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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회 마지막 예배
한국 기독교 전래와 부산 기독교 선교활동을 살피면서 믿음의 선배들이 이 땅에 심어놓은 기독교 신앙과 그 역사에 숙연해 진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구한말 물밀듯이 들어와 어둠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한국 땅에 하나님을 알게 했다. 그 중에 일본인 교회가 생겼고 중앙교회와 광복교회 등이 대청동과 보수동에 위치했다.
광복교회의 70년사를 돌아보면서 그 이전 일본인들이 이 자리에 41년간 예배를 드리던 부산교회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활천(活泉)을 통해 알아본다. 그들이 연로해 가고 전국 각처에 흩어져 있으며 당시 신도들을 만나는 일도 수월치 않다. 거기다 종교 소식지를 내는 일도 벅찬 모양이다. 그들의 마지막 예배 장면을 읽으면서 지난날 광복교회에 이런 일도 있었나 생각나게 한다.
사람은 늙어가고 쇠퇴하지만 교회는 날로 커지며 발전해 간다. 사회나 단체는 점점 젊어져 가는 게 변화이다. 광복교회도 화재를 만나 지금의 교회당을 지어 단장을 하고 조금씩 나아갔다. 주위 다른 교회보다 교세 확장이 눈에 띄게 앞서가지는 않은 것 같다. 보수동 십자로 평지의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 조금 더 분발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이 있기까지를 알아보고 다음 세대에 100년사 500년사가 아름답게 아롱지길 바란다.
이 나라에 종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오래 되었다. 중국 고대 황제의 도교와 신선교가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하더니 신라 때에는 인도 세존의 불교가 전래되어 남산은 불국이 되어 역사와 함께 내려 왔다. 천주교가 서학이라 해서 조선 중기에 서서히 포교되었다.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가 중국에서 독일 선교사 아담 샬에게 천문학과 천주교리 등 실학사상을 배워왔다. 영조 때 선비였던 이승훈도 북경에서 영세를 받아왔다.
기독교는 선조 때 임란 시 선봉장이었던 소서행장이 야소교 신자로 발을 디뎠다. 1884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알렌 등이 들어오고, 맥클레이와 스크랜턴 등이 고맙게도 한국 땅에 하나님을 알게 해 주었다. 불교와 유교, 민간신앙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붙어있는 한국에서 어려운 선교활동으로 격랑을 헤치며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갔다.
1884년 미국 북감리교회 맥클레이(R.S Maclay)는 고종에게 병원 설립을 허가받고, 미국 북장로회 알렌(H.N Allen)은 민비 친척 민영익의 자상을 치료해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1885년에 연세병원의 전신인 제중원(濟衆院)을 개설한다. 배재(培材)학당을 세운 아펜젤러(HenryG. Appenzeller) 미국 북감리교 부부와 연세대를 세운 미국 북장로회 언더우드(H.G Underwwood)가 인천을 통해 입국했다. 1886년 감리교 스크랜턴(M.F.Scranton)은 이화학당을 세웠다. 처음 선교활동은 어려워서 교육과 의료선교를 시작으로 열어나갔다.
기독교가 선진 서구 문물을 가져와 개화에 기여하면서 계급 양반 사회를 일반 시민사회로 바꿔나가게 했다. 3.1운동의 기점이 되었으며 해방 후 건국에 많은 기독교인 정치인들에 의해 정부가 세워졌다. 6.25전란 땐 발 빠른 유엔연합군으로 공산군을 물리치고 구호와 건설, 경제성장, 민주화운동, 현대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많은 시련도 겪었는데 돌아보면 가엾고 불쌍한 일이다. 낯선 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얘기는 잊을 수 없다. 또 우리 교역자와 신자들이 일제와 공산군에게 맞서 믿음을 지키다가 목숨을 읽은 일들이 많다. 지나간 선교 고난의 세월은 점점 잊혀가지만 이런 기록을 통해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특히 아펜젤러는 마태, 마가, 고린도후서를 번역하고 공주, 대구, 전주, 선교를 했으며 1902년 목포로 가다가 어청도 부근에서 선박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옆 사람을 구하려다 함께 가라앉았는데 이 나라 1,200만 신자들의 씨앗이 되었다. 제네럴 셔먼호에 미국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에서 순교를 했다. 칼을 맞으며 성서를 건네면서 믿으시오 했다니 안타깝다. 평양이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되었다.
