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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문화의 독특성을 잘 보여주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교문화(儒敎文化)의 제사의식(祭祀儀式)을 600년 가까이 연연히 이어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교의례(儒敎儀禮)의 문화 유산이다. 종묘제례에 녹아 숨쉬고 있는 민족문화의 우수성은 종묘(宗廟)의 역사(歷史), 종묘제례(宗廟祭禮)의 의식(儀式), 그리고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의 아름다움에 잘 나타나있다. 이 세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빚어지는 장엄한 종묘제례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와 가치, 그 의미 속에 담겨있는 선조들의 지혜, 그리고 그들의 멋을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다.
종묘(宗廟)는 조선왕조가 개국 된지 3년 뒤인 1395년 9월 준공되었으며, 세종3년(1421)에는 종묘 정전(正殿)의 서편에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종묘일대는 모두 소실(燒失)되었으나, 광해군 원년(1608)에 전란(戰亂) 이전의 규모로 중건(重建)되고, 그 후 몇 차례의 증축(增築) 및 보수(補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유학(儒學)을 바탕으로 창건된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유가(儒家)의 경전인 주례(周禮)의 좌묘우사(左廟右社) 제도를 따라 종묘의 터를 정했으며, 민족(民族)의 영산(靈山) 백두산(白頭山)에서 비롯된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한 줄기인 한북정맥(漢北正脈)의 끝 자락에 종묘가 자리하고 있어, 지금도 백두산의 정기(精氣)를 끊임없이 받고 있는 명당(明堂)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종로 거리에서 종묘의 정문(正門)인 외대문(外大門)을 보며 종묘공원을 들어서면, 멀리 외대문 지붕위로 야트막한 응봉(鷹峰)과 그 뒤로 솟아있는 보현봉(普賢峰)이 외대문의 지붕 선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다가서듯 가까이 온다. 외대문 전면(前面)에는 원래 5단(段)의 계단이 있었기에 멀리서 바라보는 느낌은 지금과는 달리 더욱 균형이 잡혀 장엄(莊嚴)함이 돋보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땅 속에 묻혀있지만 그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정문으로 들어선다고 상상하며 종묘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조선왕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종묘는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곳으로서의 위상에 걸맞게 음택(陰宅) 풍수설(風水說)에 따른 명당에 조성되어, 주위의 산세가 종묘 전체를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듯 포근한 느낌을 갖게 한다. 또한 제례의식을 행하는 곳으로서, 건물과 공간을 엄숙(嚴肅)하고 신성(神聖)한 곳으로 꾸미기 위해 건축물의 구성, 장식, 색채를 간결하고 단순하게 하여 종묘를 한층 더 경건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이끌고 있다. 사방 주변에는 울창한 숲을 조성하여 묘정(廟庭)에서만 공간이 하늘로 통하여 하늘이 내린 신령(神靈)스러운 기운을 가득 받도록 하였다.
사적 제125호인 종묘는 총 면적 56,500여 평으로 종로구 훈정동과 와룡동에 걸쳐 위치하며,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다.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는 정전(국보 제227호)과 영녕전(보물 제821호) 그리고 정전의 월대 아래 동편에는 정전에 모셔진 임금의 훌륭한 신하인 배향공신 83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신당(功臣堂), 서편에는 인간의 운명을 주관한다는 사명(司命) 신(神)을 포함하는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을 비롯하여 임금이 재계(齋戒)를 하던 재궁(齋宮 :어숙실), 제례를 위해 필요한 향, 축, 폐(香, 祝 :축문, 幣 :예물)를 보관 하고 제관(祭官)들이 대기하던 향대청(香大廳), 제사용품 및 음식을 준비하고 보관하던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하던 우물인 제정(祭井), 공인(工人)들이 대기하던 악공청(樂工廳), 임금이 머물며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 나라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망묘루(望廟樓) 등이 보존 되어있다.
