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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와 노후생활 -
나다운 삶은 어떻게 사는가?
宇堂 서택진/전 영광읍장
35여 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은퇴자 생활을 한 지도 벌써 9년 차 접어들었다. 세월은 쉬어가지 않고, 쏜 화살처럼 빨리 간다는 말이 실감 난다.
은퇴와 노후. 나와는 상관없는 먼 훗날의 일로만 여겼었는데…. 어느 순간 내 곁에 다가오는가 싶더니 이젠 앞에서 나를 끌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노후준비다. 기대수명의 증가로 은퇴 후에도 20~30년을 더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길어진 은퇴 후 생활에 걸맞게 경제적 여유, 정신·육체적 건강이 뒷받침된다면 노후생활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특히 나와 같은 60대 이후 세대 대부분은 가족과 먹고살기에도 급급해 자신의 노후준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은퇴 후 경제적 빈곤으로 70세가 넘어서도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가 하면 건강을 잃고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보내는 사람도 있다. 여가를 제대로 즐길 줄 모르고 주위 사람과도 어울리지 못해 외톨이로 고독하게 노후를 보내는 사람도 많다. 가족 간의 소통에도 익숙하지 못해 따돌림 당하고 부부간에 갈등이 심화돼 황혼이혼이니, 졸혼(卒婚)이니 하며 늘그막에 파탄 난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노후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나 역시 은퇴 후 노후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은퇴 전과 다른 삶을 사는 나에게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곤 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그러면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난감하다. 반은 농담으로 “음…, 오늘은 놀고 내일은 쉬고”라며 우물쭈물 대답하고 웃어넘길 때가 있다. 계획성 있는 노후를 보내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증거다. 직장을 다닐 때와 다르게 매일 주말과 휴일이 나를 찾아온다. 계획성 없이 그때그때 움직이다 보니 비효율적이다. 은퇴 후 사회 적응도 둔감했다. 현직에 안주하여 은퇴와 노후 준비에 대해 사전에 고민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덕도 도덕경 47면 ‘경제 이치’의 말씀 중에 “있을 때에 준비하고/ 있을 때에 경제하고/ 없으면 준비할 수 없고/ 없으면 경제할 수 없느니라/ 사람은 준비와 경제하는 것이/내가(삭제) 나를 살리는 것이요/ 내가 나를 살리는 것이(삭제)/ 한 가정을 살리는 것이요/ 가정을 살리는 것이(삭제)/ 국가를 살리는 것 이니라”라고 하셨다. 성인의 가르치심을 배웠음에도 준비와 실천이 부족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하지만 ‘늦을 때가 빠르다’라는 말이 있듯이 남은 삶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하나하나 준비하고 실천해야겠다. 앞으로의 삶은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가족과 더불어 이웃과 친구 그리고 사회를 함께 생각하고 그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겠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남은 삶을 후회하지 않고,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1) 이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자
나이 앞에 당당해 보자. 나이에 걸맞게 성숙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보자. 그동안 힘들게 살아온 나다. 이미 살아온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했던 실수, 내가 겪은 고통, 그것들이 쌓여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본다. 아름다운 노후는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때에 아름답게 익어가는 것이라고 본다. 인생 100세 시대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 무거운 마음을 내려 놓아야할 때다. 자녀들에 대한 집착, 재물을 모으는 일, 세상의 것에 욕심을 부리는 것 등에서 해방되어야겠다. 그리고 지금 건강을 위하여 얼마나 준비하고 투자하고 있는가? 건강을 위해서는 나쁜 마음(미움, 원망, 욕심, 집착 등)을 버리고, 나쁜 음식 덜 먹고, 운동을 생활화하자. 7학년이 됐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멋지게 폼 나게 즐기면서 살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갈지. 노후에 무엇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인가? 일상생활에서 밥만 먹고 살 것인가? 아니면 나름대로 윤택한 삶을 설계하여 재미있게 살 것인지 생각해 보자.
