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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햇쌀은 뜨겁고 낮에는 활동하기가 부담이 되는군요..
광복절 휴일 아침 멀할까 망설이다 또 한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존 델러리, 오빌 셀 공저. 이은주 옮김. 출판사 문학동네.
돈과 힘으로 번역된 이 책은 원제목이 wealth & power 부와 힘..
즉 중국의 부국강병을 말합니다..
우리는 동양학에서 부국강병을 아주 단순히 좋은 말..<나라는 부유해지고..군사력은 강하다>는 뜻으로 알지만.. 중국에서는 고래로 부국강병이 그 뜻이 심원하고 철학적 깊이가 참 무섭습니다..
보통 공자.맹자의 <인,의.예.지.신> 충효사상을 동양학,, 유가의 적통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중국에서는 공자.맹자의 인의예지.충효 사상 못지않게... 국운.치세의 중요한 사상이 한비자(상앙.관중) 등의 법가사상인데..그 법가사상의 핵심이론이 인치 보다는 법치..즉 부국강병입니다..
무릇 왕도를 행함에 있어서 인의예지가 없어도 시행은 가능하나? 부국강병이 없으면 왕도 자체가 성립하지않는다? 성현의 도는 인의예지로 가능하나..국가운영은 반드시 부국강병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인의예지(유가)와 부국강병(법가)는 쌍벽을 이루는 국가유지 철학으로 인식되었고..
중국의 수천년의 간의 지도자..경세가..황제들은 국가 리더십에서 인의예지 보다는 부국강병을 이끌어 국가를 통합한 사람을 <영웅> <황제>라 칭해왔으며... 이 책은 근대 중국근대사에서 wealth &power (돈과 힘 즉 부국강병)으로 이끈 정신적 지도자 11명의 리더를 소개합니다...
1.위원: 행기유치-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이 힘..국력이다.
2.풍계분: 자강-수치심을 느껴야 강해진다.
3.서태후: 체용- 지키되 구하라.
4.양계초: 신민-근본적인 변화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5.손문: 일반산사-흩어진 모래는 파도에 쓸려갈 뿐이다.
6.진독수: 신청년-죽지않는 것 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7.장개석:통일-응집된 힘 하나된 마음을 이길 것은 없다.
8.모택동: 혁명-밀려오는 파도를 두려워하지마라.
모택동 2 :불파불립-파괴없이는 건설도 없다.전부 파괴하라.
9.등소평: 흑묘백묘-혁명 보다는 생산. 이념 보다는 실리.
등소평2 :동란-후퇴하는 자는 반드시 패한다.
10.주용기: 입세-강해지고 부유한 후에야 행동할 수 있다.
11.류사오보:몰유적인: 원한으로 사상을 오염시키지마라..
중국 15억 인구를 이끄는 근대사의 리더들은 오로지 아편전쟁과 난징대학살에 이르는 서구의 침탈에 꺽여버린 민족의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해 ...중화주의.민족주의로 무장해 부국강병을 외치면서 150년 중국굴기를 달성해가는 시점인데..(부국강병의 가능성으로 공산주의 마저도 체제로 선택할 만큼...)
한국 지도자들은 먼저 경제개발이 되다보니 어느새 부국강병은 잊고..인의예지..개인의 행복에만 촛점을 맞춘 리더십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지구 1/4의 거대제국 중국이 부국강병을 잊었을 때 역사가 주는 질곡이 얼마나 크다는 점은 이 책이 주는 매우 큰 시사점 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초라한 모습은 돈과 힘을 갖춘..초강대국 중국이라는 공룡에게 거의 한입에 꿀걱 삼켜지는 순간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마치 포크에 찍힌 고기 조각같이...
한 개인이 걱정해도 소용없지만...참 걱정도 되는 그런 순간 입니다..
위 11명의 중국 근대사 지도자의 사상적 요체는... 오후에 한분 한분 더 상세하게 언급해놓겠습니다..///
1.위원..중국 최초의 개화파 선각자..
중국 근대사의 시발점을 1842년..아편전쟁..
아편전쟁 이전의 역사와 이후의 역사로 나누고.이전은 세계의 중심 번영의 역사.. 1842년 이후를 치욕의 역사..로 두는데..
