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시월이면 목도하는 풍경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여수는 해마다 시월이 되면 신열을 앓는다. 여순사건(14연대 반란사건)이 발발한 날이 이달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는 올해도 다르지 않아서 10월 19일 제 64주기를 맞아 언론매체들은 기념회 소식과 유가족의 추모행사 동향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연례적인 광경이다.
이런 분위기에 젖다보면 나는 직접 겪은 적이 없지만 과거 몸담았던 직장 선배들의 무고한 희생이 몹시 안타깝게 생각된다. 뒤집어 쓴 누명을 벗겨주지 못한 가운데 부정적인 언사가 이어기고 있어서다. 해서 딴에는 십 수 년 전 그 진실을 좀더 정확하게 파헤치고 욕됨을 씻겨드리자는 마음으로 생존 증언자를 찾아 나선 적도 있다.
그렇게 실태조사를 하고난 뒤의 일이다. 그로 인한 억울함과 악몽이 한동안 후유증을 남겼다. 희생을 당한 선배들의 혼령이 흉함 모습으로 나타나서가 아니라 명예회복을 해달라고 절규를 하는 꿈을 연거푸 꾸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만난 선배님의 얼굴은 한결같이 훼손되어 있었다. 아마도 증언자의 입을 통해 당시의 구체적인 정황을 접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당시 선배들이 희생된 것은 반란군이 경찰서를 점령 후 싸이렌을 울려 비상소집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응소에 응한 직원들을 후정 한곳으로 몰아넣고 제압을 해버렸다. 그런 상황이니 직원들은 꼼짝없이 붙잡힐 수밖에 없었고,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신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얼굴을 누구인지 못알아 보도록 패인트를 부어 훼손을 시켰다. 그 광경이 꿈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떠오른 것이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밤 발발했다. 반란을 일으킨 그들은 초저녁 8시경 우익 장사병을 제압하고 곧바로 시내로 진출했다. 그 시각이 대략 밤 11시. 첫 번째 타킷은 봉산파출소였다. 이날 파출소장 한주도(韓柱道) 경사는 상부지시에 따라 직원들을 독려하며 자체경비에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신월리 군부대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 예광탄이 쏘아 올려지면서 연달아 총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한 소장은 직감적으로 폭동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 일전에 제주도 출병을 앞두고 시내를 한차례 무력시위를 한 적이 있어 은근히 불상사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총소리가 들려오니 예감이 이상했던 것이다.
한편, 무장 반란군은 대오를 갖추고 파죽지세로 파출소를 덮쳤다. 그리고 파출소장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는 다시 충무파출소를 기습하여 자체경비중인 경찰관을 죽이고 그 시신을 전신주에 묶은 뒤 모자를 씌워 놓았다.
하나 그것은 광란의 서곡에 불과했다. 주력부대 2000여명은 곧바로 경찰서로 쳐들어가 살육을 자행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경찰관이 무력하게, 그리고 무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수적으로 부족한 점 이외에 예상 못한 비상소집 때문이었다. 집에서 대기하던 응소자(應召者)들은 그 소집이 정상적인 조치로 알았다. 그래서 피해가 의외로 컸다.
반란군 중에는 가담한 민간인도 적지 않았다. 미리 합세하기로 했는지 타 지역 사람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자가 발란 직후 보안서장으로 임명된 유목윤(劉穆允)이다. 그는 고인수(高寅洙)경찰서장을 직접 일본도(日本刀)로 내리쳐서 죽게 만들었다. 그는 나주일대에서 지하활동을 벌리다가 갑자기 여수에 나타났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여순사건은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반란사건인 것이다. 당시 부대상황과 좌익 활동은 어떠했는가. 14연대는 한마디로 말하면 붉은 물이든 군인들의 집합소였다. 그런데는 이유가 있었다. 주모자 지창수 상사는 광주 주둔 4연대에서도 인사계에 있었는데, 그는 여수에 14연대가 추가로 창설되자 좌익 군인들을 선발했다.
그래놨으니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여수에 진입한 후 공공연히 뭉쳐 다니며 은밀한 정보를 교환을 했다. 그러면서 피아간의 식별을 위해 모자 뒷 끈을 ‘-’자로 묶고 생활했다.