2) 신앙생활(도덕공부)
★성덕도에서 도덕공부를 한지도 33년(36세부터 ~)이 됐다. 사람의 근본인 도덕은 삼강오륜인의예지를 중심으로 사람의 일상생활 규범을 배우는 공부다. 수양하기 전에는 10여 년 동안 삶의 중심을 잃고 방황했다. 인륜의 도리를 모르고 살았다. 수양을 통해 마음을 닦아 악함을 버리고 착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개과천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고애상신된 마음을 살려 35여 년의 공직을 마치고 오늘날 잘살고 있다.
3) 건강에 투자하자
스포츠, 여행, 취미 등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도전해보자. 내가 스스로 움직여야 행복하다고 본다. 자녀들이나 아내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관리에 힘써야겠다. 늙어 질수록 정갈하고 깨끗해야 한다.
4) 여가. 취미 생활을 즐기면서 자기 관리에 힘쓰자.
우리 마을에 소재한 노인복지시설(빛고을노인건강타운)의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자. 헬스, 수영, 대체요법, 문학반(자서전 등 글쓰기), 각종 공연 등을 관람하고, 시민대학의 인문학 강좌 등을 참여함으로써 번잡스러운 정서 함양에 힘쓰겠다.
5) 소유한 것 가지고 윤택하게 살자
돈은 삶의 수단일 뿐이다. 나의 주 소득원은 공무원연금이다. 부채, 현금 관리 등을 위해 가계부를 쓰고 인생 후반전을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6) 질병, 사고 등을 대비하자
안정적인 노후 20~30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연금 관리에 있어서 어떻게 불리고 모은 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쪼개 쓰느냐로 접근해야 하겠다.
질병, 사고 등을 대비한 비상금 확보는 필수다. 또한, 주택연금계획도 세워 자녀에게 집을 물려줄 수는 없지만 집에 대출이 남아 있어도 원리금 상한의 압박이 없고 재산세 감면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자녀들이 나중에 나를 부양해 주겠지 하는 막연한 마음은 내 생각일 것이다. 노후에 자녀들에게 주는 가장 큰 지원은 나 자신의 건강과 독립적인 생활이 가장 중요하다. 현명하게 대처하고 준비하여 자식과의 관계에도 잘 대처 준비하는 삶이필요하다.
7) 기타 즐거운 일, 기쁜 일, 좋아하는 것 등 취미 생활을 해보자.
- 글쓰기, 독서, 인문학 시민강좌, 여행, 친구 만나기, 텃밭 가꾸기, 인생 마무리 정리 등등 행복은 마음에서 생기는 만족인가 봅니다.(추가)
내가 잘 하는 것은 무엇인가?
徐宅鎭/宇堂
“내가 잘하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라고 내게 묻는다면 제대로 된 답변을 하기가 어렵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언가 잘 한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반복해서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냥 남보다 잘하거나 뛰어난 것은 없다. 정말 잘 한 것을 찾을 수 있고 잘한 것을 더 잘 하도록 만들어 간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아 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자신이 타고 난 것을 찾고자 하는 질문 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력이다. 나는 꾸준함이 부족하고 쉽게 단념하고 끈질기게 견디어 나아가는 힘이 부족하다.
또한, 꼼꼼한 성격 때문에 힘들게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남들보다 티끌만큼이라도 잘한 것은 없지만 굳이 관심과 즐겁게 하는 일이 있었다면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1. 친화력과 인간관계를 매우 중요시한다.
가족들은 물론 직장 동료들에 대한 생일, 기념일, 명절, 휴가, 회식, 단합대회 등 애경사에 빠짐없이 꼼꼼히 잘 챙기는 편이다. 특히, 읍면장 재직 중에는 각급 기관사회단체장과 마을 이장을 비롯한 유지들과의 친화력과 인간관계를 토대로 지역발전과 복지증진에 함께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2.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소신 있게 일한다.