오늘날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포함하는 일대를 모두 종묘라고 하나, 당초에는 지금의 정전만을 종묘라 하였으며, 정전이라는 명칭은 영녕전과 구별하기 위해 근대에 붙인 이름이다. 종묘는 태조(太祖)의 신위를 모신 곳이라 하여 태묘(太廟)라고도 하며, 조종(祖宗)과 자손이 길이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영녕전은 4대가 지난 왕과 왕비의 신위를 종묘[정전]로부터 옮겨 모시는 또 다른 사당이라 하여 "조묘" 또는 "별묘(別廟)"라고도 한다. 그런데 태조(太祖)를 비롯하여 선왕(先王) 중에서 큰 공적이 있는 왕의 신위를 불천위(不遷位)라 하여 4대가 지나도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종묘[정전]에 모시게 되었으며,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5대 이상의 원조(遠祖) 중에서 정전에 모셔지지 않은 왕과 추존 왕, 그리고 그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신위는 서상제도(西上制度)를 따라 서쪽을 상위(上位)로 하여 배열되어 있기에, 정전에는 서쪽으로부터 태조(太祖)의 신위를 비롯하여 불천위(不遷位)로 정해진 왕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 등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의 신위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은 중앙(中央) 4칸의 신실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 그리고 동, 서 협실(夾室)의 서쪽부터 정종(定宗)등 11명의 왕과 추존 왕 그리고 마지막 황태자 영왕(英王) 등 16명의 신위와 그들의 왕비 및 황태자비 18명의 신위를 포함하여 모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 예제(禮制)의 대상에는 오례(五禮) [길례(吉), 흉례(凶), 군례(軍), 빈례(賓), 가례(嘉)]가 있었고, 제사의례인 길례(吉禮)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뉘며, 종묘대제는 사직대제와함께 대사(大祀)에 속하여 임금이 친히 받들었던 가장 격식이 높은 의식이었다. 제례에는 임금이 직접 행하는 친행(親行)과 대신으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는 섭행(攝行)이 있었으며, 친행과 섭행은 제관의 명칭과 품계 또는 축문(祝文)의 내용이 달랐다. 종묘대제는 정시제(定時祭)인 경우 오향(五享)이라 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제례인 음력 1, 4, 7, 10월 상순의 제례와 납제(臘祭: 동지 후 3번 째 未日)를 더하여 다섯번 올렸고, 영녕전에는 봄, 가을 2회만 제례를 올렸다. 제례에는 정시제(定時祭)인 5향(五享) 외에도 왕실의 경사나 중요한 일, 혹은 나라에 변란이 일어 났을 때 등에 고(告)하는 고유제(告由祭), 그리고 계절 따라 햇과일과 햇곡식이 나오면 올리는 천신의식(薦新儀式) 등 많은 임시제(臨時祭)도 거행 되었다.
종묘대제는 역대 왕들의 음덕(蔭德)을 기리고 나아가 그들의 가호(加護)로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던 매우 중요하고도 엄숙한 의식으로 조선 창건 후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으나, 1908년부터는 납제(臘祭)가 폐지되었고, 1939년부터는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어 양력 3, 6, 9, 12월 상순으로 변경 시행되다가, 이마저 광복 후에 모두 폐지 되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화(香火)만 올렸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1969년부터는 매년 1회 다시 시행 되었고, 1971년 이후로는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의 종묘대제 봉행위원회 주관으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한 차례 봉행하고 있다.
정시제(定時祭)인 5향(五享)의 경우에 임금은 처음 술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이 되고, 왕세자는 두 번째 술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 영의정은 마지막 술을 올리는 종헌관(終獻官)이 되었으며, 이조, 예조, 호조판서 등과 30여종의 다양한 직책의 많은 신하들이 참석 하였다. 시대에 따라 모셔야 할 신위(神位)의 수는 늘어났고 참석하는제관의 수(數)도 달라졌다. 최근에 봉행하는 종묘대제에는 제관(祭官) 약320명, 악사(樂士) 약100여명, 그리고 일무원(佾舞員) 약70여명에 이르는 규모이다.
