소극적 저항’의 논리는 토박이말과 비속어를 통하여 ‘다성성 대화’로 표출한다. 그리하여 일상의 저항담론과 일상 자체가 침투 당했던 시대상황과의 관련을 보여주는 것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한수영의 ‘말이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며, 일상 언어는 그러한 말들이 충돌하고 길항하는 공간임을 집요하게 일깨워준다’는 지적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사람이라는 것이 종자를 받으면 주뒹이에 처늫는 것허구 배앝는 것버텀 우선적으루 가르치는 벱이건만, 이 친구는 워치기컸길래 남으 말에 찌그렝이 붙는 것버텀 배웠는구…… 불법적으루 쓰다 들켰으면 사괏적으루 나오는 게 아니구, 됩세 큰소리 쳐? 나봐 워따 대구 큰소리여? 당신 허는 짓이 보통 사건인 중 알어? 시대적으루 볼 것 같으면 안보적인 문젠겨. 뜨건 국에 맛을 몰라두 한도가 있는 게지, 되지 못허게 워따 대구 큰소리여, 큰소리가…….”
(「우리 동네 김씨」, 25쪽)
앞 장에서 『우리 동네』를 중심으로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다성성 대화’의 의미를 탐색하였다. ‘다성성 대화’ 는 주체 구성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 속에서 주체적으로 발언하며 생을 즐기는 새로운 유형의 농민을 만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장에서는 ‘일상의 크로노토프’ 와 관련하여 독재시대 점점 강력해지는 통제 시스템에도 굴하지 않는 저항의지 표출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이문구 소설에 나타난 ‘다성성 대화’의 의미를 바흐찐의 카니발리즘에서 유발하는 유쾌한 상대성6)과 관련하여 논의해 보겠다.
Ⅳ. 언어의 카니발- ‘말’을 넘어서는 ‘말잔치’
이문구 소설에 몰입하다 보면 시나브로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웃음을 만나게 된다. 인물과 인물의 갈등조차 웃음으로 마무리하는 문장의 마력이 이문구 소설의 힘이 될 수 있다. 이문구 소설에서 웃음은 비공식 상황의 언어에 가까우며 공식적 상황을 해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우리 동네』의 어느 장면 하나 웃음을 유발하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주목하여 이문구 소설을 카니발리즘과 연관지어 보고자 한다. 카니발리즘이란 기존 질서를 뒤엎는 민중 축제의 전통을 말한다. 바흐찐이 축제의 속성을 문학이론으로 정리한 것이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기성 질서 속에서 누적된 모순이 폭발적으로 터지는 일시적인 축제의 의미를 중시하는 이론이다. ‘카타르시스’. ‘효용’, ‘감화’, ‘시대의 거울’ ‘거울과 램프’가 의미하는 문학용어만큼 일반화되지 않은 이론이다. 카니발리즘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틈새를 해명해주는 문학이론의 의의를 지닌다. 지배 질서의 입장에서 볼 때 카니발은 무질서하고 비루하며 천박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낡은 권위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와 파괴, 해체는 ‘민중의 웃음’과 일시적 해방을 유발한다. 이러한 카니발 이론은 미하일 바흐찐이 라블레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민중의 저항 문화를 의미화한 데에서 유래한다.7)
이문구 소설이 지닌 ‘다성성 대화’의 특성은 권위와 억압을 해체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농민을 주체로 다루면서도 이들을 희생양이나 투사, 이상형이 아닌 장삼이사로 보여주는 것자체가 이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들을 생명력이 넘치는 신명을 지닌 존재로 생동감있게 형상화함으로써 권위와 억압을 뛰어넘는 전도의 순간을 창출한다. 대개 이 순간은 언어와 웃음이 함께 한다. ‘말’을 넘어서는 말잔치를 통하여 일시적 해방감을 얻는다. 억압의 표출과 권력자의 말 뒤집기 등 다양하다. 비속어와 토박이말이 바탕이 됨은 물론이다.
대개 문학작품에서 웃음이 생성되는 요인은 반어, 풍자와 해학 등 작가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동네』의 웃음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연출하여 작용하는 전지적 분위기나 구심적으로 유발되는 것과 양상이 다르다. 작품 속 인물과 인물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피어나는 웃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개 금지된 생각을 함으로써 웃음이라는 에너지가 발산돼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말잔치는 언어를 통한 웃음 찾기이다. 반어, 뒤집기, 비속어, 토속어 등과 터부 깨기가 있다. 금지된 생각에서 해방되기나 허위와 위선을 깨고 맨얼굴, 맨몸의 언어가 오히려 웃음을 주고 이로써 상황이 즐거움으로 전도된다.