공직 생활하는 동안 3개 지역의 읍면장 재직 중에 있었던 일을 회고해 본다면 2002년8월 말경 ㅇㅇ면장으로 첫 발령 받고 부임하자마자 “한반도를 관통해 역대 최악의 루사 태풍 피해”가 났을 때 눈앞이 깜깜했다. 강한 비바람을 맞아 가며 전 직원들과 함께 주민들의 안전과 농경지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때가 바로 논에 심어 놓은 벼가 막 배동해서 모개에 꽃이 피어날 때였다. 상황을 보니 비바람으로 벼꽃이 다 떨어져 가을 수확을 예상하기 힘들었다. 나는 과감하게 용단을 내렸다. 전 직원들에게 현재 상태가 중요하니 있는 그대로 집계해서 상부에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때 당시 80~90% 피해가 예상 되었다. 그 이듬해 중앙에서 모두 인정되어 수백억 원이 피해 보상금으로 나와 농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갔다. 주변 지역 읍면에서는 50~60% 피해 상황을 보고하여 다소 혜택이 적었다고 들었다. 지역 주민들을 위한 행정을 과감하고 소신 있게 처리하여 지역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주민들로부터 면정에 많은 참여와 협조를 받아 안정적으로 면정을 이끌 수가 있었다.
또한, 2004.1~2007.6월까지 원자력발전소가 소재한 ㅇㅇ읍에서 근무할 때 이곳은 원전문제나 생활쓰레기장 민원으로 지역 민심이 어수선 하였다. 특히, 군 전체 지역 생활 쓰레기가 이곳으로 옮겨져 소각하고 매립하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민원이 발생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역 주민들이 생활 쓰레기 처리문제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 군청 앞에서 시위를 하게 돼 같이 동행 했었다. 시위가 너무 과격 될 조짐이 보여 과감하게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들고 군 당국을 향해 지역 주민들 편에 서서 왜 우리 주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라고 외치면서 하루빨리 근본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내려 왔다. 군청관계자나 치안 당국에서는 어리둥절했다. 읍장이 지역 주민들 편에 서서 말을 한 것이 잘못인가? 아무튼 지역 주민들의 호응은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때다 싶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여 시위를 마치게 하고 해산시켰다.
그 이후 민원이 원만하게 잘 해결되고 지역 주민들 또한 읍정에 적극 호응하여 읍민화합과 지역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이와 같은 것이 주민을 위한 행정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부심을 느꼈다.
그 후 나는 서기관(4급)으로 발탁 승진되어 본청 과장과 군청 소재지 읍장을 겸직 발령되어 근무했고, 근무하는 동안 지역 주민들과 각급 기관사회단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안정적인 읍정을 이끌어 지역발전과 복지증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여 근무하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환송을 받으며 퇴직하였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3. 자신의 일 보다는 남의 일을 잘 챙긴다.
나는 내유외강(內柔外剛)형이다. 겉으로는 강하게 보이지만, 속은 부드러운 사람이다.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이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1943년 수원농림전문학교(현, 서울대 농생명학과)에서 공부를 하고 해방 이후 미 군정이 이끌면서 일본이 수탈한 농지를 관리하고 배분해 주는 신한공사에서 근무하다가 6.25 때 직장 상사와 함께 외갓집에서 피난 생활하던 중 상사가 학살 위기에 처하자 상사를 구하려다 함께 1950.12.13 ㅇㅇ학교 운동장에서 집단학살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한 살이었다. 나는 1976년 3월 고향인 ㅇㅇ면사무소에 첫 발령을 받고 한 마을을 출장 갔는데 아버지 친구라고 소개하면서 내 손을 붙잡고 네 아버지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고, 형제, 친구, 이웃을 잘 챙기는 인자하고 덕망이 있는 친구였는데 참으로 안타깝다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가정이나 가족 일보다도 밖의 일, 남의 일을 더욱 챙기는 편이다. 아내는 말한다. 밖에서 좋다고 말 듣는 사람치고 집안일은 제로(zero)다고 핀잔을 주며 역정을 내곤 했다. 이러한 것이 자신의 이익 보다 자기를 희생시켜 남에게 공과 이익을 베푸는 것이 아닌가 싶다.
