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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강의
말씀의 봉사자로서 살아야 할 ‘복음의 기쁨’
교 육 부
1. 들어가며
2014년 8월, 한국교회에 큰 기쁨이 찾아왔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한국에 다녀가신 것이다. 방한 기간 동안 교황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내어 주고 다니셨다. 즉위 이후의 여러 행보와 자신의 권고 말씀인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정한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낮은 자’의 모습을 한국교회 및 한국사회에 보여주고 가신 것이다. 그러한 교황의 모습을 통해 많은 이들이 위로와 연민과 희망을 받을 수 있었고, 이에 교황님의 방한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큰 기쁨이 되었다. 교황님은 바티칸으로 떠나셨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주어졌던 기쁨, 위로, 연민, 희망을 이어가는 것은 이제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이어가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수천 년 동안 전해지고 이어졌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관련하여 우리는 행사 자체보다는 교황께서 주셨던 메시지, 곧 교황님이 전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자체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방한 첫날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공직자들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과 한국주교단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에서 지속적으로 ‘노인’과 ‘젊은이’를 언급하셨다. 교황은 두 연설에서 ‘노인’과 ‘젊은이’를 ‘기억’과 ‘희망’으로 표현하며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했다. 또한, 교황 방한 중 가장 큰 행사였던 시복식과 아시아 청년 대회를 통해서 교황께서 한국교회에 주고 싶은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알 수 있다. 124위 복자들에 대한 시복식을 통해 순교한 옛 선조들의 사는 법을 ‘기억’하고, 아시아 청년 대회에서 젊은이들을 만나 그들의 열망을 보며 그들에게 어떠한 세상과 사회를 물려줘야 할지 성찰하는 ‘희망’이라는 선물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라고 이야기 해 주셨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은총을 고이 간직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기억으로부터 영적인 자산을 꺼내어, 앞을 내다보는 지혜와 결단으로 미래의 희망과 약속과 도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연설,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2014. 8. 14.)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을 넘어서, 여러분은 또한 희망의 지킴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복음이 가져다 주는 희망, 순교자들을 감격시킨 그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도 어떤 다른 것, 어떤 더 큰 것, 어떤 진정하고 충만한 것을 찾고 있는 세상에 이 희망을 선포하여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연설,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2014. 8. 14.)
이러한 교황님의 당부처럼 청년 신앙인인 우리들 역시 ‘기억의 지킴이’와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억’과 ‘희망’을 지켜나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신앙의 근본인 복음을 통해 끊임없이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하에서는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의 말씀의 봉사자로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복음의 기쁨’을 간직하고 ‘기억의 지킴이’와 ’희망의 지킴이’로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2. 개인의 내면에서 느끼는 복음의 기쁨
2013년 11월 26일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하여’ 성직자, 봉헌 생활자와 평신도에게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이 발표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공식 문헌인 이 권고는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복음의 기쁨'은 어떤 의미일까?
우선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복음’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즉,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나셔서 수난을 받으시고, 부활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또한 전례 사전에 따르면 ‘기쁨’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최종 선이며 기쁨의 원천이신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일치를 고대하거나 소유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통해 구원받을 것을 약속 받았고, 그 약속을 믿기 때문에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기뻐하길 원하시고, 우리가 기뻐할 때 하느님도 기뻐하신다. 성경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라고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스바 3,17)라고 하였다. 말씀에서도 보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쁨에 겨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하느님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 역시"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7)라며 기뻐하였고, 세례자 요한도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라며 기뻐하였다. 사도행전에서도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큰 기쁨이 넘쳤고"(사도 8,8)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 차"(사도 13,52) 있었다. 이렇듯 성경의 다양한 인물들 역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며 기쁨을 느꼈으며, 우리 역시 복음을 통해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이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기쁨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복음을 통해 기쁨을 느끼기 어려울 때도 많다. 복음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어떤 의미인지 알기 어려워서, 신앙인이지만 신앙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청년들이 신앙과 실제 삶을 분리하여 ‘신앙 따로 삶 따로’ 여기기 때문에 신앙의 기쁨을 자기 삶 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가톨릭 신앙은 단순히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더욱 빛을 발한다. '복음' 역시 단순히 나의 삶이 구원되었다는 믿음으로 끝나지 않고 개개인의 삶에 반영되고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 과정이 바로 '복음화' 이다.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복음화’란 복음선포 행위 뿐 아니라 교회의 사명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흔히 생각하는 선교와 사목의 의미는 물론이고 복음의 힘으로 모든 사람들을 내적으로 쇄신시켜 복음적 생활로 인도하는 활동까지 폭넓게 의미한다. 복음화는 말씀의 선포, 생활의 증거, 성사생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을 기본으로 하는 신앙인의 모든 활동이 복음화의 과정이고, 우리는 단지 복음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녹여 냄으로써 새로운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복음화 단계로 들어서도록 격려하시고,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자고 초대하셨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이기에 이미 그 자체로 기쁨을 내포하고 있지만, 교황님의 권고 제목에서 ‘복음의 기쁨’이라고 ‘기쁨’을 반복한 것은 우리를 복음 그 자체의 기쁨을 상기하는 동시에 복음화의 기쁨 역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이끈다.
