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찮은 것. 앙리 르페브르에 의하면 일상은 “사회의 빛과 어둠, 공허와 충만, 힘과 허약함이 투사되는 평면”이다. 그렇다. 일상은 심연을 갖지 못한 평면이다. 한없는 평면의 증식. 일상은 일상을 회임하고 일상을 분만한다. 일상은 일상으로 순환한다. 순환하면서 내재적인 에너지는 소모된다. 소모되는 것은 충전되지 않는다. 소모는 다만 고갈을 향하여 달려갈 뿐이다.
네오 : “나는 너희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지금 너희를 느낄 수 있다. 나는 너희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들은 변화가 두려운 것이다. 나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것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말해 주려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것이 어떻게 시작될 것인지 말해 주러 왔다. 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그들이 보기를 원치 않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너희들이 없는 세계, 규칙과 통제가 없고 경계나 한계도 없는 세계......어느 것이든 가능한 세계........ 우리가 거기에서 출발해 어디로 갈 것인지는 내가 너희에게 남겨주는 선택이다.” 영화 「메트릭스」의 대사. 여기서는 『메트릭스로 철학하기』(슬라보예 지젝 외, 이운경 옮김, 한문화, 2003)에서 재인용
네오 : “나는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모피어스 : “자네의 정신이 그것을 진짜로 만드는 거야.”
네오 : “메트릭스에서 죽으면 여기서도 죽나요 ?”
모피어스 : “육체는 정신이 없으면 살 수 없어.” 위의 영화의 대사.
거기란 심연과 이면 없는 메트릭스, 위조된 현실이다. 내부 없는 외부. 전자 사막. 상하 좌우를 구분할 수 없는 순백색의 공간. 메타언어들과 기호들의 소비가 일어나는 곳. 이것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진부하고 몽환적이다. 우리는 현실과 시뮬레이션의 경계를 지나간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헛것들이다. 헛것들의 실재. 그러므로 우리가 씹는 스테이크는 사실은 스테이크가 아니다. 실재보다 더 똑같이 위조된 스테이크, 스테이크의 이미지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 스테이크보다 위조된 스테이크에서 더 만족감을 느낀다. 이 지각의 왜곡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 우리를 기만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거기에는 죽은 자도 산 자도 없다. 오직 좀비들이 어슬렁거릴 뿐이다. 살아 있어도 죽어 있는 자들. 그러므로 좀비는 죽지 않는다. 좀비는 분해될 수 있을 뿐이다. 누가 우리를 좀비로 만들었는가 ? 우리를 기만한 것이 우리였듯이 우리를 좀비로 만든 것도 다름아닌 우리들이다.
거기는 안/밖이 지워져 있기 때문에 외부로 빠져나갈 탈주선들이 없다. 거기의 외부로 뻗어 있는 무수한 탈주선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탈주선들은 실재를 실재보다 더 똑같이 복제한 시뮬라크르의 중심을 지난다. 탈주선들은 실재의 흔적, 가짜, 혹은 이미지들인 것이다. 거기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밖으로 탈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밖은 안이 된다. 거기는 반복과 순환이며, 오로지 이 순환을 감싸는 더 큰 순환이 있을 뿐이다. “시작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박정자 옮김, 세계일보, 1990
탈현대사회에서 삶의 지속성과 일과성을 지배하는 것은 거기의 시간, 세속의 시간이다. 우주의 시간은 오래 전에 막을 내렸다. 인간-신의 분리, 인간-자연의 분리가 갈수록 심화되고, 인간은 거기의 사막에서 표류한다. 신과 자연이 추방된 빈자리를 메꾸는 것은 거기이며, 그 밑에서 그것을 구조화하는 것은 기원 없이, 혹은 기원이 모호한 곳에서 만들어진 조직, 계획이다.
일상이라는 평면은 순환하는 체계 속에 놓여 있고, 그 반복 속에서 주체의 꿈과 상상을 갉아 먹는다. 속으로는 고갈되지만, 겉으로는 반복의 포만감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일상에는 “외관상의 드라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면 밑으로 가라앉은 크고 작은 힘들은 수시로 “나”를 공략하고, 마지막 한 점 활력까지 고갈된 “나”는 사물화된다. 그리하여 일상은 주체의 죽음을 먹고 나날이 더욱 공고화된다. 사물화와 싸우려는 자들은 도피의 꿈을 쫓게 되는데, 그 도피는 첫번째로 백화점과 같은 스펙타클한 공간에서 시간 보내기 등으로 나타난다. 백화점에서 눈으로 화려한 전시물품들을 들러보고 몇 가지의 물건들을 구매함으로써 일상성이 질식시킨 몽환적 꿈과 열망의 일부가 되살아난다. 환상을 쫓는 도피와 비일상 세계로의 꿈은 소비행위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연극이나 영화, 고가구, 미술품, 예술의 향유, 교회나 절의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기와 같은 문화적 욕구, 종교적 욕구를 통해 표출된다.