위원은 황조경세문편과 해국도지를 적어서..아편전쟁으로 인한 굴욕의 역사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수치심으로 무장하고..전함.대포.화기 등 선진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했던 인물..
청나라 말 보수적 색채가 강해서 서양문물 이라고 하면 오랑케라고 무조전 배척하던 시대에 위원의 개화주장은 거의 목숨을 내놓은 학설이었고...후세 사상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2.풍계분..자강..
위원의 영향을 받았고..위원이 사상을 비판하면서도 또 계승한 사상가인데..자강의 출발점은 수치심을 느끼는 것..아편전쟁으로 임칙서가 아편을 태우고 전쟁에 지고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개항 조차지를 때어주는 거의 일방적인 침탈 속에서 자강 개념을 중국사회에 심은 인물..
그런데 그 자강의 출발은 중화민족이 수치심을 느끼는 것..
풍계분은 외세가 단순히 대포.화기만 우수한 것이 아니고..정치제도..사회시스템..국민수준 까지 전부 우수하므로..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빨리 서구의 좋은 방식을 중국이 흡수해서 자강을 이룩해야 한다고 설파 합니다.
<교빈려항의>라는 개혁서적을 적어 증국번.이홍장과 접촉해서 중국의 자강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3.서태후:
통상 청나라를 말아먹은 여자로 서태후를 지목하는데..서태후도 쓰러지는 청나라를 구해내지는 못했지만..자강파..증국번.이홍장 등을 지원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양무운동으로 재빨리 중국을 근대화 시킬려고 나름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서태후의 양무운동이 중앙집중식 국가사안이 아니고..지방군벌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지방적 색채가 강했고..1898년 광서제의 무술 변법자강운동 (백일천하/한국의 갑신정변과 유사) 운동에..원세계가 보수파를 지원하는 바람에..서태후 마저도 캉유웨이(강유위.) 양계초 등이 실각시키고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끊고 근대화를 이끌려고 했던 강서제는 유폐함으로써 개혁기회를 실기하고 맙니다..
한국에서 갑신정변의 실패로 김옥균 박영호가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듯이.. 청나라에서도 무술변법(백일천하)의 실패로 개화파의 대부..강유위.양계초가 망명을 떠남으로써 .. 청나라 정권하의 개혁이 아니라... 만주족 지배층에 불만을 품은 한족과 왕조 차체를 갈아엎을려는 혁명세력의 봉기로 나라가 무너지게 됩니다..
서태후는 50년간 체용..청나라 체제를 지키면서 외세를 수용해서. 양무운동과 일부 개화조치를 취했지만 미처 쓰러져가는 청나라 정권을 유지못하고 근대사의 요녀.악녀로 오명을 남겼습니다..
4.양계초 (양잉차오)
캉유웨이(강유위)의 제자 격으로.. 20세기 초반 중국 사상가들에게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양계초는 <모든 것을 갈아없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사상을 전중국에 설파했고..최초로 신문 사설을 통해 계몽의식을 국민에게 전파했다고 합니다.
광서제의 입헌군주제로의 전환 시도(일본 이토 히로부미의 초청)를 계기로..약100간의 백일유신이 일단락하고..강유위와 한편이라는 오명으로 일본으로 망명해서.. 캉유웨이가 이끄는 <개혁적 입헌군주파> 쑨원의 <혁명적 공화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1901년 <신민총보>를 창간했고.
중국의 쇠락 이유를 국민의 근대적 국가의식과 시민의식의 부족으로 설명했고..국가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즉 부강..자강 개념을 넘어...자유..민주..공화의 개념까지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세상에는 오직 힘만이 존재하고..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오직 강해져야 자유이며.국가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만이 해답이라고 설파 합니다..
이런 자강.공화.민주 개념은 일본망명지에서 중국사회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이 <신민총보>의 사설을 수십만의 개혁인사(원세개.쑨원을 포함 )들이 양계초의 잡지가 발표되기를 학수고대 했다고 합니다..
신해혁명 당시에는 보황파..원세계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해 쑨원과 등을 돌렸고..연이어 원세계가 황제로 등극하려하자 실각을 경험했고..교육 부분에서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고..캉유웨이에 이은 양계초의 혁명사상은 추후 진독수.모택동 등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양계초의 파괴..혁신사상은 실질 신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모택동에 의해서 실로 인간 도살장적 파괴로 현실화됩니다..
