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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동국시인선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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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동국시인선 / 동국대학교출판부(2012.04.05)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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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는 한국 시의 별 : 한용운, 정지용, 서정주, 조지훈, 이형기
― 지상에는 한국 시의 꽃 : 신경림, 박제천, 문정희, 윤제림,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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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는 한국 시의 별
◐ 한용운(1879~1944) ◑
만해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향리의 식숙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스물일곱에 백담사에서 출가를 했다. 법명은 용운, 만해는 법호이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에 측량강습소를 개설하고 소장에 취임하여(1908) 학생들을 그르쳤다. 일제에 의해 국토는 강탈당해도 개인이나 사찰 소유의 토지를 지키자는 현실적인 목표를 중시한 까닭이다. 그는 명진학교 1회 졸업생인 동시에 동국대학교 초대동창회장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만해시비가 동국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다. 만해는 한국불교 근대화ㅣ 운동의 기수였으며,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의 일원이었고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시집『님의 침묵』(1926)의 시인이었다.『님의 침묵』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을 견디며 건너가는 한용운의 ‘나룻배’였다. 불교의 위대한 가르침 가운데하나인 ‘도세度世’ 즉 중생을 깨우쳐서 극락정토로 인도한다는 가르침이 문학적으로 나타난 경우이다. ‘님’을 향한 부드러운 여성적 목소리 뒤에는 시대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강철 의지와 영원한 이상을 향한 구도의 열정이 담겨 있어 20세기 한국문학사의 금자탑을 이루고 있다.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처럼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기에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일인 것 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정지용(1902~미상) ◑
충청북도 옥천이 고향이다. 휘문고보와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휘문고보,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혜화전문과 서울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는 민족사학으로 정평이 높았으며, 최남선∙김기림∙양주동∙김광섭∙피천득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했다.
“소월과 지용은 동갑이지만 그들의 시는 100년의 차이가 난다”(유종호)는 말에서 보는 것처럼, 정지용은 한국 근대시의 역사에서 가장 새로운 길을 개척한 선구자이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적이고 적확한 묘사, 언어의 조탁과 새로운 실험 등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공로가 독보적이다. 상허 이태준 등과 함께『문장』지를 발간, 조선 문물의 미적 성취와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일에 주력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동안 빛나는 문화운동을 했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 평양감옥에 있다가 이광수 등과 함께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1950).『정지용시집』(1935),『백록담』(1941),『지용시선』(1946) 등을 남겼다.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이든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에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서정주(1915~2000) ◑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호는 미당未堂 ‘덜 된 사람’이란 뜻이지만 ‘영원히 소년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어려서는 마을 서당 및 인근의 줄포에서 공립보통학교 과정을 마쳤으며, 중학 과정은 서울 중앙고보(현 중앙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했다. 1935년 조선불교계의 제일 큰 어른이자 당대의 석학이었던 석전 박한영 대종사 문하에 들어가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함으로써 동국대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중앙불교전문학교는 동국대학교 전신의 하나다. 1960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래 2000년 타계하기까지 모교에서 종신명예교수로 봉직했다.
195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고, 첫 시집『화사집』(1941)을 발간한 이래 모두 15권의 시집을 간행했다.「자화상」「귀촉도」「국화 옆에서」등 수많은 대표작들이 있으며, 유리하고 기품 있는 모국어를 통하여 한국의 전통 미학을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생전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다섯 번이나 추천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20세기한국의 시인들 중 가장 많은 외국어로 번역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정부는 그의 사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으며, 중앙일보에서는 2001년부터 미당문학상을 제정 운영해오고 있다.
자화상(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친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 註. 此一篇昭和十二 年丁丑歲中秋作.作者時年二十三也.(이 시는 시인이 23세 때 (1937) 추석절에 쓴 것이다.)