일상은 개체의 평화와 안정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개체의 영토성에 매몰시켜 자발적인 고립을 초래한다. 일상은 내 것, 다른 개체와의 임계적 거리를 갖는 것, 그리하여 영토화된 것이다. 이 영토에 타자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영토성의 주장은 동물에게서 하나의 본능으로 새겨져 있다. 개들은 여기저기 제 활동영역의 경계에 오줌을 뿌리고, 새들은 울음소리를 내고, 다른 동물은 나무에 몸을 비며 털과 냄새를 남긴다. 이 영토는 공공성을 갖지 않는 노동과 비밀들, 즉 사생활로 채워진다. 이 영토 안으로 다른 개체가 무단침입 할 때 동물들은 저마 특유의 경고신호를 보내고 공격적인 행동을 한다. 모든 영토들은 반드시 지표를 갖는데, 일상의 표면적 지표는 '개인'이며, 독립성과 자율성은 일상의 내부로 잠복한 지표들이다. 일상이 근대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은 일상이 이성에 대한 근대적인 가치부여라는 점에서 분명하다. 일상이란 한껏 웅크린 개인들, 지층화한 활동들에서 나타난다. 한껏 웅크림은 힘과 속도들이 생성을 위한 탈주선들을 모색하지 않으며, 새로운 배치를 만들지도 않고, 오로지 소유를 형성하는 작용을 한다. 일상에 갇힌 사람들은 사물들과 타인들, 혹은 관계들에 자기 것임을 표시하는 서명을 하고 깃발을 꽂는다. 이렇게 지층화하는 것들의 증가로 말미암아 일상은 점점 빽빽해지고 무거워진다.
일상에서 평화와 안정을 구하는 일상적 자아의 정체성은 내부의 힘과 속도들을 끊임없이 지층화하는 나무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나무는 정태적 존재를 가리키는 원형적 심상이다. 그 나무의 내면에는 수없이 많은 눈[目]들이 있다. 그 눈들은 저의 삶 밖에 있는 무수한 길들을 본다. 대지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그 나무의 내면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불은 타오르는 현존의 표상이면서, 아울러 이 삶이 아닌 저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무의식의 욕망을 보여준다. 불은 팽창과 파열, 그리고 질적 변화를 이끈다. 나무 속의 불이 커질 때 나무는 나무 아닌 것, 탈주선을 내면화한 나무가 된다. 불을 갖지 않은 나무란 무, 부재,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오로지 불을 가진 나무만이 나무에 속박되어 있으되 끊임없이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불의 날개의 꿈을 꾼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벼워져야 하고 불의 날개를 얻어야 한다. 나무 속에 있는 불의 솟구침은 존재의 솟구침, 즉 우화(羽化)에의 동경이다. 나무는 이미 내부에 불을 가진 나무, 점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나무, 하나의 부동성에서 무수한 탈주선으로 분화하는 나무, 뿌리를 가진 새의 기호가 된다. 제 안의 힘과 속도들로 저 태우며 나아가는 나무는 수목형의 나무가 아니라 불의 나무에 속한다. 불의 나무는 대지에 속박되어 있되 제 힘과 속도들로 저를 태우고 불의 종달새, 불의 피닉스가 되어 창공을 날고 있다.
본디 나무는 모성(母性)의 영역인 대지에 뿌리를 내린, 태생적으로 유목의 운명을 거부하는 붙박이의 존재다. 나무는 양육자인 어머니의 대지로부터 수유(授乳)를 받으며 몸피를 키우고 잎과 열매를 피워낸다. 저 나무의 붙박이 운명의 건너편에 있는 유목의 운명은 어린아이의 것이다. 한편으로 나무의 부동성은 열린 소통의 세계로, 타자의 세계에로 나아가기 이전의 완강한 고립과 자폐성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암중모색하는 어린아이가 빛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계몽의 기획이 필요하다. 깊은 밤의 정수리에서 암중모색하는 어린아이는 제 몸의 기름을 태우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이미 그 내면에서 변화의 활발한 조짐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린 자아는 나무의 어둠 속에 일어나 '불'의 세계로 나아간다. 불은 타오르는 현존의 상징이다. 바로 바술라르가 명제화한 "체험한 불"이다. "응시되고 명상된 불꽃으로 내면적 풍요를 만드는 것, 따뜻하게 해주고 환하게 비춰주는 화덕으로, 소유된 불, 은밀하게 소유된 불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체험한 불의 심리학이 연구해야 할 존재의 영역이다. 이런 심리학은, 이미지들의 통일성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어떤 우주의 힘들의 내면화를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들, 즉 불, 불꽃들, 불길, 불덩어리들이 제공하는 이미지들을 체험할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곧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동하는 불이라는 것을 의식할 것이다. 체험한 불의 심리학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아마도 강렬함 ― 순수한 강렬함 ― 의 심리학에, 존재의 강렬함의 심리학에 우리를 열어놓는 일일 것이다. 