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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탁번 새 시인협회장, |
◈ 어린이 문학 살리기(이오덕 선생의 유고 평론집)
아동문학(children's literature)은
어린이를 즐겁게 하거나 가르치기 위해 글로 쓴 작품과 거기에 딸린 삽화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써,
세계문학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포함하여 어린이만을 위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소설·그림책·동화·자장가·우화·민요와 그밖에 주로 구전되어온 작품들을 포괄한 쟝르를 말한다.
아동문학은 18세기 후반에야 다른 장르와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형태로 등장했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아동문학이 이렇게 늦게 발달한 이유는 경제적·사회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어린이를 단순히 어른을 축소해놓은 작은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어린이만의 독특한 요구와 이해 수준에 맞는 문학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책을 만드는 데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가르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책을 만들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어린이만을 위한 문학작품을 창작·배포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합당할 만큼 큰 시장이 형성되려면 많은 사람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하며 집단교육이 널리 보급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20세기를 맞아 아동문학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현 시점에서 아동문학은 어린이 세계의 특유한 생각과 정서뿐 아니라 어린이가 꿈꾸는 모든 상상의 세계와 일상적 환경을 다룬다. 따라서 그 세계에는 어린이뿐 아니라 생명을 부여받은 사물과 식물, 문법적·수학적 추상개념, 장난감과 인형 및 꼭두각시, 진짜 동물과 상상속의 동물, 축소된 인간과 확대된 인간, 초자연적·환상적 인물, 민간설화와 신화 및 전설에 나오는 생물, 어린이의 눈으로 본 어른들 등이 모두 등장한다. 오늘날 아동문학은 대중적인 성인문학만큼 다양하다.
성인문학의 독자가 어른이라면 아동문학의 독자는 아이와 어른이다. 아동문학은 어른도 읽을 수 있지만 성인문학은 아이들이 읽을 수 없다. 아동문학은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층이 성인문학보다 훨씬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동문학의 주 독자인 아이들은 좋은 아동문학을 읽으면서 문학을 읽는 재미와 즐거움, 보람을 알게 된다. 어릴 때부터 좋은 아동문학과 친숙해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문학을 더욱 가까이하며, 문학을 통해 삶을 풍요하게 가꿀 수 있게 된다. 아동문학평론은 아동문학을 대상으로 한다. 아동문학을 대상으로 하면서 좋은 아동문학을 가려내는 일과 아동문학 창작의 원리와 지침을 제공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동문학 평론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하겠다.
최근 아동문학에 대한 부쩍 높아진 관심과 아동도서 시장의 확대에 힘입어 창작은 매우 활발하다. 앞 시대 대부분의 아동문학 작품집 출판이 자비 출판에 의존했던 데 비하여 정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출판되고 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문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두고 있다. 그러나 아동문학 평론 쪽으로 눈을 돌리면 사정은 다르다. 창작집 출판이 활발한 것과는 달리 상대적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더러 아동문학을 연구한 책이나 아동문학을 대상으로 한 평론집 출간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출간되고 있는 아동문학 연구서나 평론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마저도 무턱대고 환영할 수만도 없다.
아동문학가로, 우리글 연구가로 한평생을 보낸 이오덕 선생((1925∼2003)의 유고 평론집(『어린이를 살리는 문학』, 청년사)이 출간되었다. 선생의 글 속에는 우리 어린이 문학의 척박한 현실이 절절히 드러납니다. 이른바 ‘명랑동화’가 인기를 누렸던 1980년대. 선생은 이를 두고 “천박한 상품”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시험점수 쟁탈의 비인간 교육을 받아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아이들은 그저 뜻 없이 웃기는 오락물만을 찾아 즐기게 돼 있다.”라며 “명랑물들은 이런 아이들의 마음에 잘도 맞추어 저질의 웃음을 파는 상품으로 만들어졌다.”라는 선생의 목소리에선 분노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이오덕 선생님은 명랑동화 열풍의 또 다른 배경으로 ‘상업주의’를 짚어내며, “어차피 자본의 세상이니 실속이나 챙기자는 상업주의는 자유당과 공화당 때는 반공동화로 한몫을 보더니, 그 뒤로는 명랑동화·명랑소설로 재미를 보고 있다.”라고 한탄의 목소리도 적잖게 높였다. 시대에 흐름을 따라 반짝 기획물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그럼에도, 야속하게도 어린이 문학의 형편은 아직까지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삶의 덕목을 직접 씹어 먹여주겠다는 부모의 조바심과 상업 출판사들의 계산이 발맞춘 결과인듯하다. 생전의 이오덕 선생은 “어린아이들은 감성으로 자란다.”라며 “지식이나 사상을 주기보다 구체적인 삶을 보여줘 그것을 느낌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관념이나 이론은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노래와 이야기와 그림을 줘야 한다.”라는 선생의 충고가 아동문학의 현실과 아동문학 평론의 중요성을 지적해준다.