5,쑨원(손문)
쑨원의 삼민주의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있지만..쑨원은 신해혁명을 이끈 국부로써..양계초.강유위 같은 심오한 사상과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의사 출신의 오랜 외국 망명생활로 강력한 외국의 능력과 엘리트의식이 없는 소탈함, 또 주변사람의 호감을 싸는 강력한 흡인력..
그 와중에도 다른 개혁가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현재 중국의 문제는 청왕조를 타도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는..부국강병과 자강은 현재 청나라로는 불가능하므로 1912년 국민당을 창당하여 보수파 군벌 원세계와 손잡고 청왕조 타도의 신해혁명을 주도합니다..
쑨원은 정치적으로는 혁명주의..문화적으로는 중국전통문화는 살려야 한다는 보수주의를 채택했고..
쑨원의 가장 큰 정치적 실적은 신해혁명 성공 후 원세계의 무력에 의해 국민당이 후퇴하긴 했으나..
연이은 공산당과의 제 1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내서 국민당이 신해혁명 후 실질적으로 중국을 이끄는 정파로써 자리잡게 합니다..
(이때 천두슈가 이끄는 공산당은 워낙 초기라 쑨원의 국민당에 세포로 잡입하여 국민당 당권을 장악할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국민당에 입당합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쑨원을 국부로 인식하고..신해혁명으로 청 왕조는 붕괴시켯지만..국민당을 창당 후 죽음으로써 나라 자체는 건국.통일을 못하고..그 과업은 국민당을 물려받은 제자인 장개석이 이어가게 합니다..
6.천듀수(진독수) 중국 공산당의 창당자이며 중국의 레닌이라 불린 혁명가..
1915년 상하이에서 발간된 <신청년>은 17년 북경으로 근거지를 옮겨서도 당시 최고의 사상가들 북경대 총장 채원배..루쉰(노신) 후스(호적) 이대소(리자다오 동료북경대 교수)마오쩌둥 등의 신지식인들로 잡지를 발간해서 중국 청년들에게 실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신청년>의 필진도 막강했지만 권두사설은 보통 천두슈가 썻는데 중국의 모든 청년들이 눈이 빠지게 신청년 잡지가 나오길 기다렸고 후일 회고에서.. 마오쩌둥은 양계초의 문집이나 천두슈의 신청년은 하도 읽어서 다 외워버렸다고 할 정도로 후학.후 혁명가들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다고 합니다..
1917년 소련에서 레닌이 볼세비키혁명을 성공시키고.. 천두슈의 사상은 점차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중국이 민족주의.민주주의 라는 계몽사상으로는 안되고.. 공산혁명을 통해 세상을 완전히 갈아엎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1921년에는 동료북경대 교수 이대소와 연합해서 중국공산당을 창당하고..초대.2기.3기의 공산당 서기장이 됩니다..
이후 신청년이란 잡지는 공산당을 홍보하는 잡지로 변질되기는 했지만..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나기 전 까지의 신청년이 중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고 합니다..
통상 중국공산당의 창당자가 누구냐? 라고 물으면... 진독수(천두슈) 북경대 교수와 이대소(리다자오) 북경대 교수를 꼽는데..남진북리..라고...남쪽 지역은 진독수가 조직화를 맏고..북쪽은 이대소가 공산당 조직화를 맏아서 쌍두마차로 공산당을 일으킵니다..
중국 초기 공산당은 소련 스탈린의 영향..즉 코민테른의 직접적인 영향과 지시..자금지원..영도지도자 파견으로 심하게 간섭받았는데...쑨원의 1차 국공합작으로 공산당원 전원이 국민당에 입당해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진독수가 공산당에 입당했던 이유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
그러나 진독수(천듀슈)는 코민테른의 입장과 점차 사이가 벌어졌고.. 도시 봉기..노동자 플로레테리아 봉기를 거점전략으로 하는 천두슈와 농촌 농민 봉기를 주장한 이대소(리다자오)와의 입장차..27인의 볼세비키로 대변되는 소련 유학파들의 공격을 받아...종당에는 트로츠기주의자로 몰려서 중국 공산당에서 축출됩니다..