제향을 올리기 앞서 임금 및 제관(祭官)들은 모두 청정(淸淨)한 상태에서 신(神)을 맞이하기 위해 7일간 재계(齋戒)의 과정을 거치게 되며, 제향 하루 전 궁궐에서는 제향에 쓸 향(香)과 축(祝 :축문)을 임금이 헌관(獻官)에게 전달하는 전향축(傳香祝) 의식을 행한다. 제례에 참석하기 위해 임금은 제향 하루 전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가마를 타고 궁궐을 떠나 종묘에 도착하여 먼저 종묘에 인사드리는 망묘례(望廟禮)를 행한다. 이어 종묘 신실(神室)의 내외(內外)를 두루 살펴보는 봉심(奉審)을 한 후, 제례 때 사용하는 제기(祭器)의 청결상태를 확인하는 성기의식(省器儀式)에 참여한다. 오후에는 선왕(先王)들께 올릴 희생(犧牲 :소, 양, 돼지)의 비척(肥瘠 :살찜과 야윔)을 검사하는 성생의식(省牲儀式)을 행한다. 제향 전에 치러야 할 이러한 의식들을 마친 임금은 재계(齋戒)의 마지막 밤을 재궁(齋宮)에서 지내게 된다.
재계를 끝낸 임금은 날이 바뀌어 축시(丑時 :새벽1시)가 되면, 수 많은 촛불과 등잔유(燈盞油), 조촉(照燭) 그리고 횃불이 신실(神室)의 내외 및 묘정(廟庭)을 밝히는 가운데 제례를 올리게 된다. 제례는 유교예법에 맞추어신을 맞이하는 절차, 신이 즐기는 절차, 신이 베푸는 절차, 그리고 신을 보내는 절차로 구성되며, 나라의 중요한 의례인 만큼 절도있는 격식에 맞추어 진행된다.
먼저 종묘[정전]의 신문(神門)에서 축함(祝函)을 들고 신로(神路)를 따라 들어오는 봉축의례(奉祝儀禮)를 시작으로 제례는 시작된다. 제관 이하 참석자 모두가 취위(就位)라 하여 미리 정해진 자리에 가서 서게 되는데, 이 때 제관들은 신(神)을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의미로 손을 씻는 관세의식을 행한다. 신실에서는 신주(神主)를 받들어 신좌(神座)에 내어 모시는 출주(出主)의식을 행한다. 신주는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혼(魂)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겼으며, 밤 나무로 만들어 위는 둥글게 아래는 평평하게 하였다.
외부 준비가 다 되면 임금은 동문(東門)을 통해 묘정(廟庭)으로 들어와 신(神)을 맞이하는 절차인 영신례(迎神禮)로서 제관들과 4배(拜)를 하고, 이어 신(神)을 강림(降臨)케 하는 의식인 신관례를 제례악인 보태평(保太平)의 연주와 일무원(佾舞員)들의 보태평 춤과 함께 행하게 된다. 신관례는 하늘로부터 혼(魂)을 모시는 의미로 향을 세번 피우고 [三上香], 땅으로부터 백(魄)을 모시는 의미로 술[울창주]을 세 번에 나누어, 관지구(灌地口)를 통해 땅으로 붓는 관지(灌地)의식을 말한다. 이는 하늘에 있는 양신(陽神)과 땅에 있는 음신(陰神)이 합해져야 온전한 하나의 신(神)이라 여겼던 사고(思考)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이어서 신(神)에게 바치는 예물로서 흰 모시를 올리는 전폐례(奠幣禮)가 뒤를 잇는다. 마치면 계속해서 각 실(室)로 나아가 위의 의식과 꼭 같이 진행한다.
