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고 무용한 공부_내면의 삶을 기르는 배움에 대하여
제나 히츠, 에트르, 2025
추천의 말
요약하면 다섯 쪽밖에 안 될 주장을 설계하고 500쪽 분량의 사례로 나머지를 채워 505쪽짜리 책을 만들곤 하는 영어권 논픽션에 덴 사람, 어떤 것의 쓸모를 논할 때 '무용함의 유용함'이라는 마스터키로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다시 여는 척하는 책에 질린 사람, 공부하는 법에 대한 책을 읽느니 그 시간에 그냥 공부를 하는 게 열 배는 더 좋은 선택이라고 믿는 사람, 그런 사람은 손들어보시길. 나는 이미 들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고, 나는 한 손을 든 채로 이 글을 쓴다. 어떤 저자가 자신의 책을 단테의 《신곡: 지옥편》 도입부("삶의 여정 중반에 이르러…………”)를 패러디하며 시작한다는 것은 그가 지금 위기에 빠진 삼십대 중반이거나 한때 그랬었다는 뜻이다. 따로 출판해도 될 만큼 인상적인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아무리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도 한번은 겪는 그 위기를 강렬하게 고백한다. 위기의 시작은 언제나 같은 질문이다.
‘이따위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저자는 자신을 포함한 만인의 공부가 본질에서 벗어나 있음을 적발한다. 공부의 탈선을 초래하는 세 가지 인력은 "부에 대한 탐욕" "사회적 우월성에 대한 욕망" 그리고 "정의에 대한 사랑"이다. 그게 왜 문제인가 싶은 셋째 항목에 대한 충고가 특히 귀하다. 현실과 유리된 '정치 담론'의 피상성과 자기도취, 만들어진 입장으로 입장하기만 하는 지적 게으름, 생산적인 '지적 폭력'을 회피하는 다양성 존중이라는 이름의 타협주의 등에 대한 비판엔 다 일리가 있다.
이어 저자는 공부에는 '숨겨진 삶'이 있다는 특유의 표현을 반복하며 공부의 지배적인 공적 초상 바깥에서 '지적인 삶'의 진면목을 고대 그리스풍으로 그려낸다. 세상(돈과 명예와 정의)으로부터 물러나 삶을 관조(즉, 성찰)하면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들에만 매달리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내면을 세공하는 삶. 그 안에서 전문 학자와 비전문 독서광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고, 인간다움의 최소공약수와 같은 존재가 되어 서로 깊이 만나는 삶. 전대미문의 그림은 아니다. 알면서도 잊고 살았던 터라 아픈 것이다. 그래서 스산해진 채로 저자에게 캐묻고도 싶다.
위 단락에서 내가 따라 요약한 대로 저자는 '지적인 삶'에 두 개의 본질/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존엄'과 '교감'이다. 그런데 이 둘은 연결될 수 있는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갈 때 타인에게로 '넓게' 열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존엄'의 측면에선 타인이 필요 없고, '교감'의 입장에선 공부가 필요 없는 게 아닐까?
저자는 그게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다는 걸 경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연관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인정한다. 사실 이는 '성찰적 삶vita contemplativa'과 '실천적 삶vita activa'의 관계에 대한 오랜 질문이기도 하다. 본래 삶에 대한 문제는 살아보지 않고 풀기 어렵고 그건 '지적인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도 당신 자신의 빵은 직접 구우라고 말한다. 그건 살아보라는 말이다. 공부도 하는 삶 말고 공부로서의 삶을.
그래도 저 난제를 풀 열쇠 하나를 제시하고 싶다. 한국어 판 제목엔 '공부'가, 부제엔 '배움'이 들어 있다. 저자는 엄밀히 구별하지 않았지만 해볼 수도 있다. 공부라는 단어에는 타자로 열린 큰 문이 없다. 그러나 배움은 다르다. 사전적으로도 이미 타자와의 경험을 전제한다. 그래서 공부는 하는 것, 배움은 얻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어 '공부'의 뜻만 새기면, '존엄'과 '교감'의 연결고리가 흐릿해질 수도 있다.
이 책은 공부에 대한 책이고 더 중요하게는 배움에 대한 책이지만 결국은 삶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어떤 바람직한 삶의 모드를 체험하게 하는 생생하고 인상적인 예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을 통해 저자는 '지적인 삶이 인류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임을 믿게 만든다. 포장을 풀기가 쉽진 않다. 그렇다고 선물인 줄도 모르고 포기한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옮긴이의 말
세상살이에 유독 생각이 많아지던 시기에 이 책의 번역을 제안받았다. 이틀 새 홀린 듯 원고를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예상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이 책이 '좋은 삶'에 대해 새로운 그림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요컨대 좋은 삶이란 공부하는 삶이며 그 공부는 무용할수록 우리의 남루한 삶을 찬란히 밝혀준다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좋은 삶의 기준을 물질적 풍요에 두게 된 우리에게 저자가 그리는 좋은 삶의 정의는 단박에 와닿지 않는다. 매일 시간을 아껴 분주하게 살아도 모자라는데, 무용한 공부를 하는 게 좋은 삶이라고?
우리에게 공부란 무엇보다도 학생의 본분이며 시험 합격, 취업, 몸값 올리기와 같은 성과를 경유해 우리의 물질적 삶을 개선해줄 훌륭한 수단이다. 그러니까 공부로 삶이 나아진다는 건 우리에게 당연한 명제인데, 저자가 말하는 공부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그리고 저자의 명제에서 가장 문제적인 부분은 '무용할수록'이라는 단서이다.
