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옥상에서 자체경비 서다
증언자: 채종일(남)
생년월일: 1961. 1. 7(당시 나이 19세)
직 업: 공원(현재 주택공사 근무)
조사일시: 1989. 4
개 요
식품회사에서 일하던 동료 몇 명과 트럭을 타고 교도소 쪽으로 가다 계엄군이 쏜 총에 가슴을 맞았다.
가슴에 총을 맞고
전남 보성 복래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그곳에서 복래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모님은 땅 6마지기로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 3형제의 학비조달을 위해 부업으로 길쌈을 하셨다. 삼씨를 밭에 뿌리는 일부터 물레로 실을 짜 옷감을 만들고 표백하기까지 일곱 과정을 거친 뒤 만들어진 마포나 삼베 등을 장에 내다 팔았다. 지금도 어머니는 용돈삼아 그 일을 계속하신다.
나는 가정형편상 대학에 못 가고 일자리를 구하려고 1980년 1월 7일 광주로 올라왔다. 아는 분의 소개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식품회사에서 일했다.
회사는 구호전(호남전기주식회사) 앞에 있는 2층 건물로 5, 6명의 남자 공원들이 그곳에서 숙식하며 일하고 있었다. 이외에 출퇴근하는 아가씨, 아줌마 몇 명이 있었고 배달차가 한 대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회사는 5월 18일부터 작업을 중단했다. 하는 일 없이 회사에만 있으니까 답답하여 19, 20일에 잠깐씩 밖에 나가기는 했으나 별다른 것은 보지 못했다.
21일 오후 6시경 밖이 소란하여 나가 보니 청년 서너 명이 총을 나눠주고 있었다. 총이 몇 정 되지 않았는지 내가 나갔을 때는 바닥 나 있었다. 그 청년들은 주위에 모여 있던 주민들에게 "광주공원에 가면 시민군들이 총을 나눠주고 있으니까 받고 싶은 사람은 그곳으로 가십시오. 우리 시민들도 이제부터 모두 무장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시민 스스로 지역방위를 서야 한다고도 했다. 청년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회사로 들어가 동료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저녁밥을 먹은 후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동료 중 한 사람이 말했다.
"효동국민학교에 가면 무기가 있다더라. 그걸 가져다가 우리도 지역방위를 서자."
그의 말에 따라 동료 서너 명과 가까이 있는 효동국민학교로 갔다. 국민학교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무기로 쓸 만한 것이 없는지 운동장을 둘러보던 우리들은 놀이터 부근에 있는 민방위훈련 기구를 찾아내었다. 갈고리가 달려 있는 것 등을 하나씩 들고 회사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가져온 물건을 가지고 회사 옥상으로 올라가 지역방위를 섰다. 우리들이 그곳에 있은 지 1시간여 후인 9시경, 회사 배달차를 운전하는 형님이 어디서 총을 한 자루 가져와 주고 갔다. 동료 중 한 사람이 카빈이라고 했다. 총이 한 자루 있자 훨씬 의기양양해진 우리들은 계속 경비를 섰다.
초저녁에는 주민들이 길거리에 많이 나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거리는 조용해졌다. 5월이라지만 밤이라 공기가 차가웠고 별다른 일이 없었으므로 조금은 지루했다. 그런데 10시경 7, 8대의 헬리콥터가 떠가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헬리콥터는 송정리 쪽에서 31사단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우리들은 '군인이 많이 투하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헬리콥터가 지나가자 다시 사방은 고요했고 가끔씩 총소리가 났다. 우리들은 점점 춥고 배가 고팠으므로 자 정이 못 되어 회사로 내려와 잠을 잤다.
22일 아침 9시경, 아침밥을 먹은 뒤 회사 동료 4명과 회사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른 시간이었으나 길거리에 시민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구호남전기 앞에 가니까 회사 배달차에서 그 차를 운전하는 형님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형님은, "우리 차를 타고 시내 한바퀴 돌아보자."하며 차에 타라고 했다. 우리들도 잘되었다 싶어 선뜻 올라탔다. 차는 배달용이라 뒤에 짐칸이 있었다. 운전석이 넓어 6명이 모두 앞에 탔다. 형님이 어제 저녁에 주고 간 카빈 1정도 회사에서 가져와 차에 실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총을 밖을 향해 내놓고 뚜렷한 목적도 없이 우리들은 광천동 쪽을 향해 달렸다.
가는 길에 보니 공단 입구 로터리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차를 돌려 임동 전남방직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대학생인 듯한 청년 세 명이 실탄을 나눠주고 있었다. 카빈 실탄을 더 받고 싶어 차를 멈추고 실탄을 달라고 하니까 M1 실탄을 많지만 카빈은 없다고 했다. 다시 차를 몰아 서방으로 갔다. 9시 30분경이었다. 길마다 사람들이 많았다.