2.1. 하느님과 대화를 통한 개인의 기쁨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복음화를 통해 새로운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복음화의 의미를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행위라 인식하기 쉽지만, 사실 복음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스스로의 복음화이다. 곧 우리 스스로가 복음 그 자체의 기쁨을 내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복음화의 첫 번째 직접적 원인이 된다고 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을 추구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추구하며, 그분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복음의 기쁨」, 267항).
복음을 통해 느끼는 내적인 기쁨은 하느님과의 대화 안에서 얻을 수 있으며, 문자 그대로의 기쁜 감정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서 오는 어떤 울림과 감동도 포함한다. 이 울림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미사 중 어떤 순간에 느끼는 감동이나 성체조배, 기도의 시간에서 느끼는 감정들도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2005)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인 각자가 느끼는 내적인 기쁨이 무엇인지, 그 기쁨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 일러 준다. 청년성서모임 말씀의 봉사자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창세기 연수에서의 체험이 바로 복음을 통해 느끼는 내적인 기쁨이다. 누군가에게는 뜨겁고 열정적인 느낌이고 누군가에게는 잔잔한 감동이고 누군가에게는 알 수 없는 울림이었을 창세기 연수에서의 하느님과의 만남이 곧 내적인 기쁨이었고, 그 기쁨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시야를 주고 무언가를 변화시켜 우리를 복음화로 이끈 것이다.
다만 복음을 통해 느끼는 내적인 기쁨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당연하거나 느끼기 쉬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매주 우리는 미사를 드리지만, 매 미사마다 울림이나 감동 혹은 기쁨을 느낄 수는 없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기쁨을 감지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청년성서모임의 연수를 위해 그룹원들은 그룹봉사자들과 함께 6개월~1년이라는 준비 과정을 갖고, 연수봉사자들은 1~2달 동안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기도하며 연수를 준비한다. 연수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자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기도를 이어간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통해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우리 안에 기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일종의 신앙적 감수성이 생겨난다. 마르코 복음 13장 32절에서 44절에 걸쳐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셨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4년 아시아 청년 대회 폐막 미사에서 “Wake up!”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나에게 주어진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하는 그룹공부, 그룹봉사, 연수봉사 역시 노트 정리, 나눔 준비 등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끊임없이 하느님과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그 본질이다. 그룹공부나 연수봉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룹원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연수 공동체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 체험의 끈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그로 인해 우리 각자는 복음의 기쁨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룹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봉사자가 먼저 복음으로부터 스스로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그룹봉사를 하다 보면 기쁨의 시간은 적고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어려움도 계속 나타납니다. 실패도 경험하고 인간적 나약함으로 많은 고통도 겪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따금 일에서 기대하던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과는 거의 없고, 변화는 더디고, 지쳐서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지쳐서 잠시 두 팔을 내려 버리는 것은 만성적인 불만과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무기력함에 빠져 영원히 두 손을 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중략).... 이러한 경우들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메세지인 복음은 갖가지 핑계로 묻혀 버리고 맙니다….(중략)....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현존하고 곳곳에서 여러 다른 방식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복음 말씀을 믿읍시다. 하느님 나라는 매우 큰 나무로 자라는 작은 씨앗과 같고, 그 나라는 여기에 있고, 다시 올 것이고, 새로 꽃 피우고자 싸웁니다." (「복음의 기쁨」, 277항)