그런데 공부가 무용해야 한다면, 공부하는 삶의 쓸모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공부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요컨대 공부는 보편적 인간이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미덕이다. 공부는 공부를 갈망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그로써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 독자에게 이 명제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저자도 여기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저자가 소개하는 다양한 사례를 읽다 보면 어느덧 설득되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리라 생각한다.
공부가 인간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이 문제적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서문'에서 저자는 공부하는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공부가 어째서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건 물론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와 같은 외적인 목적 때문일 때도 있지만, 자기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공부 자체를 위해 공부하고자 하는 욕구를 발견할 수 있다. 공부하려는 욕구가 발현되는 삶의 영역은 여가다. 저자가 인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서 여가란 곧 일과 무관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추구되며 인생의 지향점이 되는 최고의 미덕이다. 이 대목에서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먹고살 걱정
이 없는 귀족이었다는 지적이 등장하듯, 오늘날에도 여가란 '있는 사람들'이나 즐기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법하다.
물론 여유 시간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 가혹한 삶의 조건에서 여가를 잘 활용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저자는 우리가 시간과 노동의 '자발적 노예'가 되지 않고 자신에게 세상살이에서 잠시 물러날 여유를 내어주는 방향으로 삶을 선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연 여유를 즐기는 데 큰돈과 대단한 장비가 필요한 건 아니다. 자유로운 시간, 비워낸 정신과 자연이라는 조건만 갖추어지면 우리에게는 정신 활동을 추구할 여유가 생겨난다. 여기서도 저자는 여가가 소수 엘리트와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일상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외부 조건의 굴레를 벗어나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인생 최고의 지향점을 추구할 수 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가 일을 넘어서는 것이듯, 저자가 말하는 공부는 세상을 넘어서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부와 권력을 둘러싼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한발 물러난 곳에는 내면의 삶이라는 비밀스러운 풍요의 원천이 있다. 내면의 삶은 사회적 기준으로 값이 매겨지고 위축되는 우리에게 간절했던 인간적 존엄을 되돌려준다. 가난한 맨발의 부적응자 소크라테스가 열렬히 탐구에 전념할 때 초월적 존재로 보이는 것처럼, “배움 자체를 위한 배움”을 추구하는 지적 생활은 신비로운 주체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 주체는 바로 숨겨진 가치와 존엄을 지닌, 생각하고 성찰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이 정량화되고 환금성을 평
가받는 이 시대에 외부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부분이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생각만으로 상당한 위안이 된다.
저자가 예시로 드는 여러 인물의 삶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물러나 자신의 미덕을 꽃피우고 사유를 파고드는 내면의 삶을 만난다. 아인슈타인은 학계에서 일자리를 찾는 데 실패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취직한 특허청에서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수학자 앙드레 베유와 정치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교도소라는 척박한 공간에서 탁월한 지적 성취를 일궈냈다. 세속적으로 실패로 취급되는 환경에서 내면의 삶은 오히려 번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존엄을 되찾는 방법은 어쩌면 외부의 보상과 지위에 맞추었던 초점을 내면의 삶으로 옮기는 것처럼 간단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고방식은 단순히 정신 승리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만 치부할 건 아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공부가 열어주는 내면의 삶은 자극과 충동을 추구하면서 표면에 머무르는 삶에 비할 수 없이 깊고 넓기 때문이다. 공부의 대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것들에는 더 좋은 것, 더 보편적인 것을 향해 우직하게 나아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공부를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나쁜 모습에서 탈출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는 진정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관조함으로써 우리는 헛된 기대와 환상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판단력을 기르게 된다.
저자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러한 내면의 삶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므로 그 자체로 타인과 깊이 연결되고 교감할 장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상대에게서 취할 수 있는 유용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이득이 될 인맥을 관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어떠한 지적 관심을 공통분모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이들은 계급과 연령, 성별과 같은 외적 조건들을 초월하여 단숨에 동지가 된다.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 과거의 작가들과도 교감을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인간적인 연결은 우리를 파편화하고 소외시키는 요소들에서 해방시켜준다. 그렇게 인간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소속감은 한층 단단해진다. 덧없는 지금 여기의 한순간을 벗어나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과 유대할 수 있다는 것. 그 마법 같은 일에 동참함으로써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을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내면으로 물러나는 공부, 그로부터 얻는 존엄, 존엄을 토대로 하는 타인과의 교감, 그리고 세상을 향하는 실천. 이것이 저자가 그리는 좋은 삶의 지도다. 공부는 현실과 유리된 상아탑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공부는 세상에서 도피하여 자기 탐닉에 빠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더욱 인간적이며 보편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게 해준다.
삶의 초점을 잃고 속절없이 세파에 흔들리기 쉬운 우리에게 이 책의 메시지가 조금이나마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지적인 삶의 사회적 쓸모는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더 다양하고 풍부한 방식들을 북돋는 것, 우리 자신에게 어울리는 포부와 희망을 빚어내는 것에 있다." 당연하고 담담하지만 산뜻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런 문장들에서 많은 독자들이 내가 그랬듯이 마음의 혼란이 씻겨나가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자가 답을 내리지 않고 열어둔 질문들을 곰곰이 사유하며, 공부하는 삶에 행복이 깃들어 있다는 이 책의 주제를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박다솜