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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기행문>
참가자 : 총 32명
전경진, 박유숙, 전한이, 이정우, 이보은, 이상생, 김영경, 김인석, 한솔엄마, 김한솔, 박재열, 김남희, 박경석, 박준호, 김은정, 김지원, 이은정(민지모친), 서민지, 장은복, 김은결, 전경진 友, 이혜경, 유온누리, 강정애, 장지원, 김철원, 전헌열, 정현화, 정세중, 이계삼, 가은경, 이홍범
홍성은 이번이 네 번째다. 한 번 갔다 오고 나면 늘 며칠간은 홍성 방문의 여운으로 가슴 설레곤 했다. 그 설렘은 갈수록 상승해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홍성 방문의 잔상이 떠오르곤 한다.
밀양 지역에 내려온 지 7년째, 녹색평론 독자모임을 시작한지 6년째, 그러나, 어느 무렵부터는 권태에 젖어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대체로 신통치가 않았다. 나는 비교적 젊은 축이고, 뭔가 일을 하고 싶지만, 내 또래 젊은이가 많이 없다. 어떤 일을 시작해도 내가 총무를 해야 했고, 말을 꺼낸 사람이 시작부터 끝까지 주관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교조 일이 특히 그랬다. 젊은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서서히 나도 지쳐왔다.
진작부터 제도권 학교 선생 노릇을 죽을 때까지, 정년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관념을 심어준 것은 아무래도 녹색평론이다. 나는 1995년에 군복무할 때 녹색평론을 처음 읽기 시작했다. 아마 25호였을 것이다. 타계한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일기초(抄)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강연문, 그리고 권정생 선생님의 전우익 선생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감동과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해서 나는 종교적 세계관, 농(農)의 세계관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현실화되지 않은 관념이었을 뿐이다. 1년 정도 강화에서 시골살이를 했지만, 육체 노동은 나의 몫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왔다.
그러나, 자꾸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생각은 지치지 않고 솟아올랐고 그때마다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생각하곤 했다. 3월 13일 출발 전날 저녁엔 영화 ‘워낭소리’를 봤다. 사람이 엄청 많이 왔다. 정신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소를 보면서 자꾸 눈시울이 젖어왔다. 어쩌면 우리들 인생이 저러하리라 생각했다. 인생은 기쁜 것일까, 슬픈 것일까, 죽을 때까지 노동하면서 고통속에서 충성하는 것, 고통과 슬픔의 드라마. 저렇게 살다 죽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출발하는 날 아침에 사람들이 일찍 일찍 모였다. 우리는 바리바리 준비한 음식에다 뭐가 그렇게 많은지 바쁘고 힘들었다.
관광 버스가 출발하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배우러 가는 것보다 사람들이 좋아서, 같이 놀러가는 기분으로 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이거 준비하면서도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교통편도 그랬고, 홍성 쪽과의 연락도, 인원 모집도 그랬다. 애써 사람을 모으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은 말로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하지만, 그것을 만드는 일에 선뜻 나서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애써 부대끼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깨끗하고 좋은 농산물이 나오면 그거 돈 내고 사먹는 일은 또 사람이 몰린다. 공짜면 더 좋고. ‘워낭소리’에 폭발적인 인파가 몰리는 것을 보고도 마음이 좀 그랬다. 한미 FTA,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공장식 축산, 동물들에게 우리 농촌에게 가해지는 어마어마한 폭력에는 거의 수수방관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워낭소리’에는 왜 이리 폭발적인 반응일까. 그냥 센티멘털리즘 아닐까 싶기도 했다. 지금 누리는 풍요를 포기할 마음은 없으되 잠시 그런 영화를 보면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를 보상받으며 눈물 흘리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홍성에 도착했다. 시간이 조금 지났다. 문당리 환경농업교육관의 최도영 간사와 이동근 형과 통화해서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금강산도식후경, 보따리를 풀어놓고 밥을 먹었다. 역시 도시락이 최고다~~. 그냥 여기서 주저앉아 놀았으면 좋겠는데, 일정이 빡빡하다.