반란의 핵심에는 김지회(金智會)중위와 지창수(池昌洙)상사가 있었다. 그들은 제주폭동진압을 위해 출병 점검차 연대장 박승훈 중령이 부두로 나가있는 틈을 타서 봉기했다. 그들은 맨 먼저 우익 장교부터 처단했다. 그리고는 신속히 무기고를 접수하여 시내로 진출했다.
이때 이미 군부대 밖에서는 신원 불상의 민간인 7-8명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신분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없으나 미루어 짐작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뒤 일 년 후에 일어난 6.25전쟁당시 지역을 접수한 공산당원들이 필요한 인력을 쓰기 위해 받아놓은 자필서류에는 충분히 단서가 될 정황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면 '나는 어디서 학습을 받고 전신주 몇 개를 잘랐다.' '나는 어느 공공시설을 방화하고 연락책을 맡았다.'는 등의 진술이 나오고 누가 이를 보증한다는 증빙이 되어 있다.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놀라게 된다.
진압과정에서 그들의 일부는 입산을 하고 일부는 색출되어 단죄가 되었을 것이다. 사안이 이러한데도 민간인 신분이면 무조건 억울한 주검을 했다고 강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처형된 사람 중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수경찰서 소속 경찰관 72명이 단시일을 학살당한 것에 비한다면 많은 숫자는 아니다. 당시 학살당한 여수경찰은 총인원의 거의 절반이 넘었다.
한데도 해마다 여순사건 발발일이 돌아오면 여수경찰은 곱지 않는 눈총을 받는다. 경찰이 민간인을 죽이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조사하고 파악한 바에 의하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람도 여수경찰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군에서 수사를 주도하고 여수경찰은 보조를 하는데 어찌 마음대로 했겠는가. 이점은 당시 상황을 목격한 최명균, 배병태, 이상준 제씨들이 증언을 한 내용이다.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부역자를 가려서 처단을 하는 과정에서 군 책임자가 호송에 참여한 경찰관에게 사살하라고 명령을 했다. 이에 그 경찰관은 "우리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거부했더니 자기들이 처치를 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시중에 악성루머로 떠도는 '손가락질 처형'은 다분히 선동성 루머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중앙초등학교에서 총을 맞은 소년 부역자는 경찰관이 구출해 주어 살아나가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수경찰이 무고한 인명을 살상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 지금까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고 있는 현실은 답답하기만 하다. 나의 마음이 이러한데 억울한 죽음을 당한 선배경찰 혼령은 어떠하겠는가. 답답한 현실이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2012)
첫댓글 참으로 안타까운 사정입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요. 좌익 공산주의 종북주의자들이 지금도 기회만 있다면 설처대니 문제입니다. 경찰은 예나 지금이나 현 정부의 치안질서의 선봉장에서 늘 고생을 하고 있지요. 자유당, 공화동,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평민당, 김대중당, 노무현당 할 것없이 국민을 위해 봉사했지요. 경찰을 부정하고 욕하는자 의심받아 마땅한 사람이요, 집단입니다.
여순반란사건 당시는 경찰만 일방적으로 희생을 당했지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수개월을 걸쳐 당시 관여한 생존자를 만나 조사를 했는데, 경찰은 피해만 당했습니다. 당시 누구에게 들었다는 허튼 말을 퍼트린 사람은 고발을 당하기도 했지요.
몇년전에 저도 해마다 시월이 오면 이란 시로 행사장에서 낭송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때 할머니 한분을 만나 실제상황을 들었고 그 것으로 글을 썼습니다.
참으로 아팠고 힘들었습니다..선생님도 그러셨을겁니다. 더구나 일하던곳이었기에 이유야 어떻든 무고하게 희생되신 분들께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해야겠습니다. ps: 이들의 신분은 (끝에) 끝내가 아닌가요? 조심스러워서요,,
날씨가 조석으로 변화가 큽니다. 건강조심하시구요...
반란군과 지방폭도들의 만행은 차마 입에 올릴수 없도록 잔인했습니다. 억울한 주검을 했다는 사람중에는 그렇게 못된 짓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자 지적해 줘서 고맙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은 한국근대사에 빠질 수 없는 사건이지요. 그러기에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과 유족들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여순사건은 실상이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당시 경찰관이 72명이나 집단 살해를 당했는데 진상규명을 하자면서도 그 이야기는 쏙 빼버리고 말을 하니 어처구니가 업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