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소위 잘나가는 교회 부목사로 별 어려움 없이 사역하던 중, 더 나이들기 전에 오래 품어 온 생각을 실천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끌려 성도 수 열 일곱명의 농촌 미자립교회로 내려 와 2년째 사역하고 있는 김영팔 목사.
그가 처음 곡성 입면교회에 부임해 왔을 때, 성도 수는 열일곱 분이었다. 대부분 연로한 어르신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분이 돌아가시고 두 분은 요양원으로 들어가셔서 성도 수는 열네 분으로 줄었다. 처음 일 년여 동안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의 표현대로 하면 “굶어죽지 않으려고 논두렁 밭두렁으로 뛰어다녔던 시간”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입면교회로 향하는 길가에 저만큼 섬진강변을 따라 흐드러진 벚꽃이며 개나리가 너무도 아름다웠지만 김 목사는 작년엔 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단다. 올 봄에야 비로소 꽃이 이렇게 아름답게 피는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는 것. 지난 2년여간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녔고 무릎이 닳도록 기도한 결과, 지금은 성도 수 80여명으로 ‘부흥’해 주위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 화목한 교회 공동체가 되었다.경제적 여건이나 자녀 교육 등 여러 가지 환경에 있어서 서울의 강남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는 지금 행복하다. 광주와 서울, 그리고 농촌에서 두루 목회를 경험한 그와 반나절 동안 섬진강변의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나눈 이야기를 싣는다. /편집자 주
오직 전도…지난 2년간 섬진강 경치·벚꽃 눈에 안 봬
한글·영어학교, 의료봉사 유치 등 지역사회 섬김 계속
부임 전 2명이던 남성 교우 30명으로 늘어 아버지학교도
▲ 서울의 강남에 있는 수서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시다가 농촌교회로 오시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수서교회 사역은 한국 최상류층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의 경험은 앞으로 한국교회 교인들의 변화될 신앙가치관을 미리 내다보는 목회적경험에 유익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농촌교회를 섬기게 된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장 젊고 건강하고 부름의 가치가 있을 때 목회의 십일조를 농어촌지역에서 섬겨야겠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2007년 아프칸에 선교와 봉사를 하러 간 탈레반에게 피랍 억류되어 피살된 故배형규목사님의 영향이었습니다. 배목사님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믿음의 동역자였습니다. 부름받아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말하면서도 빚진마음이었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목회적양심이었습니다. 그 당시 규모있는 교회에서 청빙건이 오가고 있었지만 이곳 입면에 살고 계시는 장인어르신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에게 강단에서 설교하는 장인 어르신도 전도하지 못한 목사로서 그것은 꼭 해결해야 할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마침 수서교회 농산물직거래장터(농어촌선교연구소장:강성열목사)에서 임봉기목사(화순월평교회)로부터 입면교회 소식을 듣고 이틀만에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부임후 저희 장인어르신 포함 목사사위를 둔 3분의 어르신들이 세례받고 행복한 믿음생활중이십니다.
▲ 2년 여동안 성도 수와 예산이 4~5배 성장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특히 농촌의 현실을 감안할 때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어떤 비결이 있는지?
솔직히 처음 부임 받아 내려왔을 때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교회분열의 갈등의 후휴증과 지역사회에서 신뢰를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교인들 대부분 연로하신 어르신들이었습니다. 특별한 비결은 없구요! 먹고 살 길이 아득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밤낮으로 박카스와 냉수를 들고 마을회관, 논과밭으로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논두렁 밭두렁으로 전도하러 다니며 느낀 것은 사람들이 교회에 제 발로 오지는 않지만 논이나 밭으로 찾아가면 일하러 나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비결은 섬겼던 훌륭하신 목사님들의 가르침의 덕분입니다. 광주하남교회사역때 임준태목사님으로부터 훈련받은 새벽기도훈련, 매년 50명이상 전도하여 정착시킨 전도훈련, 서울영락교회 대학부 사역때 임영수목사님으로부터 설교훈련, 서울수서교회 황명환목사님으로부터 받은 건강한 목양훈련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광주, 순천에서 매주 이곳 입면교회까지 예배드리러 찾아오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저희교회는 부임 전 2명이던 남성교우가 30명이상 출석하게 되어 두란노아버지학교가 농촌지역에서 최초로 개설하여 32명이 수료했습니다. 젊은 대학청년부도 10여명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이었습니다. 부임후 28개월 동안 서울삼성의료원 의료봉사2회, 광주기독병원 의료봉사2회, 서울실로암안과봉사 및 여러 교회에서 교인들과 대학청년부들이 찾아와 지속적으로 한글학교, 영어학교, 어르신 영화보여주기 등의 선교봉사활동으로 지역사회의 신뢰를 이끌어냈습니다. 마음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게을리 하지 않고 농촌현실과 성도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철저한 기도와 설교준비와 누구에게든지 차별 없이 편견 없이 섬기는 따스한 목사가 되고자 합니다.
▲ 지난 2년여 동안 농촌 목회를 하면서 겪은 애환이 많을 듯합니다. 몇 가지 소개해 주신다면?.
지역을 떠나 어려움이 없는 교회가 없으리라 봅니다. 농촌교회의 공통점이라 봅니다.실제로 교인들이 증가하는 교회보다도 줄어드는 교회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아니 현상유지만 하는 교회라면 대단한 교회라고 봅니다. 저희교회 형편만 보더라도 최근 2년 동안 별세 하신 분, 연로하셔서 요양원과 여러 가지 이유로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점차 더해갑니다. 전도되지 않았더라면 부임전의 교인수의 1/4 감소 할 정도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가 농촌목회자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교회는 먼저 남성분들이 전도되어 출석하다가 아내되신분들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입면교회에 가면 남성들이 달라지더라, 삶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태도가 변화되어지더라하는 소문이 나면서 남성교우들이 여타교회보다 많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동영상전도법’에 의해서 전도된 분이 많습니다. 전도하다보면 “언제 가는 교회 가겠다”고 구두로 약속합니다. 그러나 결코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대상자와 대화를 나눌때에 휴대폰을 꺼내어 동영상을 촬영합니다. 웃으면서 언제까지 나오시렵니까? 대답을 저장해두고 전도갈 때마다 보여줍니다. 효과가 대단합니다.
▲ 서울에 터전을 이루고 생활하시다가 갑자기 농촌으로 오시게 됐는데 자녀 교육문제는 어떻게 하셨는지?
이번에 큰 아이가 수시로 동국대에 진학했습니다. 서울수서교회 사랑과 섬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3시절 공부를 돌봐주는 교회 집사님이 계셨고, 장로님 댁에서 고3 시절을 신세지며 공부했는데 저야 그렇다고 해도 제 아내는 어미 된 마음으로 얼마나 마음 졸였겠습니까? 그러나 아이가 참으로 성숙하게 믿음으로 이겨내고 잘 지내주어서 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할뿐입니다. 더불어 집사님과 장로님께도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둘째 아이도 고2로서 이곳 옥과에서 영상선교비전을 품고 학교내 동아리모임에서 QT조장으로 섬기며 예쁘게 기도하며 많은 학교친구들을 입면교회로 전도하는 모습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첫댓글 소중한 내용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