언어는 이데올로기의 집이다. 이데올로기는 실제 생활에서도 끊임없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구속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동네』의 배경은 일인독재가 사회곳곳을 지배했던 시국이었다는 점이다. 농촌은 배움과 경제와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곳이면서 공동체적 따뜻함이 잔존했던 지역이었다.『우리 동네』는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면서 상황을 타개하는 가능성의 순간을 넉넉한 웃음으로 포착하였다. 웃을 수 없는 절망의 분위기에서 웃음의 잔치가 가능한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아래 작품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가뭄에 물치기는 땅임자의 도리구 조상에 효도유, 왜 그류?” (중략) “왜 그류? 왜 그러겄구먼…… 남의 재산을 불법적으루 쓰구두 가뭄 핑계만 대면 단 중 아셔?”
중년이 대들려는 짓둥이를 하자 김은 급한 김에 말도 안 되는 대꾸를 했다.
“내가 원제 불법적으루 썼유. 물법적으루 썼지. 뇡민이 논에 물을 대는 건 당연히 물법적인 거유.” (「우리 동네 김씨」, 24쪽)
“도대체 당신 워디 사는 누구여? 뭣 허는 사람여?”
그러자 누군가가 뒤에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람두 높어유.”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곁들여졌다.
“미부락 개발위원이구, 마을문고 후원회원이구……. ”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르르 하고 아무나 한마디씩 됩들이를 했다.
“부랄 조심(가족계획) 추진위원이구……. ”
“부녀회 회원 남편이여 ”
“연료림 조성 대책위원이유.”
“야산 개발 추진위원이구.”
“단위조합 회원이여.”
“이장허구 친구여.”
“죄용해 줘유. 앉어줘유. 그만해 둬유. 입 다물어줘유.” (「우리 동네 김씨」, 35쪽)
‘다성성의 대화’를 쉽게 포착할 수 있는 장면이다. 부면장이 행하는 관의 지시 사항에 대해 불평불만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나 직접 표출할 수 없는 농민들의 억눌림이 해학적으로 분출되는 과정이다. 또한 ‘우리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다양한 위원회와 자치활동 기구가 풍자되고 있다. ‘미부락 개발위원회’, ‘마을문고 후원회’, ‘부랄 조심(가족계획) 추진위원회’, ‘부녀회’, ‘연료림 조성 대책위원회’, ‘야산 개발 추진위원회’, ‘단위 조합’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관의 지시에 따라 명칭만으로 조직된 모임과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모임, 가끔 이름만 이용하는 모임 등 다양하다. ‘부랄 조심(가족계획) 추진위원회’에 담긴 말 바꾸기의 재치는 사적담론과 공적담론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이질혼성성의 비판이 담겨있다. ‘이장허구 친구여’ 대목에서 터지는 웃음은 일방적인 권력의 목소리를 해체하는 강력함을 발휘한다. 이 해체는 지시전달이 이루어지는 현장, 이를 거부하기 어려운 농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문제제기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김씨와 부면장의 대립이 아니라 관의 지시 사항에 불만을 지닌 농민들의 입장을 소통시키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 속에서 권력의 위계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의 상황이 전도되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유쾌한 상대성’이 가능해진다.
여기에서 ‘다성성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은 앞 장에서 논의한 ‘일상의 크로노토프’ 에 담긴 ‘형식적 감시와 소극적 저항의 형식'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부면장과 김씨는 지시 전달하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인 것이다. 그 틈새에서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 저항하는 자와 저항당하는 자의 대립적 입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승자와 패자가 없는 말싸움을 쳇바퀴 돌리듯 반복할 뿐이다. 이들은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바꾸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 언어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표출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해학적 상황을 유발하면서 상황타개를 위한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여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문구 소설에서 성 관련 담화는 긴장을 풀어주는 웃음을 유발한다. 일반적 시각으로 볼 때 공적인 격식어의 입장에서는 성 관련 담화를 금기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성은 공개된 자리에서는 일종의 터부였으나 사석에서 남성적 친밀어로 강하게 표출하였다. 이문구 소설에서 성적 담화는 사생활과 공적 담화로 규정짓지 않고 수시로 그 벽을 넘나든다.
남성인물과 여성인물이 전도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여성인물은 직접 성을 언급하고 성적으로 무능한 남성인물을 꼼짝 못하게 몰아세운다. 그렇다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부각되는 것은 아니고 단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면서 긴장된 분위기를 해체하고 기존의 담론에 의문을 던질 뿐이다. 귀숙어매는 전에 사귀던 남자가 술집 여자와 자러 온 간막이 방에 다른 남자와 자러 와서 두 남자의 폭행 사건을 만든 주범이다. 경찰서에 와서 귀숙 어매가 한 말을 아래에 인용한다. 귀숙어매는 이혼녀이고 상대방은 모두 가정이 있는 남자들이다.
