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녹)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사르디스 교회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고, 라오디케이아 교회에게는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라고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장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 묵으시며,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을 것이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3,1-6.14-22
나 요한은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2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5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6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14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15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18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22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소설가인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설정과 내용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인공 스크루테이프라는 노련한 악마가 젊고 미숙한 악마인 조카 웜우드에게 영혼을 유혹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하여 악마가 어떻게 인간을 유혹하고, 어떤 상황을 즐거워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환자(영혼)에게 모든 일에서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어라.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하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는 우리한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무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스크루테이프의 편지』, 8편). 빠짐 없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신앙이 점잖게 중용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 없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안타까워하십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3,15)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지만, 그 말씀에 온전히 헌신하여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이와 반대로 복음의 자캐오는 아주 차가웠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 아주 뜨거워진 사람입니다. 그는 세리이고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자기 죄를 네 곱절로 기워 갚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나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 삶에 헌신하겠다는 뜨거운 결단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세(代洗)’를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대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세례입니다. 대게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교리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분에게 줍니다. 병의 증세가 위중해서 하느님 품으로 갈 수 있는 분에게 줍니다. 형제님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대세를 위해서 형제님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형제님은 외견상 매우 쇠약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뚜렷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본인이 세례명을 직접 정하였습니다. 2년 전에 세례를 받았던 아내와 중학생 때 세례받았던 딸과 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형제님과 가족들에게 천주교회의 4대 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하느님은 삼위일체라는 것,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나쁜 이에게는 벌준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2년 전에 은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예전에 성경을 2번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시간 되면 성경을 써 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때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믿으시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필리포스가 대답하자, '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그가 말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저는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형제님의 의지를 보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버지 곁에 있는 딸의 사랑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자캐오는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았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권위와 세상이 주는 재물로는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바람 따라 들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대세를 청하였던 레오 형제님, 세례를 받고자 했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 타는 목마름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자캐오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진리를 찾았다면 다른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 대한 목마름으로,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주님께 대한 희망으로 주님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얼른 내려오시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얼른 내려오시게
어느 누구도
자리를 내주지 않아
급히 오른 나뭇가지 위
외롭게 휘청거리며
어떻게든 함께하려는
갸륵한 나의 사람아
얼른 내려오시게
나와 함께하고픈 그대와
내가 함께할 수 있도록
그대 품고픈 나를
그대 품을 수 있도록
홀로 머문 자리 박차고
함께 머물 너른 곳으로
얼른 내려오시게
오늘의 성인
성 라파엘 칼리노프스키(Raphael Kalinowski)
성인구분 : 신부
활동연도 : 1835-1907년
은이름 :칼리노브스키, 칼리노스키, 칼리노우스키
성 라파엘 칼리노프스키 신부는 1835년 9월 1일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에서 귀족 출신의 저명한 수학교수인 안드레아 칼리노프스키(Andreas Kalinowski)와 요세파 포이온스카 칼리노프스키(Josepha Poionska Kalinowski)의 아들로 태어나 요셉(Josephus)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빌라에 있는 귀족들을 위한 학회에서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학업에 있어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1851년부터 다음해까지 그는 호리호르키(Hory-Horky)에 있는 농업학교에서 동물학, 화학, 농학, 양봉을 배우고, 1853년부터 185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Sankt Petersburg)에 있는 공병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위관급 장교로서 공병학교의 수학강사로 있으면서 1859년에는 쿠르스크-키예프-오데사(Kursk-Kiev-Odessa)를 잇는 철도의 설계를 담당하였다. 1862년에 대위로 승진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로 배치된 그는 그곳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모든 비용을 제공하며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1863년 러시아의 압제에 대항하여 폴란드 반란이 발발했을 때 그는 러시아 군대에서 제대하고 빌나 지방의 반란정부의 각료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죄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집행하지 않겠다는 양해를 구했다. 1864년 3월 24일 러시아에 체포된 그는 반란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러시아 정부는 다시 그의 형을 시베리아(Siberia)에서 10년간의 중노동으로 감형하였다. 복역 기간 중 그는 놀라우리만큼 강한 정신력과 인내심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동료 죄수들에게 기도의 정신과 평온함 그리고 희망을 갖도록 도우며 위로할 줄 알았다.