좌익에게 아들 형제를 잃고 공산군에게 순교를 당한 순천의 손양원 목사와 인민군에 죽음을 당한 전남 신안군 증도의 문준경 전도사 생각할수록 아려온다.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고 전국에서 가장 기독교 신자가 많은 순천과 증도이다. 이 성지에 관광객이 날이 갈수록 많이 이어져 전도의 장이 되고 있다.
1907년 평양대부흥회운동 후 기독교는 불교 신도 다음으로 짧은 기간에 많은 신도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2014년 11월 22일 한국기독교130주년기념대성회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대강당에서 열렸다. 신해사옥과 한강변 양화진에서 왕실의 구교 박해와 일제의 제암리교회 방화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부산 지역은 1880년대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13년까지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공동으로 하다가 이듬해 호주 장로교 관할 지역으로 되었다. 일본 주재 스코틀랜드 성공회가 최초로 선교활동을 했으며 정식 선교 입국은 1884년 9월 20일 알렌(安連)이다. 다음해 중국 복주(福州) 영국 성공회 월푸(Wolfe) 선교사가 부산에 왔다. 또 캐나다 선교사 게일(Jemes Scarta Gale 奇一)도 들어왔다.
호주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Rev.Joseph Henry Davies)는 부산 경남지방 선교를 위해 목숨 바쳤다. 그들 남매는 한국어 형태와 전환기의 한국이라는 글을 썼다. 데이비스가 천연두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자 부산지역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의 장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잠시 미국 북장로교 베어드(Baird 裵緯良) 부부가 선교하다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갔다. 그가 머문 선교중심지는 지금 초량교회 모체가 되었으며 이어 호주선교사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멕카이 목사 부부, 엥겔(王吉志), 맥켄지 목사, 니븐양, 멘지스양, 페리양, 퍼셋양이다. 세관 관리였던 헌트씨와 하디 가족과 뒤에 온 브라운양, 무어양 또 영국 장로교회 아담슨 목사도 함께 선교에 동참한다.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 영도제1교회, 김해교회가 일찍이 세워졌다. 부산 3.1운동의 기치가 올랐던 부산진일신여학교와 동래일신여중고, 의료선교의 장이었던 일신병원도 이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 무렵 일본 기독교인들의 교회도 하나 둘 세워져서 전국 곳곳에 일인교회의 선교가 이뤄졌다. 부산에는 대청동의 중앙교회와 보수동의 광복교회 전신인 부산교회이다. 부산교회는 1904년에 예배처소로 기독교도들의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광복이 되면서 세화회(世話會)를 통해 40여 년 간의 기도처를 두고 부산항을 떠났다.
그들은 일본 각처에 흩어져서 살다가 하나 둘 만나고 연락해서 모임인 부산교회신도회를 만들었다. 30년이 지나서야 그렇게 전국집회를 가지기 시작했다. 1975년 제1회 명고옥(名古屋) 때에는 42명이 참석했다. 6년 뒤인 1981년엔 49명이 복산(福山)에 모여 부모가 가꿔놓았던 부산교회 시절을 얘기하면서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이태 뒤인 3회 때부터는 2년마다 열기로 하고 창부(倉敷)에서 개최했다. 1985년 4회 대회는 열렸던 명고옥에서 54명이나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매해 9월 15일을 기해 열렸는데 그 날은 그들이 떠난 날을 기억하는 것 같다. 이날에 특기할 것은 매해 소식지를 만들기로 했다. 그 1호가 활천(活泉)으로 생명샘의 기원이 담김 제목이다.
후손들의 믿음의 소식지 활천은 2004년 19호가 나왔으며 전국집회도 겸창(鎌倉), 경도(京都), 동경(東京), 신호(神戶) 등지에서 열리다가 2001년 12회 대회는 오사카(大阪)에서 열렸다. 늙어가고 대회 운영도 힘들어 해산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4년 한국 부산 보수동의 부산교회였던 광복교회에서 대예배를 갖자고 결정했다.
활천 소식지 편집 주간인 유키 히데오(幸日出男) 장로와 이리에 유키오(入江幸男), 유키 마사코(幸正子), 요시다 메구미(吉田惠), 신키 유치로(新木陽一郞) 등은 대판과 복정(福井) 사람들로 항공편을 이용해 부산에 왔다. 또 병고(兵庫)와 복강(福岡), 녹아도(鹿兒島) 신도들은 배편으로 들어왔다. 가로지 쇼(唐牛正) 목사의 친척들인 듯 가로지 세이고(唐牛靖吾)와 가로지 겐조(唐牛健三), 가로지 히로코(唐牛弘子), 가로지 쇼이치(唐牛正一), 가로지 노리코(唐牛紀子), 이나마쓰 하루카(稻松遙), 니시무라 요시코(西村容視子) 등이 광복교회방문여행으로 찾아왔다.