곧장 풀무생협으로 갔다. 풀무 전공부의 장길섭 선생이 토요일 농삿일을 포기하고 우리들과 토요일 전 일정을 함께 해주었다. 김영규 상무의 안내로 풀무생협을 보았는데, 역시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풀무생협의 규모는 대단했다. 50억짜리 쌀 도정기계는 감탄이 절로났다. 그러나 이곳조차도 지난 몇 년간 쌀의 과잉공급으로 엄청난 적자를 봤다는 얘기. 아이들은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즐겁다. 바람이 씽씽 부는 데도, 아이들은 재잘재잘 뛰어 다닌다.
다시 문당리로 와서 김영규 상무의 강의를 들었다. 교육관 건물은 2층인데, 아주 그럴싸하다. 풀무생협의 과거와 현재를 들었다. 1980년 풀무 소비조합으로 출발해서, 생필품, 농자재, 그리고 철물이 워낙 비싸 이런 것들 공동 구매하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농사일을 나가는 부모가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출발한 갓골 어린이집도 30년 역사다. 1년에 이곳을 다녀가는 인원만 2만~3만명이 될 정도라고 한다. 1992년 생산자회가 발족했고, 2002년 풀무 생협으로 발전했다. 직접 생산자회가 조직돼 있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농민 850~1,000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해있는데, 대체로 소농들이다. 쌀 작목반이 20여개, 채소 작목반이 수십개, (유동적이다), 축산 농가가 6개 작목반이다. 수도권 소비자들이 많이 가입해있고, 홍성 시내에 매장이 있다. 마을 단위로 작목반이 구성돼 있고, 볏짚을 소먹이로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60개 작목반이 돌아간다고 한다. 60개 작목반. 이 숫자가 감탄스러웠다. 60개의 유기농 작목반, 이것이 바로 홍동면의 힘이다.
생협과 영농법인, 축산법인, 떡가공장에다 귀농자들만 60가구가 몰려산다고 한다. 여기 홍동에는 빈집이 없고, 대기자가 줄을 섰다. 홍동초등학교도 전교생 120명이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홍동면의 유기농 작목반은 장곡면 금마면 광천읍으로 서서히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2005년까지 급속한 성장을 하다가 총 유기농 재배 면적이 350만평이 되면서 2006년에 큰 적자를 봤는데, 유기농산물 시장의 변화도 있었던 것이다. 유기농산물은 이전까지는 생협에서만 구할 수 있었지만, 일반 대기업들이 뛰어들고 있고, 관에서 후원을 한다. 이들이 금세 전세를 뒤집었고, 거의 덤핑가로 유기농산물을 공급하는 구조가 생겨 큰 피해를 본 것이다. 앞으로는 대기업이 직접 축산 생산까지 관장하는 형태로 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곳 홍동면은 주형로 선생 등 풀무학교 출신 독농가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생산자 300여명이 자체로 조직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가공이 큰 화두라고 한다. 농립부가 농수산식품부로 바뀐 것이 그래서 의미심장한 것이다. 도시 생협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생협간의 경쟁 구도가 생기고, 이제 홍성 지역이건 어디건 농촌은 계속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UR부터 그랬다. 유럽을 가 보면 안온한데, 우리 농촌은 왜 이럴까.
김영규 상무의 결론은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공형 농업, 국가가 보장해주는 농업, 그렇게 해서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0년 지나면 우리 농촌은 어떻게 될까, 김영규 상무는 이 질문을 던진다.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지금 수준의 농민이 있어야 가능하다. 350만 농민인데, 농민 공무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영욱 상무의 강의는 참 좋았다. 생협과 홍동면 지역의 유기농 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홍성 지역의 촛불 운동을 주도한 것도 그렇지만, 김영욱 상무는 확실히 생협 실무자이자 농민 운동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2교시, 장길섭 선생님 강의를 듣는다. 내 수첩에 적혀 있는 장선생님의 말씀을 옮겨보면 이렇다.
