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위대한 선조이자 세계적인 해양인 장보고는 세계 해양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바스코 다가마의 희망봉 발견보다 무려 650여 년이나 앞선 시기에 불모지였던 바다로 진출하여 동북아시아 해상권과 무역권을 제패하였으며 멀리 아라비아까지 세력을 떨쳐 오늘날 세계인들로부터 '해양산업제국의 무역왕'으로 추앙 받고 있습니다.
출생과 당나라 생활
장보고의 출생시기와 출생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통일신라 말기인 서기 790년경 전라남도 완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사기에 '해도인(海島人)'이라고 기록된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장보고(張保皐)는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와 창던지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불리었고 훗날 일본에서는 재신(財神)을 의미하는 장보고(張寶高)로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장보고는 헌덕왕 12년인 서기 810년경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지금의 중국 강소성 서주 지방의 절도사 휘하의 주력부대인 무령군에 입대하여 영특한 성품과 뛰어난 무예로 서기 819년 이민족으로서는 예외적으로 30세 초반의 나이에 군사 5천명을 거느릴 수 있는 오늘날의 연대장 계급에 해당하는 '무령군중소장'직까지 올라 군인으로서 출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장보고는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지금의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에 위치한 적산포에 '법화원'을 건립하여 유민들과 유학승들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등 당나라에서 자치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던 신라방, 신라촌의 총수로 성장하였습니다.
청해진의 건설과 번영
당나라에서 무령군중소장으로 재직시 신라인들이 당나라 해적선에 의해 납치되어 노예로 인신매매 되는 상황을 목격하고 격분한 후 신라인을 구하고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서기 828년 무령군중소장직을 버리고 귀국하여 신라 제42대왕인 흥덕왕을 배알하고 서남해안의 실태를 보고한 후 청해진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으로 소탕할 것을 건의하자 국왕은 군사 1만명을 주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이후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펼쳐 해적, 노예상을 소탕하고 각지에 난립해 있던 군소 해상집단을 평정한 후 중국과 일본내의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신라·당·일본의 삼각해상무역의 실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자위적인 군사력 마저 보유하여 동북아시아의 해상교통권과 무역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견당 매물사' 또는 '회역사' 등의 명칭으로 당과 일본에 교관선을 파견하거나 멀리 아리비아 상인들과의 무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명실상부한 해상무역왕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중앙정치의 관여
제42대 흥덕왕 사후 신라 조정은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전개되었으며 막강한 군사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장보고의 도움으로 제45대 신무왕에 등극한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감의군사'라는 벼슬과 식읍 2천호를 하사하고 장보고의 딸과 신무왕의 아들 김경응간의 혼인을 약속하였습니다. 신무왕이 등극 4개월 만에 사망하고 아들 김경응이 서기 839년 8월 제46대 문성왕으로 등극하자 문성왕은 부왕의 약속에 따라 장보고의 딸을 왕비(차비)로 간택하려 하였으나 장보고의 세력강화를 우려한 중앙 귀족들이 장보고는 '해도인'이고 장보고의 딸은 천민이라는 구실로 반대하여 실패하였습니다.
장보고의 사망과 해상세력의 몰락
막강한 군사력과 부를 보유한 장보고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 귀족들은 문성왕의 차비 간택문제를 계기로 장보고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장보고의 부하였으나 장보고를 시기하고 중앙정치무대에서의 신분상의 지위향상을 노리고 있던 염장을 보내 문성왕 8년인 서기 846년 장보고를 암살하였습니다. 장보고 사후 청해진은 염장에 의해 한동안 관장되다가 서기 851년 2월에 완전 해체되었으며 장보고의 부하들은 중국과 일본으로 도피하고 청해진 주민들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인 '벽골제'로 강제 이주되면서 찬란했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신라의 국운도 함께 기울게 되었습니다. 이후 새로운 통일국가를 이룩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해양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장보고의 찬란한 유산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으나 스스로 해양세력임을 부정하고 해양활동을 천대시 하여 우리나라의 해양력은 국내 조운용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장보고 시대의 조선술과 항해술 및 해양경영 능력은 후손들에 의해 맥을 유지하여 조선시대 임진왜란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이순신 장군이 남긴 '서남해안의 세력이 없었던 들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문헌상의 기록
장보고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번천문집(樊川文集)'의 장보고·정년전이며 이는 중국 정사의 하나인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과 신라전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대표적인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 등에 장보고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 있으며 가장 권위 있고 자세히 언급된 역사서는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나라에서 9년 6개월 동안 불교수업을 한 일본의 대표적인 구법승 엔닌(円仁)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 신당서의 내용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기록되어 있고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에도 나타나 있으나 대부분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업적에 대한 내용은 없고 국내의 정치사항만 언급되어 있어 부정적 이미지만 강조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중국 기록이 없었으면 장보고는 영원히 역사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장보고에 대한 우리나라 역사기록의 현주소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평가
번천문집에서 두목은 서기 775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 토벌에서 사적인 원한을 버리고 협력하여 공적을 세운 곽자의와 이광필에 대해서 서술하고 서로 불편한 관계로 지내다가 무령군 해체 후 뒤늦게 청해진으로 돌아온 정년을 기쁘게 맞이한 장보고를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에 필적하는 현자로 평가하였으며, 중국 신당서에는 '진나라에는 기해가 있고 당나라에는 분양과 보고가 있는데 어찌 동이에 인재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장보고의 명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엔닌은 그의 저서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장보고를 한없이 존경하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있으며 장보고가 건립한 법화원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묘사에서 장보고를 평등주의자요 민주적 의식을 가진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과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장보고를 반란자 또는 반란기도자로 평가하고 있으나 이는 신라의 정통을 계승한 고려 조정의 시각에서 바라본 장보고의 정치활동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성리학을 신봉하던 조선시대 사관들로부터 외면 당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을 높이 평가하여 장보고의 인물됨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은 장보고에 대해 '전 신라인의 바다에 관한 노력을 집대성하여 거기에 일층의 광휘를 더해 놓은 자가 바다의 위인 장보고였다' 라고 기술하고 장보고를 '신라 해운의 영광을 표상하는 천고의 위인'으로 평가하였습니다.