다음 의식인 천조례(薦俎禮)는 신(神)을 위해 음식을 올리는 절차로서, 희생을 올린다고 조상에게 고(告)하는 뜻으로 미리 잡은 소, 양, 돼지의 털과 피를 창자 사이에 있는 기름 및 간(肝)과 함께 신위 앞에 올리고, 그 중 간(肝)을 취하여 준소(尊所) 밖에 놓여있는 숯불 화로[爐炭]에서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뜻으로 태운다. 다음으로 소와 양의 장, 위, 폐(腸, 胃, 肺)와 돼지 살코기[豕膚]를 삶아 익힌 삼숙(三熟)을 올리는데, 제1실인 태조실(太祖室)에 삼숙을 올려놓을 조(俎 :제기)를천조관(薦俎官)이 받들고, 삼숙을 담은 생갑(牲匣 :제기)을 봉조관(奉俎官)이 받들어 신문(神門)으로 들어와 신위 앞에 전달한다. 이때 헌가(軒架)에서는 풍안지악(豊安之樂)이 연주되고 일무(佾舞)는 없다. 악(樂)이 그치면 서(黍 :수수), 직(稷 :피), 소(蕭 :쑥)에 기름을 발라 노탄(爐炭)에서 태운다. 이것은 땅에서 자라는 동식물을 봉헌(奉獻)하는 의식을 통해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다음은 신(神)이 즐기는 절차로서 상월대에 위치한 등가(登歌)에서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을 연주하고, 묘정(廟庭)에서는 일무원(佾舞員)들의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가 펼쳐지는 가운데, 임금이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예제(醴齊 :단 술)로서 첫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가 이어진다. 끝나면 잠시 악(樂)이 멈추고 축문(祝文)을 낭독하는 독축(讀祝)을 행하며 마치면 다시 악(樂)을 연주한다. 이렇게 각실(各室)로 나아가 술잔 올림을 꼭 같이 한다. 이어서 아헌관인 왕세자가 앙제(흰빛 술)를 올리는 아헌례(亞獻禮)가 행해지며, 이때 하월대에 위치하는 헌가(軒架)에서는 정대업지곡(定大業之曲)을 연주하고 일무원들은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추게 된다. 이어 종헌관(終獻官)인 영의정에 의해 청주[淸酒 :오래 익힌 술]가 올려지는 종헌례(終獻禮)가 정대업 곡의 연주와 정대업 춤이 펼쳐지면서 아헌례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편 종헌례 도중에 배향공신(配享功臣)과 칠사(七祀) 신에 대한 제사(祭祀)도 함께 행하여 진다.
종헌례가 끝나면 신(神)이 베푸는 절차인 음복례(飮福禮)가 이어지는데, 조상신(祖上神)이 흠향(歆饗)한 제1실의 술[福酒]과 음식을 후손인 임금이 들면서, 조상이 주는 복(福)을 받는 다는 의미에서 행하는 절차이다. 다음 절차인 철변두는 제기인 변과 두(豆) 각 1개씩을 조금 옆으로 옮기는 것으로 제례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치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의식으로서, 이 때 등가(登歌)에서는 옹안지악(雍安之樂)이 연주되고 일무(佾舞)는 추지 않는다.
마치면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신(神)을 보내는 의식인 송신례(送神禮)를 행하며, 흥안지악(興安之樂)의 연주와 함께 4배(拜)를 올림으로써, 임금은 정성을 다하여 행하였던 모든 예를 마치고 재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후 마지막 의식으로 축(祝)과 폐(幣)를 태우는 망료례(望燎禮)가 이어진다. 료대(燎臺)에서 타오르는 연기와 함께 하늘로 돌아가는 조상들의 혼(魂)을 아헌관이 망료위(望燎位)에서 바라보는 의식으로 제례는 모두 끝나게 된다. 최고의 격식과 정성으로 대접 받은 조상들의 혼백(魂魄)은 이제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 이 나라의 안녕(安寧)과 번영(繁榮)을 보살펴 주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절차는 당상(堂上)에 있는 집례(執禮)의 창홀(唱笏)에 의해 제관(祭官)들의 들고 남, 음악(音樂)과 일무(佾舞)의 시작과 그침 등의 모든 절차가 엄숙(嚴肅)하고도 지극한 정성(精誠)으로 진행된다. 종묘에서 제례를 봉행할 때의 흥미로운 제관(祭官)들의 움직임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편 예(禮)의 시초는 음식(飮食)에서 비롯되었다는 말과 같이 제상(祭床)에 차려지는 제기(祭器)와 음식은 국가제례라는 위상에 걸맞게 정성을 다해 마련 되는데, 제기 중에는 대나무로 만든 변(邊)과 나무로 만든 두(豆), 그리고 구리[조선후기에는 유기]로 만든 보와 궤 등이 있었다. 숙종(肅宗)년간에 편찬된 종묘의 제도 및 제례의식에 관한 제반 사항을 기록한 종묘의궤(宗廟儀軌)에는 매실(每室)의 제상(祭床)에 올려지는 제기만 해도 64기(器)로 나타나 있으며, 각 그릇마다에는 고풍스러운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음양오행과 같은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제기를 정성스레 마련하듯 음식 또한 정결하게 준비하였는데, 제수(祭需)에 먼지 한 톨만 들어가도 신(神)이 드시지 않는다 하여 최대한 깨끗하게 만들어진다. 제수로는 소, 돼지, 양 고기 등 3생(三牲)의 날 것과 익힌 고기 6종, 그리고 간을 한 것과 하지 않은 고기 국 6종, 포 2종, 젓갈 4종, 채소 절임 4종, 곡식 4종, 떡 6종, 과일 5종, 기타 5종 등이 각 실의 일정한 위치에 놓인다. 반면 요즈음의 제례는 벼[稻], 기장[梁], 포[脯], 호두[胡桃], 밤[栗], 도라지[枯便] 등으로 간략하게 진설(陳設)하고 있으며, 3생(三牲)은 의식절차로서 제1실에만 올리고 있다고 한다.
