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만 원 짜리 변기통과 1500만 원 짜리 우산을 본 적이 있는가? 미국 최대의 사기꾼 경영자 타이코 인터내셔널의 최고경영자(CEO) 데니스 코즐로프스키(Denis Kozlowski)가 여행 출장 시 가지고 다닌 물건이다. 그는 회사 공금을 유용해 개인적인 향락에 썼다. 지중해 사르디나 섬에서 열린 아내의 생일 파티를 위해 200만 달러를 지불했으며, 그 파티에는 얼음으로 조각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전시되었다.
매도프 전 나스닥증권거래소 위원장은 20년간 총 650억 달러 규모의 금융 피라미드 사기(폰지)를 친 혐의로 징역 15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미국 금융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미국 맨해튼 연방법원의 데니 친 판사는 2009년 6월 29일 이렇게 말했다. “매도프는 다른 어떤 금융 사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사악한 죄를 저질렀다. 이런 범죄가 또다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선 분명한 메시지가 필요하다.” 물론 매도프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었나 보다.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금 순환 문제가 금방 해소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불가능한 수준으로 커져버렸다. 범죄 행위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한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생산적인 일은 도외시하고 남의 돈으로 장난을 치면서 살아온 미국 금융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매도프다.
폰지 사기는 아주 간단하다. 처음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서 그 돈으로 이자를 주고 그들이 다시 두 번째 사람들을 데리고 오면 두 번째 사람들의 돈으로 다시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람들에게 이자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투자전문가와 할리우드 스타, 노벨상 수상자까지 이 사기에 당했다. 할리우드의 대표적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워렌 버핏의 오랜 파트너인 데이비드 고트스맨(이 사기로 인해 그의 재산은 25억 달러에서 18억 달러로 줄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며 대학살 생존자인 엘리 위젤(자신의 비영리단체인 엘리 위젤 재단은 전체 자산의 상당 부분인 1520만 달러를 잃었다), 스페인의 최고 부자 여성인 알리시아 코플로위츠, 뉴욕 메츠의 구단주 프래드 윌폰, 영화배우 케빈 베이컨과 그의 아내 카이라 세드윅, 존 말코비치와 자자 가보 등도 돈을 날렸다. 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트다.
위의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돈’의 위기다. 미국은 앞날을 생각하지 않은 채 돈을 찍고, 부족한 부분은 채권을 발행하여 남의 나라에서 빌릴 뿐 아니라 값싼 이자로 부동산과 주식을 올려서 거품을 만들었다. 돈이 돈을 벌게 한 후 자기들의 배만 채운 것이 오늘날 미국의 현실이다. 그 안에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오만과 자기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 인민은행은 2009년 3월 26일 펴낸 보고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시장은 항상 잘못된 것을 스스로 바로잡는다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자기만족적인 확신 때문에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촉발됐다.” 미국이 쉽게 몰락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몰락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이후 세계경제가 어떻게 위기를 만들었는지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닷컴 붕괴 → 금리 인하 → 부시 취임 → 엔론 등 스캔들 → 주택경기 부양 → 서브프라임 사태 → 세계경제 위기
IMF 당시 우리나라의 대우를 공격하던 미국, 투명회계를 이야기하던 미국에서 엄청난 회계부정이 저질러졌다. 바로 엔론Enron이란 회사이다. 회계법인과 컨설팅회사 기업 CEO, 사외이사가 모두 짜고 서로 봐주는 시스템이었다. 그 과정에서 CEO들은 천문학적인 보상을 받았다. 최근에 망한 워싱턴뮤추얼의 대표(CEO)는 18일 동안 근무하고 우리 돈으로 162억 원을 받았다. 최근에 망한 AIG는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도 회사 간부들이 플로리다로 휴가를 떠나 몇 백만 달러를 썼다.
그렇다면 미국의 위기는 부시의 잘못된 경제정책 때문이었을까? 2001년 하반기부터 엔론, 월드컴WorldCom, 타이코 인터내셔널Tyco International 등 거대 기업들이 회계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면서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도덕적 해이와 규제시스템의 미비는 오래 전부터 경고음을 울려왔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이를 무시한 채 규제를 완화하고 경기를 부양했다. 경기부양에 고심하던 부시 대통령은 이듬해인 2002년 4400억 달러 규모의 주택경기 부양책을 발표하고, 미연방준비은행(FRB)은 2003년 6월 기준금리를 45년 이래 최저수준인 1%까지 낮추게 된다.