불의 존재가 곧 강렬함의 존재임을 보여줄 수만 있어도 우리는 그것의 환위명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에서 존재는 결코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긴장의 다양함 속에서 항상 생동하고 있어어 올라가고 내려가며, 빛나거나 어두워진다. 불이란 결코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에도 살아 움직인다. 체험한 불은 늘 긴장된 존재의 표시를 지니고 있다. 꿈꾸는 사람에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들은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강렬함의, 상상해낸 강렬함의 이미지들 덕분에 우리는 기습적으로 닥치는 근육통 같은 강렬한 난폭함에서 벗어난다. 우리가 아니무스의 불과 아니마의 불을 잘 구별할 수 있다면, 부드러움, 온순한 불, 아니마의 불에는 부드러운 강렬함의 표시인 강렬한 온화함이라는 수식어가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체험한 불의 심리학을 포괄적으로 연구하면서 우리는 형용사가 실사(實辭, 명사)에 미치는 영향을 느끼게 해주는 수많은 경우를 볼 것이다. 우리는 형용상의 존재론을 구상할 것이다. 사람들이 상상할 때, 실체는 너무 멀리 ― 우리 바깥에서 너무 멀리, 그리고 우리 안에서 너무 멀리 ― 있어, 상상력은 형용사들의 유동성에서 더욱 잘 작용한다. 그러므로 체험한 불은 경험적 시간을 지칭할 수 있을 것이며, 흘러가고 넘실거리는 삶을, 또한 솟구치는 삶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불의 일시적인 삶을 수평적 평온을 거의 알지 못한다. 불은, 그 고유의 삶에서, 항상 어떤 솟구침이다. 불은 사그라질 때에야 비로소 수평적 온기가 되고, 여성적 온기 속에서 부동성이 되는 것이다."
나무들은 더 이상 "수목화되고 뿌리내린" 것도 아니며 따라서 "수목화된 도식"에 에 따라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나무-점이나 뿌리를 이루는 수원(水源)이 아니라 강으로 행동한다. 그는 나무 아래 앉기보다는 물과 함께 흘러간다. 그리고 부처의 나무는 그 자체로 리좀이 된다."(천개의 고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상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자아의 통어의 경계 안에 삶과 타자, 그리고 곤고한 현실을 놓아두려는 욕망을 포기할 때 마음은 오히려 조급한 욕망의 감옥으로부터 풀려난다. 마음이 내달려온 막다른 지점에 이르러 자아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으로 슬쩍 물러난다. 그때 욕망과 목전의 필요에 허덕이던 축생(畜生)의 삶은 해탈을 얻는다. 보라, 자아는 어쩔 수 없음의 자리에서 "너"에 대한 시적 자아의 간섭을 끊어버리고 바람결에 제멋대로 흔들리도록 방치해 둔다. "나"에게는 그것이 '방치'이지만, "너"에게 그것은 '자유'다. 부처의 나무란 그 어쩔 수 없음의 막다른 벼랑 앞에서 갇힌 자아, 함몰된 자아가 어떻게 자유를 얻고, 길을 찾아내는가를 보여준다. 불은 불을 가진 자, 혹은 불 가까이 있는 자를 태운다. 저를 태우지 않는 자는 다른 무엇이 되지 못한다. 존재의 질적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의 횡단적 운동이 필요하다. 저를 태우는 나무만이 부동성에서 벗어나 불의 새가 된다. 타오르는 나무는 성숙에로 나아가는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는 나무다. 공중에 퍼져나가는 연기란 나무들이 저를 태우면서 우화에의 꿈이 지어내는 내면의 은밀한 문장들인 것이다.
일상의 평면성은 일상이 이루어지는 환경과 공간의 특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 평면을 가로질러 가는 것은 언제나 “사물들․확신․가치․역할․만족․직업․일․상황․기능”들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욕망의 생산과 소비의 순환에 의해 규정된다. 하나의 단층이 있다. 그 밑에, 일상이라는 평면화된 지층 아래에 “출발․분열․꿈․상상․도피”가 있다. 일상에서 과잉 억압된 욕망들은 지층 아래로 스며든다. 한없는 누수. 지연되는 욕망들. 에너지가 생성하는 계기는 존재, 깊이, 실체에서 나오지만, 일상은 그것들과 교섭하지 않으며 다만 그 표면으로 미끄러져 간다. 미끄러져 가는 것들은 덧없음, 현상의 반복, 환멸과 피로라는 찌꺼기를 토해낸다. 그리하여 거기서 피로라는 질병이 생겨난다.
일상은 정치권력이나 사회적 형태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지만 그것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법은 없다. 그것들은 잘게잘게 쪼개져서 이 평면 밑으로 잠복하고 오로지 간접화되어 나타날 뿐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상이란 회전대는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그 기계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생활이란 걸 토해낸다. 우리는 뜻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걸 놓치면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걸 붙잡고 탐욕적이고 역동적으로 소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