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얼마전 단국대교수님이 쓰신 한국사의 오점을 쓴 책을 한편 보았습니다.
거기 나온 내용의 첫번째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국사교과서나 많은 역사만화, 서적에서 가야시대의 문헌기록이 많지 않은 걸로 보아, 많은 분들이 허황후를 인도사람이나 저 멀리에서 건너온 사람으로 보고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가야의 항해술이 인도까지 이르기는 매우 무리였고, 또, 기적적으로 항해술이 높았다 치더라도, 저 멀리 인도의 허황후가 과연 듣도 보도 못한 저 멀리 타국의 나라에 시집을 가는 것도 상식에서 벗어난 일일 것입니다.
게다가 인도는 불교의 발생지로, 당시 만약 허황후가 가야로 넘어왔을 때, 불교를 필시 들고 오거나 불교를 알려 전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야는 몇 백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불교를 수용합니다.
그래서 결론은 허황후는 인도가 아니라 일본으로 추측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설이고 추측일 뿐입니다)
제 생각은 가우리(고구려)의 주몽신화나, 단군신화, 박혁거세신화, 온조신화, 비류신화 등등
각국의 나라의 신화가 있듯이, 김수로왕 신화에 허황후의 출신지도 조작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듯 싶지만, 오늘 보고 신기하게 느껴 이렇게 올립니다.
첫댓글 님의 글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님은 가야국의 항해술이 미흡하다는 뜻인데/ 잘 생각하세요. 허황후는 인도에서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가야의 항해술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 인도의 항해술을 따져야 합니다...........이런 기초 사실조차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요?..............
항해술도 그렇지만, 가약국민들이 머나먼 천이과정에 시조신화도 따라서 왔다고 보면 어떨가요? 초기 가야국은 한반도라고 보기보다 지금은 인도지나 부근으로 봄직하지 않을까요? 타일랜드가 옛날 이름이 샌러->신뤄->신라로 봄직한 것과 같이로 말입니다. 참고로 드립니다.
어떤 또라이 학자는 허황후가 반도에 있던 한사군에서 온 피난민 이라는 예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머 어찌됬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경남 일대 가 육가야의 땅이라 하는 건 완전 코미디 입니다..막말로 육가야의 왕이 동네 이장입니까? 명색이 나라 인디 여섯개 나라가 경남 일부에 다 있었다는건 말도 안돼죠...
고대 기록들을 보면 고대 동양의 '군현(郡縣)국가', 서양의 '도시(都市)국가' 들은 말 그대로 지금의 군 단위 한개 내지는 몇개 합친 면적 이었던것 같습니다. 특히 한반도 같이 산악 혹은 그리스 같이 산악 과 바다로 갈라진 고대 국가들의 '도시국가(Polis)'들이 그랬고, 로마제국 통일 이전의 이태리 반도도 그랬던것 같습니다. ^^
양천허씨로써.....음 관심깊게 봤습니다. ^~^ 근데 진짜 허씨는 아니고 발음상 허라고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만..
'이 종기' 선생도 '가락국 탐사'를 쓰시기전 인도의 '럭나우(아요오디아)'를 찾았을때 그 지역에서 오래된 성씨중 'Hu, Hir, Hur, Shu, Shur, Sir, Shir'등의 韓語音中 '허'와 비슷한 성씨를 찾느라고 애를 쓰셨답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 기록에 따르면 허황후 께서 임종前 세상에 자신의 성씨를 남기고자 수로왕께 간청 하니 수로왕께서 그것을 허락 한다 하여 '허락할 허(許)'氏 姓을 열 아들중 둘째 와 막내 아들에게 내렸다 합니다. ^^
우리 머리 속에 있는 서력 기원의 기준은 가능 하면 잊어 버리고 계산상의 숫자로만 생각하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 부턴가 서력기원 이전에는 이 세상에는 특히 '동양'에는 미개한 원숭이들만 살았던걸로 '세뇌' 되어 버렸습니다. 한반도의 고인돌, 만주와 중원의 피라밋, 만리장성, 병마용갱, 필리핀의 계단식 산악 논 등은 이미 서력 기원전에 이루어졌던것 들로서 서양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뛰어난 과학 과 문화가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의 항해술은 이미 기원前 2~3세기경에 중국의 해남도에 무역선을 보낼 정도였답니다. ^^
정말 공감할 만한 글입니다..늦게 읽습니다. 정말 제 머리가 서력으로 모든 역사가 점철되어지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