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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의 충효인물
고려시대
박서(朴犀, 고려시대,?~?)
제1차 몽고의 침입시 서북면 병마사로 재임중이었다. 적장 살리타는 철주를 함락 하고 귀주에 육박하여 왔다. 장군은 귀주성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몽고군은 성을 포위하고 30여 일동안 파상적인 공격을 펼쳤으나 장군은 기지를 발휘하여 대응함으로써 귀주성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몽고는 고려의 통사 지의심과 학록 강우창을 보내어 회안공 정(廷)의 첩(堞)으로 써 항복하기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박서는 이러한 권유를 듣지 않고 성을 더욱 견고하게 수리하면서 항전하였다. 고종 19년(1232)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몽고군의 철수가 단행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감찰어사 민희와 후군지병마사. 우간의대부 최임수를 귀주성에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하자 장군은 왕명을 어길 수 없어 마침내 항복하였다. 이후 몽고사신은 장군이 귀주성을 고수하고 항복하지 않음을 문책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최이(崔怡)는 "경이 국가에서는 충절이 비할 데 없으나 몽고의 말도 또한 두려운 것이니 경이 알아서 할 지어다" 라고 난처한 고려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장군은 고향의 향리로 돌아와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박인석(朴仁碩, 고려시대,1143~1212)
본관은 죽산, 자는 수산(壽山), 호는 회곡(檜谷)이다. 어릴때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8세에 인종의 태자 학우가 되었고, 무예에도 능했다. 신종 2년 명주에서 초적의 난이 일어나 그는 초토판관에 임명돈 김척우를 따라 경주로 내려가 이를 진입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어사잡단에 임명되어 사신으로 금나라를 다녀왔고 이어 대부송경과 삼사부사를 겸직하였다. 말년에 호부상서까지 승진하였다가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귀향하여 후진의 양성에 노력하였다.
송문주(宋文胄, 고려시대,?~1236)
본관이 진천으로 1차 몽고 침입시 박서 장군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그 공로로 고종 23년(1236) 죽주의 방호별감으로 승진되었다. 이해 9월 몽고군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장군은 성중의 군리들과 합심하여 몽고군을 격퇴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큰 전공을 세웠다. 그는 귀주성의 전투경험을 통하여 몽고군의 공성술(功城術)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몽고군의 공격을 예측하고 군사들에게 "오늘은 적이 어떤 장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방법으로 이에 응전하라."고 지시했다. 적은 그의 말대로 공격해 왔으므로 그 대비책은 손쉬웠다. 그의 뛰어난 지략을 보고 성안의 군사들은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일컬었다. 죽주성의 뛰어난 전투로 그는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임명되었다.
조선시대
경순수(慶舜壽, 조선시대,1582~1645)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대덕면 무릉리에서 출생,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나타내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선조 2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등제 후 헌납, 교서관 등 주로 내직을 역임하면서 왕을 보필했다. 이괄의 난이 발생하여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공주의 쌍수산성으로 임금을 호가하여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인조를 호가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조정대신들 사이에 주전. 주화론이 대립하고 있을 때 그는 현실의 타개책으로 주화론을 지지했다. 만년에 향리로 퇴거하여 학문의 정진에 힘썼다. 묘소는 대덕면 무릉리에 있다.
김중만(金重萬, 조선시대,1681~1755)
무신으로 본관은 언양, 한성부판윤 석창의 아들로 이지현 토현리(현 대덕면 토현리)에서 출생.성장했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남다른 비범함을 보였다. 숙종 38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부모님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협박으로 거사에 가담할 것을 강요하고 청주에서 반란군이 북상하자 거짓으로 그들의 거사에 따랐다. 그들과 함께 있는동안 이인좌의 반란군과 연합 하기 위해 거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이에 곧 바로 상경하고 고변하자 오명항을 도순무사로 파견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공로로 2등공신에 녹선되었으며 영조 6년 희천군수에 임명되었다. 75세에 사망하자 조정에서 자헌대부 공조판서로 추증하였으며, 왕명으로 도화원에서 공의 영정을 그려 하사하도록 했다.