제주(祭酒)는 4종류의 술을 사용 하는데 영신(迎神)의 절차인 신관례 때는 기장[梁]과 향기가 있는 울금초(鬱金草)로 빚은 울창주, 초헌례 때는 단 술[甘酒]인 예제(醴齊), 아헌례 때는 흰빛 술[白酒]인 앙제, 종헌례 때는 빚은 지 오래되어 숙성이 잘된 술[過夏酒]인 청주(淸酒)를 각각 올렸다. 술과 함께 명수(明水), 현주(玄酒)라고 칭하는 물을 진설 하였는데, 이는 태고(太古)에 술이 없었던 때를 잊지않기 위해서이며 담아만 놓고 사용하지는 않았다. 한편 술과 물을 담는 준(尊 :술 단지)의 형태와 문양은 계절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사용하였다.
제복(祭服)에 대해 살펴보면, 임금은 위용과 권위를 상징하는 면류관(冕旒冠)과 구장복(九章服)으로 이루어진 구장면복(九章冕服)을 착용하였는데, 면류관은 구류(九旒)를 늘어뜨리고 매 류(旒) 마다 오채옥(五彩玉)을 꿰었다. 구장복은 겉은 흑색,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으로 상의[衣] 양 어깨에는 용(龍)을 수놓고, 등에는 산(山), 양쪽 소매에는 세가지 무늬 [화(火 :불꽃무늬),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술 그릇)]가 각 3개씩 들어가며, 하의[裳]에도 4가지 무늬 [초(藻 :수초), 분미(粉米 :쌀), 보(도끼), 불(亞자형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고종 임금이 황제위(皇帝位)에 오르면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日), 월(月), 성신(星辰)의 문양이 추가 되어 구장면복에서 십이장면복(十二章冕服)으로 바뀌었다. 9장복과는 달리 12장복의 의(衣)에는 6가지 무늬로 오른쪽 어깨에 일(日), 왼쪽어깨에 월(月), 등에 성신(星辰)과 산(山), 양(兩) 소매에 용(龍)과 화충(華蟲)의 문양을 사용하였고, 상(裳)에도 6가지 문양인 화(火), 종이(宗彛), 조(藻), 분미(粉米), 보, 불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십이장면복을 착용하며 여기에 폐슬(蔽膝 :무릎 가리개), 패옥(佩玉 :양 옆으로 늘이는 옥으로 역은 장식품), 대대(大帶 :허리에 매는 끈으로 후수에 붙여 사용), 수(綏 :후수 라고도 하며 실로 짠 장식으로 뒤로 늘어뜨림), 말(襪 :의례용 붉은 버선), 석(의례용 붉은 신), 규(圭 :의례 때 손에 드는 도구) 등을 착용한다.
한편 문무백관의 제복은 품계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제관(祭冠)을 쓰고 검은색 명주로 만든 상의를 입고 심신(心身)을 단정하게 함을 뜻하며 백색 비단으로 만든 둥근 원 밑에 사각형 모양의 방심곡령(方心曲領)을 걸고, 붉은 명주의 치마를 입고 폐슬(蔽膝)을 착용하고, 후수(後綬)를 등 뒤 허리에 매고, 양 허리에 패옥(佩玉)을 차며 홀(笏)을 들고, 흰 버선에 흑피화(黑皮靴)를 끈으로 동여 신는다.
