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은 수필 ＜꽃이 피아나야 봄이디＞

[김영훈]

꽃이 피어나야 봄이다

황 지은

이른 봄, 3월 초순 바람이 아직 찬데 구례 화엄사 홍매화가 핀 사진을 핸드폰에 받았다. 지난겨울 매서운 추위가 없어 올해 봄은 개화 시기가 빠른 듯하다. 봄의 전령사 꽃 사진을 보니 잔잔한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구례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화계장터 지나면 하동이고 내가 태어난 곳이 바로 그곳이다. 지리산자락에 섬진강이 흐르니 경치가 좋은데다 강변 국도에 수령이 오래된 벚나무가 도열해있어 봄에 꽃이 피면 장관이다. 아름드리 벚나무는 하동까지 벚꽃 터널을 이룬다. 지금쯤 나무들이 수액을 올리느라 분주할 것 같다. 홍매화, 산수유가 꽃피우고, 그 매화와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 벚꽃이 차례로 꽃망울을 연다. 매화마을에 성대한 잔치가 열리고 쌍계사 십리벚꽃 길이 화려해지면서 봄은 꽃을 먼저 피우는 남쪽에서 부터 온다.

해마다 봄이 오면 그 곳 도로는 자동차가 정체되어 기차 칸이 연결된 듯 이어져 서있다. 인파가 넘쳐 사진 찍는 사람들이 함께 북적여도 사람들 표정은 너나없이 밝다. 겨울 내 움추렸던 기분을 자유로이 풀며 즐기는 것이다. 화계 장터도 사람들이 많다. 그 곳에는 가수 <조영남> 동상이 환하게 웃고 있다. 생전에 어머니가 그 곁에 앉으시기에 사진을 찍어 드렸었다. 그 때 사진을 꺼내어 보니 어머니가 새삼 그리워 보고 싶다. 비워진 고향집도 궁금하고 자식 대하듯이 귀하게 가꾸시던 꽃 마당도 생각난다. 마음이 나래를 펼치고 그 곳으로 날았다.

고향 생각, 꽃생각에 취해 있었었던 그 다음 날에, 남동생이 하동 이모부님의 부고를 받았다며 전해왔다. 계셨던 요양병원에 코로나 확진자가 17명이나 나와서 자식들도 못보고 운명하셨는데 장례식은 치룰 수 있다고 하였다. 남동생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나는 급히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모님은 자식이 여럿이라서인 조화 화환이 유독 많았다. 내 동생이 보낸 화환은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에 비해 문상객은 없이 상주들만 있었다. 코로나 염려로 부산에 사시는 이모님도 두 분이 다 안 오셨다. 하동 이모님은 못 본 사이에 치매가 걸려 대화가 온전히 안 된다. 어머니 닮은 이모님을 만나면 그리움이 해소될 것 같았는데 오히려 허전했다.

어머니 사셨던 집에 가니 잡초가 무성하다. 집을 관리하시는 옆집 아저씨가 몸이 불편하였다. 어머니 생전은 우리 부부와 남동생이 각각 자주 방문하였는데 이제 안계시니 장거리 운전하고 다니기도 어렵다. 남동생은 바빠서 여력이 미치지 못한다. 집은 구조가 편리하고 마당과 텃밭이 따로 있어 마음잡고 살면 너끈히 잘 지낼 수 있는데 관리가 안 되니 안타깝다. 고향이라고는 하나 마을에 말벗할 또래 한명이 없고 병원도 멀다. 밤에는 창문에 어른거리는 나무그림자도 낯설었다. 어머니 생전에 마지막 2년은 요양원에서 지내셨는데 가끔 맑은 정신이 드실 때는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 좋으니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하셨던 말씀이 전혀 빈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골집은 내마음속에 자리를 잡아 문득문득 내려가서 살고 싶기도 하다. 내가 4살 되던 해 이사해서 도시에서만 자랐어도 그런데, 아버지께서 노후에 고향을 못 잊어 찾으신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집터를 새로 마련하여 집을 짓고, 바로 뒷동산에 양지바른 곳은 산소자리를 조성했다. 감, 밤, 매실 등 여러 묘목을 심고 후손이 성묘 와서 열매를 수확하며 즐겁게 다녀가기를 바라셨다. 나이가 드셨음을 무시하고 의욕이 앞서 무리하여 건강을 잃으신 것 같다. 고향 가신지 몇 해만에 갑자기 세상을 뜨시었다. 아버지를 믿고 따르셨던 어머니는 혼자되어서 고향 집을 지키고 사셨다. 봄이 오면 마당에 피어나는 꽃이 너무나 예쁘다며 좋아 하셨고, 우리가 자주 왕래를 하였으나 외로움이 치매를 불렀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으니 아직도 어머니에게 죄송하다. 이모부님께 문상을 하고 다시 고향집을 찾은 고향은 예나 다름없이 또 홍매화랑 노오란 산수요 꽃이 여전한데 발걸음은 이렇게 무거워진다. 이모부님의 명복을 빌면서 그리고 친정어머님을 그리워하면서 그 꽃들을 바라보노라니 그렇 수밖에 없나 보다. 화개장터를 지나 구례로 향하는 마음은 더욱 착잡하다.

나는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어본다. 세월이 빠른데 딱히 하는 일 없이 어머님이 세상을 뜨신 것과하는 상관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다. 법정 스님의 저서 <아름다운 마무리> 에서 본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야 봄이 온다.’ 는 글귀가 떠오른다. 문득, 인생의 저녁노을 장에서도 삶이 꽃을 피워서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 와서 저 홀로 외롭게 피는 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함께 바라보는 꽃을 다시 피울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욱 마음이 따뜻할 것만 같았다. 그리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나는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내가 차를 타자 동생이 모는 승용차는 이내 그 꽃길을 지나면서 대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꽃에 갇혀 있다. 어머니와 함께 그 꽃 속에서 살았던 그 옛날의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남동생이 모는 승용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하고 있다. (2022.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