진독수는 신청년 잡지를 통해 중국사회의 의식개조는 물론.. 공산당 창당과 국공합작 추진으로 중국 공산당 초기 5년을 이끌지만..막후 실권자였던 소련 스탈린의 미움으로 권력투쟁은 패배한 비운의 혁명가 였고..1940년 때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는데..이때 주은래가 노선배를 위로 차 병문안도 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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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업이든 개인이든 국가든, 곳간이 든든해야 통장이 든든해야 지갑이 두둑해야...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합니다.. 두둑한 곳간을 만들어야 하는데..ㅎ
이제 서서히 좀 시원해 지것죠.. 너무 더워서 애먹었네 올여름 참말로..
발전이라는 것이 천천히 기반을 다지면서 이루어지면 사회내지 시스템이 더 튼튼할텐데 가난으로인해 오직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우린 너무 갑자기 성장하다보니 기반이 취약한 듯...우리에겐 왜 좋은 리더가 나오지 않는지ㅠㅠ
그렇지요. 우리가 해방.6.25 후 압축성장을 하다보니 모든 기준이 효율.성과 였는데. 이제.3만불 근처 오니 비효율적인 곳도 복지를 해야하는 상황이고. .최근 사회가 행복에 촛점을 맞추다보니 성장동력.프론티어가 너무 현격히 약화되는 듯 합니다. 경제효율과 개인 행복. .이 조화란 참 어려운 것 입니다.
중국은 21세기에 살지만 15억중 90% 인 한족의 의식은 19말 20초의 민족주의에 점점 더 매몰되는 형국임. 이는 공산당의 이념이 민족주의, 중화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며 중국 공산당의 이념이 얼마나 얇고 경박한지를 보여준다. 즉 중국의 목표는 오로지 부국강병 중화몽 그 이상이 아니다. 보라! 2천년전에 로마가 어떻게 식민지를 경영했는지. 지금 중국의 상위1%는 2천년전 로마의 지배층 보다 떨어지는 사상의 폭으로 아시안들을 줄 세우고 우호적인 정치세력을 키울려고 한다. 중국의 부국강병을 대한민국 우리는 얼만큼 소화할 수 있을까.
그냥 노예로 살 겁니다..
우리가 외세가 없다면 중국의 조공국.티벳.신장 위구르. 식으로 맛이가는데..
다행이 우리는 미국 주한미군이 있습니다.
주사파는 정전협정. 고려연방졔. .식으로 정치는 북한. 경제는 남한 식의 일국양제 ..빨대 흡혈귀 경제체제유지를 시도하겠으나. .
점차 거센 중국의 무소불위 패권주의..용골대.마골대의 여자상납 깡패주의로 갈 때 한국은 52th USA state로 갈 겁니다.외길 수순..
30년 내에 중국 압박을 못이겨 심각한 USA 편입검토를 할 겁니다. . .역사의 생존 필연상.
오죽하면 김정일이 일본은 백년의 적.중국은 천년의 적..이라고 유훈을 남겼겠습니까?
중국 한족은 단군 동이족의 만년의 적 입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전체를 말하는 민족적 개념입니까 아니면 휴전선 이남을 말하는 국가개념입니까. 우리는 이 관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틀이 있긴 합니까. 중국 공산당은 중화몽에 올인했읍니다. 그 외는 그들도 뭘 앞장 세울 정체성이나 이념이 없읍니다. 그럼 우린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정치 경제 사화적 이념틀이 존재합니까. 먹고 사는 것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 중요하지요 하지만 이게 이념과 철학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냥 개 돼지를 키우는 것 이상 되지 않읍니다. 좀만간 정전협정을 체결할려고 합니다. 우린 한반도의 주력 세력이 될 수 있읍니까?
될데로 되겠지요 뭐.. 그래도 미국도 만만찬으니 너무 걱정마시길...미.중 서로가 버거운 상대 아니겠습니까?
정체성과 상관없이 주한미군 떄문에 최악의 상황은 안 올듯 합니다...미국도 또한 패권이란 것이 있으니...결국 지난 70년간 처럼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겠지요..
단지 중국과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견제 의심 속에 피상적 좋은 관계를 유지할려고 할 겁니다.
과거 미소냉전과 같이 이제 미중 무역신냉전에
한국은 제법 피해가 컬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