정부의 적극적인 주택경기 부양책과 사실상 ‘헐값’수준으로 떨어진 대출비용 덕분에 미국인들은 너도 나도 주택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2004년 12월에는 주택보급률이 사상 최고치인 69.2%까지 치솟았다. 은행들은 불법 이민자 등 기존 대출기준으로는 도저히 돈을 빌려줄 수 없는 고위험 시민들에게까지 ‘서브프라임(비우량담보대출)’을 실시했고, 미국 전역의 주택 가격은 비정상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6년 4월 워싱턴 소재 메리트 파이낸셜이라는 금융기관이 서브프라임 사태로 파산을 신청하고 이듬해인 2007년 봄에는 5대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 산하 헤지펀드가 도산위험에 몰리면서 악몽은 시작됐다. 2008년 봄 베어스턴스가 무너졌고, 모기지론 업체 인디맥도 영업을 중단했다. 결국 9월 들어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월가는 결정타를 맞았고,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한 양대 모기지론 업체(패니메이, 프레디 맥)은 국유화라는 비상처방을 받았다. 위기의 들불은 이미 실물경제로 전이돼 자동차 회사 빅3 등 산업 전분야가 침체 위기를 맞았다. 부시 대통령이 남긴 경제위기를 치유하기 위해 버락 오바마 정부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추진할 계획이지만, 가변요인들이 너무 많아 얼마만큼이나 ‘약발’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미국의 신용평가 회사들이 미국에 내린 신용평가는 어떨까?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 법이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진앙지인 미국이 2009년 1월 13일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푸어스(S&P)로부터 다시 한 번 국가신용등급 최우량(AAA) 판정을 받았다. 향후 이 등급을 유지할 전망 역시 ‘안정적’이었다.
사실 스탠더드앤푸어스(S&P)를 비롯한 무디스, 피치 등 3대 신용평가사의 고무줄 잣대 시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한국의 신용등급은 ‘투자적격’이었고 2001년 파산한 미 에너지기업 엔론의 신용등급도 파산 4일 전까지 역시 ‘적격’이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얼마 전 ‘무디스가 최근 합병당한 대형 모기지 업체의 신용등급을 수년 전 하향조정했다가 회사측 반발로 하루 만에 다시 올린 바 있다’며 ‘경비견 역할을 했던 신용평가가가 어느새 애완견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S&P는 미국 신용등급 유지의 이유로 ‘재정악화는 일시적이며 다른 신용능력으로 극복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S&P는 “높은 소득수준과 유연한 경제구조, 특히 ‘달러를 찍어내는 나라’로서의 강점이 재정악화와 금융혼란, 대외여건 악화와 복지비용 증가 등의 약점을 눌러 이길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뢰는 추락했지만 신용등급은 유지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미국은 지금 세기적 위기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붕괴된 금융시스템은 대규모 공적자금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고 ‘재정적자가 1조 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밝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말이 현실화된다면 국가의 존립마저 위험해질 수도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주주자본주의이다. 회사 가치를 올리기 위해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회사를 인수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해 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높인 후 다시 기업을 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기는 것이 미국에서 돈 버는 시스템이다. 이런 방법으로 미국은 억만장자인 슈퍼리치(초대형 부자)도 많이 만들어냈다. 하지만 반대로 1970년 이후 미국 중산층의 소득은 증가하지 않고 있으며 삶의 질도 유럽에 비하면 형편없다. 1인당 소득은 유럽보다 높지만 노동시간은 유럽보다 월등히 길다. 미국에서는 구급차를 한 번 부르려면 한국 돈으로 백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 소득이 없는 사람이 아프면 미국에선 그야말로 낭패다.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존큐John Q>는 이런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던 존 큐는 아들 마이크가 야구 경기 중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급히 응급실로 달려간 그는 아들이 심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더욱 절망적인 소식은 보험 혜택은 물론 정부 지원금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아들을 버린 미국의 정책에 망연자실한 아버지는 마침내 병원을 점거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미국에서는 돈이 없거나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환자가 병원 응급실에 갈 경우 치료는 받을 수 있지만 엄청난 비용 독촉에 시달리게 된다. 뉴욕에서 뇌출혈 증세를 일으킨 한국인 문철선 씨는 퇴원 후 두 번째로 이 병원을 찾았을 때 이전 입원비와 치료비 등으로 모두 4천500달러의 병원비를 부담해야 된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 돈을 지불할 수 없었던 문씨는 그 이후 다시는 병원에 갈 수 없었고 얼마 후 숨졌다(<뉴욕타임스>).
미국은 전 세계 의료비의 절반 정도(미국 GDP의 13~14%)를 쓰고 있음에도 인구 중 4300만 명(미국인구의 15%)은 어떠한 형태의 보험체계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 영아 사망률도 우리보다 높다. 미국의 의학기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다큐멘터리 감독인 마이클 무어의 다음 영화는 미국 의료보험제도 비판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최상위 부자 1%가 국민소득의 16%를 차지하고 최상위 5%의 부자가 국민소득의 38%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 소득 순위 하위 50%의 국민이 가진 자산이 전체의 2.8%에 불과한 사회가 미국이다. 빌게이츠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셔도 ‘한’ 잔이라는 말이 있다. 내 주변에 부자가 있다고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부자만 늘고 삶의 질은 나아진 것이 없는 것이 오늘 미국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