4. 칠전팔기의 도전정신으로 재기에 성공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가정을 잘 돌보지도 않았고, 직장에서도 성실히 근무하지 못했다.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결혼 후 36세 되던 해까지 10여 년간 방황했다. 직장 동료들이 나와 함께 근무하는 것을 기피 했을 정도였다. 아내 말을 빌린다면, 가정과 가족들은 안중에도 없고 직장 근무가 끝나면 집으로 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친구, 사회인들과 어울려 매일 술이나 마시고 화투놀이 등을 일삼고 방황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직장이나 사회로부터 불신이 거세게 일어났고, 멍한 상태에서 아내와 상의도 없이 직장에 사표를 내 던졌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내게 이런 일이 있었던가? 이런 상황에서도 아내는 나에게 채찍보다는 용기를 주었다.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소 하며, 같이 힘내자고 말했다. 아내의 말에 용기를 얻어 바르고 옳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재기의 꿈을 갖고 성실하게 근무했다.
그동안 실추된 명예를 되찾겠다는 신념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칠전팔기의 도전정신으로 위기를 잘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본다.
지방공무원으로서 승승장구하여 ㅇㅇ군청에서 3개부서 과장을 거쳤고, 3개 지역 읍면 장을 역임하면서 지방공무원의 최고급인 서기관(4급)까지 승진하고 대통령 훈장을 받고 영예롭게 퇴직했다. 그리고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교를 못가고 군대 가게 돼 아쉬웠었는데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5. 내 것이 아니면 보기를 눈 어두운 것 같이했다.
공직 말년에 ㅇㅇ군청 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전 직원에게 특별히 당부하면서 강조했다. 모든 예산은 투명하게 그리고 불요불급한 예산집행을 지양하라. 특히, 과장 출장 시나 명절 때 꼭 필요한 예산만 집행할 것, 또한 사업자로부터 어떠한 봉투를 받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였다. 내가 근부(무) 하는 부서는 이권 부서여서 사업자와의 관계가 다소 있다. 그래서 공직 말년에 불명예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집으로 퇴근해서 보니 ㅇㅇ사업체 간부가 집에 와서 아내에게 금일봉을 놓고 갔다고 해서 그 이튿날 아침에 출근 시 봉투를 갖고 그 사람을 사무실로 불러 엄중히 주의를 주고 돌려주었다. 그 이후 읍 소재지 읍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누가 제보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검찰로부터 제가 근무했던 부서에 직원들의 고질적인 뇌물리스트가 발견 됐다며 검찰이 수사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눈앞이 깜깜했다.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수사 결과 그동안 고질적인 병폐가 드러나 불미스럽게도 직원2명이 직장을 잃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 역시 검찰에서나 주위의 시선이 곱지는 안했다. 결국 검찰에서 출두지시가 내려와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검사가 리스트를 보여 주면서 과장에게 ㅇㅇ원을 주었다고 적혀 있다고 말했다.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으면서 떳떳했다. 만일 그 돈 봉투를 돌려주지 안했었다면 지금 어떻겠는가? 정말 아찔했다.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 본다. 조서를 받고 나오면서 검사에게 도의적인 책임이 없진 않습니다. 다른 직원들의 선처를 잘 부탁한다며 공손히 인사하고 나왔다.
6. 친구들과 잘 소통하는 편이다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 상대방을 처다 보고 최대한 듣고 나서 내 생각을 말하면 친구들은 좋아 한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갚으라는 말을 못하고 처분만 본다. 친구들과 동남아 여행 시 달러 환전해주면서 100달러를 주어야하는데 1,000달러를 주고도 나머지 차액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가끔 식사를 접대할 뿐만 아니라 모임 시 친구들에게 접대하기 위해 1~2년 전부터 담금주를 담아 두었다가 모임 시 갖고 가서 한 잔씩 돌리면 친구들이 좋아한다. 친구들이 마시는 것을 보면 기분 좋고 보람도 있다.
