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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大臣率備堂請對, 上引見。 蓋因義州府尹鄭夏彦狀啓云, ‘瀋陽將有蟒牛哨設屯之意故也。’ 左議政趙顯命曰: "此實渠之安邊大略矣。 聞流民前則殆近三十萬, 今則倍蓰, 故欲開利竇, 以爲安集之地, 果如此則來頭之慮無窮矣。" 領議政金在魯曰: "退柵事, 最悶矣。" 上曰: "彼若屯田, 則防備之道, 當着實料理, 而至於設屯事, 瀋陽將所爲, 極陰譎矣。 使臣呈文則可以探知, 而若不得請, 則雖埋骨燕山可矣。 彼人貪風大振, 今雖行賂彌縫, 後必難支矣。" 顯命曰: "若退柵而設屯, 鷄犬烟火相接, 則必多生事之端。 而此猶小者, 流民若近在, 則實係國家安危。" 上曰: "使臣力爭可也。" 司直金始烱曰: "其所設屯處, 與鴨江咫尺矣。 烟火相通, 則男女必無常往來。 如此而其可無弊乎?" 司直趙觀彬曰: "其地土沃, 故必欲開墾, 在我爲必爭之地。 且聞瀋將貪虐, 與訥親之族三四人, 作爲一黨云矣。" 戶曹判書金若魯曰: "若行賂請寢, 則後弊無窮, 恐不可矣。" 上曰: "然矣。 終必至傾朝鮮, 而行賂其亦難矣。 行賂一節, 嚴禁可也。" 顯命曰: "信行首譯玄泰翼上送節目, 極爲駭然, 萊伯之循例上送, 亦非矣。" 承旨金尙迪讀奏狀啓與節目, 上曰: "東武何謂也?" 李周鎭曰: "關白所住處也。" 上曰: "京都留宿云者, 何也?" 周鎭曰: "京都, 卽倭皇所在大板城。 己亥年則使臣暫時經過, 今行則以留宿節目矣。" 上曰: "節目中關白之稱殿下, 已極猥濫, 島主太守之稱殿, 樣極駭然, 而萊伯之不能嚴辭退却, 甚駭然矣。" 顯命曰: "玄泰翼入去時, 太大君及儲君許鷹子十連事, 無報達之事, 而五連以十連定式者, 未可知也。" 上曰: "太守則禮單中本無, 而渠何敢肆然書上耶? 萊伯事尤駭矣。 泰翼豈不知此節目之有傷事體? 其所敢稱書姓名云者, 無尊敬之意。 彼雖自尊, 我則公然書諱乎? 朝廷紀綱, 宜示遠夷。 首譯玄泰翼, 館門外梟示, 萊伯亦當嚴處矣。" 在魯曰: "倭奴之使我國書姓名云者, 卽書御諱之意, 爲譯官者, 見此而不爲嚴斥, 肆然上送, 已極可駭, 萊伯亦何敢循例馳啓乎?" 吏曹參判金尙魯曰: "殆同慢書, 毋惜一律。" 上曰: "我國若有紀綱, 豈至此? 然刑殺甚重。 予當有闊狹, 首譯、萊伯, 命竝拿鞫嚴問。" 仍敎曰: "交隣, 禮、信而已。 禮卽敬也, 信卽誠也。 若無二者, 何以交隣? 今萊府上送節目, 有不敬猥褻者, 爲府使、譯官者, 不能嚴斥, 敢爲轉達, 事之可駭, 莫此爲甚。 其在樹國綱重交隣之道, 不可不各別嚴處。 府使金尙重、譯官玄泰翼, 發遣都事卽爲拿來, 前正閔百祥東萊府使除授, 卽日辭朝。"
대신(大臣)이 비국 당상을 이끌고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대개 의주 부윤(義州府尹) 정하언(鄭夏彦)의 장계(狀啓)에, ‘심양장(瀋陽將)이 망우초(蟒牛哨)에 설둔(設屯)할 뜻이 있습니다.’라고 한 때문이었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는 실로 그들이 변방을 편안히 하려는 큰 책략입니다. 듣건대 유민(流民)이 전에는 거의 30만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다섯 갑절이 되므로 이익이 생길 만한 길을 열어서 안집(安集)할 땅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니, 과연 이와 같다면 앞으로의 염려가 끝이 없습니다."