김충수(金忠守, 조선시대,1549~1592)
효자로 본관은 서흥, 죽산부 고삼면 월향리에서 출생했다. 6세에 서당에서 글을 깨우쳤으며 재주가 뛰어났다. 9세때 부친상을 당하였고 이후 모친 한씨가 종창을 앓았는데 의원이 입으로 고름을 핥아내는 것이 즉효라 하자 이를 시행해 효험을 보았다. 이후에도 모친의 봉양에 열과 성을 다해 효자로서의 칭송이 자자했다. 45세에 의병진을 조직하여 죽주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격전을 벌였다. 수차례에 걸친 진퇴와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적병 100여 명을 통쾌히 살해했다. 하지만 노도처럼 밀려드는 적들에 대항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이에 그의 아들 함은 적전을 뚫고 부자가 합세하였으나 10월 말경 최후를 맞이하였다.
박심문(朴審問, 조선시대,1408~1456)
문신으로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靑齋), 본관은 밀양이다. 약관의 나이에 학자로서 명성을 얻어 천거되어 사온서직장이 되었다. 세종18년 친시 문과에 급제하여 기주관으로 발탁되어 왕의 신임을 얻었다.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때 종사관이 되어 여진에 대한 진무책으로 남쪽지방의 주민을 이주시킬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했고, 이러한 공로로 평안도 판관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도체찰사 종사관 등을 역임했다. 단종원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성삼문, 하위지등과 단종복위를 도모하기도 했다. 세조 2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서 사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박원형(朴元亨, 조선시대,1411~1469)
호는 만절당(晩節堂)으로 본관은 죽산이며, 안성에서 출생하였다.21세기인 세종 14년 사마시에 합격했고 2년 후에는 알성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예빈시직장.도염 서령을 지냈다. 계유정난시 수양대군을 도와 좌.우부승지겸 지형조사로 발탁되었다. 세조 7년 집현 전을 대신하여 홍문관이 설치되자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우의정을 역임하였다.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는 시문에 능했는데 특히 과문에 뛰어났다. 명과의 외교관계에서 자신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그 명성은 유구국(琉球國)까지 떨쳤다. 그리하여 명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모든 외교사는 대부분 그의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
오명항(吳命恒, 조선시대,1673~1728)
조선 숙종ㆍ영조때 문신으로 현감 오수량 선생의 아들이며, 여성제 선생의 외손으로 자는 사상이며, 호는 모암ㆍ영모당으로 본관은 해주이다. 1705년(숙종31)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1709년(숙종35) 교리를 거쳐 설서ㆍ사서 등을 역임하고, 1710년(숙종36) 부수찬, 1713년(숙종39) 필선, 1715(숙종41) 부응교ㆍ이조 좌랑을 지내고, 1716년(숙종42) 승정원 승지에 이어 경상ㆍ강원ㆍ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1742년(영조1)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1727년(영조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중용될때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어 호조ㆍ이조ㆍ병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자 판의금부사 겸 사도 도순무사로 임명되어, 박문수 선생을 종사관으로 하여 죽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난을 진압한 공로로 분무 공신 1등으로 해은 부원군에 봉해졌고, 이어 의정부 우찬성으로 중용되었으나, 자신이 이인좌 씨와 같은 소론이라는 자책에서 사직하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1728년(영조5)에 타계하자 시호를 충효라 하고, 효자 정문과 초상화 등이 용인 모현면 오산리에 사는 후손들에게 전승되어오고 있으며, 묘소도 현재의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에 안장되었고, 이인좌의 난을 토평한 내용을 담은 토적 송공비가 안성시 낙원동의 공원내에 있다.
<문헌:숙종ㆍ경종ㆍ영조실록, 경기도지,안성군지,용인군지,안성의 얼과 맥55면,국사 대사전 948면, 한국인명대사전 474면>
오정방(吳定邦, 조선시대,1552~1625)
무신으로 본관은 해주이다. 양성면 덕봉리에서 출생.성장하였다. 선조 16년 무과에 장원급제 하였고, 북쪽의 오랑캐 니탕개가 종성을 침략하자 이이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41세 왜란이 발발하자 5위도총부도사로 임명되어 함경도 영흥에서 수천명의 의병을 모군 훈련시켜 많은 적을 섬멸해 그 전공으로 부령부사, 정평부사등의 외직이 제수되었다. 선조 37년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이듬해 경상우도 병절도사가 되었으며,선조 40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는 등 주로 외직을 거쳤다. 1623년 인조반정때 포도대장에 기용되었으며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겸 진주목사를 지내고 사퇴했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발생하자 왕을 모시고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후 향리에서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 74세로 타개했다. 묘와 신도비는 양성면 덕봉리 선영에 있다.