1935년 진단학보에 장보고에 대한 최초의 논문 '고대의 무역형태와 라말의 해상발전에 취하여'를 발표한 전 서울대학교 김상기 교수는 장보고를 '해상왕국의 건설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미국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는 1955년 그의 논문인 '엔닌의 당여행기'에서 장보고의 업적과 위대성을 자세히 기록하고 '해양산업제국의 무역왕'으로 평가하여 장보고가 세계적인 인물로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역사학자 이기백 박사는 장보고를 '해상의 왕자'로, 이기동 박사는 '해상왕국의 건설자'로 규정하면서 장보고의 해상왕국 건설을 '한국사를 통해서 볼때 하나의 절정과 같은 느낌이 드는 사건'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최근의 평가를 보면 미국 펜실바니아주 어시누스대학의 휴 클락 교수는 1992년 11월 전남 완도에서 개최된 제1회 장보고 대사 해양경영사 국제 심포지엄에서 군사력과 상권을 바탕으로 청해진을 전략적 기지로 하여 일본·중국을 잊는 네트워크를 구축한 장보고의 전략적 자질은 가히 천재적이라고 극찬하였으며, 중앙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김성훈 현 농림부장관은 장보고를 현대적 의미의 국제해양인으로 평가하면서 '한국 최초의 군산복합종합상사의 건설자'로 규정하였고, 우리나라 장보고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숭실대학교 명예교수 김문경 박사는 '세계 최초의 해양질서 확립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상왕 장보고의 업적과 교훈
오늘날 세계는 총성 없는 전쟁으로 비유되는 무한 무역경쟁 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며 해양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증대되고 있습니다. 육상자원의 고갈 등 인류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해양개척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이유로 많은 미래학자들은 21세기가 해양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습니다. 해양의 시대이자 무역·교역의 시대인 21세기를 맞이하여 1천 2백여년전 세계 해상무역권을 제패하여 찬란한 해상왕국을 건설한 해상왕 장보고의 업적과 해양개척 정신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첫째, 지정학적 여건을 극복하고 진취적인 해양개척 정신으로 불모지였던 바다로 진출하여 해적과 노예상을 소탕하고 동북아시아 해상권과 무역권을 제패하여 해상왕국을 건설한 점입니다.
둘째, 해외동포를 규합하여 당나라 및 일본에 신라촌, 신라방 등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여 치외법권적 특권 및 행정상 자치권 확보로 국제무역의 기반을 조성한 점입니다.
셋째, 당, 일본, 페르시아 상인들로부터 유입된 문물의 판로개척을 위한 봇짐장사법 개발, 5일장, 7일장과 같은 재래시장의 형성 등 시장경제와 유통원리를 개발한 점입니다.
넷째, 해상삼각무역을 통한 현대적 의미의 다국적기업의 효시를 이루었으며 불교문화, 도자기문화의 수입으로 국민 생활양식의 변화에 기여한 점입니다.
다섯째, 신라인들로부터 계승 발전된 우수한 조선술 및 항해술로 해상무역권을 장악하여 고려 창건의 토대와 이순신 장군의 해전승리의 초석을 마련한 점입니다.
이 밖에도 해상왕 장보고의 위대한 업적으로 범선시대에 해상무역을 위해 개척한 노철산항로, 황해횡단항로, 동중국사단항로의 3대 항로를 들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선박들의 항해에 이들 항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첫째, 노철산(老鐵山)항로는 3국 시대에 확보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항로로써 발해의 해안선을 따라 산동반도의 북부에 이르는 가장 안전한 항로였습니다.
둘째, 황해횡단(黃海橫斷)항로는 한반도와 당나라의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가장 가까운 항로로 당시 가장 많이 이용한 항로였습니다.
셋째, 동중국사단(東中國斜斷)항로는 일본과 한반도 남부 및 중국 동남부를 연결하는 경제적인 항로로써 장보고 시대에 개척하여 이슬람, 페르시아 상인들과 교역에 활용한 항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