동신고 가까이 가자 시민군 몇 명이 도로 가운데로 나와 차를 멈추게 했다. 교도소 쪽에 계엄군이 숨어 있으므로 총이 있는 사람만 가고 총이 없는 사람은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들은 카빈을 보여주고 그곳을 통과했다.
동신전문대를 지나 말바우시장 사거리에 이르자 15명 정도의 시민군이 교도소 쪽을 향해 1렬 횡대로 서 있었다. 시민군들은 우리에게 계엄군이 있으니까 조심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조금 겁이 났지만 이왕 내친김에 서서히 차를 몰고 교도소 쪽으로 갔다. 어디서 금방이라도 총알이 날아올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얼마 못 가서 옆 동료가 갑자기 소리쳤다.
"군인이다."
동료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도로변에 있는 야산(현 무진아파트 자리) 위에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두 방의 총소리가 울렸다. 순간 내 등이 뜨끔했다. 엉겁결에 손으로 만져보니 끈적끈적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무사했다.
"나, 총에 맞은 것 같애."
했더니 운전하는 형님이 급히 차를 뒤로 뺐다. 동신고 지나 사거리까지 가서는 나를 짐칸으로 옮겨 실었다. 자꾸 졸음이 왔다. 깜박 잠이 들었을 때 동료들이 나를 어느 병원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적십자병원이었다. 병원은 이미 부상자로 가득 차 있어 응급치료만 겨우 받고 그곳을 나와야 했다.
이번에는 적십자병원 앰뷸런스를 타고 기독교병원으로 갔다. 창문을 통해 들어 오는 바람을 느끼면서 나는 다시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기독교병원 응급실이었다. 의사는 급히 나에게 수혈을 하였다. 수혈한 후로 나를 중환자실로 옮겨 피묻은 옷을 벗기고 수술을 했다. 수술을 받고 나자 통증이 왔다. 의사는, '총알이 가슴을 관통해 폐와 간 일부가 손상을 입었다'며 그만하기가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나는 광주에 사는 친척에게 전화로 다친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친척이 병 원으로 왔고, 친척이 다녀간 며칠 뒤에 시골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셨다.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던 부모님은 광주까지 오는 차가 없어 화순으로 걸어서 오다 친척으로부터 내가 총에 맞았다는 말을 듣게 되셨다고 한다.
주택공사에 근무하여
상처가 거의 아물어갈 무렵인 6월 3일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러고는 바로 부모님과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 시골에서 개고기를 먹는 등 몸보신을 하면서 휴식을 취했으므로 몸이 어느 정도 거뜬해졌다. 한 달 후엔 적당한 직장을 잡아보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시험을 치러 광주로 올라왔다. 친척 할머니 댁에서 무등고시학원에 다니며 취직시험을 준비했다. 몸이 온전치 못했을 뿐더러 오랜만에 공부를 하려니까 힘이 들었다. 그해 추석명절에 시골에 내려간 나는 취직시험을 포 기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다.
그럭저럭 지내다 보니 어느덧 구정을 맞았다. 직장생활을 하던 친구들이 시골로 내려왔다. 나는 그들로부터 서울생활에 대한 얘기를 듣고 서울로 올라가리라 마음먹었다. 친구들을 따라 바로 서울로 올라갈 수도 있었으나 그해 4월 25일 있을 징집 신체검사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체검사 결과 예상했던대로 건강상의 이유로 징집이 면제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동네 친구와 함께 대우그룹 계열회사인 생산직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기능직보조로 2년 있다가 그 후 다른 회사로 옮겨 패턴을 뜨는 일을 했다. 작업 시간은 보통 12시간이었는데 1시간씩 잔업을 하기도 했다. 작업량에 비해 보수는 매우 적었다. 우리도 별 차이는 없었지만 특히 일의 숙달이 빠른 어린 여공들의 노동을 통해 폭리를 취하는 기업주의 부당성을 피부로 느껴야 했다.
1988년초엔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회사 기숙사에 있을 때 국물을 안주삼아 많이 마셨던 술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져 술, 담배를 끊고 지냈다.
1988년 7월경 광주에 사시는 형님으로부터 광주에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다. 5·18 부상자 명목으로 도에서 취직을 시켜줄 것 같다고 했다. 부상자로서 신고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병원에 입원했던 기록으로 벌써 부상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7월 24일 광주에 내려와 형님이 말한대로 전남 지사장을 만났더니 주택공사에서 일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지사장이 건네준 서류를 작성하고 서울에 올라가 소식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마 안 되어 취직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동안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1988년 말에 처자식과 함께 광주로 내려와 지금까지 주택공사 공사과에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심한 운동은 못 하지만 다른 부상자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광주항쟁 이후 상당히 지역감정을 갖게 되었다.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광주진압에 동원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광주항쟁에 대해 철저히 진상규명을 하고 보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현 체제 아래서 진상이 규명되기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