나는 원래 출판사에서 일하는게 좋았다. 맨처음에는 시대의 흐름을 쫓아 노동현장으로 갔다가 육체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1년만에 내가 나온 대학 근처에서 헌책방을 했는데, 그것도 장사를 잘 못해서 말아먹었다. 그래서 출판사를 들어갔는데, 거기서 책 만드는 전 과정에 다 참여하는 일이 즐거웠지만, 먹고 살아야 하는 일 때문에 쓰레기 같은 책도 책이라고 내는 일이 힘겨워 결국 포기했다. 그러다가 김종철 선생님을 만나고 녹색평론 창간 작업에 함께 했다. 3년간 일을 하면서 한 원고를 열댓번 읽으며 녹색평론을 만들다보니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완전히 개종되었다. 93년부터 농사를 짓기 위해 경기 양평에서 5년간 있다가 다시 이곳 홍성으로 와서 현재 10년째 농사를 지으며 풀무전공부에서 강의하면서 산다.
풀무 전공부는 전임 5명, 학생 25명, 비전임 5~10명 수준이다. 땅 2만평에 농사를 지어 학교가 자급자족한다. 농장과 지역이 모두 학교의 울타리다. 물론 나는 월~금요일까지는 학교에서 강의하고 학교 일을 보고, 주말에는 우리 농사를 짓기 때문에 사생활이 거의 없는 생활을 한다. 이 생활이 8년째에 이른다.
홍동면은 인구 4천명이고, 장곡면도 4천명인데, 대부분 유기농으로 전환했다. 갓골어린이집, 홍동초, 홍동중, 풀무고, 풀무전공부가 유관 협력체제가 되어 있다. 그리고 풀무생협, 풀무신협, 홍동농협까지 활동하고 있다. 비교적 이상적인 형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개 면 지역에 69개의 작목반이 있다. 그리고 여성농업인 센터에 아줌마들이 모여 수다도 떨고, 탁아도 같이 하고, 좋은 일들을 한다. 사안이 있을 때는 이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일제고사 반대 체험학습 때도 그랬고, 가을걷이 축제도 같이 한다. 문제는 교육이 아닐까 싶다. 귀농자들과 어린이집부터 전공부에 이르기까지 농민의 자녀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농촌, 농업 농민에 대한 교육을 통해 도시화 산업화 이후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 풀무학교 교사와 이곳 여러 기관의 실무자들이 많은 부분 풀무학교 졸업생이다. 이것이 교육의 힘이다. 농촌에서는 이렇게 서로 돕고 자급하는 생활을 하면 100만원으로도 살림이 가능하다. 동네에서 다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지역에서 돈이 돌게 만들자. 사실 이 나라는 농촌을 떠나 교육받은 사람들이 다 망쳐먹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농삿일을 배우게 하면 자급자족하는 농사는 식은 죽 먹기다. 1주에 이틀 일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전공부 식구들은 전부월급이 100만원이다. 교사나 식당 아줌마다 똑같이 100만원이다. ‘일만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 우리는 일도 하고 공부도 하는 사람이 되자’. 이게 풀무의 표어다. 이게 참 깊은 이야기다. 일도 하고, 공부도 해야 한다. 사람은.
이제 저녁을 먹을 차례다. 나는 아침부터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속이 좋지 않아서 설사를 했다. 저녁은 금세 아줌마들이 만들어냈다. 물론 중간 중간에 김철원 실장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쌀을 씻어 안쳤고, 이정우 씨가 최도영 간사와 함께 광천으로 가서 해산물을 사왔다. 저녁을 맛나게 먹었는데, 쉴 시간이 없다.
이제 저녁이다. 주형로 선생님의 강의가 이어졌다. 다들 새벽부터 먼길 떠나서 하루종일 차안에서 또 피로하게 지내와서 많이 힘들었는데, 이거 웬걸, 주형로 선생의 강의는 완전 옛날 이야기 듣듯이 너무 재밌다.