이들은 2004년 6월 19일에서 21일 3일간 20일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부모들의 교회를 찾아 노구의 몸으로 들어온 것이다.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이날의 예배는 이들에게 참으로 감격적이었다. 13명의 광복교회방문여행단은 신창수 목사의 설교에 감복이었다며 행일출남은 기술하고 있다. 그들의 목조 건물 교회는 이웃 공장의 화재로 함께 전소되어 없고 새로 철골조 시멘트 슬래브 집으로 더 정교하며 웅장해 진 것에 놀라움을 입강행남이 말했다.
예배드리고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교회와 주위 모습들이 크게 변한 것과 교인들의 따뜻한 환대에 감사하는 구절이 곳곳에 보인다. 최후라는 말을 자주 쓴 것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산하려는 모습이다. 1945년 11월25일 회당 시설을 아버지 당우정(唐牛正)의 신학교 동창인 윤인구 선생에게 통지해서 대한야소교장로회광복교회를 인계한다는 구절과 최후 성일예배 드리는 얘기가 당우정일의 글에 담겨있다. 아버지 당우정의 마지막 설교가 가슴에 새겨져 오래 기억된다는 말도 담았다.
행일출남의 활천 19호 서문에 일본이 인접국을 침략해서 점거한 사실에 부끄러움을 가지며 깊이 참회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 우리를 이리 반겨 맞음에 한없는 감사를 표한다고 한다. 당우정일은 광복교회 창립25주년에 아버지 당우정에게 십자가가 그려진 동판 기념패를 증정한 것에 감사했다. 이번 모교회 방문에는 오사카 영화교회 김안홍 목사가 동시통역으로 관광 안내까지 맡았다.
청년부 2명이 2대의 차로 시내 관광과 경주 고적을 돌아보는 봉사가 대단히 감사하다. 특히 불국사와 대릉원, 왕묘를 둘러보고 고속도로를 지나며 주위 경제발전상에 놀랐단다. 대량생산업지와 조선, 제철등 대규모 시설이고 제2의 도시 부산의 눈부심이 대단하단다. 해운대와 해안선, 야경, 용두산 전망대 등을 보여주고 불고기 접대한 것에 감사한다. 자유시간에는 번화가의 구매가 매혹적이었다. 또 가까운 일본과는 달리 지진이 없다는게 경이로웠다.
예배후 식당에서 한국음식을 먹을 때 혀가 춤을 췄다는 말도 있다. 떠날 때 해태와 우산 등 토산품을 한 아름 안겨준 것도 잊지 않았다. 이들은 신의 특별 은총을 받았다고 한마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도송우자는 60년이 지난 지금 부산은 고층 건물이 나란하고 일본보다 차가 많으며 교회 근처 집들과 시장, 소학교 교정이 크고 아름다워 감격적이라 했다. 도송요는 한국인들이 부지런하고 언어가 좋으며 친절하다고 말한다. 당우기자는 귀가 어두워도 신목사 설교에 교감이 되며 배가 떠날 때는 신도들의 그 친절함이 그리워졌다고 했다.
당우건삼과 홍자는 한국역사가 정확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당우정오는 신도들의 열렬한 환영과 점심이 어찌 그리 맛있었냐며 불고기 맛과 함께 시내 안내가 좋아 감격이 지극하다고 했다. 신목양일랑은 어머니가 다니던 부산여고를 방문했다. 서점가를 산책하기도 했는데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라고 했다.
서촌용시자는 광복교회와의 교류가 계속되어지길 바란다고 했으며 길전혜는 부산항의 야경을 보면서 부모가 이곳에 계실 때를 생각하니 가슴이 따스해 온다고 했다. 또 성가대의 찬미가 자기를 압도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사무국 담당인 입강행남은 일본 무력침략은 선진국 조선의 문화를 후퇴시켰으며 일본 패전은 당연한 심판이다. 참회하며 위축과 소침해 진다. 또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가 이주해 원주민인 조선인을 식민지경제로 몰면서 질곡을 안겼고 재산권 박탈과 추방 등으로 힘겨워 했던 조선인이 1천만 명이 넘었다. 신앙으로 깊이 뉘우쳐 하나님께 화해하길 기도한다고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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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명깊게 머물다 갑니다
어찌그리 소설 같은 글 수고와 감사 합니다
단비가 내려 감사합니다.
선생님 한국 기독교 역사 가슴 뭉클하게 읽었습니다.
요즘은 왜 사람들 마음에 '신'의 존재가 약해지는지요...
사랑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