일찍이 예(禮)의 완성은 악(樂)이라고 하였듯이 종묘제례는 종묘제례악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엄숙한 제례절차에 따라 연주되는 종묘제례악은 경건하고 장엄한 곡(曲)으로서의 그 음악성을 높이 평가 받고있다. 특히 보태평(保太平)악과 정대업(定大業)악은 세종(世宗)대왕이 연향(宴享)에 쓰도록 친히 지은 것을, 세조(世祖) 때 다시 다듬어 세조10년(1464)에 처음으로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된 이래 오늘날까지 전승 되고있는 또 하나의 귀중한 문화 유산으로 중요 무형 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차에 따른 종묘제례악의 연주(演奏)>
종묘제례악 연주에는 등가(登歌)와 헌가(軒架) 2개의 악대 편성으로 나누어 연주하되 함께 연주하지는 않는다. 등가(登歌)는 양(陽)을 상징하는 악대로 짝수의 음(音)인 음려(陰呂)의 음악을 연주하며, 헌가(軒架)는 음(陰)을 상징하는 악대로 홀수의 음(音)인 양률(陽律)의 음악을 연주하여 음양(陰陽)의 화합(和合)과 조화(調和)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등가(登歌)와 헌가(軒架)에 배치된 악기(樂器)들 또한 모두 음양(陰陽) 도형(圖形)의 관념과도 연관이 있다. 예를 들면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데 쓰이는 "축(木兄)"이라는 악기는 시작을 의미하는 동쪽으로 보아 청색[靑]으로 칠해져 동쪽에 자리하며, 반면에 음악의 끝에 쓰이는 "어"라는 악기는 호랑이 모양으로 서쪽을 상징하는 흰색[白]으로 칠해져서 축(木兄)의 반대 방향인 서쪽에 위치한다.
64명의 춤에 의해 펼쳐지는 팔일무(八佾舞)와 역대 제왕의 문덕(文德)을 찬양하는 보태평 11곡과 무공(武功)을 기리는 정대업 11곡의 악장(樂章)과 함께 어우러지는 종묘제례악은 아악기(牙樂器), 당악기(唐樂器), 향악기(鄕樂器)가 고루 편성되어, 상월대에 배치된 등가악대 37명[협율랑 1, 도창 6, 연주 30]과, 하월대에 배치된 헌가악대 72명[도창 6, 연주 66]에 의해 연주되며, 그 뛰어난 역사적, 예술적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한국 전통 음악의 장엄함과 경건함의 특징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
종묘제례에서 추는 춤인 일무(佾舞)의 기원은 세조(世祖) 때 종묘에서 사용하기 시작 한데서 비롯되며, 본래 36명[6列6行]의 무원(舞員)들이 열을 지어 육일무(六佾舞)를 추었는데, 고종이 황제위(皇帝位)에 오른 이후부터는 64명[8列8行]이 추는 팔일무(八佾舞)를 춘다. 문인(文人)의 품위가 풍기는 춤인 문무(文舞)를 추는 무인(舞人)은 왼손에 세 개의 구멍이 뚫린 관악기 같은 약을 들고, 오른손엔 꿩 깃털로 긴 막대를 장식한 적(翟)을 들고, 영신례, 전폐례, 초헌례 때 보태평 악(樂)에 맞추어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를 춘다.
무인(武人)적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는 무무(武舞)를 추는 무인(舞人)은 원래 처음 두 줄은 나무칼, 다음 두 줄은 나무 창, 마지막 두 줄은 활과 화살을 들고 춤을 추었으며, 각종 깃발 등의 의물(儀物)을 든 의장대(儀仗隊)가 일무원의 춤과 박자에 맞추어 발을 구름으로써 그 장엄함을 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앞의 4줄은 나무로 만든 칼을, 뒤의 4줄은 나무로 만든 창을 들고, 아헌례와 종헌례 때 정대업의 악(樂)에 맞추어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추며, 의물을 든 의장대는 배열 하지 않는다.