◐ 조지훈(1920~1968) ◑
경상북도 영양 출생. 본명은 동탁이다.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이 강한 조부 슬하에서 공부하고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뒤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1939).『문장』지에「고풍의상」「승무」「봉황수」등을 발표하면서 정지용 추천으로 등단(1939-1940)한 그는 혜화전문학교 시정 학교 동인지『백지』등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박두진∙박목월 등과 함께 청록파를 결성, 『청록집』(1946)을 간행함으로써 해방 전후의 문학사를 새롭게 만들어 갔다.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고려대학교에서 민족문화연구소를 창설, 초대 소장에 부임(1963)하면서『한국문화사대계』를 편찬하는 등 고려대학교의 국학 전통을 세우는 기초를 다졌다. 그는 시창작만이 아니라 여러 문장에 두루 정통하고 정밀했다. 지식인으로서의 지조와 절개를 몸소 실천했었으며, 젊은 제자들에게는 시와 민족문화와 불의에 항거하는 기백을 가르침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사표師表로 평가받는다. 시집으로 『청록집』(1946),『풀잎단장』(1952),『조지훈 시선』(1956),『역사 앞에서』(1959),『여운』(1964) 등이 있고, 평론집『시의 원리』(1953),『한국문화사 서설』(1964), 수필집『창에 기대어』(1958), 『시와 인생』(1959), 『지조론』(1962), 『돌의 미학』(1964) 등을 남겼다.
승무(僧舞) -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이형기(1933~2005) ◑
경상남도 진주 출생. 진주농림고등학교 재학 당시『문예』지에「비오는 날」이 추천(1950)되어 등단했다. 동국대학교 불교과를 졸업한 후 언론사 기자 생활 20여년을 거친 후 동국대학교 국어구문학과 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진주의 요시노(吉野) 소학교 시절부터 책읽기에 열중, '소설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일찍 드러냈다. 이 독서열은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스스로를 서음書淫이라 할 정도로 열렬 독서가였으며 광적인 탐서가眈書家인 브르헤스에 비견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서정성 짙은 작품을 주로 발표했으나 중기부터는 존재의 무상함과 소멸의 미학을 다루는 비판적 허무주의를 형상화하는데 주력했다. 짧고 간결한 수사, 모순 향용의 역설과 비판적 풍자정신을 통해 현대 문명에 대한 고발과 존재의 고독함을 주요한 특징으로 표방한다. 시집『적막강산』(1963),『돌베개의 시』(1971),『꿈꾸는 한발』(1976),『풍선심장』(1981),『보물섬의 지도』(1985),『죽지 않는 도시』(1994),『절벽』(1998) 등이 있고, 평론집 등 20여권의 저서가 있다. 한국문학가협회상,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윤동주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낙화(落花) -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지상에는 한국 시의 꽃
◐ 신경림(1936~ ) ◑
충천북도 중원에서 태어났으며,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동국대학교 재학 중인 1955-1956년『문학예술』에「낮달」「갈대」「석상」등을 발표,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등단 이후 여러 해 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73년에 첫시집『농무』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피폐하고 핍박받는 농촌 현실에 대한 따뜻하고 섬세한 관찰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런 형상력은 그의 시적 개성으로 성취되어 지속적으로 심화된다. 한국 민중시의 계보를 이어가는『새재』(1979),『달넘세』(1985),『남한강』(1987),『가난한 사랑노래』(1988) 등이 그 성과물이다.
그의 시 세계의 주요한 특성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의 상상력과 세계관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행복한 공동체의 삶에 대한 시인 신경림의 꿈과 희망은 산업화 시대의 어두운 밤을 지나온 우리 시대의 횃불로 기억할 만하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 작가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이사장을 역임했고,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 몸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박제천(1945~ ) ◑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박제천의 시편들은 한국의 전통문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등 동양문화 전통에 기반한 활달한 상상력과 호방한 문기文氣를 펼쳐 보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동국대학교 재학 중에『현대문학』(1966)을 통해 등단했으며, 동국대학교 ‘시인공화국’의 학생시인으로서 동국문풍을 이끌어 나갔다. “시인이 되려고 시를 쓰지 말라. 전인적인 정신의 결집체가 바로 시다. 또한 시인이란 예술가가 되어야지 단순한 장인匠人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은 거짓말을 통해서 진실을 보는 것. 역사는 사실을 통해서 거짓말과 만나는 것.”이라는 언급에서 보는 것처럼, 시적 테크닉보다는 시적 정신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시집으로『장자시』(1975),『심법』(1979),『율』(1981),『나무 舍利』(1995), 『SF-교감』(2001) 등 다수가 있으며,『박제천시전집』(2005) 전5권이 간행된 바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녹원문학상, 월탄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984년 미국 아이오와대학 국제 창작 프로그램(I.W.P) 초청시인. 현재 문학아카데미 대표를 맡고 있다.