윤필상(尹弼商, 조선시대,1427~1504)
본관은 파평, 자는 양좌(陽佐), 호는 청봉(晴峯) 또는 청산(淸山)이며, 안성군 보개면에서 출생. 성장하였다. 세조 3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동부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의 측근에서 왕명의 출납을 잘 처리하여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성종 2년 경상도에 가뭄으로 기근이 심하자 우찬성으로 진휼사가 되어 기민을 구제한 공로로 모의와 녹피화를 하사 받았다. 1474년 이조판서와 의금부당상을 겸직 하였으나 한명회 등의 권신들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자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곧 복직되었으나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았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1484년 영의정으로 승차하면서 파평부원군에 봉해졌고 연산군 2년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을 하사 받았다. 그러나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고 치죄를 당하여 진도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았으나 죽지 않아 자신이 지니고 있던 극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그의 묘소는 보개면 구사리에 있다.
이덕남(李德男, 조선시대,?~1592)
의병장으로 본관은 영천,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한 후 외삼촌 홍자수에게서 자랐다. 무예에 뛰어나 약관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훈련원 부정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당시에 그는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난의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달려가 임금을 호종하려 했으나 이미 의주로 피난가고 없었다. 그는 안성으로 돌아와 외삼촌 홍자수, 외사촌 동생인 홍계남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고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들며 군사를 조련시켰다. 왜적이 죽산부로 결집을 시도하자 죽산의 좌찬령으로 달려가 연전연승으로 이를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홍계남이 중상을 입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출하였다. 이어 기호.호서의 의병진과 연합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적들의 연합군에 의해 외삼촌 홍자수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이숙번(李叔蕃, 조선시대,1373~1440)
문신으로 본관은 안성, 자는 백응(佰膺), 호는 운정(藝亭)이다. 태조 2년(1393) 춘장방에서 10등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태조 7년(1398)지안산군사로 재직할 때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사공신 2등에 안성군으로 봉해졌고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좌명공신 1등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을 내세워 방자한 행동을 일삼으므로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태종13년(1413) 병조판서에 제수되고 이듬해 찬성, 태종 15년(1415)에는 안성부원으로 제수 받았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는 시흥군 수암면 산현리 (현 시흥시산현동)에 있다.
홍계남(洪季男, 조선시대,1564~1597)
무신이며 의병장으로 본관은 남양이다. 우찬성 자수의 아들로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단정하고 위용과 용력이 뛰어나 무술에도 특출하였고 높은 것을 뛰어 넘는 재주가 있어 홍나비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변사 이일의 휘하로 상주에서 신립장군과 합세하여 충주탄금대에서 혈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규합하여 목촌에서 성을 쌓고 왜군과 대치하였다. 죽주성에서 적군은 그를 사로잡고자 부친의 시신을 성 밖에 달아 놓고 유인작전을 펼쳤다. 그는 적을 처단하고 부친의 시신을 무사하게 가져와 진중에 안치시켰다. 이같은 공으로 장군은 당상관으로 특진되었고 수원판관겸 기호양도조방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절충장군 칭호를 하사받았다. 선조 29년 이몽학이 난을 일으켜 홍계남이 자기 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하옥되어 많은 고초를 당했으나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복직되었다. 이듬해 34세를 일기로 영천에서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부음을 듣고 처자와 노모의 부양을 적극지원하도록 하는 한편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그리고 그의 충효를 널리 후세에 전하고자 <삼강행실도>에 속기토록 했다.
홍자수(洪自修, 조선시대,?~1592)
본관은 남양으로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발발 당시 충의위에 소속되었으며, 아들 홍진ㆍ홍제ㆍ홍전ㆍ홍계남과 생질인 이덕남 의병장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여 지휘하였다. 개전으로 진천의 엽둔고개에 진을 치고 있다가 왜군을 대파하고, 그 후 의병대장기를 앞세워 의병 3천명을 모집하여 매복전과 유격전을 감행하여 왜군의 보급로 차단과 연합전선의 결성을 방해하는 등 많은 타격을 주었으며, 특히 안성의 목천에 성루를 쌓고 진을 쳐 큰 전과를 올렸고, 생질 이덕남 의병장과 함께 왜적의 대군에 의해 격파 당해 전사하였다. 왜란 평정 후 조정에서는 승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5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고 정려를 하사받았다. 묘소는 미양면 갈전리에 있으며, 묘소아래 정문이 있는데 향토유적 제31호로 지정되었다. <문헌:안성의 얼과 맥 45면, 안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311면
출처 :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