“누구는 삼천리 동포 위해 살던가베. 그러면 나 땜이 냄의 농사가 들 된다는 거여, 장사가 들 된다는 거여. 냄이사 연애를 걸건 애인을 갈건, 그게 부가가치세를 무는 거유 방위세를 내는 거유? 암만 생각해 봐두 아저씨가 좌향 앞으롯 가, 우향 앞으롯 가, 헐 일이 아닌디 소리가 큰소릴세”
그녀는 넉살좋게 코웃음을 쳤다. (「우리 동네 류씨」, 199쪽)
‘부가가치세’ ‘방위세’, ‘좌향 앞으롯 가’, 우향 앞으롯 가‘의 표현이 소설 속에서 처해진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그녀의 표현은 해학을 통한 에너지를 생산해 줄 뿐만 아니라 기존 담론에 대해 문제제기를 품도록 만든다. 그 문제제기는 군사적 통제문화를 떠올리게 하며 ’개인의 성‘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자각할 때 유쾌한 상대성의 웃음으로 끝나지 않는 무거움이 실린다.
Ⅴ. 마치는 말
이문구 소설의『우리 동네』에 나타난 저항과 소통공간의 의의를 바흐찐이 소설을 읽는 ‘다성성 대화’의 눈을 통하여 밝혀보았다. 이를 통하여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권력에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가는 주체적 농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개별자를 보편자로 형상화하여 ‘투사형’이나 ‘이상형’ 아닌 허점을 지니지만 주체적으로 발언하고 생을 즐길 줄 아는 진짜배기 농민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일상의 크로노토프를 통하여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감시와 소극적 저항’으로 의지를 표출하였다. 이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원리이고 저항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감시와 통제의 시대를 주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삶의 논리이다.
이문구의 『우리 동네』는 1977년 5월부터 3년여 동안 임시로 거주했던 발안에서 탄생한다. 감시와 통제의 시대에 이문구는 소설 창작을 통하여 억압으로부터의 저항과, 소통 공간을 창출한 것이다. 이러한 창작원리의 바탕이 된 것은 작가가 직접 현장에서 부딪히며 생산해낸 민중언어의 힘이다. 이 힘을 빌려 이문구는 ‘말’을 넘어서는 ‘말잔치’의 주체로서 『우리 동네』의 장삼이사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로 인하여 토속어, 비속어, 언어유희 등 금지된 생각의 분출, 여성과 남성의 전도된 성담론 속에서 유쾌한 상대성의 웃음을 유발할 수 있었다.
이문구의 소설 『우리 동네』를 바흐찐의 눈으로 읽으면서, 이러한 창작 장치들이 일인 군부정권의 억압 담론을 일상적으로 해체시키는 원동력으로서 새로운 돌파구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에너지였음을 조심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문구 문학이 지닌 '사회 대응 양상의 문학적 의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기 바란다.
1) 컬러 텔레비전의 국내 판매는 1980년 8월 1일부터 시작되었고, 1980년 12월 1일 컬러 방영이 시작되었다.
2) 박민규, 『문학동네』 67호,「메스게임 제너레이션」은 70년대의 표정을 참신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3) 이문구의 소설에 있어서만큼은 어휘와 문장, 또는 문체를 아우르는 그의 소설 속의 말들이 이미 방법이나 묘사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나의 주제이자 이념의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대화 들이다. 이 대화들이야말로 발화자에게 그 소유권이 귀속되지 않고, 발화자가 청자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중층적으로 그리고 구성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흐찐이 이야기하는 대화란 단순한 대화와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의 무대에 명멸하는 다양한 사회계층들의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갈등과 투쟁이 이루어내는 구체적 관계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수영, 『말을 찾아서』, 255쪽.
4) 이문구,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이야기책과 애늙은이」, 돌베개, 2004, 20쪽.
5) 미하일 바흐찐 지음, 전승희 ․ 서경희 ․ 박유미 옮김,『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창작과비평사, 260쪽.
6) 바흐찐은 문화를 그 수용주체에 따라 지배계층, 귀족계급의 문화인 공식적 문화와 피지배계층, 민중의 문화인 비공식문화로 구분하였다. 카니발이란 비공식문화, 집단적 민중적 특성, 웃음과 패러디를 통해 지배계층의 권위와 전통을 파괴 모든 대립 되는 것이 뒤섞이는 '유쾌한 상대성'이 지배하는 세계로 중시함.
7)바흐찐의 카니발적 상황은 궁극적인 대화적 형식이며, 사회의 이질혼성성이 최대한 자기 역할을 펼치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사회 역사적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고 사회를 개혁하는 수단을 도출시킬 수 있는 사회의 모델을 구현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역사와 사회에 존재하는 허구적이며 연극적인 요소로 사회적 현실의 위계질서를 절대화하는 권력구조에 대해 비판적 전망을 제시한다. 교조적이고 권위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 지배 체제와 담론을 희화하고 전복한다.사회의 본질이나 궁극적 방향을 미리 결정하지 않은 채 치환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유동적인 사회적 실상에 접근한다. (권덕하,『 소설의 대화이론 』, 소명출판, 337쪽.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