복음을 전하면서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인으로서 복음이 우리에게 심어 준 희망,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이다. 복음의 기쁨을 자신이 먼저 느끼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노력한다면, 곧 꾸준히 기도, 묵상, 미사 참례 등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이는 복음의 참 기쁨을 느끼기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2.2. 다른 사람을 통해 만나는 하느님 체험, 복음화의 기쁨
우리는 스스로 복음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며 하느님를 체험하기도 하지만,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내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하여 '타자에게 내재된 하느님과의 만남'으로도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우리는 성서모임의 그룹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일생을 만나는 체험을 한다. 성서모임의 그룹공부 또는 연수 과정에서 소공동체 나눔을 하는데, 다른 사람의 나눔을 들으며 한 사람의 삶을 듣게 되는 것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긴 미사'라는 교황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들을 때 미사에서 느끼는 마음의 울림과 같은 감동을 받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나눔을 통해 타인 안의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영적 일치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 영적인 힘은 다른 이를 사랑하게 한다(「복음의 기쁨」, 272항). 그리고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이 사랑은 결국 "어둠에 싸인 세상을 언제나 밝혀 주고 우리에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주는"(「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9항) 유일한 빛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영성을 실천할 때, 우리 마음은 주님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은총에 더 활짝 열리게 된다.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된다. 특히 그룹봉사자들과 연수봉사자들은 다른 이들의 삶에서 만난 하느님을 느끼고 또 그룹원들과 연수생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내어 주기 위해 노력하며, 이 과정에서 우리 신앙의 빛은 더욱 밝아져 하느님을 알아 뵙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영성 생활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정신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복음화 활동은 마음의 지평을 열어 주며, 성령의 활동을 더욱 민감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 주고, 우리의 제한된 영적 도식을 뛰어넘게 해 준다. 헌신적인 그룹봉사자는 흘러넘치는 물로 다른 이들에게 생기를 주는 샘이 되는 기쁨을 경험한다.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하면서 또 그들의 행복을 바라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만이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이 열린 마음이 기쁨의 원천이 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사도 20,35)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른 이들에게서 도망치고, 숨고, 나누는 것도 주는 것도 거부하고, 자신의 안위에 갇혀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도 더 잘 살지 못할 것이며 그러한 삶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권고한다(「복음의 기쁨」, 272항).
타인의 기도와 나눔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된 우리들은 복음화의 기쁨에 가득 차 함께 기도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우리가 복음화 임무를 맡고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기도의 한 형태가 바로 '전구'이다. 소그룹공동체에서 그룹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거나, 연수공동체가 떼제 기도, 룸꼬 기도를 할 때 다른 사람의 간절한 기도를 같이 듣고 그 마음을 함께 느끼며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한마음으로 빌어주는 것이 전구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바오로 성인은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기도를 드립니다….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필리 1,4-7)라고 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전구가 참다운 관상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것을 알아보는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영적 시선과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쏟는 마음에서 비롯된 감사는 다른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가 된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기도로부터 마음을 더 활짝 열게 되고,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는 데에서 벗어나 선행을 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싶어 하게 된다. 하느님의 주도로 우리의 전구는 그분의 힘과 사랑과 성실하심을 사람들 가운데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복음의 기쁨」, 283항).
3. 교회 공동체에서 살아야 할 복음의 기쁨
"읽어라! 창조주이신 신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주신다."