하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퇴책(退柵)하는 일이 가장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둔전(屯田)을 설치한다면 방비(防備)의 방도는 마땅히 착실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나, 설둔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심양장이 하는 바가 지극히 음휼(陰譎)하다. 사신이 정문(呈文)하면 탐지할 수 있겠으나, 만약 청할 수 없다면 비록 뼈를 연산(燕山)에 묻더라도 옳을 것이다. 피인(彼人)들의 탐욕스러운 풍조가 크게 떨치고 있으니 지금 비록 뇌물을 보내 미봉(彌縫)하더라도 뒤에 가서 반드시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만약 퇴책하고 설둔(設屯)하여 계견(鷄犬)과 연화(烟火)가 서로 접하게 되면 반드시 일이 발생할 단서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작은 것이고 유민이 만약 가까이 있으면 실제로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신이 힘써 다투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사직(司直)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그 설둔하는 곳은 압록강(鴨綠江)과 지척(咫尺)입니다. 연화(烟火)가 통하면 남녀가 반드시 무상으로 왕래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데도 폐해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직 조관빈(趙觀彬)은 말하기를,
"그 지대는 토지가 비옥하므로 반드시 개간하고자 할 것이니, 우리에게는 반드시 싸워야 하는 땅이 됩니다. 또 듣건대 심양장은 탐학(貪虐)하여 눌친(訥親)의 족속 3, 4인과 함께 일당(一黨)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만약 뇌물을 보내어 정지할 것을 청하면 뒤의 폐해가 끝이 없을 것이니, 옳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끝내는 반드시 조선(朝鮮)이 기울어지는 데에 이르러 뇌물을 보내는 것도 그 역시 어렵다. 뇌물 보내는 것을 일절 엄히 금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행(信行)의 수역(首譯) 현태익(玄泰翼)이 올려 보낸 절목(節目)은 지극히 해괴하고, 내백(萊伯)260) 이 전례에 따라 올려 보낸 것도 또한 잘못 되었습니다."
하고, 승지 김상적(金尙迪)이 그 장계(狀啓)와 절목을 읽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무(東武)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관백(關白)이 머무는 곳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도(京都)에 유숙(留宿)한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하니, 이주진이 말하기를,
"경도는 왜황(倭皇)이 있는 대판성(大板城)입니다. 기해년261) 에는 사신이 잠시 경과(經過)했는데, 지금 신행은 유숙한다는 절목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절목 가운데 관백을 전하(殿下)라고 칭했으니 이미 지극히 외람되고, 도주 태수(島主太守)를 칭전(稱殿)함은 모양이 매우 해괴한데, 내백(萊伯)이 엄한 말로 물리치지 못한 것이 심히 해괴하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현태익이 들어갈 때 태대군(太大君) 및 저군(儲君)에게 응자(鷹子) 10련(連)을 허락한 일은 보달(報達)이 없었던 일인데, 5련에서 10련으로 정식(定式)을 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수는 예단(禮單) 중에 본래 없던 것인데, 저들이 어찌 감히 방자하게 써서 올리는가? 내백의 일은 더욱 해괴하다. 현태익이 어찌 이 절목에 사체(事體)를 손상함이 있음을 몰랐단 말인가? 감히 성명(姓名)을 쓰라고 말한 것은 존경의 뜻이 없다. 저들이 비록 자존(自尊)하더라도 나는 드러내 놓고 휘(諱)를 써야 하는가? 조정의 기강(紀綱)을 멀리 있는 오랑캐에게 보여 주어야 마땅하다. 수역 현태익을 관문(館門) 밖에서 효시하고 내백 역시 마땅히 엄중히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왜노(倭奴)가 우리 나라로 하여금 ‘성명을 쓰라.’고 한 것은 곧 어휘(御諱)를 쓰라는 뜻이었는데, 역관(譯官)이 된 자가 이를 보고서도 엄히 물리치지 못하고 방자하게 올려 보낸 것은 이미 지극히 해괴한 것이고, 내백 역시 어찌 감히 관례대로 치계(馳啓)한단 말입니까?"
하고, 이조 참판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거의 오만한 글과 같으니 일률(一律)을 아끼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만약 기강이 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죽이는 형벌은 매우 중하다. 내가 마땅히 넓히고 좁힐 것이니 수역·내백을 아울러 나국(拿鞫)하여 엄문(嚴問)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교린(交隣)은 예(禮)·신(信)일 뿐이다. 예는 곧 경(敬)이고, 신은 곧 성(誠)이다. 만약 두 가지 것이 없으면 어떻게 교린하겠는가? 지금 동래부(東萊府)에서 올려 보낸 절목에 불경(不敬)하고 외설(猥褻)한 것이 있는데, 부사(府使)와 역관이 된 자가 능히 엄준하게 배척하지 못하고 감히 전달하였으니 일의 해괴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교린을 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 각별히 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사(府使) 김상중(金尙重)과 역관 현태익을 도사(都事)를 파견하여 곧 잡아 오고, 전 정(正) 민백상(閔百祥)을 동래 부사에 제수(除授)하니, 오늘부로 사조(辭朝)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