이 분이 어떻게 해서 풀무학교를 오게 됐는지, 거기서 어떻게 농사를 짓게 됐는지 그 부분이 참 가슴 찡했다. 풀무의 산 증인, 홍순명 선생님. 당최 수업도 안 듣고, 배구 선수출신이라서 공부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는 소년 주형로를 집으로 오라고 해서, 밤새 ‘무슨 말을 전해줄까 이 엇나가는 아이에게’, 이런 고민을 했을 선생님의 퀭한 눈을 보면서 소년 주형로의 인생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타임>지를 보다가 발견한 오리농법 기사를 중견 농부 주형로 선생에게 주었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오리농법이 시작되었다는 말씀.. 결국 문당리를 변화시킨 씨앗은 홍순명 선생이 뿌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놀라운 교육의 힘. 사실, 노무현 대통령에게까지 전해진 그의 유기농업 성공담이나 문당리를 연 2만이상이 다녀가게 만든 성공적인 농촌 경영담은 약간 갸웃한 것도 있었지만, 그 자체로 참으로 소중하고 값진 것이었다.
4교시는 홍성신문의 윤종혁 기자의 순서다. 나는 지역 언론에 대한 공부를 꼭 했으면 해서 윤종혁 기자를 소개받았는데, 그 또한 녹색평론 독자였고, 우리들과의 만남을 기다린 듯한데, 주형로 선생의 강의가 길어지면서 실제 시간을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스러웠다.
홍성신문은 그래도 우리 밀양 지역 언론은 그야말로 스승으로 모셔야 할 신문이다. 군민주 400여명의 모금과 치과 의사 한 분의 희사로 시작되어 현재 직원 10명에 매주 1회 24면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발간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구독자는 6천명에 이르고 월 5000원의 구독료로 신문 인쇄 비용을 충당한다. 매호 400~500만원의 광고 수입이 발생하는데 이것으로 월 200만원씩 10명 직원의 인건비를 충당한다. 월 200만원의 인건비라면 정말 좋은 조건이다. 거기다 회사 사옥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광고 입김에 토호들과 관공서의 영향력이 작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구 9만 정도의 작은 도시에서 이만한 규모의 풀뿌리 언론이 있다는 것은 지역사회의 건강성을 위해서 아주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역공동체 운동의 중요한 매개이자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지역언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쯤 첫삽을 뗄 수 있을까.
이제 밤이 깊었다. 곧장 뒤풀이장소인 아래층 식당으로 옮겨 갔다. 부엌에선 아줌마들이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고, 아저씨들은 술 마시느라 정신이 없고, 숙소에서는 애들이 논다고 정신이 없다.
거기서 나는 많이 취했다. 아줌마들은 이제 음식을 끝내놓고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수다 떤다고 정신 없고, 나는 장길섭 선생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뭐 티벳불교와 녹색평론과 전공부와 내 인생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다. 긴장도 풀리고, 기분도 좋고, 한이 아빠가 가져온 보드카가 우리 테이블로 왔는데, 나는 그 맛이 너무 좋아 혼자서 다 마셔버렸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래서 결국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중간 중간에 붙긴 했는데, 장길섭 선생이 가실 때 인사드린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오락가락이다. 노래 부르고, 시 읊고, 혼자 깝치고,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거의 나의 독무대였던 것 같다. 나중에 설거지 한 것도 얼핏 기억이 난다. 박재열 아저씨도 대취, 김철원 실장도, 이동근 형도, 전경진 아저씨도, 다들 술 하나는 강적이다. 나는 새벽 서너시쯤에 쓰러져 잠이 들었을 것이다.
다음날 일어나니 얼핏 잔 것 같긴 한데 속도 엉망, 머리도 지끈, 입에서는 술냄새가 풀풀.
겨우 아침 식사를 하고, 이제는 에너지 전환엘 갔다. 패시브 하우스는 말로만 듣다가 처음 봤는데, 인상이 썩 좋진 않다. 대부분 석유 화학 제품이고, 상당히 값비싼 재료를 써야 될 것 같다. 에너지효율을 높이는 문제는 중요하지만, 결국 답은 ‘더울 땐 덥게, 추울 땐 춥게’ 에너지를 덜 쓰며 사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풀무고등학교의 느낌은 세 번째 와보지만, 여전히 좋다. 작고 조용하고 소박하고, ‘노동을 하는 학교’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풀무학교의 교훈석에서 기념 사진 한방 박고.
