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군 서면 모곡리 소재의 한서 남궁억 선생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작년 7월 말경 무궁화 심포지엄 참석차 오후 늦게 도착하여 또다시 갈길을 재촉했기 때문에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기념관을 휴가를 하루 연장하여 홍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남궁억 선생의 발자취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서 남궁억 선생 기념관은 단순한 기념관이 아니고
무궁화운동의 성지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무궁화 선양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선생의 기념관답게 입구에는 아름다운 무궁화가 피었습니다.
기념관 앞 우측에 선생님의 동상 앞에서 가운데 아들딸 녀석이 까치발을 들면서 조금 더 커보이려고 ㅎㅎ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선생의 흉상 앞에서 어머니도 함께 기념사진
기독교 신자였던 선생의 신도비를 올해 기념관 앞으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신도비 아래 무궁화 무늬가 보입니다.
15일 아침 촬영한 사진인데 마침 선생의 후손들이 신도비 앞에 과일들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념관 좌측에 보이는 동상
우측에 보이는 선생의 필적
기념관 바로 우측에 선생이 모곡리에 내려와 처음 예배당을 지었던 자리에 예배당을 복원해놓았다고 합니다.
사진의 예배당 자리 좌측으로 한서 남궁억 선생 기념관이 있고, 사진 우측으로 한서교회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념관을 들어서자 정면에 있는 남궁억 선생의 흉상
사진 좌측에 보이는 선생의 어록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나무 밑어 뭍어 거름이나 되게하라"
표현할 수 없는 선생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이 배어나오는 글입니다.
전시관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보이는 모습
선생이 손수 지으신 애국의 노래
무궁화연대의 무궁화축제 팜플렛 제 1면에 있는 '무궁화동산' 노래입니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동산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호는 한서(翰西). 20세까지는 한문을 공부했고 1884년에 재동의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했다.
1889년 고종의 어전통역, 1892년 경북 칠곡 부사(府使), 1895년 궁내부(宮內部) 토목국장을 역임했다.
1896년 서재필의 독립신문에 참여했고, 중추원 의관(議官), 독립협회의 수석총무를 맡았다.
1898년 황성신문 초대 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필화로 2번이나 구속되었다.
1905년 성주 목사(牧使), 1906년 양양 군수를 지낸 뒤 1907년 12월 오세창·유근(柳瑾)·장지연 등과 대한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4월부터 〈대한협회회보〉를 발행했고 광동학우회를 조직하여 〈교육월보〉도 발간했다.
일제강점 이후 배화여학교에서 9년간 영어를 가르치다가 1918년 강원도 홍천의 모곡으로 내려가 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전념했다.
1933년 '반일 애국사상과 무궁화사건', '십자가당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이듬해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학교는 폐쇄되었다.
위 자료는 중요한 부분이나 글이 잘 보이지 않아 옮겨 적습니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운동과 십자가당 사건은 서로 다른 내용의 사건이다.
무궁화운동은 겨레의 상징인 무궁화를 통하여 민족의 자긍심과 국권을 회복하고
세계 열강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자는 민족운동으로 놀이[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노래와 시, 자수본, 무궁화나무 보급을
통하여 겨레의 독립을 전개한 독립운동이며,
십자가당 사건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수사를 받는 가운데, 압수된 모곡학교 교사의 일기를
통하여 발각된 사건으로 1932년 한서 남궁억 선생이 있는 모곡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홍천서 구역전도사 유자훈을 중심으로
강원도 일대에 전개하려던 기독교 이상향 건설 운동이다.
이 운동은 성격상 항일운동의 조항이 있어 이를 빌미로 28명이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특별한 내용이나 활동이
없었기에 주동자 3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단기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 사건이다.
무궁화운동으로 1933년 홍천경찰서에 구속 수감된 남궁억 선생은 1934년 보안법 위반으로 1년 복역,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언도받아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1935년 석방되었으나 고령에 2년여의 옥고는 선생의 건강을 크게 해쳤다.
홍천군 서면 모곡리 모곡교회(현 한서교회)는 무궁화운동의 성지이다.
애국가 후렴부의 가사작시를 통해 무궁화를 노래하신 무궁화운동은 배화학당에서 무궁화 자수본운동과 세계열강의 침략을
막아내자는 놀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이어, 이곳 모곡리의 무궁화 묘목 보급운동은 전국의 교회와 학교를 통하여
3십만주가 퍼져나갔으며, 무궁화는 이렇게 민족의 총과 칼이 되어 일제의 박해와 압제를 몰아내는 민족의 얼이 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무궁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흔한살의 노인을 구속구금하고 모곡학교 무궁화동산에 핀 7만주의
무궁화나무를 뽑아 불살라 버렸으니 교회와 학교도 모자라 말없이 피고지는 무궁화까지 잔인하게 짓밟아버린 무궁화
십자가당 사건이라 불리는 일제의 만행인 것이다.
한서 남궁억 기념관 방문기 2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