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대구에 사는 권모씨는 알고 지내던 김모씨가 200만원을 빌려달라고 하자 당좌수표를 끊어줬다. 김씨는 권씨 인감을 위조해 1700만원짜리 수표로 만들어 써버렸다. 권씨는 김씨를 고소했지만 경찰은 오히려 권씨를 무고죄로 구속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수표에 찍힌 인감이 진짜라고 감정한 것이다. 권씨는 6개월 뒤 풀려나 재감정 끝에 겨우 위조를 밝혀냈다. 국과수도 속을 만큼 위조가 감쪽같아 생긴 일이다. 지난 3년 국과수가 의뢰받은 인감 감정이 2000건이 넘었다.
▶2004년 서울 구로의 동사무소 직원이 가짜 신분증에 속아 김모씨의 인감증명서를 발급해줬다. 사기꾼은 이 증명서로 3억원을 대출받아 달아났고 은행은 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하급심은 동사무소 직원의 책임이 없다고 봤다. 한 해 100건씩 인감이 부정 발급되고 공무원들이 책임을 지게 되자 2003년 정부가 공무원의 확인 의무를 덜어주도록 법을 바꿨던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작년 7월 "여전히 관청에 책임이 있다"며 원심을 깼다. 법적 안정성을 중시한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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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감은 도장 인(印)과 거울 감(鑑)을 합친 말이다. 1871년 일본은 미리 관청 장부에 거래에 쓸 도장을 찍어두고 나중에 진짜인지 비교하도록 했다. 일제에 의해 대만은 1906년부터, 우리는 1914년부터 인감을 쓴다. 국민의 66.5%, 3289만명의 인감이 등록돼 있고 작년에만 4846만통의 인감증명이 발급됐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선 공증(公證)제도가 발달했다.
▶정부가 인감증명을 요구하는 사무를 올해 안에 60% 줄이고 5년 안에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내년부터 전자위임장 제도를 도입하고 인감증명을 대신할 '본인 서명 사실확인서'를 발급하는 등 다양한 대체수단을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서명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인감증명 제도는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컸다. 국민들은 인감증명을 발급받느라 관청에 찾아가야 했고 발급 수수료도 내야 했다. 그 비용이 한 해 2500억원에 이른다. 전국의 3850개 읍·면·동 사무소의 발급 시스템 유지와 인건비에 연간 2000억원이 든다고 한다. 일본도 벌써 전자인증제도로 전환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100년 전 제도에 머물러 있다. 2006년에도 인감 폐지가 논의되다 국민들이 불안해한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거래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이제 이 제도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