애인이여
심우, 심우도 1 - 박제천
천년 전의 애인과 함께
바다란 바다를 모두 돌아다니니
그대, 내 슬픔
슬픔을 찾아 지느러미를 흔드는
넙치나 아구
아구의 옹다문 이빨 사이에
내 고통이 끼어
잇몸이 쑤시기 그지없다
애인이여
그대는 어디 있나
산은 바다가 되고
시비거리는 끝이 없느니
애인이여
이 백지위에 그려진 천년을
차라리 지우개로 지워 버릴 거나.
◐ 문정희(1947~ ) ◑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69년『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미당 서정주를 사사했으며 각종 백일장 대회 단골 수상자이기도 했다. 오늘날 문정희는 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류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의 시편들은 생활의 현장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혜를 쉽고 편안하며 재미있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에서 영역시집 Wind flower, Woman on the terrace가 출판된 것을 비롯해서 그녀의 시는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일어, 알바니아어를 포함한 10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인들에게도 소개되고 있다. 1995년 미국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 초청시인,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고려대 문창과 교수를 역임했다.
시집『꽃숨』(1965),『문정희시집』(1973),『새떼』(1975),『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아우내의 새』(1986),『찔레』(1987),『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1988),『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1992),『남자를 위하여』(1996),『오라, 거짓사랑아』(2001),『양귀비꽃 머리에 꽂고』(2004),『나는 문이다』(2007),『다산의 처녀』(2010)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동국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나지나만문학상, 시카다상 등을 수상했다.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들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 윤제림(1959~ ) ◑
충북 제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문예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1987).윤제림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여행, 전통, 삶의 세부가 뒤섞인 채로 은근한 감동을 선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며, 허투루 한 듯하면서도 삶이 의표를 찌르는 정신의 북비가 일품이다. 그의 시의 특징은 ‘재미’인데, 이는 일상화된 습관이나 감각을 낯설게 만들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발견에 이르게 하는 예술가의 선험적인 자질이다. 또한 동시에 일상의 소중함을 유머러스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후덕한 시선이 독자들에게는 상질의 기품 있는 눈빛으로 다가선다.
직업이 교수 겸 카피라이터이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에서 일하면서 명품 카피들을 많이ㅏ 내놓았다. 시적 상상력과 간결함이 광고 카피와 성공적으로 결합하는 좋은 사례다. 햔재 서울예술대학교 광고창작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시집으로『삼천리호자전거』(1988),『미미의 집』(1990),『황천반점』(1994),『사랑을 놓치다』(2001),『그는 걸어서 온다』(2008) 등이 있다.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을 수상했다.
사랑을 놓치다 - 청산옥에서 5
윤제림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번번이 멀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 여자가 바로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 문태준(1970~ ) ◑
경북 김천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동국문예대학원 문창과 석사,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1994년『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문태준은 독자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시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 향토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따뜻한 감정의 교류를 지향하며, 그러면서 동시에 참신한 감각을 선보인다. 사물을 바라보는 섬세한 성찰의 이면엔 현대사회의 눈부신 속도를 반성하는 ‘느림보 마음’이 자리하고 있으며 말의 울림과 맛깔스러움을 독특하게 선보인다. 큰어머니의 암투병 상황을 다루는 명시「가재미」를 통해 시가 평범한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은 우리 시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축복이다.
불교방송PD라는 독특한 직업 역시 그의 시작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삼라만상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연기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제행무상의 가르침 등이 내면화되어 있어서 한국 시의 사상적 깊이를 심화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시집『수런거리는 뒤란』(2000),『맨발』(2004),『가재미』(2006),『그늘의 반달』(2008), 산문집『느림보 마음』(2009)이 있다.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문학상 들을 수상했다.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 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 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가슴에 부리를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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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겨레의 언어, 동국의 시
137억 년 우주의 역사를 오롯이 담아 하늘에 빛나는 별들처럼, 여기 한 세기 동안 이 땅에서 찬연히 꽃피운 불멸의 시들이 있습니다. 시는 인문정신의 꽃입니다. 대학이 추구하는 인문정신은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 해도 변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인문정신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이유와 삶의 기품에 대해서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한 대학이 구축해 놓은 인문정신의 두터움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지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문학의 백두대간을 이룬 시인들의 절창絶唱으로 겨레의 빛나는 언어, 동국의 황홀한 시혼을 아직도 꽃다운 그대 청춘의 심장에 보내드립니다.
윤재웅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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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겨레의 언어,
동국의 시
우리문학의
백두대간을 이룬 시인들의
절창絶唱으로
겨레의 빛나는 언어,
동국의 황홀한 시혼을
아직도 꽃다운 그대 청춘의
심장에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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