이렇게 종묘제례는 의례(儀禮)와 악(樂:기악), 가(歌:노래), 무(舞:춤)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그것을 보는 사람도 기뻐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조상신도 기뻐하고, 나아가 하늘까지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조상께 효(孝)와 예(禮)를 다함으로써, 국가의 안녕과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기원하던 유교 최고의 행사였다. 근엄한 제의(祭儀)에서부터, 제관(祭官), 제수(祭需), 제기(祭器), 제복(祭服) 및 제례악(祭禮樂), 일무(佾舞), 악기(樂器)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유교적 제례의 전통을 보여 주는 행사로서, 중요 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 되어있으며, 유네스코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을 "인류 구전(口傳) 및 무형 문화유산"으로 선정한 바 있다.
이처럼 600여년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역사와 선조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생동감(生動感)이 넘치는 역사의 현장인 종묘(宗廟)는, 우리만이 아닌 세계인 모두가 보호해야 할 인류의 문화유산(文化遺産)으로서 보호, 유지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우리 고유의 자랑스러운 제례문화(祭禮文化)를 보존(保存)하고, 후손들에게 전승(傳承)해야 할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들의 책임은 실로 무한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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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관련 등록문화재 현황
종묘(宗廟) : 사적 제125호 정전(正殿) : 국보 제227호 영녕전(永寧殿) : 보물 제821호 종묘제례(宗廟祭禮) :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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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 목록 등재
종묘(宗廟) :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 (1995년) 종묘제례(宗廟祭禮)와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 인류 구전(口傳) 및 무형문화유산(2001년) .
주(註)
제례의식의 절차는 가능한 한 조선초 성종년간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에 충실하도록 하였기에 오늘날 재현되는 의식의 절차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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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국조오례의 / 법제처 2) 종묘의궤 / 숙종년간 3) 서울민속대관(풍수편) / 서울시 4) 무형문화재 홍보 영상물 / 서울시 5) 종묘대제 / 대동종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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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대제 행사 시간표: (2004. 5. 2. 일요일)
1) 10:00~12:30 -------------------- 종묘대제 (영녕전 제향) 2) 12:30(경복궁 출발)~14:00(종묘 도착) --------- 어가 행렬 3) 14:00~16:30---------------------- 종묘대제 (정전 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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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동건(종묘지킴이) / 사진. 강임산(한국의재발견 사무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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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사진 고맙습니다. 저는 어가 행렬을 보진못했는데 선생님 사진을 통해서 몇가지 잘못 된것이 있군요. 어가 행렬이 신로를 지나고 있고 세자가 어로를 지나고 있군요. 대동종약원 에 알려야 할것 같습니다. 이렇케 바로 잡아가는 것이 우리 지킴이 역활이 아닐까 합니다. 선생님 화이팅*^^*
역시 지킴이 답습니다. 어가 가 종묘에 당도한 모습 부분 부분별로 상세히 참 보기 좋습니다. 이삼일 뒤 (눈이 덜 피곤할 때 ) 선생님과 겹치지 않는 모습 조금 더 올리겠습니다. 권샘 말대로 공식 찍사 하셔야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게시판에 선생님처럼 사진 쭉 엮어 올리는 방법좀 가르쳐 주세용.^^
김윤복선생님 반갑습니다, 아직은 어느 분이 어느 분이신지 얼굴을 몰라서 글로만 인사를 드립니다. 선생님의 지적대로 그렇군요, 사진으로 보니 우가 바로 나옵니다. 좋은 말씀 또 한 수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magicH님 반갑습니다, 사진이 좀 그렇습니다, 그러십시오, 선생님의 사진이 저보다 훨씬 좋습니다. 찍사로서는 자격이 부족합니다^* 게시판에 직접 사진을 올리려면요 자료실에 올렸다가 속성을 복사해서 앞에 소스를 붙이고 간격을 띠어야 합니다, 제 글의 소스보기를 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 블러그를 가지고 있어서 그곳에 올린 사진들입니다, 자료가 무제한 올라갑니다, 자료실이 차서 지울 필요도 없구요, 선생님께서도 하나 만드세요, 그리고 비공개로 전환하시고 사진실로 쓰시면 그만입니다, 나중에 만나면 자세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전화를 주세요. 메일을 주시던지요. 감사합니다.
우와! 감사합니다. 예전에 모 선배님께서 종묘에 나오니 이것 저것 생각지 않은 것도 배울 기회가 더러 있어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귀한 가르침도 주시는군요. 말씀대로 시도 해보고 다시 질문드리겠습니다.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