(코란 96,1-5)
"읽어라!" 코란은 이슬람교의 경전으로서 "읽다"라는 아랍어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다. 경전의 제목 자체가 ‘읽어야 하는 것(혹은 읽을 것)’으로, 이슬람교는 경전을 읽는 행위 자체를 중시함을 보여 준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읽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보고 듣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보고 듣고 따르라고 강조하셨지 읽고 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지 않았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근본적으로 우리 같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신앙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2천 년이 넘었지만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직 채 500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성경을 읽기 위해 성서모임의 그룹봉사자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루터의 가장 큰 업적은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신앙의 개인화가 촉진됐으며 개신교 종교 혁명과 가톨릭의 종교 혁명에 대한 대항 혁명을 통해 서구 문명 자체의 혁신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가장 큰 실수도 바로 이 '읽음'에 있다. 현대에 와서는 성경을 텍스트적으로 해독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물론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씀하신 "보고 들어라"라는 그리스도교만의 가장 그리스도교다운 특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3.1. 보고 듣는 것으로 시작하는 교회
결국 교회의 시작은 보고 듣는 것이다. 우리가 매주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그룹봉사를 하는 것도 바로 보고 듣기 위해서이다. 그룹봉사 공동체가 소공동체인 이유도 더 잘 보고 더 깊게 듣기 위해서이다. 혼자만의 신앙은 결코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신자’라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신자는 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는 현실의 비구원적 상황에서 나 자신 외부에 위치한 한 타인, 예수라는 인격적 존재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다. 좀 더 어려운 말로 쓰면, 신학자 칼 라너는 우리를 ‘개방적으로 세계를 지향하면서 세계 안에서 소멸하지 않고 자기에게로 귀환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신자’란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세계 안에서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잊지 않은 채 자기 개방을 통해 자기 외적인 것, 타자를 향한 ‘여백’을 마련해 놓은 사람들이며 그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비구원의 상황’을 극복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집에서 혼자 성경을 읽고 혼자 기도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굳이 시간과 돈과 정성을 들여 그룹봉사를 하는 이유도 '자아의 개방을 통한 구원'이라는 우리 신앙의 고유의 특색 때문이다. 그룹봉사와 그룹공부는 타자를 향한 적극적인 자기 비움(여백)이 가장 온전히 이뤄질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룹원들에 대한 그룹봉사자들의 전적인 개방, 곧 자기 비움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의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역으로 그룹원들 역시 자기 개방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익명성이 팽배해 있는 거대한 조직체(혹은 공동체) 안에서 보다 작은 공동체나 소그룹 안에서 훨씬 더 각 개인의 정체성 인식이나 주체 의식의 자각이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우리가 그룹봉사 그리고 타인과의 만남이나 관계를 통해 가시화되어 체험하는 하느님의 사랑 역시 작은 단위 공동체나 소그룹에서 훨씬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우리들의 그룹봉사는 소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며 또한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이르는 길에 도움이 된다.
3.2. 너를 보고 듣게 해주는, 한 줌의 흙
하느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교회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이루어지고 다스려진다.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된다”(로마 12,4-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32)
위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듯 성직자와 평신도는 위계질서를 형성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양성을 지니면서도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교회의 필수적인 구성원으로서 평신도는 자기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일상생활 안에서 복음화의 사명을 동시에 이행해야 할 책임이 주어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매번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로부터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라는 파견 명령을 받는다. 연수가 끝나고 나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상으로 ‘파견’된다. 우리가 하는 청년성서모임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역할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에 가장 부합하는 일이다. 특히 청년의 복음화에 앞장서는 그룹봉사자들의 역할은 바로 한국 교회의 미래를 건설하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직자나 선교사들이 하기 어려운 일—현대의 치열한 경쟁과 소비문화 속에서 젊은이들이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재복음화하는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같은 젊은이인 우리 그룹봉사자들이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냉담 중인 대학생, 미사 전례에 참여는 하지만 마음의 뜨거움이 없는 본당의 젊은이, 그리스도를 알고 싶지만 용기내기 어려웠던 청년 비신자들을 교회 안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역할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단적으로 연수에서 만난 연수봉사자들, 그룹에서 만나게되는 그룹봉사자들의 면면이 이 시대의 일반적인 젊은이들의 그것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느꼈을 기쁨과 환희가 지금과 같을 수 있었겠는가.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말씀의 봉사자들 중에는 스스로 말씀을 전하리라 마음먹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표봉사자나 주변인들의 권유 때문에 반강제로, 혹은 인간적인 의무감이나 미안함 혹은 호기심 때문에 그룹봉사를 시작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치열한 경쟁, 자아를 끊임없이 소모시켜야만 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말씀을 전파한다는 것, 말씀에 가까운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모든 말씀의 봉사자들이 부르심에 응답할 때 각자 자신만의 커다란 결단을 내렸어야 할 것이다.