이오덕 프로필
이름:이오덕
출생:1925년11월14일
사망:2003년8월25일
출신지:경상북고 청송
직업: 작가
학력:영덕종합고등학교
데뷔:1954년 '소년세계' 통해 등단
경력: 우리말 연구소 대표, 1991년 무크지 어린이 문화 창간
수상:2002년 문화관광부 문화의 날 은관문화훈장 , 1988년 제3회 단재상
◈ '꽃' 의 김춘수, 선생의 유품전시관 개관
'꽃의 시인'으로 유명한 경남 통영출신 김춘수(金春洙.1922~2004) 시인의 유품을 모은 전시관이 고향서 개관된다.
17일 통영시에 따르면 봉평동 옛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 건물 4층을 김춘수 시인 유품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해 28일 오후 4시 유족들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한다.
지난해 12월 경기도 성남시에 살고 있는 김 시인의 첫째딸인 영희(64)씨와 셋째아들인 용삼(57)씨는 통영시에 김 시인의 유품 수백 점을 전달했다.
유품 목록에는 육필원고 126점과 서예작품, 액자, 통영 두석장(豆錫裝:놋쇠, 백통장식장)과 침대를 포함한 가구류, 10폭 산수화 병풍, 생전에 입던 롱코트, 사진 등 330여 점과 이와 별도로 400여 권에 달하는 수필집과 사전류를 포함한 서적이 포함됐다.
전시관 한쪽에는 김 시인이 생전에 기거하던 것과 비슷한 형태로 방을 꾸며 침대와 병풍, 액자 등을 넣었고 나머지 공간에는 옷가지와 책, 평소 쓰던 소지품 등을 전시한다.
통영시 동호동 63번지에서 출생한 김 시인은 해방 후 고향에서 시인 유치환, 작곡가 윤이상, 시조시인 김상옥, 화가 전혁림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통영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47년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한 이후 2004년 향년 82세로 타계할 때까지 20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 한국 시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통영시민들은 그의 타계 3주기인 지난해 11월29일 자발적으로 1천500여만 원의 성금을 모아 시내 중심가 항남동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꽃' 시비를 세우기도 했다.
김춘수 프로필
이름:김춘수
출생:1922년 11월25일
사망:2004년11월29일
출신지:경상남도 통영
학력:니혼 대학교
데뷔:1946년 시화집 '애가'등단
경력:1991년 KBS이사, 198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수상:1958년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생애와 활동>>
경기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1942년 퇴학당했으며 사상이 불순하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윤이상·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노동자를 위한 야간중학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46~48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향·김수돈 등과 동인지 〈노만파 魯漫派〉를 펴냈다. 1952년 대구에서 펴낸 〈시와 시론〉에 참여해 〈시 스타일 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6년 유치환·김현승·송욱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펴냈다. 해인대학교·부산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64년 경북대학교 교수로 취임, 1978년까지 재직한 뒤 이듬해 영남대학교로 옮겨 1981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81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신군부 정권에 참여하여 정계에 진출한 것에 대해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1986년 한국시인협회장, 1991년 한국방송공사 이사를 역임했다
<<시세계>>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詞華集)인 〈날개〉에 〈애가 哀歌〉를, 1948년 동인지 〈죽순 竹筍〉에 〈온실〉 외 시 1편을 발표한 뒤, 같은 해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펴내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사 蛇〉(문예, 1949. 8)·〈기 旗〉(문예, 1949. 10)·〈꽃〉(시와 시론, 1952. 11) 등을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초기에는 릴케에게 영향을 받아 〈릴케와 천사〉(문예, 1949. 12)·〈릴케적 실존〉(문예, 1952. 1) 등의 평론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늪〉(1950)·〈기 旗〉(1951)·〈인인 隣人〉(1953) 등을 펴냈다. 6·25전쟁 바로 전에 펴낸 제2시집 〈늪〉에서는 대체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인식을 드러내고 있으나, 현실참여적이라기보다 현실을 초월하고 있다. 전쟁중에 펴낸 제3시집 〈기〉에서도 〈늪〉의 현실초월적 경향과 몽상취미는 계속되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를 꿈꾸거나 신라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제4시집 〈인인〉에서는 허무나 무의미를 극복하기 위해 관념이나 의미를 더듬어 찾고 그것에 매달리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나아가 1959년에는 그의 시세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시집 〈꽃의 소묘〉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펴냈다.
시선집으로 〈처용〉(1974), 〈처용 이후〉(1982),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1990), 시집으로 〈남천 南天〉(1977)·〈비에 젖은 달〉(1980), 〈서서 잠자는 숲〉(1993), 〈의자와 계단〉(1999), 〈거울 속의 천사〉(2001), 〈쉰한 편의 비가(悲歌)〉(2002) 등과, 평론집으로 〈시론〉(1961)·〈시의 표정〉(1979)·〈의미와 무의미〉(1982), 시론집으로 〈시의 이해와 작법〉(1989), 〈시의 위상〉(1991) 등이 있다. 사화집으로는 〈김춘수 사색사화집〉(2002)이 있다. 1959년 〈꽃의 소묘〉로 아세아자유문학상, 1960년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1992년 은관문화훈장, 1997년 다산문학상, 1998년 인촌상, 2004년 소월시문학상 특별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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