7. 마무리
나는 너무 단순하고 성격이 꼼꼼해서 상대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 가족은 물론 친구, 이웃 등 모든 사람과의 인간관계가 원만치 못했는데 나 자신을 뒤돌아보고 고쳐 나가야겠다. 좀 쑥스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써보니 잘하는 게 아예 없지는 않네요. 이명란 교수님께서 좋은 과제를 주셔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생각, 이런 글을 처음 써 보는 거라 어색하긴 하지만 소신 있게 한 일에 대해서는 자존감도 다소 생긴다.
♡ 동남아 여행길에서 죽마고우 친구들과 함께 ♡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宇堂/서택진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고 마음이다.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 나는 자신은(삭제)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 산다. 마음은 서로 소통할 때 기쁘고 행복하다.
아내와 결혼한 지 45년이 되었다. 서울에서 살아온 아내는 생소한 농촌 환경에서 홀어머니, 형, 그리고 나 세 가족이 함께 살면서 적응하는데 힘들어했다.
홀어머니는 평생 농사일을 하신 분이다.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농사일을 돕는데 버거워했다. 특히, 아내가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보이지 않은 동서지간의 묵은 갈등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힘들었다.
갈등은 인간관계와 소통에 따른 문제인 것 같다. 이런 문제를 남의 일인 양 방관한 나의 잘못이 크다. 상대 입장에서 보지 않고 내 입장에서만 본다면 갈등이 있을 만한 원인을 찾지 못하겠다. 서로 이해 부족 탓이다. 굳이 원인을 찾아 본다면 그동안 소통이 부족했고 그리고 무심함, 이기심, 욕심, 열등감 등에서 비롯된 듯싶다.
나는 결혼 이후 공직생활을 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 아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면서 칠전팔기의 도전정신으로 부단히 노력했다. 아내의 내조에 힘입어 위기를 극복하고 35여 년 동안 공직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영예롭게 퇴직했다.
또한,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교를 못가고 군대 입대하게 돼 아쉬웠는데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노인상담사 등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한편, 어머니는 13여 년 전 별세하기 전에 재산을 두 아들에게 대부분 증여했다. 갈등은 어머니 별세 후 남은 재산 상속 문제로 동서지간에 갈등이 발생했다. 나는 어머니의 혼과 얼인 유산을 후손에게 물려주자고 제안했으나 형이 거절하여 소유권을 형에게 넘겼다.
그런데 최근에 고향 마을에서 이상스러운 말이 들려 왔다. 상속문제 이후 형수가 나를 비방하고 모함을 했다는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르겠으나 인격을 갖춘 분으로서 그럴 리가 없다고 일축하고 모함이 아닌가 싶었다. 나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 여겼다. 그러나 듣고 보니 석연치 않았다. 분명 오해가 있을 성싶다. 자초지종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말을 들은 아내는 그동안 쌓인 감정 때문인지 역정을 내면서 인연을 끊자고 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동고동락을 함께 해 온 형제인데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큰 수치이며, 금수보다 못한 짓이다.
제주도 어느 숲 해설가는 “칡 나무와 등나무의 엉켜있는 것을 가리켜 이 나무를 일명 갈등나무라 한다며, 두 나무는 성질이 서로 달라 정반대 방향으로 감고 올라가 엮이게 되는데, 이 성질을 고칠 수가 없어 감긴 나무가 먼저 죽어 쓰러지게 되고, 두 나무도 버틴 목이 없으니까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결국 다 죽게 된다”라고 말했다.