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삶을 살아나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그룹봉사를 시작했다고 해도, 그 과정 안에 험난한 길을 피해 갈 수만은 없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대는 그룹원, 카톡이나 문자를 확인하지 않거나 그룹 나눔 때 자주 빠지는 그룹원, 심지어 그룹의 화합을 해치는 그룹원 등을 만나게 되면서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룹원과의 갈등은 없다 하더라도 그룹봉사에 반대하는 부모님이나 이성친구와의 갈등, 다른 봉사자들과의 불화, 본당 신부님 등으로 인해 상처 받고 그룹봉사에 대한 회의감으로 힘들어하는 말씀의 봉사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1코린 4,10),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을 수 있음을(로마 8,37-39) 기억해야 한다. 우리 청년 말씀의 봉사자들은 교회의 선교 사명을 이어나가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성서에 대한 해박함, 텍스트를 해독해내는 능력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우리의 노력과 용기가 교회를 바꿔나가는 데,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에 분명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깃든 자부심과 우리의 사명에 대한 믿음을 통해 스스로의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으며, 위에서도 언급했듯 우리 스스로와 그룹원들의, 더 나아가 내 주위 사람들의 구원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요한 복음 9장을 보면 태어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침과 흙을 손으로 개어 태생 소경의 눈에 직접 발라 주시고,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명하신다. 태생 소경은 마침내 눈을 뜨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어 있었기에 구걸을 하면서 목숨을 이어 온 그는 분명 어떤 따스한 손길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어떤 사랑의 말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느끼고 들은 것이라고는 성전 앞을 지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따가운 눈길과 부모의 죄나 스스로의 죄 때문에 눈이 멀었을 것이라는 매서운 말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손길은 배가 아플 때 배를 쓰다듬어 주시는 할머니의 약손같은 사랑 가득한 약속이었을 것이다. 그 뜨거운 손길은 그의 한(恨)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리고 마침내 실로암, ‘파견된 자’라고 불리는 그 연못에 가서 눈을 씻고는 눈으로 쏟아지는 빛을 이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그분을 보는 것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도 힘들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훌륭한 그룹봉사자들과 연수봉사자들을 통해서 침과 흙을 개어 우리 눈에 발라 주심으로써 비로소 그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볼 수 없던 우리의 눈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할은 이제 예수님의 한 줌 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손길과 침으로 하나 된 흙이 되어 아직 하느님의 빛을 보지 못한 젊은이들의 눈에 발라져 보고 듣지 못하는 청춘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3.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1코린 10,31)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룹봉사자로서 사는 삶만이 완전한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연수나 그룹공부 안에서 전해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젊은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닌 평신도로서 누구보다도 삶에 충실해야 한다. 가정, 본당, 학교, 직장 어디에서든, 우리의 삶이 있는 장소라면 그분의 말씀이 향기처럼 퍼져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코린 10,31)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눈과 귀는 항상 조금씩 더 큰 세상 속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말씀의 봉사자인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공간적 외연을 물리적인 교회에 한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며, 계속해서 우리 신앙의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따라서 말씀의 봉사자는 자신의 관심의 범위를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는 이 세상 모든 곳이 교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꿈과 신념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며, 진정한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물리적인 교회 밖에서도 살아 나갈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4. 사회 공동체에서 살아야 할 복음의 기쁨
교회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어디로 나가야 하냐고요? 삶의 변두리라면 어디든 가리지 말고 그곳을 향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라! 그곳으로 나가라! 복음을 선포해라! 복음을 증거해라!’ (마르 16,15) (…)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신앙은 예수님과의 만남이고,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5월 18일 강론)
우리는 살면서 많은 부르심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누군가의 친구로, 동료로서 역할을 하며 살고, 신앙적으로는 청년성서모임 말씀의 봉사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삶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며 살게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아마 예수님이 살았던 삶의 모습을 따라 사는 것,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골고타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청년성서모임 말씀의 봉사자로서 우리의 삶을 말씀과 일치시키고자 결심했다면, 그것은 단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쁨을 느끼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말씀을 실천하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청년 신앙인인 우리는 소공동체와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실질적인 터전에서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일주일의 6일을 형편없게 보내다가 주일에만 선행하는 신앙인이 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시작이며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의 첫 과정인 창세기는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만드시고 어떻게 사랑하며 돌보시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어 내신 뜻에 맞갖게 살아가고자 할 때, 삶의 어떤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고자 할 때 언제든 돌아가야 할 우리의 근원을 제시해 준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하느님이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셨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담은 귀한 존재임을 배웠고, 학교나 사회에서의 교육을 통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배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살아가고자 할 때 과연 그 믿음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지켜지고 있는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4.1. 현대 사회에서의 ‘가난’의 의미