학교 후원의 잔디밭이 참 잘 가꾸어져 있다. 즉석 줄다리기. 여성 동무들이 미친 듯이 기운을 쓴다. 한솔이 아빠의 촬영으로 우리 카페에 올라있지만 이 영상을 바라보니 기분이 훈훈해진다. 사람들의 표정들이다 살아 있다. 풀무 고등학교 기숙사도 그렇고 실습지도 그렇고, 학교는 이래야 한다, 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그 다음에 갔던 풀무학교 생협 매장이었다. 무인가게가 정밀 인상깊었다. 사람들이 환장을 하고 싹쓸이 쇼핑을 했다. 우리도 요구르트, 빵, 비누 등속을 샀다. 풀무 전공부에는 지난 여름에 한 번 특강하러 온 적이 있다. 그때 강의장에 와 있던 전공부 학생들,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그 가족, 아이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겸손하고 소박한 눈빛. 문득 내가 저 사람들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지 싶어서 몸이 후들후들 떨리던 기억이 났다.
전공부의 정민철 선생은 녹색평론에서 글로도 본 적이 있고, 전공부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강국주 선생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야무지고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다.
짧고 굵은 이야기가 좋았다. “이곳을 둘러 보고, 완성된 결과만 보지 마세요. 우리도 과정 중에 있고, 여러분들이 모색하고 고민하는 그 과정이 곧 결과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제 오늘 홍성을 둘러보면서, 그리고 내 삶을 생각하면서 오고가던 모든 번민들의 종착점이 되어 주었다. 모든 것이 과정이다. 결국 이 일들을 언젠가는 시작해야 하고, 그 길을 가는 과정 그 자체가 결과인 것이다.
전공부를 지나서 목공소를 보았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정도는 돼야지 목공이라는 걸 할 수가 있는 거구나. 핸드 메이드의 천국, 모든 것을 돈이 아니라 내 손으로, 이웃과 함께, 직접, 만들어 쓰고 나누는 세상을 잠시 꿈꾸어보았다.
느티나무 책방도 참 좋았다. 이것은 내 오랜 꿈이기도 하다. 작은 책방을 하면서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며 두런두런 사는 꿈. 아마 우리가 꿈꾸는 일들 속에 책방은 한 귀퉁이를 차지할 것이다.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사람들이 회관 여기저기를 오고가며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고 논다. 나도 노숙자 컨셉으로 여러 남성 동무들(수사자)들과 사진 한 방을 박았다. 아이들은 지들대로 신이 나서 재잘재잘..
좋은 일이다. 1박2일,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알차게 보냈다. 밀양에 와서 지낸 몇 년간 많은 일들을 했지만, 제일 보람있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는 버스 안에서 소감들을 나누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되는 시간이었다, 무어든 시작해보자, 촛불 가족들이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다들 말했다.
그 뒤로부터 나는 내내 창에 머리를 찧으며 잤다. 술도 많이 마셨고, 그 전날까지 일정도 빡빡했고, 너무 많은 생각들이 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밀양에 도착했지만, 또 헤어지기가 싫어서 ‘설봉 돼지국밥’에 다시 모였다. 돼지국밥은 얼마나 맛이 좋은지.. 거기서 학교 만들어졌을 때 자기 역할을 벌써! 다 나누었다.
나는 인문학 선생, 경석이 아빠는 미술 선생, 소사, 은결이 엄마는 생물 선생, 한이 엄마는 상담실장, 하늘피리는 행정실장, 김철원 실장님은 체육 선생 겸 소사, 한이 아빠는 사회 선생, 그런데 역시 소사 자리 경쟁이 제일 치열하다.
이래저래 흐뭇한 시간이었다. 아마도 훗날 평가하겠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된다면, 이 1박2일의 경험이 ‘마중물’을 길어올린 날로 기억될 것이다. 다들 수고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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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다녀오셨네요! ^^*
그런데, 홍성분들 찾아오는 손님 맞느라 생업에 지장이 있겠어요. 홍성이 너무 많이 알려져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