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
신동선
건조주의보로 걱정이 많던 3월을 지나, 눈길 닿는 곳마다 파릇파릇 봄기운 물씬 풍기는 4월이다. 어느 지역은 건조한 날씨와 강풍으로 산불 진화에 어려움이 많았다는데 오늘의 단비로 잔불까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귀한 단비가 내리는 오늘 저녁은 빗소리가 반가워 늦게까지 큰 창을 열어 놓았다. 향기롭고 빛깔 고운 꽃차 한 잔 들고 식탁에 앉아 상념에 젖는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내 주변엔 좋은 일, 슬픈 일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슬픈 일들은 내리는 비에 흘려보내고, 좋은 일들만 떠올리면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해본다. 아직은 특별히 아픈 곳이 없다. 아이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무탈하게 제 몫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니 대책은 없으면서 ‘지금도 좋고, 앞으로의 노년도 별일 없이 평범하게 살아갈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있다.
하나뿐인 남동생은 이런 대책 없는 누나를 염려하는 마음에 수시로 노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동생이 늘 하던 말과 같이 여러 유튜브 채널에서 경제 위기가 더 크게 올 것이고, 노후 준비가 꼭 필요하다고 설득력 있게 알려주는 것을 종종 보았다.
얼마 전까지 베짱이처럼 취미 생활과 이런저런 봉사를 하며 짧은 계약직 일자리를 전전하던 내겐 노후 준비를 하라는 조언은 입에 쓴 약처럼 씁쓸하지만,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 것을 안다. 이대로는 노년이 위험하다는 것도 새삼 느낀다.
한동안 시골 친정 빈집으로 들어가서 귀촌 생활을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지난 연말에 드디어 정규직 취업을 했다.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곳에 취업이 확정되어 설레는 봄을 맞이하였다.
얼마 전 동생에게 월급 받은 기념으로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게 만나자는 전화를 했다. 동생은 ‘누나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으나 적금을 단단히 넣는 것에 그 돈까지 보태어 사용하면 더 기쁘겠다.’라고 한다. 진심을 담아 다시 한번 노후 자금 모으기를 강조한다. 낙천적인 마음만 있을 뿐, 금전적인 노후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나에겐 현실적이나 마음 아픈 말이다,
후다닥 일어섰다. 동생의 말이 되새김질 되어 적금을 들리라 단단히 결심하고, 모처럼 월 지출을 확인했다. 그동안은 가계부를 쓸 것도 없이 한달 한달 빠듯하게 수입과 지출이 엇비슷하게 떨어졌다. 적금은 못 들어도 보험은 유지하고 있고, 마이너스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이번 기회에 매월 자동이체 되는 정기 지출을 제외한 남는 금액 대부분을 최대한 적금에 가입하려니 벌써 숨 막힐 듯 빠듯한 긴축 생활이 옥죄듯 느껴진다. 그렇지만 견뎌내야 한다. 그럴 것이다.
5년, 10년 만기의 적금 두 구좌를 인터넷으로 가입하고 보니 비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여윳돈이 너무 없는 게 아닌지 걱정이 밀려온다. ‘적당한 소비는 기분 전환도 되고, 나라 경제도 돌아가게 하는 건데…’. 앞에서는 말 못 하고 구시렁대는 혼잣말이 텔레파시로 동생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늦은 밤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큰딸에게 카톡을 했다. 뒤늦게 준비하는 나의 어설픈 노후 대비 적금 들기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제부터라도 경제 흐름이나 금융상품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적어 보냈다.
뜻밖에 큰딸이 첫 번째 적금 들 돈을 곧바로 송금해 주었다.
‘엄마, 너무 쪼들려 살지 말고요, 그래도 딸 키워놨는데 가끔 이런 이벤트는 있어야 키운 보람이 있지요.’라는 답장이 왔다. 웃다가 울었다. 목이 멘다. 낯선 땅에서 적응하고 사느라 더 고생하고 있을 텐데…. 큰아이가 좋아하는 먹거리라도 택배로 보내야겠다.
심란하던 마음이 큰딸의 마음 씀씀이로 생기 돋는 봄날이 된다. “그런데 얘들아! 엄마의 가장 큰 적금은 너희들이라는 것, 알고 있니?” 고마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