알게 모르게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절규 앞에서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다른 이들의 고통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그들을 도울 필요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지 우리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반면에 기회의 박탈로 좌절된 모든 이의 삶은 우리의 마음에 전혀 와닿지 못하고 단순한 구경거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54항)
오늘날에는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었다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을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무척 가슴 아픈 일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p. 244)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타인의 어려움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여기며 그들의 삶에 개입하기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릇된 개인주의 때문일지도, 혹은 모두가 알고 있듯 현대인의 팍팍한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평등함의 감각을 잃었고, 남의 불행에 무뎌지거나 어쩌면 나에게 이득이 된다면 남이 고통에 빠지는 순간마저도 기다리게 되었다. 스스로의 불행은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만 여기게 되었고, 가난은 사회 구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치부하게 되었다. 물론 현대인의 이러한 성향의 원인으로 여러 사회적 요인도 있겠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의 이러한 냉소적 태도 뒤에 하느님에 대한 거부가 숨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냉소적이고 세속적으로 만드는, 이웃에 대한 배척과 돈에 대한 숭배는 우리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과는 상관없는 조건들을 더 많이 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온갖 불필요한 예속에서 벗어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줄리아노 비지니 편, 김정훈 역,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p. 244).
교회가 사회가 요구하는 물신주의와 예속에 벗어나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라고 강조해 왔음은 가톨릭 사회교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염려와 배려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 언제나 함께하셨고 또한 스스로 가난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난은 사회적, 문화적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범주에 속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드님이 우리와 함께 걷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모든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항상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되새겨 봐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가난'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가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굶주리는 사람, 난민, 혹은 최저의 생계조차 유지하지 못한 사람을 생각하기 쉽지만 교황님이 ‘신빈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듯 현대의 가난은 새롭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교황님은 이번 방한 시 아시아 청년들과의 만남에서 “사회의 빈부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엄청난 물질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빈곤·외로움·남모를 절망감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함은 단순한 빈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빈곤, 시간의 빈곤 등을 포함하기에 현대인인 우리 모두의 삶에서 ‘가난’이란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4.2. 청년 신앙인은 왜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하는가
현실에서 소외된 이웃을 돕는 것을 비롯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확립하고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구호 활동이 아닌, 사회 제도적 차원의 개선도 필요하므로 때론 정치 참여가 요구된다. 교회의 일원인 우리는 이웃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게 된다. 예수님은 당신을 이방인, 슬퍼하는 사람, 폭력과 착취의 무고한 희생자와 동일시하면서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계명으로 삼는 사랑이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진리 안의 사랑」, <복음의 기쁨> 166쪽, 재인용)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 경제, 정치 영역에서도 사랑이라는 원칙이 작동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나 정치권을 향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법을 지키는 사회인이자 동시에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떨어져 구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행위"(권목기,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는 9가지 삶의 지침>,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4. 8. 14.)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동시에 교황님은 아무리 사회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정부를 비판하더라도 교회 공동체가 가난한 이들이 품위있게 살고 아무도 배척당하지 않도록 노력이나 실질적인 협력을 하지 않고 안주한다면 공동체의 와해를 피할 수 없다고도 말씀하신다(「복음의 기쁨」, 207항).