1874년 풀려난 그는 리투아니아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프랑스 파리(Paris)로 가서 3년 동안 개인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877년 마침내 그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성소에 응답하여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성 요셉의 라파엘(Raphael a Sancto Ioseph)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헝가리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82년 1월 15일 크라쿠프(Krakow) 근처의 크체르나(Czerna)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도적 열정에 불탔던 그는 신앙을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바쳤고, 다른 카르멜회 수사와 수녀들이 완덕의 산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에 빠진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해 그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래서 그의 장상은 그에게 많은 중요한 임무를 맡겼고, 죽을 때까지 그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실행하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던 그는 1907년 11월 15일 마침내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그는 바도비체(Wadowice)에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서 선종하였고, 그의 유해는 크체르나에 있는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성덕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놀라우리만큼 칭송을 받았다. 1934년부터 크라쿠프 교구에서 그의 시복에 대한 절차가 시작되었고, 1983년 6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그의 시복식이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거행되었다. 그 후 1991년 11월 17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보편교회 모든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성 오바드야(Obadiah)
활동년도 :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지역 :
같은 이름 : 아브디아스, 오바디아스, 오바디야
성 오바드야(Abdias, 또는 오바디야)는 구약성서 12 소예언서의 하나인 오바드야서에 등장하는 예언자이다. ‘야훼를 섬기는 이’ 또는 ‘야훼의 종’을 뜻하는 오바드야는 히브리어에서 흔한 이름으로, 구약성서에서는 다윗 시대부터 유배 이후 시대까지 여러 사람이 이 이름으로 불린다. 바빌론 탈무드에서는, 북왕국 아합 시대에 궁내 대신으로 있으면서, 이세벨 왕비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학살할 때에 백 명을 구해 준 오바드야를(1열왕 18,3-4) 이 예언자로 지목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소예언서를 열둘로 고정시키려고 말라키(Malachias)서처럼 주인 없이 전해지는 예언을 오바드야라는 이름으로 묶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러할 개연성도 별로 크지 않다.
성 오바드야는 실제 예언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는 성전에서 봉직하던 전례 예언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도 대환난이 일어난 뒤, 폐허로 변해 버린 성전에서 참회와 탄원의 전례가 거행될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 예언서에 수록된 신탁을 선포하였을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짧은 21절로 된 오바드야서에서 예언자 오바드야는 억압자 앞에서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나라가 바빌론에게 약탈을 당하고 망해가고 있다. 이때 오바드야가 나서서 형제 나라 에돔(창세 25,19-28; 36,1 참조)이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대신 부자들을 편들었다고 비난한다. 에돔은 사태를 즐기고 있었다. 땅을 정복하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약탈과 박해와 살인에 동참하고 있었다. 선택받은 사람들과 보호를 청하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못된 짓을 복수심으로 행하고 있었다. 과거의 불목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2열왕 8,20-22 참조). 에제키엘 예언자가 말하는 것처럼, 에돔은 ‘영원한 미움’을 간직하고 있었다(에제 35,5).
그 외에도 에돔인은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자기네를 이길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3절). 자기네 지혜와 자기네 전사들의 용맹성을 내세우면서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오바드야 예언자는 동맹국들이 보호를 받지 못하고 공격을 당하는 형제 나라 에돔에게 등을 돌릴 때(5-9절), 그 지혜가 무지로, 그 용맹성이 비겁함으로 변하리라고 말한다. 오바드야는 유대 왕국도 무죄하지 않고 그래서 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겪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역사상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형제국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에돔에게 큰 잘못이 있음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