세상 살다 보면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기질과 살아온 삶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간극을 어떻게 지혜롭게 좁혀 가느냐가 문제다. 욕심은 서로 부딪혀 파멸을 일으킬 수 있고, 침묵은 독이 된다는 말에서 좋은 교훈을 얻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존심과 욕심을 버리고 대화를 하지 않으면 파멸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고향의 친척이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상속문제로 온 가족들이 사분오열되어 죽기 살기로 원수같이 다투고 있는 사례를 목격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해결할 수있는 방법은 없을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걸까? 욕심은 나를 괴롭히고 마음이 상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위 사례를 나 자신에게 묻고 무슨 좋은 묘책이 없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묘책이 생각났다.
아내에게 제안했다. 큰집에 가서 담판을 짓고 오겠다고 했다. 아내가 느닷없이 함께 가겠다고 하여 난감했다. 갈등을 풀 수 있는 묘책을 갖고 그동안 내가 살아온 과정, 그리고 아내의 역정 등을 허심탄회하게 다 털어놓고 대화를 나눌 계획인데 아내가 함께 가면 할 말을 다 못한다. 특히, 묘책을 내놓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가겠다고 아내로부터 양해를 구했다. 남 탓보다는 내 탓으로 하고 그 이튼날 몸을 최대한 낮추고 큰집을 찾아갔다. 형과 형수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밖에서 점심 식사를 잘 대접했다. 그리고 다시 큰 집으로 갔다. 두 분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다소 어리둥절했다. 점심시간 분위기를 살려 두 분 눈치를 살폈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예감이 좋다고 판단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두 분은 그동안 우리 집안의 기둥으로써 가장 역할을 해 왔고, 가정의 모든 애경사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하고 희생하신 분들이다며 경의를 표했다. 특히, 두분은 홀어머니 살아 계실 때 극진히 봉양하신 분들로서 그 노고에 대한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정중히 올렸다. 그리고 동생으로서 그동안 잘못한 점, 생전에 어머니에게 불효한 점 등을 하나하나 정중히 사과하고 묘책도 함께 내놓았다.
처음 드린 말이기도 하고, 처음 내놓은 묘책이기도 했다. 참으로 죄송스럽고 부끄럽다. 왜 진즉 이런 묘책이 안 떠올랐을까 하고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인간관계와 소통을 잘 했더라면 갈등 없이 형제지간에 화목하게 잘 지냈을 텐데 하고 반성했다. 자존심 때문에 그랬을까? 동생이 형과 형수에게 무슨 자존심이 필요하겠는가? 두 분 역시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그러면서 두 분께서 오늘 잘 왔다. 뜻깊은 자리가 된 것 같다며 표정이 밝아 보였다.
나는 힘이 났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역경 속에 고난을 극복하고 공직생활을 마친 배경, 그리고 아내의 45년 묵은 갈등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았다. 두 분께서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3시간 동안 대화를 잘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속마음은 묵은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마음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대화에 임했다. 특히, 아내와 묵은 갈등을 풀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며칠 후 성과가 나타났다. 형수로부터 아내가 점심 초청을 받은 것이다. 형제 가족이 함께 모여 모쪼록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며칠 후 또 형수로부터 양파, 마늘 등을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보이지 않은 갈등이 다소 풀리는 것 같아 다행이다. 아내 표정은 내색은 안지만 밝아 보였다. 묘책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나 또한 흐뭇했다.
이 글을 쓰면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양보하는 것도 미덕이다”는 진리를 배웠으며, 그리고 가족은 물론 모든 사람들과의 진실한 인간관계와 소통의 중요함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이젠, 우리 가정과 가족의 모든 갈등은 훨훨 날아가고 평화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산다는 것은 / 서택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양보하는 것도 미덕이다
갈등은 물레방아처럼 흐르고
내것이 아니면 장님이 되거라
칠전팔기 도전정신이 결실로
황혼의 축복이 되어 무거운 짐
내려놓고
남은 삶을 위해 봉사하는 넉넉함은
준비하고 실천했는 오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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