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의학 이야기] 허삼관
피 팔아서결혼식하고 아들 치료비까지
매혈, 섬뜩하나 역사의 한 페이지, 1973년 신촌 헌혈의 집 처음 생겨
눈부신 외과 수술의 발전, 수혈 통한 혈액 보충 있었기에 가능
예전엔 수혈량이 부족해 매혈이 허용됐다. 하지만 1973년 서울 신촌에 헌혈의 집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후 10년 뒤인 1983년엔 헌혈만으로 국내 혈액 수요량 100%를 충당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은 영화 허삼관의 장면들. 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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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옛 추억에 빠지게 한 종이 인형들이 있었습니다. 닥종이 작가 김영희의 투박한 인형들은, 마치 잊고 살았던 우리의 고향 같았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코흘리개 시절에 동생을 들쳐 업고 구슬치기, 딱지치기, 땅따먹기로 해 넘어가는 것도 몰랐던 시절들로 삶의 페이지가 되돌아갑니다. 노란 갈탄 연기 자욱한 교실, 난로 위에서 김을 내는 도시락을 기다리던 동심의 기억들이 새록 새록 떠오르기도 합니다.
복고, 지나간 날에 대한 향수는 감성을 자극하는 맛있는 소재입니다. 그래서 각종 미디어의 단골 콘텐츠이고, 흥행에 목마른 제작사들이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영화 ‘허삼관’ 역시 복고에 많은 무게를 실은 작품으로 하정우 감독의 미술적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배우 하정우는 영화 ‘롤러코스터’로 감독 데뷔를 했고 특유의 개성 있는 연출로 관심을 끌었습니다.
감독 하정우의 두 번째 작품인 영화 ‘허삼관’은 그의 개성은 배어 있으나 지나치게 조신한 작품입니다. 알려진 바로는 그가 낯가리고 숫기가 없는 편이라고는 하나 그의 작품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착한 연출, 숨어 있는 날이 없어 무디게 느껴지기도 하는 영화 ‘허삼관’입니다. 하지만 마치 ‘부다페스트 호텔’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연극 무대 같은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는 영화입니다.
겸손이 지나쳐서 그런지 원작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너무 얌전히 영화화했다는 평이 많습니다. 원작 ‘허삼관 매혈기’는 중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시대소설인데 각색은 우리나라의 1950~60년대를 배경으로 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재건사업이 한창인 1953년의 충남 공주, 착실한 청년 허삼관(하정우)은 동네에서 제일가는 미녀 허옥란(하지원)에게 연정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가갈 밑천이 없는 허삼관, 동네 아저씨들의 매혈(피를 파는 것)에 솔깃해집니다.
피를 팔아 돈을 모은 허삼관은 옥란의 아버지(이경영)를 찾아가 담판을 벌이고 결국은 허옥란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어느덧 11년이 지나고 허삼관은 아들 셋을 둔 어엿한 가장이 됐습니다. 예쁜 아내와 듬직한 삼 형제, 부러울 것 없던 허삼관에게 시련이 찾아옵니다.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첫째 아들 일락이 허삼관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허옥란의 결혼 전 애인이었던 하소용의 아들로 밝혀지고 허삼관과 아들 일락의 사이는 멀어집니다.
일락의 생부인 하소용이 중병에 걸리고 일락을 찾습니다. 이 과정에서 허삼관은 아들에 대한 애정을 어렴풋이 느끼게 됩니다. 결말에 이르러 일락이 병에 걸리자 허삼관은 무리한 매혈로 아들 일락의 치료비를 위한 돈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과연 이 가족은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애틋한 정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 ‘허삼관’입니다.
허삼관이 결혼에 이를 수 있게 된 동력은 피를 팔아 번 돈이었습니다. 매혈, 피를 팔아서 돈을 번다는 섬뜩한 사실이 불과 수십 년 전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을 통해 혈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정부는 1954년 국립혈액원을 창설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활한 혈액 수급이 어려워 의료기관들이 돈을 주고 피를 사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6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를 살펴보면 이런 기사가 당시의 매혈 상황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자기의 피를 돈과 바꾸려는 매혈 희망자들이 요즘 부쩍 들어 매일같이 혈액은행 문전에 쇄도하고 있는데 이 서글픈 군상은 참혹한 생활고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중앙혈액은행은 작년 5월에 채혈한 한 고학생이 사망함으로써 2개월간 폐문하였다가 동년 칠 월부터 다시 개원하였는데 그후 2, 3개월간은 매일 평균 20명 정도의 매혈 희망자가 찾아왔으나 금년에 들어서부터는 매일 60, 70명이나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며...-
물론 지금은 매혈은 법으로 금하고 있지만 엄연한 우리 역사의 가슴 아픈 한 페이지입니다. 이후 일부 의과대학에서 시작된 헌혈운동으로 1973년 서울 신촌에 헌혈의 집이 처음으로 만들어집니다. 10년 뒤인 1983년이 돼서야 헌혈만으로 국내 혈액 수요량 100%를 충당할 수 있게 됩니다. 눈부신 외과수술의 발전은 수혈을 통한 혈액의 보충이 가능했기 때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의학의 진보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 역시, 수혈입니다.
혈액의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 내로의 산소 운반입니다.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이 폐에서 산소와 결합하고, 말초 혈관으로 이동하여 산소를 분리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메르스를 일으키는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외부 침입자들과 싸우는 백혈구, 임파구 등 면역세포들 역할도 중요하지만 혈관이 손상됐을 때 혈액의 누출을 막는 혈액응고 인자들의 역할도 아주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전혈 수혈이라고 해서 공여받은 피를 냉장 보관했다가 그대로 수혈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전혈 수혈은 피의 모든 성분이 수혈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양이 들어가게 되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적혈구 농축액, 혈소판 농축액 등 이른바 성분 수혈이 대부분입니다.
최근에는 많은 의료기관에서 수술 중 수혈을 적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술 중 마취약 조절로 인위적인 저혈압을 유지함으로써 출혈을 줄이고 덱스트란 등의 고분자 수액으로 혈장을 대체해 수혈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은 수술 전에 미리 철분 주사제를 맞는 것입니다.
철분은 적혈구의 산소 운반에 핵심 역할을 하는 단백질, 헤모글로빈의 주성분입니다. 이 철분이 부족하면 철 결핍성 빈혈이라는 대표적인 빈혈이 발생하게 되지요. 그래서 출산을 앞둔 임신부가 빈혈이 심하거나, 환자가 다량의 출혈이 예상되는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 미리 철분을 주사해서 헤모글로빈 함량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현재까지는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으나 단점은 철분 주사 후 헤모글로빈이 증가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심한 빈혈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량의 출혈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에게는 오직 수혈만이 살 길입니다.
의학 발전이 현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수혈입니다. 피를 대체할 인공 혈액의 개발은 아직 묘연합니다. 하지만 산소를 공급하는 적혈구의 기능 대체에 대한 연구들은 조금씩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부작용 없는 인공 혈액이 개발돼 외과의사들이 출혈에 대한 두려움 없이 수술에 몰입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 봅니다.
척추전문 나누리서울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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