다른 의미로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복음의 기쁨을 빼앗는 사회의 부조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과 봉사를 통해 복음의 기쁨을 느끼지만 세상 속에서 그 기쁨을 너무나 쉽게, 자주 빼앗긴다. 기쁨 안에 계속 머무르려는 노력에는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는 것도 있겠지만, 세속화를 극복하고 우리를 짓누르는 불평등으로 인한 비관주의를 떨쳐버리는 것도 있다. 물론 이러한 실천은 혼자서는 어렵다. 여러 사람의 계속 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 악화되기만 하는 사회를 바라볼 때 우리는 쉽게 패배주의나 비관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 가치를 두어야 하는 것이 사회적 연대이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이와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들을 가까이 두시며 그들과 연대하셨다. 연대는 인생이라는 긴 미사를 함께 걷는 것, 서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프란시스코 교황님은 “그 누구도 혼자서는 구원될 수 없습니다. 곧 고립된 개인으로나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기쁨」, 113항) 라고 말씀하시며 신앙을 통한 우리의 구원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음을 강조하신다.
연대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환대이다. 어려운 사람을 환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빈곤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시혜적인 도움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동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황님은 끊임없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대가 자선을 넘어서 삶의 모든 수준과 차원의 개선을 위한 활동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하시며, 가난한 사람에게 아무리 큰 사랑을 베푼다 해도 그 사람이 계속 가난 속에 있다면 그 사랑은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 공동체에서, 가정에서 환대하는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는 정의를 요구한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때로 우리가 원했던 것들을 버리게 하고, 꿈꿨던 것들을 등지게 하기 때문이다. 교황님은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고통스럽게 깨닫게 된다 하더라도 계속 걸어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새기라고 당부하신다(「복음의 기쁨」, 85항).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섬기는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을 마련해 두셨고, 우리는 그 선물을 받아들이고 서로 나누면서 더 크고 많은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바로 그룹봉사자로서의 부르심 말이다. 연수 셋째날 연수봉사자들이 읽어 주는 ‘사랑 편지’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세상은 언젠가 평화의 동산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첫번째 실천으로 우리는 그룹봉사자가 되기로 응답했다. 우리가 교회 밖으로 걸어나가 당장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사명을 인식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세상은 언젠가 평화의 동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모두 당신 스스로 벌거벗고 길을 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으로 오셨고 섬기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강론278)
5. ‘기억의 지킴이’와 ‘희망의 지킴이’로 살아가기 위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말씀의 봉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복음의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교회 그리고 나아가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서 복음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바쁘지만 서로의 시간을 봉헌하며 그룹봉사와 연수봉사를 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만족, 성공을 위한 삶이 아닌 2,000여년전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서론에서 이야기한 말씀의 봉사자로서 ‘기억의 지킴이’와 ‘희망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정리해보자.
말씀의 봉사자로서 ‘기억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개인적 혹은 다른 사람 또는 연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했던 순간을 ‘기억’하여 우리의 신앙을 조금 더 견고히 하고, 성장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기에 말씀의 봉사자인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에 맛을 들이면서 하느님을 체험했던 ‘기억’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느님을 체험했던 ‘기억’에만 집착하다 보면 신앙의 다음 단계인 삶의 변화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역시 당신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고서 그 황홀경에 계속해서 머물고자 했던 베드로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마르 9,2-10). 잠깐 체험했던 황홀경은 예수님께서 진정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손희송, 카톨릭 청년성서모임과 청년 사목의 미래, 『사목』, 2006. 5.).
따라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과 같이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을 넘어서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말씀의 봉사자로서 ’희망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복음에 맛을 들이는 것을 넘어서서 ’복음의 기쁨‘을 누리며 자신의 삶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의 신앙적 성숙을 넘어서서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도 어떤 다른 것, 어떤 더 큰 것, 어떤 진정하고 충만한 것을 찾고 있는 세상에 이 희망을 선포하여야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교황문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복음의 기쁨
단행본 및 논문 줄리아노 비지니 편, 김정훈 역,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바오로딸, 2014. 김종봉, 『파파 프란치스코 100』, 불휘미디어, 2014. 손희송, 가톨릭 청년성서모임과 청년 사목의 미래, 『사목』2006년 5월호.
간행물 권목기,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는 9가지 삶의 지침>,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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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토마 형제님!
내용이 참 좋네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